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지시(亂世之始)3-통권152
용황궁의 정전. 라혼은 고학, 호사천, 그리고 설화와 앞으로의 행보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군.”
“신주관은 상경을 지키는 마지막 관문인데….”
“빙장 어른,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황진성부로 들어온 서제는 스스로 독 안으로 기어 들어온 쥐새끼일 뿐이니 말입니다.”
“….”
라혼의 30만 대군을 끌고 온 서제를 빗대 독 안에 든 쥐라는 말에 호사천은 어이가 없었다. 또한 고학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서제의 전략을 분석한 결과, 서제는 지구 전술의 달인이었다. 30만의 풍부한 병력은 한두 번 진다고 해도 완전히 소진되지 않는다. 서제 서포틈이 상경부에 속한 논밭을 태우는 청야전술(淸野戰術)을 시도하면 그 피해는 막대하다고 할 수 있었다. 상경은 인구 250만의 천하 대도이기 때문에 싸우는 와중에도 그들의 배를 곯게 해서는 안 된다.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용호왕과 서제의 권력 투쟁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설화만은 남편이 지금 무얼 하려 하는지 짐작했다.
“서방님, 천자가 되시려는 거예요?”
“…!”
밑도 끝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설화의 질문은 호사천은 물론 고학도 눈을 부릅뜰 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글쎄…? 나는 그냥 네가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하는데?”
“전 싫어요!”
“그렇군. 그럼, 빙장 어른이 호황이 되면 되겠군.”
“끄응!”
호사천은 사위의 말을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하며 앓는 소릴 냈지만 고학은 긴장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주군, 중경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라혼은 고학의 물음에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호사천에게 물었다.
“천자의 일이야 천원 회의에서 다룰 일이지만, 호가의 당주는 빙장 어른이 맡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호사천은 사위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천하의 기재라 자부했건만….’
호사천에게 백호나한이란 자는 도무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자였다. 그는 해도대원수로서 모든 물길을 장악하고 있는 자였다. 그러니 그의 역량이라면 군사들을 천호를 가로질러 중경에 내려놓는 일은 쉬운 일이리라. 게다가 호황가는 지금 당주가 없는 상태, 현재 천림왕이 득세하고 있다고는 하나 병권을 쥐고 있는 금군교위 무골후 호장은 아직까지 천림왕을 지지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20만 용호군이 뒤를 받쳐준다면 호황가의 당주가 되는 일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 쉬운 일이리라. 호황의 붕어와 호태자의 급서가 천림왕과 서제에게 기회였듯이 자신에게도 기회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호사천은 백호나한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무서운 존재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라혼은 그렇게 호사천에게 약간의 언질을 주고 나서 자신과 설화의 진정한 보금자리인 금림으로 들어왔다. 금림에는 흑산자와 아기를 안고 있는 까무잡잡한 피부의 야성녀에서 푸근한 기도의 메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소첩 메이가 상공을 뵙습니다.”
“주공을 뵈오.”
“오랜만입니다, 흑사! 메이, 이 아이가 모원의 아들인가?”
라혼은 흑산자와 메이의 인사를 반가운 마음으로 받고 메이의 품에 안긴 아기를 건네받았다.
“산입니다.”
“모산이라…. 좋은 이름이다. 산아, 그러고 보니 내가 미처 네 백일 선물은 준비하지 않았구나! 뭐가 좋을까? 그래….”
라혼은 모산에게 뭘 해줄까 궁리하다가 이내 생각을 정리하고 강보를 벗겨냈다. 그리고 내기(內氣)를 아기의 몸에 침투시켜 아직 굳지 않은 뼈와 근육을 어루만져주었다. 심장과 내장을 튼튼히 하고, 서서히 막혀가는 영규혈(領揆穴)에 기운을 심어 막히지 않게 했다. 그리고 임독이맥(任督二脈)을 다시 한 번 단단히 했다.
“허! 벌모세수(伐毛洗髓)를 이렇게 쉽게 하다니….”
라혼이 아기에게 시술하는 벌모세수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흑산자는 절로 감탄했다. 아기를 벌모세수하는 정도야 흑산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심력과 내력 고갈, 그리고 원정(元精)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도 아이가 자라면서 잘못된 습관이나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등 외부 자극에 반응하여 근골이 제대로 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거기다 하늘의 기가 통하는 영규혈이나 내력을 쌓는 데 필수 불가결한 임독이맥을 튼튼하게 해주어도 그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닫혀간다. 하지만 어렸을 때 이렇게 벌모세수를 해주면 좀더 쉽게 기초가 쌓이고 나중에 상승 공부를 할 때도 큰 도움이 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라혼은 주요 혈에 내기를 심어 시간이 지나더라도 막히지 않게 조처했다.
“메이, 앞으로 잔병치레하는 일은 없을 거다. 내가 이놈을 효자 중 효자로 만들었으니….”
“감사합니다, 상공.”
메이는 상공이 산이에게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흑산자의 중얼거림을 들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아이가 커서 아버지를 따라 문에 뜻을 둘지, 아니면 무에 뜻을 둘지 모르지만 어느 쪽에 뜻을 둔다 해도 대성할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리고 상공의 말처럼 최소한 잔병치레는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로 태어난 아기 산을 중심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아기가 잠들자 설화와 메이는 조심스런 발걸음으로 아기를 방으로 옮겼다. 여인들이 사라지고 대청에 흑산자와 라혼만 남자 흑산자가 조심스런 어투로 질문을 던졌다.
“설화에게 들으니, 주공께선 후세를 바라지 않는 것 같다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이오.”
“….”
흑산자는 라혼의 긍정하는 말에 그 연유에 대해 물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했다. 말 못할 고충이 있는 것이 분명하니 더 이상 묻기도 뭣했기 때문이었다. 라혼은 그런 흑산자와 서늘한 정자에 자리잡고 서편에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설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오.”
