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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신학대학원2006동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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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자료 스크랩 그루지야분쟁
소망 추천 0 조회 73 10.03.20 18: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러시아-그루지아 전면전

2008-08-09 

베이징올림픽이 개막된 8일 러시아와 그루지야가 전면전에 돌입했다.

러시아 전투기들은 이날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에서 25km 떨어진 바지아니 공군기지와 흑해의 포티항과 서부 세나키 군사 기지 등을 폭격했다.


또 일단의 러시아 군 병력과 탱크 등 군 장비가 그루지야 자치령 남오세티아 수도 츠힌발리로 이동,

수도로 진입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오세티아내 언론들은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러시아의 무장 차량들이 수도의 북부 외곽지역에 진입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러시아 뉴스통신사들은 남오세티아 사태로 츠힌발리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이 숨졌고

건물들은 불타고 있으며 거리에는 파괴된 탱크와 전사한 그루지야 군인들의 시신이 산재하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군은 이날 오전 남오세티아로 진입하기 전에 러시아 포병과 탱크부대가 그루지야의 주요 진지를 파괴했다고 밝혔다.


남오세티아측도 이날 새벽 수도 츠힌발리에 대한 그루지야군 공격으로 민간인 1천여명이 사망했다며 그루지야를 비난했다.

테이무라즈 카사예프 남오세티아 민족장관은 

 전날밤 그루지야군 공격으로 많은 츠힌발리 시민들이 희생됐다 면서 사망자수는 1천명 이상이라고 말했다.


 

 

 

 

 

 

 

그루지아분쟁의 원인  

 

그루지야는 1990년 구 소련이 붕괴되면서 러시아에서 독립한 신생국가다.

그러나 독립 직후 그루지야 내 남오세티아가 그루지야와의 전쟁 끝에 자치권을 확보하면서 양측간 군사적 분쟁이 시작됐다.

민족적으로 그루지야와 완전히 다른 남오세티아가 완전한 분리 독립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7만명의 남오세티아는 1991년 러시아에 속한 북오세티아 공화국과 통합하기 위해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

18개월 간 정부군과 내전에 들어갔고 1994년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조건으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그러나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쉬빌리가 그루지야 대통령에 취임 직후 영토 통합을 추진하면서

그루지야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지난 2월 코소보 독립에 자극받아 본격적으로 독립을 시도했다.


이에 대해 그루지야로서는 남오세티아와 또 다른 자치 영토인 압하지야의 독립 움직임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만일 압하지야가 완전 독립하거나 남오세티아가 러시아의 북오세티아와 합병할 경우 영토적 손실은
물론 흑해와 카스피해의 석유 등 풍부한 자원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국 석유회사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바쿠(아제르바이잔)-티빌리스(그루지야)-세이한(터키)

송유관 중 약 100km가 남오세티아를 지나가고 있다.


카스피해의 석유 등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미국은 그동안 그루지야를 전폭지원해 와,

이번 전쟁은 간접적 미-러 전쟁의 양상까지 띠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개입된 이번 사태가 1991년 그루지야 정부군과 남오세티아 반군 간의 전쟁 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인구 7만명의 남오세티아는 1991년 러시아에 속한 북오세티아 공화국과 통합하기 위해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

18개월 간 정부군과 내전에 돌입한 뒤 94년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조건으로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남오세티아는 친미 성향의 미하일 사카시빌리 대통령이

취임 직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토통합을 추진하고,

남오세티아를 자극하면서 본격적인 무력대응에 나섰다.

여기에 흑해 연안에 자리잡은 압하지야까지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추진하면서

그루지야는 '제2의 발칸반도'로 불릴 정도로 불안한 정정이 이어져 왔다.


특히 에너지 문제를 둘러싸고 서방과 러시아간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그루지야 분쟁은 더 복잡해졌다.

천연가스 부국인 그루지야는 러시아를 통과하지 않으면서도 유럽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송유관이 관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서방이 그루지야의 송유관 보호를 목적으로 친러 성향인 두 자치공화국의 독립에 미온적인 반면,

러시아는 남오세티아 등에 군사적 원조를 강화하면서 그루지야를 압박하고 있다.

러시아는 주민의 80%가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두 자치공화국에 매년 상당한 규모의 재정 지원도 하고 있다.

 

 

 남오세티야 South Osettia

 

남오세티야는 흑해에 면하고 있는 카프카스 산맥 인근에 위치한 우리나라 제주도보다 2배가 조금 넘는 3900㎢ 크기의 지역으로,

인구는 7만명 정도로 추산되며, 인구의 3분의2가 인도·유럽어족의 고대 이란어 계열을 사용하는 오세티야인이다.

나머지 인구 20~30%는 인접한 그루지야인들이다.


오세티야인들은 국제적으로 그루지야 영토로 인식되는 남오세티야와 러시아에 속하는 북오세티야에 살고 있다.

오세티야는 1801년부터 러시아에 편입됐기 때문에 오세티야인 대부분이 러시아어에 익숙하고 러시아 여권을 사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남오세티야는 1991년 그루지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 내전을 벌였고,

1994년 러시아 평화유지군 주둔을 조건으로 그루지야와 정전협정을 맺었다.

 

그루지야 [Gruziya]

 


공식명칭 : 그루지야(Georgia)

인구 : 4,474,000

면적 : 70,152㎢

수도 : 트빌리시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공화제, 다당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그루지야어

독립년월일 : 1991. 4. 9

화폐단위 : 그루지야라리(Georgian lari)

과거에 소련을 구성했던 공화국 가운데 하나이다. 흑해 동남해안을 끼고 있으며, 카프카스 산맥 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그루지야 역사

 흑해와 카스피해의 지협인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에 위치해 오랫동안 각 방향에서

온 강대국의 침략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혼란스런운 인종분포를 보이는 곳이다.

