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6:1-9
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라(1-4)
남유다의 멸망 전후에 활동한 선지자들은 서로 다른 장소, 다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죄악으로 무너진 예루살렘 도성에서는 선지자 ‘예레미야’가, 포로로 끌려간 곳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는 선지자 ‘에스겔’이(겔 1:3), 참혹한 포로 생활을 이어가던 바벨론의 왕궁에서는 선지자 ‘다니엘’이(단 1:8),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은 서로 달랐지만,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한 분이셨고, 그 부르심 앞에서 그들은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부르심, 곧 ‘소명’(calling)은 특별한 하나님의 방식 가운데 각자의 삶 속에 주어졌습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 역시 바로 그 부르심의 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는 자요, 부름 받은 자의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이들을 묶을 수 있는 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선지자’(prophet)입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는 어떠한 사람일까요? 첫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입’입니다.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9) 그는 말씀이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린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의 생각과 입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다시 말해 그의 전 존재가 말씀의 통로인 셈입니다. 둘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눈’입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렘 1:11) 선지자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시대를 바라보고 상황을 해석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넘어,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시킵니다. 셋째, 선지자는 ‘하나님의 표징’입니다. “너는 띠를 사서 네 허리에 띠고.”(렘 13:1) 선지자의 삶은 선포된 말씀의 증거입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삶으로 드러내는 자, 말씀을 직접 삶으로 살아내는 자, 그가 바로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에게도 그와 동일한 모습이 발견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1-2)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단락의 시작은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씀의 사람임을 밝힌 후에 그에게 매우 이례적인 명령이 주어졌음을 알립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결혼과 자녀를 금지하는 것, 즉 가정을 이루지도 말고, 대를 잇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본래 가정은 모든 인간관계의 기초이자, 최소 단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최소한의 관계마저 맺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일까요? 죄악된 도시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그 심판으로 인해 모든 생명이 사라질 그때가, 이제 곧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명령은 한 개인에 대한 금지나 금욕이 아니라 남유다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님의 표징입니다. 그들에게 닥치게 될 앞으로의 현실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3-4) 이 곳에서 낳은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오니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독한 질병으로 사람이 죽고, 죽은 시체가 넘쳐 나서 지면의 분토, 즉 거름이 됩니다. 칼과 기근,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굶주리게 됨은 물론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 쌓여 짐승의 먹이가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한 이들은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닙니다. 그곳에서 함께 살았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입니다. 온 가족이 거리의 시체가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무서운 것은, 그 죽음 앞에서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슬픔이라는 당연한 감정마저 사라진 땅, 즉 인간다움을 완전히 상실한 땅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족의 죽음 앞에서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시대, 그런 사람들로 가득한 도성,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남유다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5절입니다.
그들을 위해 슬퍼하지 말라(5-7)
(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십니다. “초상집에 가지 말고, 통곡하지도 말고,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도 말아라.”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해 보면, 예레미야는 본래 그런 일을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슬픔 중에 있는 자들을 찾아가 함께 울고, 함께 위로하는 일. 사실 그 일은 그동안 남유다를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사역이요,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일을 멈추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서 ‘평강’(שָׁלוֹם)과 ‘인자’(חֶסֶד)와 ‘사랑’(רַחֲמִים)을 빼앗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선물입니다. 언약 백성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 복으로 인해 남유다는 그동안 질서와 안정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제 그 모든 복을 거두어 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복이 사라진 도시의 실상, 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6-7절입니다.
(6-7)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거두신 복, 곧 평강과 인자와 사랑이 없는 도시의 처참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냅니다.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런데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을 애도할 수조차 없는 현실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사회의 장례와 고인에 대한 애도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행위이자, 남겨진 사람을 위한 연대와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함께 슬픔을 짊어지고, 상실의 아픔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신을 매장해 줄 사람도, 부둥켜안고 서로 울어 줄 사람도, 위로의 떡과 잔을 건네줄 사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끊어진 관계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의 마지막 존엄마저도 무너뜨리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사라진 것은 슬픔만이 아닙니다. 기쁨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본문 8-9절입니다.
그들과 함께 기뻐하지 말라(8-9)
(8-9)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장례’가 삶의 끝을 지탱하는 의례라면, ‘혼인 잔치’는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예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잔칫집을 향한 발걸음마저 막으십니다. 여기서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가 끊어진다”라는 말은 미래를 향한 소망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가정의 시작과 생명의 탄생은 일생일대의 큰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을 누릴 수도, 나눌 수도 없습니다. 언제, 어디에서 그렇습니까? “네 목전, 네 시대에,” 죄악이 만연한 시대에, 타락한 남유다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일을 행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며 살아갑니다. 꼭 그래야 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자 은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세 가지 ‘금지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결혼과 출산을 금지하셨고, 슬픔과 기쁨도 막으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감정마저 억눌린 채,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야 했던 선지자 예레미야, 하나님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와 같이, 그를 부름 받은 자, 곧 ‘사명자’로 빚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감내해야만 했던 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본문은 그가 이 명령 앞에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결혼도, 자녀도, 슬픔도, 기쁨도 금지당한 것이 결코 쉬운 일, 가벼운 부르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 부르심의 자리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 명령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단 한 가지 이유, 그 명령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삶을 던져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고단한 순종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성도님들을 심방하다 보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중에는 제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고통과 아픔 가운데 있는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어느 날 한 성도님께서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저를 이곳에 두실까요?” “왜 이런 상황을 지나게 하실까요?” “왜 이런 일을 겪게 하실까요?” 사실 이것은 그 성도님의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 자리에 선 연약한 저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저 또한 인생의 어려움과 삶의 고비고비를 지날 때마다 똑같은 질문을 주님께 드리곤 합니다. “왜 그런가요? 주님.”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해되어야만 순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알아야 참을 수 있고, 납득이 되어야 견딜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때로 이해보다 먼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순종의 자리에서 진짜 믿음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지금 우리의 삶에도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일들도 있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시간도 있습니다. 기도해도 문제 해결의 답은 보이지 않고, 기다려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고, 또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의 삶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순종하는 삶이 아닙니다. 지금 이해되지 않아도, 당장 받아들일 수 없어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이 아니라, “네.”라고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내 기준과 판단의 신을 벗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서 걷는 믿음의 여정입니다. 비록 그 길이 좁고 험한 고난의 길일지라도, 그 인도하심이 나의 기대나 바람과 다르다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으로 걸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순종의 사람과 오늘도 함께 하시며, 그 값진 순종을 통해 당신의 선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날마다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거칠고 험난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이곳으로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주목하며, 오직 주의 말씀만을 따라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 시간 주님만을 의지하며,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을 맡겨드립니다. 주께 모든 것 맡긴 믿음의 사람들과 오늘도 동행하여 주시고, 믿음의 순종을 통해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날마다 경험하는 모든 성도님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삶의 자리는 어디이며, 무엇을 원하신다고 생각하나요?
2. 하나님의 뜻보다 나의 뜻과 생각과 감정이 앞서는 판단과 결정이 있었나요?
3.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순종했었던 경험이 있었나요?
4. 지금 내 삶 속에서 “왜?”가 아니라, “네”라고 응답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작성: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