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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영국의 스튜어트(Stuart)왕조(2) - 권리청원
임광자 추천 0 조회 151 08.05.14 09: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House of Stuart) (2)-권리청원

 

나. 찰스 1세(Charls 1 / 1625∼49)

 

(1) 권리청원(權利請願)

 

뎀스 강 건너편에 바라본 영국 의사당제임스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첫째 아들 헨리가 요절하였기 때문에,

 

둘째 아들이 왕위를 계승 찰스 1세(CharlesI / 1600.11.19 ~ 1649.1.30)가 되었다(1625)

 

그는 용모가 빼어나고 그림을 좋아하는 미술 애호가였으며, 프랑스 앙리 4세의 딸 앙리에타 마리아(Henrietta Maria)와 결혼하여 프랑스 부르봉왕가의 루이 13세와는 처남 매부간이 되었다.

 

가정적으로 아내에게는 충실한 남편이었고 자녀들에게는자상한 아버지였지만, 감정에 쉽게 치우치고 통찰력이 부족하여 국왕으로서는 도량이 좁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부왕 제임스 1세와 마찬가지로 의회(議會)라는 영국적인 대의기관(代議機關)을 무시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로서, 무리한 대외 정책으로 국고를 탕진하자,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독단적으로 관세(關稅)를 징수하고, 헌금(獻金)을 강요하고, 공채(公債)를 강매하였다. 이를 반대하면 무조건 체포, 구금하여 절대왕권을 세우고자 했다.

 

이런 왕의 처사에 영국인들이 반발한 것은 당연했지만 이를 항의할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628년 에스파냐 등과의 대외전쟁으로 돈이 궁색해진 찰스 1세가 과세의 동의를 얻고자 의회를 소집하게 되었고, 새로이 소집된 의회에서는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국왕의 강제공채와 불법투옥 문제를 둘러싸고 처음부터 왕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래서 영국 의회(하원)에서는 에드워드 코크가 중심이 되고 그의 손으로 작성된 권리청원(權利請願 / Petition of Right)이라는 문서를 의회의 이름으로 국왕에게 제출했다(1628). 청원이란 형식을 취한 것은, 새로운 입법이 아니라 영국적인 관습과 전통을 국왕이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권리청원의 전문은 글 끝에 별기로 첨부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의회에 소집된 성속(聖俗)의 귀족 및 서민(theLords Spiritual and Temporal, and Commons)이 삼가 국왕 폐하께 아룁니다(To theKing's Most Excellent Majesty)로부터 시작하여, 에드워드 1세(1272 ~ 1307), 및 에드워드 3세(1327 ~ 1377) 치세 기간에 선언된 이 나라의 법률에 의해서 주어진 영국인의 권리 및 자유가 지켜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앞으로는 아무도 의회 제정법에 의한 일반적인 동의 없이는 어떤 증여(贈與), 공채(公債), 헌금(獻金), 세금 등의 부담을 지지 않으며, 또 그런 부담을 강요 당해서도 안된다....어떤 자유인도 위와 같은 이유로 함부로 구속되거나 감금해선 안 된다.....

국왕의 육·해군 병사들을 철수 시켜야 하며(민가에서), 국왕 폐하의 신민은 이러한 부담(병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을 더 이상 질 수 없다. 군법 재판에 의한 명령서도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는 것은 취소, 무효화 해야 한다....는것 등으로,

 

이는 찰스 1세가 부왕인 제임스 1세의 절대군주제를 답습하여,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고 공채를 강제로 팔았으며(强制公債), 백성들에게 군대의 숙식을 강제로 제공하게 하였고(强制宿泊), 일반인에게도 군법을 적용하여 체포와 구금을 예사로이 행하자, 이를 영국 국민들은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 국왕에게 위와 같은 청원을 한 것이나, 사실상 권리선언을 국왕이 승인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찰스 1세의 입장에서는 혹 떼려다가 오히려 더 큰 혹을 붙인 결과가 되었고, 그렇다고 의회의 요구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1628년 6월 7일 찰스 1세는 마지 못해 이를 승인(承認)하였으나, 실천에 옮길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의회의 동의없이 세금을 징수하는 등 전제정치를 계속하였다.

