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19-11-15)
< 사소한 행복 >
문하 정영인
친구들 몇몇이서 가을나들이를 떠났다. 가을 단풍 보러 떠났다. 싱거운 이야기들을 지껄이며 떠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음식을 같이 먹는다. 사람끼리 밥을 같이 먹는 것만큼 가까운 일은 별로 없다.
아침 일찍이라 빈속이 무두질을 한다. 더구나 입동이 며칠 안 남아서인지 꽤 써늘하다. 출출한 속에 더욱 한기가 스며든다.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른다. 이른 조반으로 뜨끈한 유부우동을 먹는다. 반찬이라야 단무지 몇 쪽이다. 펄펄 끓는 국물에다 토렴해준 우동 국수 가락이 꼬들꼬들하다. 다들 후루룩 국물부터 마신다. 뜨끈한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리니 몸과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들 행복한 기운이 얼굴에 퍼진다. 그들먹하게 차린 한정식보다 나으면 낫지 덜하지 않다. 거기다가 회장님이 준비한 믹스커피를 김나게 마시니 행복감이 절로 든다.
이렇게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훌쩍 떠나올 수 있어서 감사하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박사는 “내가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 아니라, 내가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고 한 말이 가슴에 따뜻하게 와 닿는다. 감사하지 않으면 행복할 수가 없다. 감사가 먼저이다. 그러니 우리는 감사할 일을 일부러라도 만들어야 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우리 신부님은 감사를 입에 달고 다니란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요즘 생활이 핍박하다. 도대체 감사할 일이 없는 것 같다. 거짓투성이다. 가짜 뉴스는 미친개처럼 쏘다닌다. 어디에도 감사거리가 없는 것 같다. 가만히 틈을 뒤져보면 감사거리가 틀림없이 이곳저곳에 숨어 있다. 자꾸 찾아보니 감사거리가 수두룩하다. 누가 집에서 가꾼 호박을 두 개나 주었다. 한 철, 햇볕과 바람과 비와 이슬을 듬뿍 먹어서 야무지게 익었다. 풋콩을 넣고 호박죽을 해 먹었다. 맛있다. 고마운 일이다. 그 호박 한 덩이에는 가꾼 이의 땀과 정성, 싹을 트게 하고 자라게 한 흙과 물에 대한 고마움, 햇빛 한 자락, 가끔 빗물이 씻겨주고, 달님 해님이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이 오가다 더위 식혀주고 잎들은 호박 만드느라 얼마나 고심초사했을까? 아기 키우듯이……. 거기다라 벌 나비는 호박꽃 중매하느라 발버둥을 쳤다. 칭얼거리는 애호박을 위해 달님은 자장가를 불러 주고 별밍는 반짝반짝 율동을 해주었을 것이다. 이렇게 하찮은 것 같은 호박 한 덩이도 고마운 존재다. 결국 호박죽 한 그릇에 온 우주의 고마움이 담겨 있다.
다들 옛 추억에 잠긴다. 증기기관차가 빽빽 거리며 달리던 시절, 천안역에서 잠깐 기차는 숨을 고른다. 잽싸게 내려 기차 풀랫홈 포장마차에서 후루룩 먹던 우동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국수 삶은 지가 오래라 팅팅 불었다. 멀건 멸치 국물이다. 허겁지겁, 먹는 것이 아니라 마신다고 해야 옳다. 기차는 가겠다고 김을 내뿜는다. 몇 모금 안 남은 국물을 후다닥 마시니, 기차는 어기적어기적 선로를 떠난다. 그런 우동을 먹었을망정, 우리는 행복했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뜨신 국물이 추운 내장으로 흘러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만사가 감사하고 행복했다. 마음 통하는 친구들과 여행 가죠, 점점 다가오는 단풍 구경하죠, 뜨거운 우동 한 그릇 먹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다. 그저 아주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이 순간만은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다.
이 나들이에서는 남도의 맛난 것들을 먹을 것이다. 나주 곰탕, 짱뚱어탕, 회정식 등. 그래도 이른 아침, 서늘한 속을 뜨끈히 데워주는 우동 한그릇만 할까. 우동 한 그릇에 속을 달랜 얼굴은 행복한 얼굴이다.
우리는 일생생활에서 작고, 적고, 소소하고, 사소한 행복이나 즐거움을 놓지는 것은 아닐까? 파랑새 같은 행복, 너나 내나 로또 같은. 거대한, 한꺼번의 행복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의 물질은 극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원자나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 본바탕은 작은 것이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나 달콤한 맛도 아주 작은 분자화 되지 않으면 그 맛이나 향기를 맛볼 수가 없다. 그 본바탕은 극히 작은 것이다. 모든 것은 작은 것이 모여 큰 것이 되는 것이다. 거대한 사막도 작은 모래알갱이가 모여서 된 것이다.
1,000원짜리 물건을 사고도 기뻐한 적이 있다. ‘다이소’라는 가게다. 이곳은 주로 천 원짜리부터 오천 원짜리 물건들이 수도 없이 진열되어 있다. 한 마디로 없는 것 빼놓고 다 있다. 하기야 천원에 살 수 있는 것이 그리 흔하지 않다. 배 한 개에 삼사천 원이다. 거기서 육개장 컵라면을 1개 샀다. 단돈 500원이다. 집에 와서 끓여 찬밥에 말아 먹으니 제법 육개장 맛이 났다. 500원으로 배부르게 먹으니 나른한 행복이 스며 들었다. 나는 오백 원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말은 요즘 인기리 방영이 끝난 tv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까멜리아의 사장 동백인 공효진이 한 말이다. "행복을 수능 점수표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답이 없더라. 그래서 내 점수는 내가 정하기로 했다. 남보기에 어떻든 내가 행복하기로 했다“ 고 소신을 이야기했다. 우리는 명품 행복이나 로또 행복을 쫓는다. 대개가 남과 같아져야 행복하다는 파랑새를 쫓는다. 사소하고 작은 진짜 내 행복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마치 ‘행복’이라는 세 잎 클로버를 지천으로 옆에 두고 ‘행운’이라는 네 잎 클로버만 찾는 것처럼……. 내 보기 행복이 아니라 남 보기 행복만 찾는다. 그래서 자꾸 불행해지고 진짜 자기 행복의 순간을 놓쳐 버린다.
행복해지려면 우선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것도 사소한 것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감사하지 않은데 행복해질 리 없다. 그리고 최고의 행복은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한 것일 것이다. 자리이타(自利利他) 행복이 가장 으뜸 행복일 것이다.
내가 행복지기 위해서 타인을 불행하게 하는 행복은 본질이 그른 행복이다. 그런 것은 불행한 행복의 시작이다. 내가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탈 장학금을 타는 것은 도둑 행복이기 때문이다.
작은 행복을 저버리는 큰 행복은 불행한 행복이다. 일확천금, 로또 당첨자들의 큰 행복은 대개가 불행한 행복으로 마감되었다고 한다. 친구가 천 원짜리 로또 한 장 사 주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의 행복 때문에 아직도 확인하지 못하고 지갑 안에서 기다리고 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의 행복을 기다리는 소인배임은 틀림없다.
신문을 읽었다. 어느 유명한 노 디자이너의 말이 생각난다. “가질수록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아마 채우는 행복보다는 비우는 행복이 더 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