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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교양 강의]
마음의 문을 열라
아주 먼 우주에서 지구를 보면 탁구공처럼 보일 것이다. 지구의 작은 일부인 중국은 좁쌀처럼 보이지 않을까? 우주 비행사라면 정답을 알 것이다. 그것을 알고 싶으면 우주선을 타고 달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젊었을 때 방동미(方東美) 선생의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선생은 장자를 강의할때면 늘 장자가 우주 비행사일 것이라고 하셨다. 우주 비행사가 아니라면 어떻게 이렇게 비범한 상상을 할 수 있겠느냐고 여러 차례 강조하시곤 했다.
물론 장자가 우주 비행사였을 리 없다. 그는 탁월한 상상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밤하늘을 바라보고 하늘가에 별들이 총총히 빛날 때 별들의 입장에서 지구를 바라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우주 한가운데 있는 지구가 작고 하찮게 여겨질 수도 있다. 세상에 있는 물건들과 비교해보면 탁구공 같지 않을까? 장자는 어떻게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었을까? 그 사고 방식은 지금도 유효하다.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
『장자』 「추수」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을 물이 때가 되어 천 갈래 계곡에서 황하로 들어오니 물이 갑자기 늘어나 양쪽 강기슭과 모래톱 사이에 있는 소와 말을 분간할 수없을 정도로 황하가 넓어졌다. 그래서 황하의 신인 하백(河伯)은 득의양양하게 천하의 아름다움이 모두 자신에게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물길을 따라서 동쪽으로 가다가 북쪽 바다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니 바닷물의 끝을 볼 수 없었다. 이때 하백은 비로소 득의양양했던 안색을 바꾸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북쪽 바다의 신인 약(若)에게 감탄하며 말했다.
“속담에 ‘도(道)를 조금 알면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여긴다'는 말이 있는데 나를 두고 한 말이군요. 또한 나는 공자의 식견이 별것 아니라 하고 백이의 절개를 경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데 애초부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의 헤아리기 어려운 광대함을 목도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래도록 도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샀을 테니까요."
위에서 말씀드린 우화에서 하백이 가지고 있었던 득의양양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인의 뛰어난 시력으로도 반대쪽 강기슭에 있는 것이 소인지 말인지를 구별하지 못할 정도였는데 어느 누가 지구 위에서 황하보다 더 큰 강을 보았겠습니까. 하백은 바다의 신인 약을 만났을 때 이 큰 바다는 강가에서 소인지 말인지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라 그 끝조차 보지 못할 정도로 넓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초라함을 깨닫게되지요. 그래서 태도를 바꾸고 바다의 신인 약에게 자신의 유치함과 무지함을 솔직하게 인정했던 겁니다.
그는 바다의 신인 약의 광대함에 혀를 내두르면서 공자와 백이를 떠올립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속의 지식과 행위에 대한 판단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학문이 훌륭하다거나 누구의 덕행이 고상하다는 따위의 모든 판단은 상대적인 기준에 따라 형성된 것입니다. 마치 강기슭이 있어야만 강의 너비를 헤아릴 수있는 것과 같지요. 만약 끝도 없이 넓다면 누가 낫고 누가 못하고를 무엇으로 비교하겠습니까?
하백은 현실을 인정하고 바다의 신인 약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신인 약은 하백처럼 스스로 득의양양 했을까요? 바다의 신인 약은 말합니다.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줄 수 없다. 개구리는 공간의 구속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여름날 벌레에게는 얼음을 말해줄수 없다. 그 벌레는 시간의 제한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편협한 선비에게는 도를 말해줄 수 없다. 예속의 속박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너는 강줄기에서 벗어나 큰 바다를 보고서 자신이 초라한지를 알았다. 이제야 비로소 너에게 큰 도의 이치를 말해줄 수 있겠다."
세상에 '우물 안 개구리'나 '여름날 벌레', '편협한 선비'의 처지에서 벗어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바다의 신인 약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자신도 초라한 존재라는 점을 명백히 아는 일이지요. 그래서 이 단락의 시작부터 그는 장자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위대한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핵심이 되는 말이 나옵니다. 바다의 신인 약이 말하지요.