 

이렇게 국왕의 처사가 약속과 달라지자 다시 의회에서는1629년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였다. "누구든지 의회의 승인을 얻지 않은 관세의 징수를 협의하거나 권고하거나 실행하는 자는 국가의 대적(大敵)으로 간주한다"...

 

이런 의회의 결의를 바꾸어 말하면 국왕은 영국의 대적(大敵)에 해당된다. 따라서 찰스 1세는 격노(激怒)했고, 주동자 9명을 체포, 런던 탑에 감금 시키고 골치 아픈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그리고 앞으로도 의회를 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래서 찰스 1세는 다른 변수가 없는 한 절대군주의 자리를지킬 수 있었을 것이고 그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2) 청교도(Puritan)

 

웨일즈 지방의 농촌 풍경이런 찰스 1세의 절대군주권영속(永續)을 저지 시키는 장치는 또 있었다. 종교가 그것이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7세로부터 시작하여, 엘리자베드 1세 여왕에 의해서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완성되었으나,

 

엘리자베드 여왕은 당시 영국의 복잡한 사정을 고려, 중용(中庸 / Via Media)을 택한 것이 신·구교 어느 쪽도 아닌 다시 말해서 모든 교파의 주장을 수렴해서 영국 국교회를 만들었다.

 

이런 영국 국교회에 대해서 신교측에서는 카톨릭의 잔재(殘在)를 모두 지워 버리고, 청순(淸純)한 교회를 만들어야 된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을 퓨리턴(Puritan / 淸敎徒)이라 하고 여기에는 칼뱅파는 물론 루터파도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장은 대개 두 갈래로 대별된다. 하나는 영국국교회에 머물면서, 내부 개혁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청순한 교회로 만들어 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국교회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영국의 절대왕정을 떠받치고 있었던 이데올르기, 즉 국왕이 교회의 우두머리(首長)로 되어 있고, 왕권은 신으로부터 받았다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국왕측에서 본다면 이런 새로운 교회 운동은 분명히 이단 행위로 취급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시의 어떤 왕정(王政)도 종교를 떠나서 성립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교회의 교구조직이 곧 지방 행정 조직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메스 미디어가 발달되지 못했던 이 시기에 설교자들의 말 한 마디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종교만큼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잡을 수있는 것도 없었고, 종교 이상으로 인간의 행동을 강력하게 좌우하는 것도 없었던 당시로서는 종교와 왕정을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런 종교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 왕정도 파탄에 이른다는 것은 너무도 뻔하기 때문에 헨리 8세건 엘리자베드 1세건 종교에 대한 비판 세력은 가차없이 탄압을 가했고, 이것이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에 이르러 더욱 강화되었다.

 

(3) 청교도 탄압

 

"주교(主敎)없이는 국왕도 없다"라는 것이 제임스 1세의 통치 이념이었다고 한다. 튜더 왕조에서는 그래도 의회라는 의견 수렴기관을 거치는 합리성을 갖추었지만 스튜어트 왕조에서는 사사건건이 물고 늘어지는 의회에 대해서 이를 무시해 버리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고 국교 분리주의자(청교도)들도 더욱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제임스 1세 치하에서 종교적인 탄압으로 많은 신교도들이 네덜란드 등 외국으로 망명하였고, 그 중 일부(102 명 가운데 순수 청교도는 35 명이었다고함)가 다시 1620년 메이플라워호(May flower 號)를 타고 플리머스항을 출발, 긴 항해끝에 미국 매사추세츠주 어느 항구에 도착, 그 일대를 뉴잉글랜드, 도착한 곳을 플리머스라 이름 짓고 정착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영국 식민지 거점을 마련했다. 이들을 훗날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 / 巡禮始祖)라 불렀다.

