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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호치민인가?: 베트남의 진실이 위기의 한반도에게 묻는다.
송필경, 에녹스, 2013, 403쪽.
- 2020년 10월에 베트남어로 번역(「Tai Sao LH Ch Minh?」)
“쌀을 찧어질 때 / 몹시도 아프겠지만
다 찧어진 뒤엔 / 솜처럼 새하얗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 이와 같은 것
고난은 너를 연마하여 / 보석이 되게 한다.” (175쪽)
이 시는 베트남 감옥에 있었던 전사들(millitants)이 읊은 시라 한다. 이 시는 실생활적이고 경험적이라 누구에게나 가슴을 찡하게 한다. 고난과 고통은 꼭히 감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의 과정에서는 인민도 감당하는 삶이다. 소크라테스 시대에 민주주의 의식의 발흥은 20년간의 펠로포네소스 전쟁 과정 중에 생겨났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 중에서 내부적으로 투쟁과 사투에서 인민은 사회와 국가의 주인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시는 한편으로 서정적이며 한편으로 삶의 과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삶이 먼저이고 철학은 다음이다.’ 실천이 먼저이고 사유와 사고는 그 다음이다. 학습과 수련 그리고 노력은 삶의 기본이다. 그 삶에서 인간은 누구나 그 삶의 터전의 토지와 풍토의 얼굴을 지닌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얼굴을 지니고, 인민들의 기억에 남아 금성홍기(Cờ đỏ sao vàng 旗𣠶𣋀黃)의 별이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호찌민을 신화로 만들지도 영웅으로 만들지도 않는다고 한다. 죽 읽어 가면 사상사적으로 호찌민은 가장 경험적이고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라는 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호찌민 자신이 막 각성하는 시기, 세계 변화의 시대에 여러 노선들의 발산이 있었다. 그는 20살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스스로 벌어서 살면서 사유를 깊이하며 30여 년 동안 거의 전지구상을 주유(周遊, 노마드) 하였다. 그 노마드에서 몸에 베인 진실성과 실재성은 만나는 인민들에게 그가 품은 길이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더라도 삶과 조국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주유의 과정에서 어느 일터에서든지 – 여객선 화부, 주방보조원, 집사 등등– 시간만 있으면 책을 보며 학습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문제제기에 대한 해결을 위한 노력을 끊임없이 이어왔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유럽, 러시아, 미국, 일본, 중국의 이야기 속에서 가장 현실적이면서 그들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체득하였다는 것이다. 경험적, 실재적, 현실적 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그가 불교의 영향을 입어서 대승적 차원에서 인민과 함께 수레를 끌고 간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고, 무소처럼 행동하라는 수타 니파타를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고향의 인민들이 ‘응에 안(Nghệ An / 省乂安, 성예안)의 고집 센 물소’라 불리는 것과 같이. 그의 30년 노마드에서 속내가 점점 더 잘 실재성을 띠고 현실화의 방향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55TMHI) [물을 무로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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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장점은 ‘인민 속에서’를 잘 서술하였다. 인민 속에서 인민에 의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실천과 사유는 거의 동태적 종교성을 띠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큰 수레를 끌고 밀고 가는 사유를 제시한 첫째 사상가들은 고대의 고다마 싯달다와 소크라테스에 있을 것이다. 이를 이어받아 정리한 이들이 각각 나가르주나와 플로티노스일 것이다. 19세기는 실질적이고 총체적 사유를 하는 방향을 실증적으로 정리해 본 철학자는 벩송이며, 이상하게도 이런 사유를 고대 그리스 아테네 사상에서 뽑아 올린 철학자는 박홍규와 들뢰즈일 것이다. 이런 사유가 실질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풍토에서 나온 얼굴들이다. 이런 사유의 공통점은 참주(황제, 군왕)의 제도가 아니라 인민이 주인인 민주의 사상이다. (55TMG)
