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별곡] 러일 전쟁의 아픈 역사가 살아 숨쉬는 인천 연안부두
어쩌다 한 번 오는 저 배는
무슨 사연 싣고 오길래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마음마다 설레게 하나
부두에 꿈을 두고 떠나는 배야
갈매기 우는 마음 너는 알겠지
말해다오 말해다오
연안 부두 떠나는 배야
- 김트리오, <연안부두>
부산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항구도시 인천,
1876년에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으로 인해 불평등 조약을 맺으면서 1883년 인천의 제물포가
강제로 개항되었다. 그때부터 이 도시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우리에게 인천은 수많은 이미지로 남아있다.
그 이미지는 세대와 관심사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것 같다.
나이가 있는 어르신 분들은 인천 상륙작전의 기억이 먼저 떠오를 것 같고, 혹은 부평 쪽에 있는 거대한 산업단지를
떠오르는 분도 있으실 것이다. 중, 장년층은 으레 월미도나 연안부두의 횟집 또는 바닷바람이 기억날 것이다.
'시작'의 도시, 인천
젊은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차이나타운, 월미도의 디스코 팡팡, 그리고 새롭게 떠오른 송도, 청라
신도시까지 범위가 넓어진다. 이처럼 인천은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켜켜이 쌓여있는 코스모폴리탄의 도시가 아닐까 싶다.
현재 297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인천시는 어느덧 대구를 넘어 제3의 도시로 크게 성장했다.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상당 수의 많은 것들이 인천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 우선 철로가 먼저 놓인 곳이
인천이고, 축구와 야구도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선교사를 거쳐 전해졌다. 또한 서양식 호텔, 근대적인 의미의 공원, 극장,
등대, 해수욕장까지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인천을 통해 들어온 이방인들은 처음에 그들만의 조계지에서 활동을 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이 즐겼던 문화나 음식이
한국화가 되어 현재까지 한국인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짜장면이다. 중국 산동성 지역에서 건너온
화교들은 주로 노동에 종사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부둣가에서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려고 국수에 춘장을 비벼먹은
것이 그 시초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냉면을 뽑다가 실수로 탄생했다는 설이 있는 쫄면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음식이다.
이처럼 인천은 한국의 어느 도시보다 더욱 드라마틱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 인천의 시작은 언제부터였을까? 시계를 앞당겨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의 건국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어머니가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처로 들어가 왕자로 대접받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비류, 온조 두 형제는 이복형인 유리가 찾아오자 그들만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한강 유역까지 남하했다.
하지만 운명을 함께 했던 형제도 의견이 갈려 각자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중 비류가 문학산 기슭에 미추홀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미추홀이 바닷가라 짜고 습해 농사를 짓기 부적절했고 이후 자연스럽게 온조가
세운 위례성, 훗날의 백제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이후 인천은 시대를 거치는 동안 그 이름을 바꾸며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지만 고려시대 이자겸 세력이
득세하면서 전환기를 마련했다. 그는 바로 인천을 본거지로 하는 인천(경원)이씨기 때문이다.
부평(또는 부천)의 속현이었던 인천은, 이자겸의 이모 인예 태후가 숙종의 모후가 되면서 경원 군으로 승격됐다.
그 후 이자겸의 딸 문경 태후가 인종을 낳은 것을 계기로 인주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인주를 인천이란 명칭으로 고치고, 지금의 관교, 문학동 일대를 중심으로 인천대 도호부를
세움으로 이 일대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한다.
하지만 인천이 개항되면서 제물포를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새로운 도시를 만들게 되면서 관교동은 구읍으로 전락했다.
물론 1995년 인천광역시청이 관교동 일대로 오게 되면서 다시 인천의 번화한 거리가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인천 편을 이어가면서 차차 설명하기로 하고 현재 인천을 대표하는 아이덴티티가 녹아들어 있고
매력적인 관광 명소가 넘치는 동구, 중구 일대를 시작으로 그 포문을 열고자 한다.
