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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행 (동대문구)
서울사랑 Magazine에서...
지금은 서울 한복판이 되었지만, 예전 동대문구는 한양 도성 동쪽 흥인지문(興仁之門) 밖 일원 전체를 지칭하는 행정단위였다. 따라서 지금의 동대문구는 물론 성북, 도봉, 성동구의 일부지역까지 아울렀다. 1936년 일제가 경성부 구역확장을 하면서 동대문구로부터 성동구를 분할했고, 1949년 성북구의 신설로 관할구역이 축소되었다. 나중에 동쪽 행정구역을
중랑구로 넘겨 관할구역이 더욱 작아지는 바람에 지금은 인구 30만 남짓의 비교적 단출한 규모가 되었다.
동대문구에 동대문은 없습니다.
‘동대문구’ 하면 당연히 동대문(흥인지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區) 로고에도 번듯하게 흥인지문이 들어있다. 그러나 동대문구에는 동대문이 없다 왜일까? 1975년 10월 1일에 단행된 행정구역 변경 때문이다. 흥인지문을 종로6가동과 공유하고 있는 창신동이 숭인동 및 신설동 일부와 함께 종로구에 편입된 것이다. 그러니 동대문구에서 버스로 몇 정거장을 지나 종로구 관내에 들어와서야 겨우 구의 상징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이 기막힌 모순, 어떤 식으로든 해결을 봐야 할 것 같다.
동대문구 하면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가 재래식 가옥이 즐비한 뒤쳐진 지역이다. 하지만 이곳은 대한민국 과학기술 및 경제개발의 산실이었던 곳이자, 서울 시내에서 가장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는 삼림을 포용하고 있는 서울 도심의 허파다. 먼저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 부속 홍릉수목원.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국내외의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을 체계적으로 수집·관리, 기초 식물 학문분야 발전은 물론, 식물유전자원 확보를 위해 조성한 시험연구림이다. 44만㎡ 크기에 총 157과 2,035종(목본 1,224종 : 국내종 836종, 국외종 388종 / 초본 811종)의 식물 20여만 개체가 식재돼 있다.
경희대 서편에 있는 천장산(141m) 남서 사면에 위치한 이 수목원은 여름에는 고온다습하고 겨울에는 한랭건조해 수목원으로서의 입지로 최적격이다. 그간 수목연구원으로만 운영되다가 1993년부터 자연 학습 및 환경 교육을 위해 일반에게 개방하고 있다. 그런데 수목원 이름을 왜 홍릉으로 했을까. 이곳은 본시 명성왕후의 유해를 모셨던 능이다. 그러다 1919년 명성왕후 유해가 남양주로 이장되면서 수목원이 들어선 것이다.
고도성장의 산실 홍릉연구단지
수목원을 나와 왼쪽을 보면 한국과학기술원(KAIST) 홍릉캠퍼스, 오른쪽을 보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개발연구원(KDI), 한국국방연구원(KIDA) 등의 정문이 보인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세종기념관 뒤로는 산업연구원(KIET), 그리고 경희대쪽으로 가다 왼편으로 틀어 들어가면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 등이 포진하고 있다. 이른바 홍릉연구단지.
모두 1970년대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던 과학기술 연구 및 경제 계획의 산실이다. 요즘에야 기업들 스스로 생존과 성장을 위해 연구 개발과 경영 계획 짜기에 몰두하고 있지만 만약 그 시절 이들 연구기관이 없었더라면 ‘한강의 기적’을 달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곳에 연구소들이 포진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결단 때문. 박정희는 가까이서 과학기술과 경제를 챙기고 싶었다. 하지만 도심에서 적당한 부지를 찾을 수 없자 홍릉수목원 부지를 대거 징발(?), 이곳에 과학기술 및 경제 관련 연구소와 대학원(KAIST)을 배치한 것이다(90년대 들어선 모든 강의를 영어로 진행하는 KDI국제정책대학원까지 홍릉연구단지 내에 입주해 연구단지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있다).
