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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3대 해전 : 프레배자해전 - 레판토해전 - 칼레(아르마다)해전
“바다를 지배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 ”는 말은 진리이니 옛날부터 해전으로 국가의 운명이
판가름난 경우는 부지기수인데 “살라미스 해전, 포에니 전쟁, 악티움 해전”등 고대 해전은
원거리 전투가 어려웠기 때문에 대부분은 "근접하여 갑판전" 을 벌이는 형태가 주류였으니
곧 충각 전술인데 함선들은 많은 노를 가진 흘수가 얕고 길이가 긴 “갤리선” 이 대부분입니다.
“중세” 에 접어들면서 “중국에서 나침반과 화약” 이 유럽에 전해지고 “함포” 탑재가 가능해지면서
해전은 변화하니 고대 해전의 주축인 갤리선 대신에 “범선” 이 늘어나고 전투에서는 “함포”
사용이 느는데....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 기독교 연합함대가 맞붙은 “프레배자 해전” 과 “레판토
해전” 이니.... 이때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대량의 함포가 사용되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게 됩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여전히 “갤리선으로 대표되는 충각과 백병전” 위주의 함선이 대부분을
차지 하고 있었으니.... 당시 갤리어스 로 대표되는 포함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배는 “갤리선에 일부 함포” 를 올린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문 수나 명중률
및 화력은 형편없는 수준 이었지만, 그래도 함포를 이용한 포격의 이익은 있었습니다.
1) 이슬람 오스만 터키가 승리해 지중해를 차지한 프레베자 해전
중세에 동방무역에 종사한 항구 도시가 다섯개 있었으니 오늘날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라고 불리는 “라구사” 와 이탈리아의 서쪽 “아말피, 피사, 제노바” 에 이탈리아 동쪽에
“베네치아” 이니... 이 다섯 나라는 전쟁을 통해 제노바와 베네치아만 남았는데 상권 쟁탈
을 위해 십자군 전쟁떼 레반트에서 그리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 무수히 전쟁을 치릅니다.
한때 제노바 해군은 달마티아를 거쳐 베네치아 인근 까지 침략했으며 이때 베네치아 수군
으로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제노바로 끌려간 마르코폴로 는 옥중에서 중국을
다녀온 자신의 경험을 구술한 것이 "동방견문록" 인데..... 베네치아는 다시 동쪽으로
진출해 서쪽으로 향하는 이슬람 오스만 터키의 공격을 온몸으로 방어하나 역부족 입니다.
1453년에 이슬람 오스만 터키가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그리스를
정복한후 그리스의 베네치아 영토와 크레타섬 점령후 서쪽 기독교 세계로 진격해오자
1538년 6월 베네치아 요청으로 1차 기독교함대 가 결성되니.... 교황청 27척에 제노바의
안드레아 도리아가 지휘하는 스페인 49척, 베네치아 55척에 몰타등 162척이 집결 합니다.
“프레베자 해전” 은 알제리등을 근거지로 지중해 유럽의 해안을 약탈하는 이슬람 함대를 먼저
격파해야 한다며 면피용으로 함대를 출진시킨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의 비밀 지시를 받은
제노바의 안드레아가 전투를 회피함으로써 기독교함대는13척 손실, 36척 나포, 포로
3천으로 패배하니 “오스만 투르크”가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해 이슬람의 바다로 만듭니다.
2) 베네치아와 스페인등 기독교 함대가 터키에 승리한 레판토 해전
오스만 투르크 서진을 막고 있던 베네치아 는 30년후에 다시 절규에 가까운 호소에 로마 교황청
이 나서니 1,571년 베네치아 110척 + 교황청23 척에 스페인 75척 (17 + 제노바 22+
이태리 나폴리와 시칠리 36) 등 합계 208척의 대함대 가 결성되니 바로 "레판토 해전" 입니다.
*** 오스트리아공 돈 후안과 전투를 회피하는 도리아에 맞서 강공하는 베네치아의 베니에르 ***
1571년 8월 23일 전대미문의 208척 기독교 신성동맹 함대 가 메시나항에 집결해 동쪽으로 나아가
코르푸에서 재정비한 후에 10월에는 그리스 서부 파트라스만을 봉쇄 하는데 좌익은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에 우익은 제노바(스페인)의 잔안드레아 도리아 중앙은 총사령관
오스트리아공 돈 후안으로 기독교함대는 오스만투르크군 전사 8천에 포로 1만을 잡아 승리합니다.
잔 안드레아 도리아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해적의 근거지 알제리 공격을 우선하는 스페인왕의
비밀 지령을 받았기에 33년전의 프레배자 해전 처럼 전투에 소극적 이라....... 원래
기독교도 이탈리아인으로 이슬람 해적에 납치되어 성장한 후에는 전투에서 이슬람군
좌익사령관을 맡았던 알리는 무사히 탈출해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터키 해군을 재건 합니다.
