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하는 날은 우리 집 잔치 날이었다.
아니 우리 집 뿐만이 아니라 집집마자 돌아가면서 김장 품앗이를
하다보면 동지 달은 한 달 내내 김장 하는 달이기도 하다.
아침 일찍부터 부산스럽게 정지를 오가는 엄마 덕분에 온 집안 식구들도
덩달아 바쁜 날이다.
게다가 작은집과 우리 집 김장을 한꺼번에 하기 때문에 아닌게아니라
엄마가 서두르지 않으면 김장을 하루 종일 해야 한다.
작은 오빠는 엄마의 성화 때문에 식전부터 남새밭에 나가 찬 서리를
털어내며 김장독과 무, 배추 묻어둘 구덩이 파는 노역에 힘을 빼고 있다.
제법 깊게 판 구덩이 속에 두툼하게 지푸라기를 깔고 무, 배추를
쟁인다음에 솔가지를 덥고 작은 짚단으로 숨구멍을 만든 뒤 그 위를
흙으로 평을 치고 작은 봉분을 만든다.
앙증맞은 봉분이 아니라면 누구도 그곳이 무 무덤인지 잘 모를 것이다.
조반상을 물리기도 전에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서는 옆집 선자엄마
경숙이 엄마 쇠죽 골 댁 아주머니가 머리엔 고깔 같은 수건을 두르고
앞 지락엔 뽀얀 광목으로 만든 앞치마를 질끈 동여맨 모습이 참으로
단정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 엄마들의 그런 모습이 얼마나 멋져 보였었는지 모르겠다.
마당엔 이미 두레멍석을 깔아놓은지라 아주머님들께 특별한 자릴
마련하지 않아도 되었다.
밥그릇을 반 정도 밖에 비우지 못한 엄마는 벌써부터 급한 마음에
입안에 있는 밥과 말을 한데 버무리면서 방금 숟가락을 놓은 오빠를
채근해 절임 배추를 지게 바작 위에 올리라 한다.
배추를 쉽게 씻으려면 둠벙 샘으로 옮겨주는 일은 온전히 작은오빠와
봉근이 아제 몫이기 때문이다.
어젯밤, 마당 끄트머리에 걸려있는 무쇠 솥에 황석어젓 멸치젓을 끓인
탓인지, 아직까지도 비릿하고 짭짜름한 젓갈냄새가 온 집안을 휘져으며
오늘이 우리 집 김장 하는 날이라고 광고를 한다.
동네 아주머니들 두어 명은 배추지게를 따라가고 나머지 분들은
두레 멍석위에 둘러앉아 김장 속 썰기에 여념이 없다.
작은오빠와 봉근이 아제가 지게를 지고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만
씻은 배추를 채반위에 탑처럼 쌓아놓는다.
너른 함지박에 찹쌀 죽, 젓갈, 그리고 미리 썰어놓은 양념들을
모두 섞어 속을 버무리면서 입담 좋기로 소문난 경숙이 엄마가
빠른 일손만큼이나 농익은 재치로 우수개 소리를 배추 속과 함께
버무렸는지 다른 아주머니들의 자갈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형님 아우 하면서 감칠맛 나는 배추속잎을 떼어 서로 간에 먹여주면서
보이지 않는 두터운 정을 쌓는 중이다.
뽀얗던 배추들은 어느새 다홍치마를 입고 울 밖 항아리 속으로
겨울잠을 자러가는 사이 나와 경숙이는 고소한 배추 속을 얻어먹는
재미로 김장하는 내내 엄마 곁을 맴돌았다.
속을 여러 번 먹다보니 너무 매워 우리 둘 다 혓바닥을 길게 빼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작은집 언니가 배추꼬리를 쪄서 입에 물려주었다.
김장을 하는 날엔 여지없이 엄마 심부름으로 배추김치를 바가지에
두어 포기씩 담아 이집 저집 돌랭이질을 할라치면 징그럽게도 사나웠던
아랫집 검둥이가 무서워 김치바가지를 대문간에 놓고 달아났던 기억도
고궁의 고색창연한 단청만큼이나 선명하다.
굳이 역사를 따지지 않아도 우리에게 있어서 김치는 먹거리에 신이다.
김장철이 도래한 만큼 요즘 어딜가나 주부들의 대화 화두는 김장이다.
게다가 올 해엔 흉작으로 무 배추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지만 아무리
비싸도 1년 먹을 농사이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걱정이 많다.
하긴 이제는 굳이 철을 따지지 않고 김치를 해서 저장을 할 수 있는
김치냉장고가 이웃 집 아주머니들의 우정 어린 일손을 대신해주고,
김장 할 때 가장 힘이든 절임의 수고로움조차도 돈 몇 푼만 더 얹어주면
둠벙 샘에서 씻어 날라야 했던 고된 노동까지도 간단하게 해결이 되는
시절이다,
하지만, 너 나 없이 요즘 사람들은 그러한 풍요 속에 살아가면서도 왜?
그때보다 더 행복해하지도 않고, 매사에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는커녕
오히려 풍요 속에 빈곤함, 군중 속에 고독함을 느끼게 되는 것인지?
어쩌면 인간은 끝없는 욕심의 덧으로부터 벗어 날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 법정 큰 스님, 무소유의 가르침이 왜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각설 하고~,
올해 우리 집도 소설 언저리 즈음에서 김장을 할 생각이다.
시린 손 호호 불면서 하는 김장도 아니고 절임배추 사다가 두레멍석 대신
따뜻한 거실에 앉아~ 그러니까 예전에 비하면 날로 먹고 거저먹는 김장을
하면서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 부스러기 하나가 소심한 내 양심을
자꾸만 건드리는게 있다.
벌써부터 귀찮다는 핑계로 맛있는 백김치를 안담은지도 오래고 올 해엔
갓김치도 생략할 생각이다 보니 이러다가는 정말로 제대로 된 우리 집표
김장 레시피가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이렇게 해가 덧 해 갈수록 편한 것만 찾다가 과연 나는 내 딸아이들에게
우리 어머니에 손맛을 제대로 계승을 할 수 있으려나?
첫댓글 도시화및 주거공간의 아파트화와 이제는 필수품화 되어버린 김치냉장고로 김장철이 다 사려졌네요. 오래동안 온갖 양념준비하던 어머니의 모습과 서로 품앗이 하며 떠들석하던 것들, 겨울나기 준비가 다 끝난것 같아 든든하고 풍족한 마음이 들고 했는데.. 직장생활때는 의례적으로 김장보너스도 주던 것이 이제는 다 추억이 되버렸습니다. 그때는 또 추었섰는데.. 요새는 날씨도 따뜻한것 같고 춥고 힘들었지만 정이 많았던 때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