우선 인천 구도심의 수많은 포인트 중에 우리가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연안부두다.
차이나타운, 월미도, 신포시장 등 주목받는 장소가 많은데 왜 연안부두냐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연안부두야말로 인천의 삶과 애환이 압축적으로 녹아들어 간 그 역사를 대표할 수 있는 곳이라 할만하다.
인천 앞바다는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커 크게는 10m까지 차이가 난다. 덕분에 갯벌이 드넓게 조성돼 수산물을 쉽게
획득할 수 있지만 항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한 시설이 바로 독(dock)이다.
이 시설을 설치하면서 늘 일정한 수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인천은 항구도시로서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게 되었다.
그 시설 중 외항에 위치한 연안부두는 1979년 김트리오가 부른 <연안부두>를 통해 더욱 알려졌다.
특히 야구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문학구장에서 울려 퍼지는 응원가로 뇌리에 깊게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현재 연안부두는 인천의 각 섬들을 이어주는 여객터미널이 있으며, 인천 최대의 어시장도 자리한다.
특히 밴댕이 회 무침 거리가 있어 적당한 가격에 한상 가득한 백반을 함께 즐길 수 있으니 한 번쯤 올 만한 곳이다.
그러나 연안부두에는 몇 가지 독특한 조형물이 눈에 띈다. 우선 연안부두 한복판에 있는 넓은 광장이 바로 러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의 명칭을 본뜬 상트페테르부르크 광장이다.
러시아와 연안부두의 인연
그 광장에는 마트료시카라 불리는 러시아 전통 인형을 본뜬 거대한 조형물도 있고, 한편에는 러시아식 건축양식을
표현한 기둥도 보인다. 러시아와 연안부두의 인연이 있다는 얘기일 텐데 무척 흥미로운 스토리가 될 것 같다.
알고 보니 연안부두 앞바다가 러시아와 일본이 펼쳤던 러일전쟁의 무대 중 하나였다. 만주와 한반도의 패권을
다투기 위해 식민지 쟁탈을 다퉜던 러일전쟁은 급작스럽게 일어났다. 이미 치밀한 준비를 마친 일본은 몰래
일본 함대를 이끌고 인천항에 입항했다. 곧이어 일본 육군 3000명을 제물포에 상륙시켰다.
원래 인천항은 중립 항구로서 전투를 펼치면 안 되는 국제적인 규약이 있었는데 일본은 그걸 무시하고 정박 중인
러시아 함에게 항구를 떠날 것을 통고했다.
러시아의 순양함 바랴그호와 코레예츠호는 닻을 올리고 팔미도 해상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치요다호를 위시한 일본 함정 10척이었다.
여기서 첫 전투가 벌어짐으로 인해 러일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만신창이가 된 러시아 함선을 자폭을 선택함으로써 전투는 종료되었다. 기습공격에 성공한 일본은 개전 후
선전포고를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 기선을 잡고 1년간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러일전쟁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행해 한반도를 식민지를 발판으로 삼았으니 그 아픔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지 100주년이 지난 2004년에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날을 기념해 일본의 기습공격에
희생된 바랴그호와 코레예츠호의 전사자 추모비를 연안부두에 건립한 것이다.
이후 2013년엔 푸틴 대통령이 연안부두를 방문해 추모비에 헌화했다고 하니 연안부두라는 장소의 중요성이
얼마나 남다른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인천 구도심을 함께 탐방해 보도록 하자.
첫댓글 ㅎㅎ 먼저 감사합니다
제고향 인천을 저보다 더 잘알고
계시네요
연안부두하면 해수탕. 밴댕이 회무참아 유명하고ㅡ쫄면하면 인천 신포 우리만두가 원조인데 쫄면의 유래까지 알고 계시네요…
학창시절 맛있게 먹던 쫄면…
옛샹각 나서 가끔 가보면 옛날 추억의 맛이 아니라 아쉬움 남기곤 돌아오게 되네요…
인천을 자세히 소개해주셔서 굿굿 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