3) 영국 넬슨이 스페인 아르마다 함대를 격파해 대서양을 제패한 칼레해전
고대 해전과는 달리 중세시대 끝 무렵인 “대항해시대의 해전” 은 주력 함선이 “갤리선에서
범선” 으로 바뀌면서 종래 전투 양식인 배 앞부분으로 적의 배 옆구리를 들이받는 충각
전술은 자취를 감추고 이제는 측면에 배치된 대량의 “화포가 전투의 중심” 으로 떠오릅니다.
해상 전투는 횡대가 아닌 “종대진형”으로 나란히 측면을 바라보며 화력을 극대화해 전투를 벌이는
형식이 나타나는데 “대량의 화포와 대규모 화력”이 동원되는 상황 이었지만 아직까지는 상대편
전함으로 건너가서는 근접전으로 상대 함선을 제압하는 형식의 전투는 여전히 존재 하고 있었습니다.
범선에 장착된 화포 는 원거리 전투에서 적 함선에 피해를 입힐 정도로 “파괴력”이 강하지도
않았고 “명중율”도 형편 없었기 때문에 화력 효과를 높이기는 위해서는 서로 접근 해야했는
데... 그 대표적 해전은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함대와 격돌한 “아르마다(칼레) 해전” 입니다.
그전에 영국은 장미전쟁이라 불리는 내란을 수습하고 헨리 7세기 국왕이 되어 튜더왕조를
열었는데 장남이 죽자 차남이 왕위에 오르니 헨리 8세로 왕권 안정을 위해 형수인
스페인 공주 캐더린과 결혼해서 딸 메리 를 얻었는데 헨리 8세는 시녀인 “앤 불린 과 결혼
을 위해 아내와 이혼” 하니 스페인의 위세에 눌린 로마 교황청은 “국왕을 파문” 에 처합니다.
그러자 헨리8세는 반발해 가톨릭을 폐지하고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 를 만드는데 앤 불린이
딸 엘리자베스를 낳은후 왕자를 사산하자 내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왕자의 탄생을 간절히
바랬던 왕은 왕비를 간통죄로 몰아 도끼로 목을 쳐서 죽이고 시녀 제인 시모어 에게서
왕자 에드워드 를 얻는데 그녀가 죽자 3번 더 결혼하지만 아들은 에드워드가 유일 했습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으나 병약한 관계로 죽으니..... 캐더린의 딸 “메리가 왕위 에 오른 후에
스페인왕 펠리페 2세와 결혼” 하고는 국교회를 폐하고 가톨릭을 부활시키니 피바람이
부는데, 여우짓으로 가톨릭교도로 행세해 살아남은 “엘리자베스가 왕위” 에 오르니 가톨릭
에서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고 “스페인 보물선을 약탈” 하자... 펠리페 2세는 전쟁을 결심합니다.
스페인은 레판토 해전에 참가했으며 아조레스제도 전투에 대승한 산타크루즈 후작이 죽고
해군에 전혀 문외한인 “메디나 시도니아” 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함대는
1588년 5월 28일 발진하는데..... “무적함대는 대형 갤리온선 20척, 무장상선 44척에
갤리선등 132척 함선, 선원 9천명, 병사 2만명”에 죄수 노꾼 2천명으로 구성 되었습니다.
한가지 매우 특이한건.... 선원과 전투원 외에 180명의 “가톨릭 수사와 사제” 가 동승하고
있었으니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펠리페 2세는 하느님의 도움으로 승리를 보장
받을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인데, 십자군 전쟁과 같은 성전(聖戰) 이니 병사들에게
이 원정에 참여하면 “죄사함” 을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면죄부" 를 발행하였습니다.
영국해협의 잉글랜드 함선들을 거대 함선으로 견제하면서 “파르마 공작의 3만 대군 의 영국
상륙을 엄호“ 하는 것이었는데..... 함대에 승선한 병사들도 상륙해 5만 병력 으로
잉글랜드 육군을 무찌르고 런던으로 진격 하는 것이었지만 여러곳에서 배를 급하게
끌어모은 탓에 “배 종류와 질” 이 다양해 “속도등 통일적인 행동” 을 기하기 어려웠습니다.
원양항해에 맞는 빠른 함선 에다가 승선 전투를 위해 최대한 많은 병사들을 태우게 고안된
갤리온선 들도 있었고 풍랑이 심하지 않은 지중해를 다니던 상선과 노선(櫓船)
들도 포함 되어 있었으니..... 함대가 “리스본을 출항하는데만 이틀” 이 걸렸고
500km 를 항해해 에스파냐 서북단의 피니스테르 곶까지 가는 데만 3주일 이 걸렸습니다.
