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추리는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여름꽃이다. 잎은 나물이나 국거리로 뿌리는 약초로 쓰이는 아주 유용한 여러해살이 풀이다.
어렸을 때 호기심에 뿌리를 날로 맛을 봤을 때 아린 맛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무그늘에서 산수국이 더운 여름을 지켜보고 있다. 이래도 한 여름 저래도 한 여름인데 덥다고 해서 피해갈 수도 없는 것이니 있는 그대로 즐기는 게 대수다. 헛꽃은 꽃이 수정을 마치면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꽃을 뒤집어 땅을 본다. 아직은 할 일이 남아 있는 산수국이다.
숙은노루오줌은 꽃이 지고 열매가 익어간다. 머리에 든게 많아 무거운지 고개를 땅에 쳐박고 있다. 노루오줌에 비해 이삭을 숙이고 있는 것이 숙은노루오줌이다.
정령치에 가까와 질 때 길가에 물봉선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봉선화과에 속하는 이 꽃은 '나를 건들지 마세요'라는 꽃말을 갖고 있는 아주 예민한 아가씨다. 열매가 익었을 때 건들면 다섯 조각으로 벌어지며 그 속에 들어 있는 씨앗을 멀리 던져 자기의 영역을 한 층 더 넓힐 수 있다.
정령치에 가까와지자 나무데크로 만든 계단이 나온다. 오늘 일정이 이제 끝을 향해 치닫는다. 이 고개만 내려가면 되는 것으로 잠시 착각했다.
정령치 ( 鄭令峙 1,172 )를 넘나드는 도로위로 동물과 사람이 넘나들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흙길을 따라
건너가니 전망대에 김윤수 회원이 서 있다. 서로 정령치에 온 표시로 인증사진을 찍어주고 큰고리봉으로
향했다.
정령치에는 작은 습지가 있어 야생화가 많이 피어 있으나 가뜩이나 늦은 걸음이라 미련을 접어 두고 고리봉으로 가는 길가에 톱풀과 좁쌀풀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전에 황악산 구간에서 보았던 참좁쌀풀꽃과 달리 꽃 중앙에 붉은 무늬가 없다. 나비나물 자주빛 꽃송이도 지나다니는 산객들이 조심하는데도 이리 저리 치이면서 힘들게 피어 있다. 그리고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풀섶을 헤치며 쪼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찍고 있는 부부진사를 만났다. 그들은 풀잎 사이에 피어 있는 산제비란을 찾아 내어 연록색의 꽃을 열심히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들이 일어서기를 기다렸다가 나도 엎드려 사진 몇장을 찍었다. 저들은 이 정령치 습지에 야생화탐방을 온 모양이다. 덕분에 귀한 꽃 한송이 담아간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는 마애석상이 가까이 있다는 표지판을 보고 그냥 지나친다. 이것 저것 다 보고 가면 집에는 언제 가려구. 발걸음이 빠른 김윤수 회원은 어느 새 그림자도 안보이고 또 다시 나 혼자 호젓한 산길을 걷게 되었다.
톱풀은 풀잎의 모양이 톱니처럼 가는 결기가 촘촘이 나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나비나물은 잎모양이 나비날개처럼 양쪽으로 갈라져 있다. 콩과 식물인 나비나물은 이제 꽃이 지고 콩깍지처럼 생긴 열매를 맺을 것이다.
좁쌀풀은 참좁쌀풀에 비해 꽃 가운데 붉은 반점이 없다.
산제비란. 어찌하여 꽃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무엇을 갈망하기에 저런 모습으로 피어 날까. 수풀속에 숨어 있는 산제비란이 마치 뻘속에 묻혀 있는 진주알처럼 예쁘게 빛난다.
길에서 한 발짝 떨어져 소담스럽게 피어 있는 말나리가 잠자리와 여름을 즐긴다. 꽃대의 크기를 보니 이 말나리는 벌써 여러해동안 이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산객들을 바라보고 있었을 듯 하다. 나처럼 한 번 지나가고 마는 뜨내기 손님도 마다하지 않고 한껏 멋차림을 하고 포즈를 취해준다.