벩송에게서 경험적 총체성의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느낌으로 한 단어를 뽑으라면 일반적으로 알려진 “지속(durée)”보다 “우여곡절(la sinuosité, 꾸불꾸불)”을 꼽을 것이다. 의식은 지속이고 총체적 덩어리인데, 개인적 삶의 과정에서 그 지속이 하나의 선도 아니고 그렇다고 매번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방황하는 것도 아니며, 장애물 앞에서 지체하기도 하고 우회도 하고 넘기도 하면서 꾸불꾸불 지나간다. 우여곡절은 마치 우연 또는 우발인 것 같이 보여도 - 라이프니츠는 역사에서 우연으로 보이는 것이 필연이라 한다 – 그 당시 그 터전에서는 어쩌면 최선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어서 그나마 이런 인간의 역사를 이끌고 온 것이 아닐까 한다. 태어나서 살다가 간다는 것은 어느 생명체에게나 필연이다. 그 필연의 양태들은 다양하다는 것이고, 이 다양함을 자각하는 인간은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사유(상상, imagination)과 노력(돈수, 학습, 수련)을 하는 것이리라. 그런 노력에도 필연에 메일 수밖에 없다면, 맡겨 살아갈 것이다. 과거의 역사는 되 돌이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과거에서 누군가 언젠가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왜 노력, 수련, 돈수, 명상 등을 하겠는가? 그래도 인간이 무엇인가 필연과 달리 어떤 통로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자유를, 새로움을 창안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져 오듯이, 저항과 봉기는 역사를 만들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필연에서 다른 길을 제시한 것이 종교이라고 생각하지만, 잘 반성하고 성찰해보면 어느 종교든 집단화되고 매개자가 있는 한에서 필연과는 다른 길을 제시하기보다 필연에 따라 살아라 라고 한다. 또는 그 필연을 넘어서 수련하거나 도는 닦는 이들을 이단 또는 악마 취급을 한다. 잘 생각해보라,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중세 말기의 마녀사냥처럼 설쳐대는 것을 보면, 그 사고의 틀에는 필연의 복종에 대한 맹신이 있고, 그와 더불어 믿는 개인들에게는 탐만치가 가득 들어 있음을, 그들은 신의 충만이라 부를 것이다. 내가 보기에 벩송은 서양철학사 2500년 과정을 가장 잘 꿰뚫어 보았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무엇을?
벩송의 철학에서 과정은 지속이며, 지속이라는 것은 마치 어떠한 선들도 직선인 적은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속하는 시간은 마치 지나온 과정이 화살처럼 지나간 것으로 직선을 통과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 착각이 종교에서 이상한(초월적) 또는 파라노이아(편집증)에 걸린 자들과 같은 사고를 한다. 화살도 먼 거리를 날아갈 때 직선을 날아갈까라고 문제제기할 필요조차 없다. 지구의 이 터전이 둥근 면이라고 아무리 농부에게 설명해봐야, 농부는 평면의 밭을 삐뚤삐뚤하더라도 직선으로 갈고 있다고 생각하고 간다. 벩송에게서 유클리드 직선은 사고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인간에게 사고가 먼저가 아니라 삶이 먼저이다. 꾸불꾸불한 삶이 먼저이며, 그 과정을 축약하고 중첩하여 보니 그저 그런 곡선과도 같고, 더욱더 추상하면 직선인 것처럼 착각한다. 경험은 먼데서 보아 직선으로 보이지만, 걸어보면 직선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사는 것이 먼저이고 다음이 철학한다. 즉 실천이 먼저이고 이론과 설명은 그 다음이다. 삶에 대한 이런 경험과 운동으로 체득한 자가 진솔한 혁명가일 것이고, 그 중에 한 혁명가가 호치민이다. (55T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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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많은 부분들에 각주들이 있다. 