"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마치 작은 돌이나 작은 나무가 큰 산 속에 있는 것과 같다. 그토록 왜소한 존재가 어떻게 스스로를 뛰어나다고 여기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사해가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개미집 구멍이 큰 연못 속에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또한 중국이 사해 안에 있는 것은 커다란 창고 안에 좁쌀이 있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이라는 말은 바로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당시에 장자가 말하는 '커다란 창고'는 사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우주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 지구도 작은 점에 불과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논의는 점점 심각해집니다. 이런 식이라면 우리가 큰 것과 작은 것을 분별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큰 것 밖에 더 큰 것이 있고 작은 것 안에 더 작은 것이 있어서 이 두 가지 방향은 모두 무한합니다. 그래서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가 없습니다.
큼과 작음은 상대적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사물의 귀천(貴賤)도 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큼과 작음은 눈으로 보아서 간단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현실 속에서 어려움없이 쓰일 수 있는 판단들입니다. 이를테면 화물을 운송하려고 할때는 반드시 큰 배로 큰 강에서 항해를 해야 하지만, 그 상태로 작은 계곡에서는 나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문제에서 크기는 쉽게 가늠이 됩니다. 그러나 귀천의 평가는 매우 복잡합니다. 장자가 말합니다.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스스로는 귀하다 하면서도 서로는 천시한다." (以物觀之, 自貴而相賤.)
꽃이 말을 할 줄 안다면 아마 스스로 가장 아름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풀이 스스로 추하다고 생각할까요? 큰 나무는스스로 자신의 색이 너무 단조롭다고 생각할까요? 흰 구름은 스스로 한 곳에 얌전히 있지 못하고 부산하게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고 생각할까요? 동물의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인간의 집단이나 사회단체에서 어느 누가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서로 천하게 여기지는” 않는지 물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겠습니다.
여기서 장자가 「추수」편에서 제시한 핵심적인 관념은 도가의 주요 사상이기도 합니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귀함과 천함이란 없다.”(以道觀之, 物無貴賤.)도의 입장에서 보면 만물에는 귀천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일종의 평등'의 관점을 통해 만물은 안분지족(安分知足)할 수가 있고 도를 깨달은 자도 이를 통해 만물 자체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작가인 소로H. D. Thoreau(1817~1862)가 쓴 『월든』이라는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호숫가 근처에서 2년 2개월 동안 혼자살면서 얻은 마음의 깨달음을 적고 있습니다.
하버드대 철학과 졸업생으로서 그는 지혜의 깨달음에 따라 단순하고 독립적이며 담대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미 있게 살고 싶다면 반드시 섬세하게 덕행과 학문을닦아야 합니다. 소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진흙탕에 뿌리를 내리고 나면 왜 하늘을 향해 뻗어나갈 수 없는 걸까.”
살아가고자 한다면 마음과 정신을 고양시켜야 하고 위를 지향해야 하며 더 높은 깨달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소로는 호반에서 혼자 살면서 자연스럽게 부근 농민들의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농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누군가 그에게 물었지요.
“당신은 여기에 혼자서 사니 매우 적막할 것 같습니다. 다른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특히 비가 내리는날이나 깊은 밤에는 더욱 그럴 것 같은데."
그때 소로는 이렇게 대답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이 우주에서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상상해보세요. 지구 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거리가 멀면 또 얼마나 멀겠습니까. 근데 왜 제가 적막하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장자의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이라는 비유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장자는 사해 안에 있는 중국만이 좁쌀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또 그는 “천지는 좁쌀과 같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소로는 또 어떤 생각을 이끌어냈습니까. 먼저 '적막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말합니다.
“사람이 사람들과 떨어져 적막감을 느끼는 것은 어떤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일까요? 저는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물심양면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두 사람의 영혼을 더 가까워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두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묵계가 부족하면 같은 방에서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적막감을 없애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째서 대자연으로 돌아가 모든 생명 본래의 면모, 그 자체를 감상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지구가 하나의 좁쌀처럼 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저 좁쌀 위에 함께 사는 만물을 어째서 꼭 귀함과 천함, 높음과 낮음, 아름다움과 추함, 좋음과 싫음 등을 따지며 구별하는 것일까요. 소로의 책에서 가장 빼어난 부분은 작은 생명체에 대한 그의 찬미입니다.