큰고리봉으로 오르는 길목에 노란꽃을 피운 마타리가 건들거린다. 그래, 너정도 잘났으면 좀 건들거려도 뭐라 할 사람 없겠다. 짧은 여름 한 철 멋지게 살아라.
바위에 올라서는데 하얗게 핀 꽃이 보인다. 대체 너는 누구니 ? 이른 봄에 피었다가 벌 써 지고 없는 찔레꽃이 어이하여 이 더운 한여름에 꽃을 피운다냐 ? 얘도 틀림없이 늦둥이인가보다.
백두대간길은 이 큰고리봉 정상에서 좌측으로 꺽어진다. 여기서 오른쪽으로는 낙동강으로 흐르는 물줄기를 타고 왼쪽으로는 섬진강으로 흐른다. 백두대간의 개념을 이해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한반도위에 내리는 빗물이 어느 곳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그 빗물은 동해쪽으로 흐르기도 하고 서해로 흐르기도 한다. 물론 바다로 흐르고 나면 다시 합쳐지겠지만 그 바다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을 따라서 걷는 것이 백두대간길이다. 큰고리봉에서 한발짝만 바래봉쪽으로 다가가서 흘린 땀방울은 낙동강을 통해 남해로 흘러가고 한발짝 뒤로 물러서서 흘린 땀방울은 섬진강을 통해 하동을 거쳐 광양으로 흘러간다.
큰고리봉에서 좌측으로 꺽어 고기삼거리로 내려가는 길은 무척 가파르다. 안전로프를 설치해 놓았으나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내려가는 길목에 노각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남쪽 지방에 있는 산에 다닐 때야 만날
수 있는 나무라서 나한테는 귀한 존재다.
꽃이 하얗게 핀 모습이 함박꽃나무 꽃과 닮은 것 같은데 아직 그 꽃을 직접 보질 못했다. 혹시나 하고 나무 위를 올려다 보았는데 잎만 무성하다. 마치 늙은 오이(노각)껍질처럼 얼룩 무늬가 있어 노각나무라 부르는 줄 알았는데 해오라기의 다리문양과 닮았다 하여 노각(鷺脚)나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고유종이라지만 경상남도, 전라남도 등 남쪽지방에서만 볼 수 있다. 올해는 꽃을 보기에 너무 늦어 버렸고 내년에나 기대를 해봐야겠다.
가파른 길을 내려서면 편안한 솔숲에 둘러싸인 오솔길이다.
잣나무숲길로 들어서면서 산길은 마치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편안하다. 룰루날라 휘파람이 절로 나온다.
우산나물꽃. 이른 봄 솜털을 잔뜩 묻힌 채 태어나서 우산같은 잎날개를 펼치고 꽃대를 세우고 마침내 꽃을 피웠다.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은 소담한 꽃이다. 그저 숲속의 한 개체로서 할 일을 다 하고 나면 다시 계절의 뒤안으로 사라져 버리는 꽃이다. 잘났다고 으스대지도 않고 또 누구에게도 주눅드는 일 없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서 있다.
빽빽하게 자란 잣나무숲을 지나고 담쟁이 덩굴을 몸에 치렁치렁 감고 있는 금강송숲길을 지난다. 누군가 송담을 채취하여 가다가 길가에
버려 두었다. 몸에 좋다는 얘기가 메스컴을 통해 방송을 타면 전국의 해당 풀나무들은 긴장해야 한다. 도망갈 수도 없고 숨을 수도 없는 그
풀나무들을 마구잡이로 채취하는 통에 번식력이 약한 것들은 자칫 희귀종으로 전락할 수 있다.
어느 누군가의 효자비인가 아니면 누구의 공덕비인가. 남원땅에는 이렇게 좋은 일을 한 사람들의 공을 기리는 누각이나 비가 많이 보인다.
길 양쪽으로는 햇볕을 좋아하는 덩굴식물들과 키작은 풀들이 한여름의 뙤약볕을 즐기고 있다. 큰낭아초 ( 늑대의 이빨모양과 닮았나요? ) 도 늑대처럼 떼지어 피어 있다. 지나는 사람들이 보건 말건 개의치 않고 피묻은 이빨을 드러내고 자기들끼리 뜨거운 여름을 즐기고 있다.
사위질빵꽃이 만발했다. 곁을 지날 때 사위질빵꽃이 속삭이며 퐁기는 은은한 향기가 기분 좋게 들린다.