박정희는 업무에 골치가 아플 때는 이곳 홍릉연구단지를 방문해, 과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들으면서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낙관적 전망으로 기뻐했고, 홍릉수목원을 돌아보며 심기일전, 호흡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잉태되고 분가한 여러 연구소들이 대전광역시 대덕연구단지로 이전해 훨씬 더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보면, 격세지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정부가 KIST, KDI, KIET 등 국책연구원을 글로벌 녹색연구단지로 조성하겠다고 발표했다. 70년대 고도성장의 산실을 녹색성장의 산실로 전환하겠다는 아이디어 또한 세월의 흐름을 절감케 한다.
기구한 운명의 수표
홍릉수목원 정문에서 대각선 쪽에 보이는 게 세종대왕기념관. 조선시대 최고의 치세를 이룩한 대왕의 기념관에는 재위 32년의 업적을 담은 그림을 비롯 보물급 한글 관계 문헌 100여 종과 탁본 등이 전시돼 있다. 건물 밖에는 보물 제838호인 수표(水標)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 세종대왕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수표는 조선 성종 대의 유물로 청계천 수표교 옆에 있던 것을 복개공사 때 수표교와 함께 장충단공원으로 옮겨졌다가, 1973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기구한 운명. 언젠가 수표교와 함께 원 위치해야 할 터인데...
다음으로 만나는 곳은 홍릉근린공원. 이곳엔 영휘원(永徽園)과 숭인원(崇仁園) 등 무덤 둘이 안치돼 있다. 영휘원은 조선 고종황제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무덤이다. 엄 귀비는 숙명, 진명, 양정 등 사학 명문을 세운 개화기 여성 선각자다.
숭인원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영왕, 영친왕이라고도 함)의 큰아들이자 엄 귀비의 손자인 이진(李晉)의 원이다. 그런데 이진의 죽음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1922년 일본에 체류하던 영친왕과 부인 이방자 여사가 당시 덕수궁에 기거하던 순종에게 8개월 된 황손 진을 소개하기 위해 일시 귀국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진이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하며 돌연사 한다.
당시 일제가 조선황실의 대를 끊기 위해 자행한 만행이라는 설도 돌았고, 조선황실에서 이방자 여사의 일본인 피가
섞인 황손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벌인 일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개운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한방산업특구 서울약령시
홍릉인근공원을 나와 서로 ‘원조’를 주장하는 홍릉갈비집들을 지나 서쪽으로 5분쯤 가다 홍파초등학교를 만나 남쪽으로 틀어 내려가면 거대한 시장을 만나게 된다. 이름 하여 경동시장. 추석이나 설 임박해 제수용 물가 알아본다고 지상파 방송 기자가 단골로 찾는 곳이다.
그만큼 취급하는 품목도 다양하다. 무, 배추 등 채소부터 고사리, 더덕 등 나물, 각종 청과에 육류, 생선, 건어물에 인삼까지 없는 게 없다. 서울에서 물건 값이 제일 싸다는 정평이 나 있을 정도로 팔도 각처에서 품질 좋은 물산이 쇄도한다.
경동시장 얘기하면서 빼놓으면 서러울 곳 한 곳 더. 바로 맞은편에 있는 서울약령시. 입구부터 각종 약재가 어우러져 내뿜는 기이한 향취에 젖다보면, 웬만한 질병은 금세 나아버릴 것 같다. 물론 이따금 이곳에서 독성 농약이 다량 함유된 중국산 약재가 대량 유통되고 있다는 우울한 뉴스를 접할 적도 없지 않지만.
서울약령시는 조선시대 태조 2년(1393년) 왕명에 의하여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의지할 곳 없는 백성과 병자들에게 치료를 담당하던 구휼기관인 ‘보제원’이 있었던 곳이란다. 한동안 쇠퇴했던 이곳은 1994년 서울시로부터 ‘서울약령시(傳統韓藥市場地域)’로 지정 승인됐고, 2005년 정부로부터 한방산업특구로 지정 고시되면서 다시 활성화됐다. 제세구민과 생명존중을 구현했던 선조들의 위업을 이어가기 위해 매년 10월 서울시 전역의 저소득층 1500명을 대상으로 무료진료와 투약을 실시하는 축제를 연다.
열심히 호객하는 약재상의 쉰 목소리 사이로 여러 약재의 독특한 향취를 흠뻑 맡은 채, 약령시 탐방을 끝내고 남쪽 끝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2번 출구쪽으로 나온다. 한솔동의보감빌딩 앞마당에 세워진 비 하나가 나그네 눈에 들어온다. ‘성동역터’.