소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들판의 수탉이 나무 위에서 우는데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몇 리 밖에서도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러자 대지는 진동했다. 이것이 온 나라를 일깨울 수도 있다. 그것은 영원히 건강하고 목소리는 영원히 맑으며, 정신은 나태한 적이 없다."
“황혼 녘 먼 지평선 위에 우는 소가 있다. 숲 속에 전해지는 소리는 감미롭고 선율도 우아하다. 나는 처음엔 그것을 유랑시인의노랫소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것들은 모두 대자연의 소리였다!"
“한 마리 다람쥐가 눈 속을 달려간다. 마치 나뭇잎이 바람에 표표히 날려가는 듯하다. 갑자기 저 방향으로 몇 걸음 가다가 또갑자기 이 방향으로 몇 걸음 간다. 그러나 매번 반 미터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어서 갑자기 익살맞은 표정을 짓더니 멈추어 섰다가또 우아하게 발걸음을 돌린다. 마치 전 우주의 눈이 그를 보고 있는 듯하다. 다람쥐 한 마리가 숲 속의 가장 깊은 적막 속에서 움직인 것에 불과했지만 그 다람쥐는 극장의 관중이 바라보는 가운데 춤추는 여자 같았기 때문이다."
그다음 단락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한 번은 내가 정원에서 김을 매고 있을 때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 어깨 위에 앉았다. 당시 나는 내가 어떠한 훈장을 차도 이와 같은 영광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로는 마음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좁은 관점에서 사물을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소한 사물에게서도 흥취를느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로는 인간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까요.그가 호숫가 근처에서 홀로 살았던 것은 자신이 최소한의 자원에 의지하여 생활할 수 있다는 점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당시의 일반적 사회 분위기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조차 그의 집과 1마일이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빈곤과 수고로움에 편안해하고 즐거워할 때에만 우리는 사심이 없고 총명한 관찰자가 되어 인생을 관찰할 수 있다. 사치스러운 생활에서는 농업, 상업, 문학 혹은 예술의 성과까지도 모두 군더더기이다."
“근래에 철학 교수는 세상에 가득하지만 철학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장자가 바다의 신인 약의 입을 빌려 “도의 관점에서 보면 귀함과 천함이란 없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귀천의 문제뿐 아니라 인류사회의 여러 가치관에 대해서도 공감하고 이해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성군 요(堯)임금이건 폭군 걸(桀)임금이건 모두 자신은 긍정하면서도 상대방은 부정한다고 말할 수 있었겠지요. 달리 말해 도가는 그런 부분마저도 초월하려고 했습니다. 위 대목은특히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라
불교에서는 "위아래 두 방향으로 향하라" (上下雙回向)고 말합니다. 장자의 사상을 배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점을 염두에 두어야합니다. 우선 위로 초월하여 물질적 욕망이나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 그리고 가치관의 속박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현실 세계로 되돌아와 여러 가지 다양한 상황에서 스스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위로 초월하는 것만 알아서 세속의 번뇌와 고통을 회피하며 이와 부딪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 산속에 은거하며 세속을 피하는 소극적인 피세주의와 다를 바가 없을 겁니다. 당연히 어떠한 책도 쓸 필요가없었겠지요.
장자가 귀한 것은 위로 초월할 수 있으면서도 다시 아래 세속으로 내려온다는 점입니다. 언어와 행위로 표현함에 있어 다른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원한도 가지지 않지만 속마음도 아무런 구애를 받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마음이 편안합니다. 서양 철학자 가운데 이와 비슷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A. W.Russell(1872-1970)은 그의 저작인 『서양 철학사』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인 스피노자B. Spinoza(1632-1677)를 극찬하고 있습니다. 러셀은 스피노자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지만 사상이 고귀하다”라고 칭찬합니다. 유명해지고 나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철학 교수직을 맡아 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스피노자는 조금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지금 나의 생활에 만족하는데 왜 바꾸어야 하지요?"
완곡하게 그 요청을 거절한 것이지요.