갈퀴나물은 보라색 꽃으로 예쁘게 치장하고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에 긴 더듬이 덩굴손을 뻗어 거침없이 타고 오른다. 햇볕과 물과 양분만 있으면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콩과 여러해살이 풀이다. 봄에 어린줄기를 나물로 먹을 수 있고 여름에 덩굴을 채취하여 말려서 다려먹으면 류머티즘 관절염 등에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길가에 새로 식재한 듯한 가로수가 서 있는데 루브라참나무다. 잎이 갈라진 것이 기존 우리 산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참나무종류와 다르다.
성장이 빠르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라는 점을 감안하여 서둘러서 이 백두대간길을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선정한 나무같은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좀 더 긴 안목으로 수종을 선택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를 들어 원산지가 우리나라인 노각나무를 심는다면 예쁜 꽃도 볼 수 있고 백두대간에 맞는 상징성도 있고 또 남쪽에서만 자라는 나무이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좋은 추억거리도 제공할 수 있으니 북아메리카가 고향인 루브라참나무를 심는 것 보다는 좋을 것 같다는 소견이다.
대간길은 아스팔트를 달려 운천교회를 지나 노치마을로 이어진다.
이 아스팔트길이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 (分水嶺)’이라니 참 묘한 기분이 든다. 산자분수령 (山自分水領), 즉 산은 물을 가르지 않고 물은 산을 넘지 않는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현장이다. 도로는 평평한데 길 양쪽으로 흐르는 농수로는 이 길을 넘을 수 없고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 노치마을로 향하는 방향의 오른쪽은 낙동강으로 왼쪽은 섬진강으로 흘러간다.
도로는 운천교회를 지나 들판 한가운데를 달려 노치마을에 닿는다. 교회 뒤로 지난 3월에 걸었던 수정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늦은 오후 햇빛을 받아 잔잔하게 다가온다. 멀리 하늘위에는 마른 구름이 해를 가리고 찬란한 저녁노을을 준비하고 있다. 도로가의 밭에서는 두명의 여인이 상추잎을 따고 있고 그 옆에 원두막 그늘에서는 젊은 총각인 듯한 사람이 그 여인들과 메마른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가끔씩 큰 소리로 공허한 웃음을 날려 보낸다. 한가한 농촌의 풍경이다. 지난 3월 처음 대간길을 시작할 때 잠시 들렀던 노치마을을 다시 찾았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느티나무는 수백년 마을의 역사를 알면서도 한마디 말없이 오가는 산객을 바라본다. 우리가 떠나고 나 이후에도 앞으로 또 수백년을 그렇게 서서 아픈 일들과 기쁜 일들을 내색하지 않고 바라볼 것이다.
에필로그
산행을 마치고 다시 고기삼거리로 버스를 타고 돌아와 개울에 들어가 몸을 씻었다.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계곡물은 폐속까지 시원하게 한다. 옷을 입은 채 물속에 들어가 자맥질을 하니 그 재미가 쏠쏠하다. 7시간 산행으로 풍기는 땀냄새를 말끔히 씻어내고 새옷으로 갈아 입으니 몸과 마음이 개운하다.
산행기를 쓰면서 두 번이나 쓴 것이 저장이 안되어 다시 쓰길 반복하다 보니 내용이 조금 바뀌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아두면 나중에 하나씩 꺼내어 읽는 재미가 있을 터인데 파일이 깨져 복구할 수 없다 하니 그냥 허공으로 날아간 글이 되고 말았다.
첫댓글 좋습니다 생생한 모습입니다
즐감 합니다
동진이 오랜만이다~
ㅎ잘 지내지^^
어김없이 야생화의 갈론은 이어집니다
야생화 박사님 계속 수고를 부탁드리며 사랑합니다.
총대장님도 건강하시죠~
사진 잊어먹겠어요^^
기수별로 산행기는 대를 잇는데
형님께서 22기 전통을 잇는군요
ㅋ골프 10년 등산은 일이년??
훌륭하십니다
9월9일 반야봉에서 뵙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
좋은 격려의 말씀 감사합니다. 미약하나마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회상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검증하며 읽어주세요. ㅋ
산행기에다 야생화까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