성동역은 지금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경춘선의 시발역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경춘철도 주식회사가 부설한 사설철도로 광복 후 국철로 편입됐다. 성동~월곡~성북~신공덕~화랑대를 지나, 남춘천~춘천으로 이어졌다. 경춘선은 승객뿐 아니라 경기도 북부 일원과 강원도 일대의 농산물과 임산물을 실어 날라 공급함으로써 경동시장과 서울약령시 등이 번성하는데 기여했다.
정릉천 변 한솔동의보담빌딩 자리엔 성동역사가 있었다. 봄, 가을 이면 역 마당엔 대성리, 강촌, 남이섬 등으로 MT나 야유회를 가는 대학생, 혹은 청춘남녀들로 붐볐다. 이들은 차 시간을 기다리면서 통기타를 치거나, 야전(야외전축)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 등 흥을 돋우곤 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지만, 젊음의 기세를 어찌 꺾을 것인가!
하지만 낭만과 시골 내음이 범벅됐던 성동역도 서울시가지 확장 등에 따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1971년 성동역과 월곡역은 폐역이 되고, 경춘선 기점은 성북역, 출발역은 청량리역으로 바뀌었다. 예전 대성리로 야유회 떠나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며 성동역터를 떠난다.
왕의 백성 사랑, 선농단
성동역터 비를 지나 서쪽으로 100여m 쯤 가다가 주택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울타리로 둘러싸인 사적을 만나게 된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선농단(先農壇). 이곳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 신농씨(神農氏)와 후직씨(后稷氏)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면적은 16㎡. 지금은 사방 4m의 돌단만 남아 있다. 선농(先農)의 기원은 멀리 신라시대까지 올라가는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역대 임금들이 이곳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선농제(先農祭)를 지냈다 한다.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도 하였다. 왕의 밭갈이 시범이 끝나면, 행사에 참여한 이들을 대접하기 위해, 왕의 밭갈이에 동원된 소를 그 자리에서 삶은 살코기를 쇠뼈 고은 국물에 말아냈는데, 당시 선농탕이라 불렀던 이 메뉴가 오늘날 설렁탕이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왕과 신하, 선농단 긴근의 상민과 노비 등이 모두 같은 메뉴로 끼니를 때우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정겹다.
1476년(성종 7년)에는 관경대(觀耕臺)까지 쌓아 어엿한 단(壇)을 이뤘던 선농단 역시 한일병탄과 함께 친경이 폐지되면서 쇠퇴와 퇴락의 길을 걷는다. 그런 가운데 동대문구가 최근 선농제의 가치 회복과 지역내 대표적 역사자원인 선농단의 보존을 위해 선농단 정비 및 역사공원 조성에 들어갔다. 구는 지난 5월 11~12일 선농문화제를 연 뒤, 공사에 착수했다.
완공은 내년(2013년)으로 예정돼 있다.
개인적으로 선농단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다. 중학교 3년, 대학 4년 등 도합 7년 간 선농단을 품에 안은 캠퍼스에서 학창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용두동 어간을 지날 때면 예전 캠퍼스가 있던 곳을 배회하곤 한다.
선농단을 지난 30여m 더 올라가면 초등학교 정문을 만나게 된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나 종암초등학교가 성북구 종암동에 있지 않고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그것보다 더 이상한 것은 이 학교가 특이한 세계기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베이비붐 세대인 1960년대, 그래서 ‘콩나물 교실’이라는 용어가 나올 즈음의 일이다. 어느 학교나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국민학교(현재의 초등학교)의 학생 수용상황이 끔찍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이 종암초등학교. 당시
이 학교는 80학급에 학생 8675명을 수용하고 있었다(61년 2월24일자 소년한국일보). 학급당 평균 학생 수 108명 수준.
가히 세계기록이었다. 2부제 수업은 기본이고 저학년(1~3학년)은 3부제 수업까지 해야 했다.
말이 3부제지 선생님이나 학생이나 자기 교실 찾는 것부터 보통 일이 아닐 터. 제대로 수업이나 했을까? 하지만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의 콩나물교실 문제는 그 뒤로도 한참이나 우리 교육현장의 골칫거리였다. 그런 콩나물 교실에서 공부한 이들이 자라 선진국 직전에 다다른 대한민국을 끌고 가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참 요샌 출산기피, 혼인기피로 학생 수가 줄어 도심에도 폐교하는 학교가 있다고 하던데….