「추수」편에서 장자는 “만물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다”는 점을 설명한 후 더 나아가 만물에 진짜 귀함과 천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정해진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인간 사회에서는 매우 분명합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과 순임금은 선양하였기 때문에 제왕의 지위가 계승되었지만 연나라 왕인 쾌와 자지는 선양을 했는데도 나라를 망하게 했다. 상나라 탕임금과 주나라 무왕은 전쟁을 하면서 왕이 되었지만 초나라 백공습은 전쟁을 하고 죽었다. 이로 볼 때 전쟁이나 선양의 예와 요임금과 걸임금의 행위는 때에 따라 귀해지고 천해지는 것이지 변치 않는 것은 아니다.
세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란 분명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망할것이 빤한 상황인데도 그 상황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변통(變通)의 능력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변통할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지식이 필요하지만 초연한 깨달음도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아도 그렇게 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다시 만물을 관찰해보면 한 사물의 귀함과 천함은 '기능’, ‘기술', '본성'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장자는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대들보나 용마루같이 큰 나무는 성벽을 칠 수는 있지만 작은구멍을 막을 수는 없다. 이는 기능이 다르기 때문이다. 천리마 같은 준마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살쾡이나 너구리보다 못하다. 이는 기술이 다르기 때문이다. 부엉이는 밤중에 벼룩을 잡으며 털끝까지 살피지만 낮에는 눈을 부릅떠 도산이나 언덕을 보지 못한다. 이는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단락의 내용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하면 좋은 교훈을얻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이를 기를 때, 우리는 위에서 서술한 세가지 조건의 순서를 거꾸로 되짚어보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할 수 있을 겁니다. 첫째, 아이가 천성적으로 타고난 본성'에는어떤 전공의 공부가 적합할까. 둘째, 아이가 습득한 '기술'은 어떤 직업에서 발휘되는 것이 좋을까. 셋째, 아이가 구비한 ‘기능’은 어떤 곳에서 쓰이는 것이 좋을까. '하늘이 나의 재능을 내었을 때에는 반드시 쓰임이 있다'(天生我才必有用)고 하지만 문제는 먼저 자신의 재능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해야 하고, 또 이런 재능이 어떤 곳에서 사용되면 좋을지를 알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을 찾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요.
바다의 신인 약은 하백의 여러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하는데 그 가운데 하백이 "어째서 도를 귀하게 여깁니까" 하고 질문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는 아주 핵심을 찌르는 질문입니다. 장자는 도가에서 말하는 비장의 카드를 열어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 질문은 바꿔 말하면 이런 말입니다. 만물에 귀함과 천함의 차이가 없고 인간 사회의 행위에도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우리 같은 일반인이 도가를 배우건 배우지 않건 혹은 도를 이해하건 이해하지 않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도를 아는 사람은 사물의 이치에 반드시 통달하게 되고 이치를 통달한 사람은 상황에 맞는 행위 방식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상황에 맞는 행위 방식을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외부의 사물 때문에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다. 지극한 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이 그를 뜨겁게 할 수 없고 물이 그를 빠뜨릴 수 없으며 추위나 더위도 그에게 해를 끼칠 수 없고 금수도 그를 해칠 수 없다. 이는 그가 이런 것들에 함부로 접근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그가 안전과 위험을 분명하게 살펴서 재앙과 복에 잘 대처하며 나아가고 물러나는 행위에 신중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해칠 수가 없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늘의 자연은 마음 안에 깃들어 있고 인간의 작위(作爲)는 겉으로 드러난다. 덕이란 자연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인간을 이해한 행위는 자연을 근본으로 삼고 덕 가운데에 처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아가고 물러날 때 자유자재로 굽혔다 폈다 하면서 근본으로 돌아가 근원을 깨닫는다.”
그래서 '커다란 창고 안의 좁쌀'이라는 비유부터 사물에는 귀함과 천함이 없다'는 관점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내용은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아무런 일도 하지 말라거나 자신의 직분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열린 마음으로 내면의 편견이나 집착 혹은 고정관념을 버리기를 장자는 바라고 있습니다. 크고 작음 또는 귀함과 천함을 함부로 분별하면 자신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곤란과 고통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추수」편은 『장자』전체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으로, 그 가운데 하백이 바다의 신인 약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도가의 근본적인 입장을 바로 살필 수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