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5년 일본은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고종은 헐버트를 미국에 보내고
각국 공사들을 상대로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한다.

주최국 러시아가 대한제국에 보낸
제2차 만국평화회의 초청국 목록에
뚜렷이 나타난 대한제국 명칭
(이 공문은 을사늑약 이전에 보내어진 것으로
을사늑약 후에 러시아의 태도는 달라졌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가 없자,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전 의정부참판 이상설,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前)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 등
3명을 밀사로 파견해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열강의 후원을 얻으려 했다.

헤이그 밀사 3인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우리는 ‘이준 열사’의 이름 때문에
이준을 그 3인의 대표로 기억하지만,
사실 그 3인 중 정사(正使)는 이상설이었고,
이준과 이위종은 부사였다.
그리고 이위종이 나머지 둘을 만난 것은
러시아의 수도에서였다.
당시 러시아 주재 한국 공사는 이범진이었는데,
이미 1905년의 을사조약으로
그의 외교관 지위는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그는 공사관을 사수하고 있었다.
이범진은 나이 마흔을 넘어 외교관이 되었던 바,
외국어에 능통하지 못했다.
그를 도운 사람이
7개 국어를 말할 수 있었던 아들 이위종이었다.


제 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건물
(현 네덜란드 국회 상원의사당)

제 2차 만국평화회의 장면(1907년 6월)
천신만고 끝에 세 헤이그 밀사가 헤이그에 도착했을 때
그들이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미 1905년 카쓰라 태프트 밀약으로
조선과 필리핀을 교환한 미국도 그랬고
1902년 일본과 동맹을 맺은 영국도 그랬으며
러일전쟁에 패배한 러시아도 그랬고
주최국인 네덜란드도 다르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는 국제 미아가 됐다.


만국평화회의의 실상을 풍자한 당시 언론삽화
그들을 파송한 대한제국에서 그들에게
사형과 무기징역 선고(형식적일지언정)를 내릴 정도였으니
말해 무엇할까.

밀사들의 활약이 결실을 맺어
당시 만국평화회의보 1면에 보도된 밀사들에 대한 기사
하지만 세 밀사는 어떻게든 이 난관을 뚫어보려고 애썼다.
1907년 7월 8일 이위종은 열국의 기자들을 모아놓고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 라는 연설을 하였다.

고작 20살의 외교관으로
세계를 흔든 이위종
대한제국 친일정권은 이위종에게 사형을,
이상설과 이준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만큼 이위종의 헤이그에서의 활약이 컸다는 증거이다.
“... 일본인들은 항상 큰 목소리로 얘기합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일본의 국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 문명인으로서의 일을 하는 것이며,
개방정책을 유지하며 모든 국가에 동등한 기회를 보장한다.’
고 말합니다.
그러나 러일전쟁 이후 그들은 변합니다.
놀랍게도 원통하게도
그들은 모든 나라에 대한 정의롭고 평등한 기회 대신
추하게, 불의하게, 비인도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결정적으로 야만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이들에 따르면 을사조약은 우호적으로 체결되었지만,
우의와 형제애를 말하면서
그 뒤통수를 치는 일본의 강도보다도
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중략)
한국인들은 아직 조직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토록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일본의 침략이 종말을 고하기 위하여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본은 반일정신으로 무장한 2천만 한국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위종의 프랑스어 연설은
모여있던 기자들의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깐깐하고 의심 많기로 유명한 기자들이었지만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며 공감한다는 결의안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자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그리고 국제관계는 냉혹했다.
당장 이위종의 연설을 듣고
장문의 연설문을 협회보에 실어주었던 영국인 스티드부터
곧 밀사들을 외면하게 되니까.

뜻을 이루지 못한 노여움으로 이준 열사는 분사했고,
사형선고를 받은 이위종과 무기징역형을 받은 이상설은
다시는 조국의 땅을 밟지 못했다.
1910년 대한제국의 주권이
일본에게 완전하게 강탈당하자,
1911년 이위종의 아버지 이범진은 자살로서 생을 마친다.
외교권을 빼앗긴 나라의 외교관으로서
군자금을 모아 의병들을 지원하고,
공관을 잃고 아파트로 들어가서도
대한제국 공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던 이범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유산을 독립운동에 쓰라고 하면서.
"우리의 조국 대한은 이미 죽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
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소인은 자살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소인은 오늘 생을 마감합니다."

이위종의 아버지이며, 독립운동가 이범윤의 형인
초대 주 러시아 대한제국 공사 이범진(1853-1911)
향후 이위종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러시아 군에 입대하여
1차대전 중 동부유럽전선에서 전사했고,
가족들에게 전사 통보가 전해졌다는 설도 있고,
그 뒤 러시아 혁명에 가담했고
러시아 거류민들 앞에서 붉은 군대의 장교로서
"조선의 독립을 도울 것은 러시아"라고 주장한 '이위청'이
그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은
나이 스무 살에 서양인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유창한 외국어로 자신의 나라를 도와 달라고 외치던
1907년 7월 8일이었을 것이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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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2838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