추억의 시외버스정거장
주택단지로 변해버린 옛 캠퍼스를 나와 다시 성동역터를 지나 남으로 향한다. 지하철 용두역 4거리 한켠 동대문구청 청사 옆에 대형마트. 이 마트와 구청사는 예전 마장동 시외버스정거장이었다. ‘정거장’이란 촌스런 이름이 말해주듯, 이따금
급행 버스도 있었지만 주로 완행 시외버스가 출발하던 곳이었다.
행선은 경기도 북부, 강원도, 경상북도 일원을 아울렀다(동대문운동장 맞은편 지금의 Apm 쇼핑몰 자리에 있던 시외버스 정거장 폐쇄로, 경기남부 및 충북 노선도 합류). 마장동정거장 하면 대학 4학년 때 혈혈단신으로 동해 행을 단행해,
삼척~옥계~강릉~속초~미시령~원통~인제~홍천~양평 등을 거쳐 지친 몸으로 당도했던 기억이 난다. 마장동정거장은
나중에 상봉터미널로 자리를 옮겨 확장해 오늘에 이른다.
이제 동대문구 탐험을 마칠 시간이다. 아! 그런데 빠져선 안 될 곳이 빠졌다. 그렇다 청량리역, 바로 청량리역이다. 청량리역은 우리나라 제2의 종관(縱貫)철도로 일제강점기 한반도 및 만주의 지하자원을 수탈하고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거쳐
만주에 이르는 여객 및 화물의 수송을 위해 1936년 부설된 중앙선(청량리~경주)의 시발역이다.
이후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 한 반도를 좀 더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영동선(청량리~영주~강릉)을 개설하면서
이의 시발역으로서도 기능이 추가된다. 이에 따라 서울역과 함께 서울의 물류를 담당하는 양대 철도역으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런데 서울역과 청량리역의 변천사는 사뭇 다르다. 서울역이 거대한 신청사 운용과 KTX 운행으로 환골탈태 초 현대화된 모습이라면, 청량리역은 비록 민자 역사로 외양은 어느 정도 현대화돼 있다 해도, 아직까지 예전의 그 노선, 그 승객들을 그대로 실어 나르고 있다. 게다가 성동역 폐쇄로 넘어온 경춘선까지 떠맡고 있다. 요즘은 중앙선 구간 중 전철화 된
용산~용문 구간을 탑승하는 행락객의 중간 탑승 역으로도 분주하다.
청량리역 하면 이 얘기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바로 인근 유곽(遊廓) 얘기다. 청량리역 인근 588(전농동 588번지)은 서울역 앞 양동, 용산역 앞 한강로 2가, 동대문 근처 오관수교 청계천변, 마장동 시외버스정거장 주변, 미아리 텍사스, 천호동 텍사스 등과 함께 서울의 대표적 유곽이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다른 유곽들이 개발과 강제 이전 등으로 모두 쇠퇴했음에도 청량리 588은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는 점이다.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마침)
- <동대문구 탐방> - 언제가 될지... 동대문구를 탐방할 경우 탐방로를 미리 구상해 봅니다.
* 청량리역 - 홍릉근린공원(영휘원, 숭인원) - 세종대왕기념관(보물 838호 수표, 세종대왕 신도비) - 천장산(141m)
자락의 홍릉수목원(주목적) 관람 - 홍파초등학교 - 경동시장 - 서울약령시 - 제기동역 - 한솔동의보감(빌딩) 앞
‘성동역’비 - 선농단(유형문화재 15호) - 종암초등학교 - 동대문구 청사 (마무리)...
첫댓글 지난 3월 15일날 청량리 탐방에 이어.. 언젠가.. 동대문구를 탐방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들이 잘 몰랐던 부분들도 많이 있더군요. 그런데.. 홀릉수목원은 토요일, 일요일날만 개장을 하던데... 덕일총무께서 시간을 내어... 석희회장님과 상의하여 일정을 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런후... 청량리.. 주재원.. 건영님의 의견도 들어 보는 것이 좋을 듯하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