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 (1950년 3월 21생)
조용필은 경기도 화성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1968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컨트리 웨스턴 그룹 애트킨즈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다가
1969년, 미 8군 무대에서 데뷔하였다. [1] 1971년, 3인조 음악 그룹
김트리오를 결성하여 본격적인 락 음악으로 전환하였으며 1974년 쯤에서야
자신의 이름을 쓴 조용필과 그림자라는 그룹을 결성하게 되었다.
26세가 되던 1975년에 솔로로 전향하여 발표한 트로트 음악,
<돌아와요 부산항에>이라는 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후 처음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6년 대마초 파동에 휘말려 4년간의 공백기를 갖게 되고,
해금 조치이후 지구레코드와의 전속으로 1979년에 공식적으로 가요계에 데뷔하여
정규 1집 음반 타이틀곡 <창밖의 여자>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이 수록된 조용필의 정규 1집 음반은 대한민국 최초로
100만장 이상 팔린(밀리언 셀러) 단일 음반이다.
조용필이 데뷔했을 때의 가요계는 그렇게 큰 영향을 끼친 가수가 없었다.
그는 단독으로 음악작업을 하면서 여러 히트곡을 발표하고 1980년대 대중음악계
영웅으로 탄생하였다.
조용필은 락 음악과 발라드 음악, 트로트 음악 또는 <강원도 아리랑>처럼
한국 민요를 리메이크하는 등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거의 모든 장르를 소화해 내며
다양한 연령층을 확보하였다. 또한 조용필은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오빠부대로 불리는 젊은 여성 팬층을 이끌고 다니기도 했으며 조용필 등장 이전에
한국 최고 인기 가수로 칭하던 남진과 나훈아의 뒤를 이어 한국가요계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1985년 조폭 출신 김모씨로부터 폭행에 휘말리기까지 했다.
경찰은 조씨에 대한 폭행사건에대해 수사를 펼치기로 했으며 보디가드를 5명으로
늘리기로 하였다. 홀로 한국 가요사의 한 획을 긋기 시작하던 조용필은 1986년에
일본에 진출하여 발매한 앨범 <추억의 미아 1>가 100만장이상 판매하는 대성과를
거두어 그 해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였다.
한국에서는 모든 장르를 섭렵한 가수로 통하지만 일본에서는 조용필을 엔카의 황제로
불리고 있다. 1988년에는 10집 음반을 발표했는데 그 음반의 수록곡
<서울 서울 서울>, <모나리자>가 대박을 떠뜨리면서 여러 가수와 경쟁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