“…!”
“흑사께서는 의학에 밝으시니 한번 봐주시오.”
흑사는 그 말을 듣고서야 후세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본부인이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면 첩을 들이면 그뿐이었다. 그러나 주공이 후세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그럴 뜻이 없다는 것을 완곡하게 돌려 표현한 것이다.
“가엾게도….”
“….”
“그보다 주공!”
“말씀하시지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흑산자는 심중에 품었던 질문을 하기 위해 무거운 어조로 라혼을 불렀다. 그리고 물었다.
“북지성에 웅랑교의 웅천패가 있습니다.”
“….”
침묵.
“흑사!”
“….”
“그때도 말했다시피 복수를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천지가 어두워지고 맑은 밤하늘에 별이 호수에 내려앉자, 설화가 따뜻한 차를 내왔다. 라혼과 흑산자는 말없이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주공,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라혼은 흑산자가 떠나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산자는 외곬이었다. 웅랑교의 웅천패가 오신룡 중 하나인 우(于)라는 사실을 알았어도 복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겐 마지막 한 가지 수가 남아 있었다. 독종사인(毒宗邪人), 그 저주받을 마물이…. 아마도 영환지존 영환자라면 독종사인이 깨어나지 않는 이유를 알 것이고, 해결책까지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于)는 어쩔 수 없으리라.
***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칠흑 같은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송개는 오늘도 그 누구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했다. 용호왕과 서제의 다툼은 상경의 장사치들에겐 참으로 힘겨운 때를 맞게 했다. 대하의 수로를 통해 오는 상품은 있지만 남원주를 비롯한 갑주, 병주, 임주의 장사꾼들이 상경으로 오질 않으니 물건은 창고에 쌓여만 갔다.
“후우~. 오늘따라 유난히 구름이 어두운 것을 보니 날이 흐리겠군. 비라도 오려나?”
송개가 하는 일은 해가 뜨면 현무문이 열리고 상경에서 양항으로 들어서는 물품을 옮기는 일꾼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아이구. 오늘도 송 대인이 가장 먼저 나오셨군요. 그런데 밤일은 제대로 치르고 나오시는 겁니까?”
“예끼, 이래 봬도 나는 아직 한창때야!”
“아닌 것 같은데…?”
“객쩍은 소리 말고 신패나 내놔!”
부두에서 짐을 나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신분이 확실하고 무슨 일이 벌어졌을 경우 조사가 용의하게 되어 있었다. 요즘은 뜸하지만 하루에도 엄청난 물량의 짐이 하선되고 또 배에 실려 나갔다. 개중엔 한 상자만 없어져도 손해가 막심한 고가품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것에 대한 관리를 철저히 하려다 보니 신분이 확실하지 않으면 짐에는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양항을 관리하는 관청을 따로 두었는데, 어렵고 힘든 일을 신분이 확실한 사람만 골라 쓰기에는 지난한 일이었다. 그래서 송개 같은 사람이 필요했다. 일꾼들에게 신패를 발급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사고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두 일꾼들이 하나 둘 모여들고 일꾼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은 일거리가 있으려나?”
“글쎄…. 어제 백호나한이 멀쩡하게 돌아오는 걸 자네도 직접 보았지 않은가? 용호왕부의 돌아가는 눈치가 심상치 않으니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 같더라고. 게다가 어제 저녁부터 수군 소속의 군선들이 모여드는 것 같으니….”
“에이, 대수영의 물건이야 지네들이 나를 텐데 우리들에게 일거리가 돌아오겠습니까?”
“그렇지?”
“오늘도 공치면 안 되는데….”
“왜? 호호루(好好樓)의 단향이 젖가슴이 그렇게 그립던가?”
“아! 단향이뿐이겠습니까? 추월이, 세연이, 국향이….”
“에라! 자식아, 젊은 놈이 밤낮 그 생각이지….”
“에헤헤헤헤, 몰랐나? 그 자식 숫총각이야!”
“아유 비린내, 어쩐지 젖비린내가 풀풀 풍기더라니.”
그러다 문득 늘어지게 하품하며 하늘을 쳐다본 한 일꾼이 어둠이 가시는 하늘 위에 거뭇한 구름 같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옆에 있는 동료에게 물었다.
“어이, 저게 뭐여?”
“아! 뭐가? 글쎄 구름 같기도 하고 시커먼 것이… 소나기가 오려나?”
그들의 말에 하나 둘 고개를 돌려 하늘을 본 사람들은 점점 밝아오는 새벽에 그것이 절대 구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서, 설마? 산?”
“마, 맞아 산, 산이여!”
“세상에 하늘에 거꾸로 떠 있는 산이라니?”
그날 아침 상경의 백성들은 하늘 위에 둥실 떠 있는 산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것이 신선들이 산다는 선산환도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백호나한이 부린다는 것도 알았다.
“세, 세상에….”
“저런!”
라혼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용호군 장군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금강이 양항에 내려앉으면 용호군 전군은 금강에 오른다. 오늘부터 용호왕부는 금강에 둘 것이다.”
“조, 존명!”
라혼은 염동력으로 그저 떠 있을 뿐인 환도금강을 움직였다. 그리고 금강에 상주하고 있는 귀림의 드워프들은 금강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느라 라혼이 정리해둔 법륜의 원리를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허장성세(虛張聲勢)를 떨 필요가 있어 금강을 끌어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날 20만 용호군과 기본적인 물자만 실은 금강은 허공에 떠올라 빠른 속도로 북쪽으로 날아갔다.
“물길을 지배하는 것이 대수영이니, 하늘을 지배하는 건 대공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