그루지아는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와 함께 카프카스 지역 국가에 속해 있으며 신생국가이다.

3개국이 처음으로 통일된 것은 10-13세기였으나 해체됐다가 18세기에 들어 재편성다.

그루지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로 서 그루지아가 처음으로 침략 받은 것은 기원전 8세기 그리스로부터 였다.


터키의 아나톨리아 족은 1세기 후 동부지역으로 옮겨와 리베리아 왕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550년에서 300년 사이에는 페르시아 제국, 마케도니아 왕국, 셀레우코스 왕조의 침략을 받다가

189년에 로마 제국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물리치고 독립 아르메니아를 건설했다.

백 년 후 동부의 로마 제국은 카스피해에서 중부 터키까지를 차지해 현재 그루지야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400년경에는 서아르메니아와 서그루지야가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고

리베리아의 동부는 7세기 중반 무슬림 아랍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페르시아 제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아랍과 비잔틴의 다툼은 1060년 아르메니아를 점령한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끝나고 투르크의 지배를 받는다.

다수의 우수한 그루지야 기독교인들이 피난을 갔는데 이 당시는 그루지야가 리베리아란 이름으로 결합해 있던 시기다.

1122년 아랍제국에 의해 트빌리시가 회복되던 시기는

그루지야의 황금시기로 아제르바이잔의 서부와 터키의 동부까지 영토가 확장돼 있었다.

안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그 후 800년간 몽골, 페르시아 사파비,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관할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대제의 군대를 이끌고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던 그루지야 서

부지역으로 이동해 왔고 1870년에는 터키로부터 그루지야의 완전한 통치권을 빼았았다.


그루지야의 사회주의 민족주의자 운동은 제1 그룹, 제2 그룹, 제3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고 가장 진보적인

제3 그룹은 요세브 주가슈빌리(Ioseb Jughashvili)가 속해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이름을 철의 남자로 바꾼 스탈린이다.

자카프카스는 1918년 모스크바로부터 독립을 선언했지만 바로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리됐고

그루지야는 1920년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점령돼 주변국가들과 함께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Transcaucasian Soviet Socialist Republic; TSFSR)으로 소련의 일부로 편입된다.

스탈린은 그루지야 민족주의자 십 만 명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1936년 자카프카스 공화국이 해체돼 그루지야는 그루지야의 국명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소련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철의 장막이 걷히면서 1990년 여러 당이 참여한 선거가 실시됐고 압하지야(Abkhazia)와 남 오세티아(South Ossetia) 지역에선

소련의 유지를 원하며 독립 다툼이 일어났고

1992-92년의 내전 기간은 무정부 상태를 야기하기도 했다.

소련의 외무장관 출신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Shevardnadze)가 1997년 정부를 안정시킨 그루지야는 경제 회복 중에 있다.


 

그루지아의 행정 및 일반

 그루지아의 수도는 트빌리시이다.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스니 공화국, 아자르 공화국 등 세 개의 자치 공화국이 있다.

주민의 상당수는 그루지야인(83.8%)이다.

그 외에도 아르메니아인, 러시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오세트인, 압하지아인, 기타등이 있다.

공용어는 그루지야어이다.

그 외에도 러시아어 터키어, 우크라이나어, 아르메니아어, 아제르바이잔어 등이 사용되고 있다.

종교는 그루지야 정교회가 75%, 이슬람교(터키인과 아제르바이잔인)가 11%, 기타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나라는 민족이 복잡하기 때문에 종교 분쟁이 심각하다.

 

그루지야는 오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

4세기에 문자가 만들어졌고, 5세기부터 그루지야 특유의 문학이 나타났다.

그루지야인·그리스인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친 고대의 고등교육 기관이 그루지야 중부의 콜치스에 있었으며,

중세에는 중세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인 이칼토·겔라티의 학당들이 12세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지식을 전파했다.

 12세기에는 그루지야인의 민족 정신을 잘 표현한 시인 쇼타 루스타벨리의 민족 서사시 〈표범 가죽을 입은 기사 Vepkhis-tqarsani〉가 나왔다.

그 후 18세기에 작가 술칸-사바 오르벨리아니, 소설가·시인·극작가 일리아 차프차바제 등이 나타났다.

19세기에는 극작가 기오르기 에리스타비가 근대 그루지야 연극을 확립했다.


러시아 혁명 이전에는 서정시인 아카키 체레텔리, 카프카스의 소설가 알렉산드르 카즈베기,

자연시인 바자 프샤벨라 등이 활동했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그루지야 출신인 스탈린이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많은 작가들이 수난을 당하는 가운데 소설가 미헤일 자바히슈빌리, 시인 티치안 타비제가 처형되고 시인 파올로 이아슈비리는 정부의 비판을 받고 자살했다. 1987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텐기즈 아부라제 감독의 영화 〈후회 Repentance〉는 당시의 억압을 비유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그루지야는 연극과 건축 문화의 전통을 자랑한다. 그루지야 연극은 유럽과 기타 지역의 연극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쳐 온 왔으며, 아르메니아 건축과 더불어 비잔틴 양식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그루지야의 건축문화는 오늘날 많은 수도원·교회 등의 대형 건축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많은 신문·정기간행물이 그루지야어로 발행되고 있으며 라디오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몇몇 소수민족 언어로, 텔레비전 방송은 그루지야어와 러시아어로 이루어지고 있다.

 

 

 

러시아-그루지야 전쟁 2008년 8월10일

 

 

 

from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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