“속도가 느린 배”도 함께 간 탓에 시일이 너무 “오래 걸려 많은 수병과 선원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지쳐 있었기에 코루나에 입항해 휴식과 재보급을 받으려
하였으나....... 폭풍이 몰아쳐 함대가 흩어져 버리는 바람에 정찰선들이
비스케이만 전역에 흩어진 ”함선들을 다시 모으는데만 무려 1개월“ 이나 걸렸습니다.
심지어 잉글랜드 콘월의 실리 제도 까지 밀려간 스페인 배들도 있었으니 모으는데 시일이
너무 많이 걸렸는데..... 어찌어찌해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를 향하여 오는
동안..... 배 옆에 중포를 장착한 최신식 전투함 211척에 소형함 49척등 170척의 “잉글
랜드 함대는 영국 남단 플리머스” 에 정박해서 무적 함대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 함대의 수장은 항해 경험은 있었지만 전투 경험이 별로 없는 노팅엄 백작 찰스
하워드 였으나...... 다행히도 그의 휘하에는 “항해와 해전” 에 있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 가 있었으니 드레이크는 하워드에게 무적함대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하여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를 떠납니다.
하지만 “남풍” 이 불어 북상하는 무적함대에 유리 한지라 임긍래드 함대의 함장 하워드는
무적 함대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해서는 도중에 플리머스로 회군 하니 잉글랜드 함대는
34척 군선과 사략선 164척을 합해 197척 이었지만 “영국해협 곳곳에 흩어져” 버렸습니다.
북상힌 무적함대가 잉글랜드 서남단 실리제도에 도착한 건 1588년 7월 19일로 펠리페왕은
메디나에게 “파르마 공작의 병력을 잉글랜드로 상륙” 하는 것을 도울 것을 명령 하였지만
“세부내용이 명확하지 않았으니” 메디나는 잉글랜드 남부해안을 따라 항해해 잉글랜드
동남단 마르게이트에서 파르마의 상륙정들과 만나 도와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네델란드의 스페인 총독인 파르마” 는 무적 함대가 잉글랜드 와 네덜란드 함선들을
견제하는 것 까지는 메디나와 생각을 같이 하고 있었지만 전투 이후 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까지 접근해 상륙정들을 됭케르크에서 잉글랜드 해안” 까지 엄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어 에스파냐의 육해군 사령관들간에 “관점의 차이” 가 존재 했습니다.
펠리페 2세 국왕이 명령한 에스파냐의 작전계획은 두가지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었는데
첫번째는 잉글랜드 해군 못지않게 “네덜란드 해군”도 그 전력이 만만치 않았으니...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해안에는 “67척의 네덜란드 군선”이 에스파냐군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만일 “네덜란드 해군과 잉글랜드 해군이 연합작전” 이라도 편다면 아무리 강력한 무적함대라도
곤란을 겪을수 있었으니, 파르마가 네덜란드를 떠날때 무적함대가 조금이라도 늦게되면
에스파냐 상륙군은 “네덜란드 군선들의 공격” 에 모두 물귀신이 될 수도 있었으니.......
그렇다고 무적함대가 네덜란드 해안에 접근하거나 항구에 정박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이게 펠리페 스페인왕 작전의 두번째 문제였으니 “네덜란드 해안은 수심이 얕은”데다가 크고
작은 “모래톱이 해안을 가로막고” 있어 무적함대의 큰 함선들이 접근할 수가 없었으며
네덜란드 해안을 잘 아는 항해사 조차 없어 “네덜란드 해안에의 접근”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7월 19일 잉글랜드 군선 하인드호의 선장 토머스 플레밍이 순찰 중에 무적함대 를 멀리
에서 발견하고 플리스머스로 돌아가서는 부사령관 드레이크 에게 적이 도래했음을
알리자.... 드레이크는 즉시 “하워드에게 무적함대를 추격” 할 것을 요청하였고 그날
저녁 썰물이 되자 마자 “드레이크는 여섯척의 함선” 을 이끌고 플리스머스를 나섭니다.
그 다음날에는 “30척 잉글랜드 군선” 이 뒤를 따랐는데 한편 육지의 잉글랜드 보초병들도
무적함대를 발견하였고 그들은 즉시 “봉화”를 올려 잉글랜드에 대한 위협을 알리는데
무적함대 사령관 메디나는 잉글랜드 남부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연락선을 네덜란드로
보내어 파르마가 언제 올 것 인지를 물었지만 “파르마는 속시원한 대답” 을 하지 않았습니다.
펠리페 왕의 명령서에는 무적 함대가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정박하거나 해안 마을들을 습격하는 것을
금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당히 ”닻을 내려 쉴 수도“ 없었으니 전투함들이 보급품 을 적재하고 있는
상선 들을 둘러싸고 호위하는 진형을 유지하여야 했기 때문에..... ”수병들의 피로도는 급증“ 하였습니다.