 

종교를 탄압해서 뿌리 뽑겠다는 위정자가 있으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탄압하면 순교로서 저항하거나 그래도 여의치 못하면 일단 지하로 숨어들고,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이 종교의 속성이다. 이런 것은 영국이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당시 영국 국교회의 분리주의자(청교도)들 중에는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재정적으로 궁핍해진 국교회의 재산을 사 모아서 그들이 원하는 "청순한 교회"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베일에 가린 체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비밀 움직임에는 국교회와 왕실의 야합에 반발한 지방 호족(豪族)들이 대거 참여, 왕정과 국교회의 뿌리를 조용한 가운데 흔들고 있었다. 이런 청교도의 세력이 심상치 않게 확대되자 왕실과 국교회측의 방어 체제도 더욱 강화 되었는데, 이런 역할을 담당한 것이 켄터베리 대주교 윌리엄 로드(WilliamLaud / 1573 ~ 1645)라는 사람이다.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그는 교회 재산의 매매행위를 적극 단속하는 방법으로,

 

성직자들로부터 서약서를 받고, 위반자나 잘못이있는 청교도에게는 고등 종무관 재판소를 통해서 귀나 코를 자르는 극형을 가했다.

 

이렇게 탄압이 심해지자 이에 비례해서 반발 또한 심해졌다.

 

청교도들의 머리 속에는 자기들만이 신의 백성이고 다른 자들은 모두 크리스트의 적이라는 이원주의(二元主義)와 적대 감정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적인 집회가 점차 정치적인 결사(結社)로 변형되어 갔다.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그들의 정책을 밀고 나가야 하는 찰스 1세나 윌리엄 로드에게 가장 큰 문제는 궁색해진 재정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것은 의회의 승인없이 징수할 수 있는 톤세(Tonnage duties)를 확대하고, 토지를 가지고도 기사가 되지 않은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법률의 맹점을 악용하여 독점권을 팔았는데, 이 가운데 항만시설 이용료에 해당하는 톤세를 전국으로 확대하자 여기에 이해관계가 얽힌 사람들, 특히 젠트리층의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결국 젠트리 한 사람이 납세 거부 태도를 보이자, 이를 재판에 회부, 재판의 결과는 국왕측에서 이겼으나, 이를 계기로 전국적인 납세거부 운동이 일어났고, 그것은 절대왕정의 위기인 동시에 새로운 권력이동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런 국민들의 종교적 정치적 불만은 먼저 제임스 1세의 본 고장 스코틀랜드에서 폭발하였다.

 

스코틀랜드의 교회는 칼뱅파의 장로회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윌리엄 로드가 이 스코틀랜드에서도 영국 국교회를 강요하자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고, 이런 가운데 1637년 스코틀랜드의 수도 에든버러에서 주교(主敎)가 영국 국교회의 기도서(祈禱書)를 든 것을 본 군중들이 분격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복음의 순수성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맹약을 맺고, 왕실과 국교회에 대항하기 위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찰스 1세와 윌리엄 로드는 그들과 타협할 것을 거부하고, 전쟁으로 응징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다. 돈이 없는 그들로서는 전쟁은 해야겠는데, 마땅하게 돈을 빌릴 만한 곳도 없었다. 결국 의회를 다시 소집하여 그들의 동의와 협찬을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1640년 4월, 실로 11년만에 의회가소집되었다.

 

그리나 의회가 국왕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줄 리가 없다. 새로이 소집된 의회에서는 다시 국왕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었고, 해산과 재 소집의 순환에도 타협점을 찾지 못한 양측은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동원하게 되었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의 서막이다.

 

이제 청교도는 청순한 교회를 세우겠다는 국교회의 분리자들뿐만 아니라 찰스 1세의 절대왕정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의 결집으로 대변되었고, 따라서 이들에 의해서 이룩한 영국 헌정사의 한 획을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다음 이야기 - 영국의 청교도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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