이 각주들에는 우리나라를 되돌아보게 하는 반면거울로서 저자의 견해를 첨가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또는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예들을 제시하면서, 베트남에 있을 수 있었던 장면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 50년대 세대들이 탐구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물론 대학이 이런 일을 감당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일제 교육과 미제 교육은 어떤 편향 속에 있었는데 이는 앵글로색슨 사고의 한계일 것이다. 일제 교육이 식민지 교육임을 알아차렸다고 느낄 때조차 미제의 식민지 교육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앵글로색슨의 특성을 깨닫기에는 120여년을 지나서야 느낌으로 와 닿았다. 그러나 이미 도로의 간판이나 안내 글자에는 미국이 자리차지 하고 있고, 어느 새 영어의 단어가 한글보다 일상어로 와 있다. 쉴드(보호막)과 가스 라이팅(상대방의 심리·상황 등을 조작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고, 타인의 정신을 지배·조종하는 행위를 뜻)이 그러하다. 이미 그런 용어들이 일반인의 사고에 막을 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55TME)
결과이기도 하지만 과정에서도 호찌민(胡志明, 호지명, 1890-1969)은 삼발 정(鼎)을 이루었는데,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1906-2000)과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 1911-2013)과 함께 있었다. 프랑스에게 저항하며 전투를 벌인 시기에 하노이를 중심으로 이들과 함께 있었다. 이 책은 대 프랑스 항전의 과정을 죽 설명했다. 그리고 대 미국 항전의 과정들은 언급만 하고 서술하지 않고 지나간다. 호찌민 사후이기 때문이리라. 대 미국전투는 사이공(현 호찌민)시의 함락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알려진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활동에는 우리나라 파병에 관련들이 있다. 파병시절(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에 삼선개헌(1969)의 반대, 1971년 셋째 대통령으로 뽑힌 박정희가 1972년 10월 유신을 감행한 시기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저항세력은 베트남의 파병을 용병이라고 지칭하는 시국 선언문을 내기도 했다. 군사정권은 시위를 막으려고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제1호를 하였다. 변역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당시의 저항활동 중에 하나는 윤정원의 「1960-1975년 ‘대구인혁그룹’ 연구(2020)」를 참조할 수 있다. (55T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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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례 **
이 글을 읽는 분들께 4.
역사는 윤리와 만나야 한다. 8
I.베트남 단상 26
II. 선조들이 애국심을 유산으로 남긴 역사. 54
III. 호찌민의 고향; 빈의 낌 리엔 90
IV. 호찌민 기념관 130
V. 까오 방의 박 보 동굴 186
VI. 하노이 바 딘 광장 232
VII. 베트남 군사 역사 박물관 254
VIII. 디엔 비엔 푸 332
끝머리에 400
** 내용 중에서 *
# 왜 호치민인가?: 베트남의 진실이 위기의 한반도에게 묻는다.
* 이 글을 읽는 분들께 4.
* 역사는 윤리와 만나야 한다. 8
내가 대학교 1학년 때인 1975년 4월 30일, 베트남은 북베트남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부패한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뜨리고 통일 이룩했다. 약소 인민이 제힘으로 쟁취한 이 통일은 베트남 인민이 반프랑스 식민투쟁 70년과 미국에 대항한 반제국주의 전재 30년, 무려 100여 년 동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견디며 끈질기게 저항한 결과이다. (12) [2013년 서른여덟 해를 기다려야 했다.]
탄타오(Thanh Thao, 1946-) 시인의 강연에서 그 끔찍한 고통을 견디며 이룩한 민족 통일이란 역사의 성취를 보았다. 그 성취란 진정한 용기에서 나온 용서와 관용이라는 힘이다. (22) [원주 15: 중용(中庸) 제10장에서 제가가 공자에게 진정한 용기의 의미를 묻자 불보무도(不報無道)란 말씀을 하셨다. 극악무도한 자에게도 보복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강(强)함이라는 뜻이다. 베트남에서 반미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것, 부끄럽고 부러울 따름이다.]