이후 잉글랜드 함대는 플리머스 남쪽에서 무적함대와 조우 하였는데 잉글랜드 함대는... 보다
“구경이 크고 강력한 함포를 지닌 무적함대” 와 정면 충돌하기 보다는 잉글랜드의 함포가
보다 가볍고 “사정거리가 긴” 점을 이용하여 근접전 대신에 무적함대 함선들을 “장거리에서
하나씩 사격” 하기로 했으나... 멀리서 사격하였기에 무적함대가 입은 피해는 거의 없었습니다.
스페인 해군은 17년전의 레판토해전 승리에 안주해 잉글랜드 배에 접근해 백병전든 근접전을 원했으나
오히려 잉글랜드 함대의 포격 보다는 진형을 유지하기에 급급하던 무적함대 내의 “충돌사고에 의한
피해” 가 더 많았으며 “화약이 폭발하는 사고” 도 발생하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의 추격을 받으며 항해
하던 무적함대는 포틀랜드섬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대에 역습” 을 가합니다.
중세 후기의 이 해전에서는 배 옆에 장착한 함포사격을 위해 함대가 종열로 전진했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은 “우수한 기동력” 으로 스페인 함선들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지라....... 이 전투는
“무승부” 로 끝났고, 메디나의 관점에서 마르게이트에서 파르마를 기다리라는 펠리페 왕의 명령
이 있었지만 “파르마가 나타난다는 보장” 이 없는 상태에서 참모들의 조언대로 네덜란드로 향합니다.
하지만 스페인함대는 “모래 언덕에 배가 걸리는 위험”을 감수할수는 없었기 때문에 네델란드
(벨기에 북부로 플랑드르) 대신에 7월 27일 “벨기에 남부인 칼레 항구” 로 들어가는데
무적함대는 잉글랜드 함선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백제 부흥운동 시인 663년
백강에서 왜선 1천척이 풍랑과 당군에 대비했 듯..... “밀집 진형으로 정박”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잉글랜드 함대는 “8척의 화공선”을 내려 보내니 칼레해전(아르마다해전)인데 스페인 배들은 화공선
들을 피하여 "닻줄을 끊고 출항"하는 수 밖에 없었으니, 다행히 피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일부 선박
은 서로 "충돌해 피해" 를 입었으며 "닻줄을 끊으면서 브리튼섬 해안에서 배를 정박시킬수 없게" 됩니다.
잉글랜드 함선들은 바다로 나온 무적 함대가 "재결집하기 전에 공격" 을 가하였으니...
"그레이 브라인 전투" 라고 알려진 이 싸움에서 양 함대는 근거리에서 포격전
을 벌였고 전투를 벌인 잉글랜드 함대와 무적함대 양쪽에 사상자가 발생 합니다.
잉글랜드 함선들은 단 1척도 침몰하지 않은데 비하여 무적 함대에서는 "두척이 격침되고 세척
이 나포" 당했는데 잉글랜드 함선들이 적선의 포탄을 맞고도 침몰하지 않은 이유는 에스파냐
가 급하게 포탄을 만들며 "너무 급하게 식힌" 지라.... 철포탄의 경도가 높아 발사할 때나
적함의 단단한 부분에 부딪히면서....... 오히려 “스페인군의 포탄이 부서졌던 것” 이라고 합니다.
영국 함대의 전술이 우위인데다가 함포의 사정거리가 길고 승조원의 함포 사격술이 우수한 탓에 승리
헸는데 스페인의 함선들은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거친 북해" 로 물러나올 수 밖에 없었고 잉글래드
함대를 피해 “북해로 밀려난 무적함대” 는 이제는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군선들을 뚫고 파르마의
육군과 랑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니 “브리튼 섬을 돌아서 에스파냐로” 돌아가는 것 뿐이었습니다.
칼레에서 영국 화공선을 급히 피하느라 닻줄을 끊어버렸으니 이제 닻이 없는 스페인 함대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를 돌아 에스파냐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었으니
거친 바다 에서 항해를 견디지 못하고 “ 침수되거나 해안에서 암초에 부딪혀 침몰” 합니다.
1588년 9월 11일 무적함대가 코루나항에 도착 하였을때 “무적함대는 65척”으로 줄어 있었으니
잉글랜드 상륙은 시도도 못해보고 “67척이나 되는 배와 수병, 그리고 병사” 들이 사라진
것인데... 하루에 무려 “6만 듀카트의 돈”을 잡아먹고 사람들이 “세상이 생겨난 후로
가장 컸던 함대” 라고 불린 무적함대의 잉글랜드 공격은 이처럼 참담한 실패로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