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마, 백봉 거사
백봉 김기추 거사(1908~85)는 출가 승려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재가자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을 주어
20년을 하루 같이 정진할 수 있게 한 힘의 원천이었다.
백봉은 부산 영도에서 한의원집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산상고에 진학한 그는 일제가 만든 일본인 학교를
부산제1상업학교라고 하고,
그보다 먼저 생긴 부산상고를 제2상업학교라고 지칭하는 데
반대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하다가 퇴학당했다.
20살 때엔 부산청년동맹 초대 총무와 3대 위원장 등으로
항일운동을 벌이다 1년간 부산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다시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벌이다 일본 관헌에 체포돼
사형수 감옥에 구금되기도 했다.
약소국 민족으로서 속박된 삶의 연속이었다.
1950년부터 고향에서 부산남중·고교를 설립해 교육사업을 하던
백봉에게 ‘자유의 날’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백봉이 한 지인과 함께 청주 심우사를 찾았다.
백봉은 주지 스님에게
“요술이나 좀 가르쳐달라”고 할 만큼 불법엔 무지했다.
그러나 백봉은 마음이 순수했고, 무엇을 하든지 철저하게 했다.
주지 스님으로부터 ‘무’()자 화두를 받자 일념으로 집중했다.
1964년 1월 도반들과 함께 보름간 정진하기로 하고 다시 심우사로 갔다.
백봉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백봉에게 어떤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감지한 도반들이
몰래 그를 돌보기 시작했다.
도반들이 법당에서 예불하고 참선하는 사이
백봉은 남몰래 나와 눈 내리는 바위 위에서 좌선에 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4~5리쯤 떨어진 아랫마을 사람들이
어느 집 사랑방에서 놀다 집으로 가던 중 암자가 있는 곳에서
불빛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런 광명이 솟는 곳엔 금광이나 금불상이 있다는
속설을 들었기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올라갔다.
그 빛이 나는 곳에 가보니 정작 바위 위엔
눈에 싸인 사람의 코만 빠끔히 나와 있었다.
살펴보니 온 몸이 얼어붙은 채 숨소리만 가늘게 내뿜고 있었다.
사람들이 꽁꽁 언 그를 방으로 옮겨 뉘어 주물렀다.
한 도반이 선사의 어록을 가져와 읽어주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그 순간 백봉이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그 때 백봉의 몸이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이었다.
또다시 방광이었다.
바로 그 때 암자 아랫마을로부터 예배당의 새벽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순간 백봉의 몸이 비고, 욕계, 색계, 무색계도 비고,
천당과 지옥마저 비어 툭 터져 버렸다.
몸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일체가 허공인 경지를 체득한 것이다.
홀연히도 들리나니 종소리는 어디서 오나
까마득한 하늘이라 내 집안이 분명허이
한 입으로 삼천계를 고스란히 삼켰더니
물은 물은 뫼는 뫼는 스스로가 밝더구나.
백봉은 깨달음을 이렇게 읊었다.
한 도반이 바로 백봉에게 금강경을 한 구절씩 들려주자
단 하루 만에 이를 명쾌하게 풀어냈다.
이것이 백봉의 <금강경강송>이다.
그 때까지 백봉은 금강경 한 번 읽어본 적이 없었다.
<유마경>에선 붓다가 제자들에게 유마거사를 병문안토록 하자
사리불과 목건련, 가섭 등 10대 제자와 미륵보살까지도
유마거사의 법력을 감당해 낼 수 없다며
유마거사를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백봉을 가리켜 욕설법문으로 유명한 춘성선사는
출가자가 아닌 거사의 몸으로 무상대도를 이룬 유마거사에 빗대
“이 시대의 유마거사”라고 불렀고,
탄허선사는 “말법시대의 등불”이라고 칭송했다.
백봉을 달마와 육조의 후신으로 믿는
묵산 선사(84)는 보림선원을 개설해
백봉의 선풍 선양에 노구를 불사르고 있다.
70년대 초까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 선사는 백봉에게
“삭발출가해서 조계종 본산 조실을 맡아 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봉은 이를 거절했다.
그는 절대성 자리를 깨치는 종교가 특히 기복과
상대성 시비 놀음에 빠져 있음을 간파했다.
중국에 수많은 사찰과 탑을 세운 양무제의 공덕에 대해
“없다”고 잘라 말해버린 달마대사처럼
백봉은 상대 세계에 현혹된 알음알이를 부수는 벼락이었다.
백봉은 “눈이란 기관을 통해서 보는 놈이 누구냐,
귀라는 기관을 통해서 듣는 놈이 누구냐”며
“빛깔도 소리도 없는 바로 그 자리,
허공이 본바탕이고, 법신”이라며 천기누설을 서슴지 않았다.
조선조 마지막 한의학자인 무위당 이원세를 비롯한
서운· 춘당 선생과 연화당· 일심행 보살 등이
각 곳에서 백봉의 뜻을 이었고, 국민대 김문환 총장, 전창렬 변호사,
인천지검 김진태 차장검사, 한국과학기술원 감직상 연구원 등도
백봉 문하생이었다. 또 백봉을 직접 모셨던
보림회 총무 전청봉씨와
‘우리는 선우’ 이사장인 성태용 건국대 교수와
외국인노동자쉼터인 ‘사명당의 집’ 대표 김광하씨,
불교집필가 장순용씨 등이 거사선풍을 드날리고 있다.
허공을 걷어잡는 보림선방을 나서니 다시 허공이다.
산문 밖 역시 허공이다. 일체가 허공이라는데
거리의 온갖 풍경은 대체 무엇인가.
한 선객이 준 테이프에서 들리는 너털웃음 섞인
백봉의 목소리가 그림자에 현혹되는 버릇을 다시 통쾌하게 날린다.
“우주가 한바탕 웃음 아닌가. 하하하”
한겨레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