I.베트남 단상 26
풀 메탈 재킷(Full Metal Jacket)(28)
할리우드는 베트남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다. 존 웨인의 ‘그린베레’나 실베스트 스텔론의 ‘람보’ 같은 미국이 백전백승한다는 돈키호테 같은 얼빠진 영화도 있지만, 명화의 반열에 오른 걸작들은 베트남 전쟁의 후유증을 처절하게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뼈저린 반성을 촉구한다. 다시 말해 광기 서린 전쟁 때문에 인간이 참혹하게 파괴당하는 모습을 드러내어 반전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 영화다. / <디어 헌터>, <지옥의 묵시록>, <플래툰>, <야곱의 사다리>와 같은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30)
내가 말하는 유일한 사고방식이란 ‘연역적 전제’로 세상을 도배해버리는 성향을 말한다. 도올 김용곡은 우리나라의 특유한 ‘연역적 전제’를 이렇게 보고 있다. (38) - [철학사에 대한 이해부족이다. 어느 나라든 로고스 사고와 누스 사유가 거의 반반으로 있다. 일본의 영향과 일제 그리고 미제 140년동안 앵글로색슨(로고스 사고) 철학에 젖어있어서 그렇다. 이 배경에 크리스토스 관념이 들어있다. 앵글로색슨 철학인지 모르고 사는 것은 일제와 미제에 의해 교육이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다. (55TMI)]
사마천은 ‘공자세가’를 집필하기 위해 섬성성 장안에서 산동성 곡부까지 수천리 여행을 감행했다. .../.. 치과 후배이며 노동운동하는 박장근.. 대구 노동운동가 김찬수... / 사진작가 이재갑.. 2008년 9월 1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을 답사했다. (45)
베트남의 애국자들에게 ‘호찌민’은 자랑스러운 조국 베트남과 동의어다. 북쪽 인민은 물론이고 남쪽의 인민들까지 베트남 인민 모두는 호찌민이라는 이름 속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였다. (34)
II. 선조들이 애국심을 유산으로 남긴 역사. 54
938년 응오 꾸옌(Ngô Quyền, 鳴權, 명권)은 바익당 하구에서 중국군을 섬멸시켜 중국천현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룩하는 첫발을 내딛었다. (55) -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물리친 만주의 역사 이야기가 어디에 있을까?]]
쩐 흥 다오(Trần Hưng Đạo/ 陳興道, 1228-1300)의 유언은 20세기까지 이어져 .. 전술의 원천이었다. 20세기 불가사의이자 베트남 전쟁의 상징인 쯩선(Truong son, 長山장산) 산맥의 호치민 통로와 거미줄보다 정교한 구찌터널을 건설한 작업은 베트남 역사의 본능이다. (69)
15세기 응우옌 짜이(Nguyễn Trãi, 阮廌, 완치, 1380-1442)의 정신을 이어 받은 20세기 호찌민이 혁명을 주도한 궁극적 목적은 공산주의 건설이 아니다. 호찌민이 내건 기치는 베트남 역사에서 변함없는 ‘민족의 독립과 자유’다. 호찌민의 애국적 정열은 북베트남 인민은 물론이고 자본주의에 물든 남베트남 인민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었다. (72-73)
구수정 박사가 들려준 이야기다. “.... 그래서 저[구수정]는 그 어떤 마을보다 빈 호아 마을을 자주 찾았다. 어느 날 그 마을에 들어가 보니 한 할머니가 해먹에 아이를 눕혀 놓고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여라, 너는 자라서 이 말을 기억하여라. 한국군들이 우리들을 폭탄 구덩이 넣고 다 쏘아 죽였느니라.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여라.’ 뭐 이런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다. 이 자장가는 매우 구슬펐다. 그때 나는 마을의 역사나 어머니가 겪었던 일을 구전 자장가로 들려주는 것을 목격했다.” (73-74)
1615년 호이 안에 처음으로 교회를 세웠다. .. 이 선교사는 프랑스인 알렉상드르 드 로드이다. (78)
1771년 베트남 중부 떠이 선(Tay son, 西山 서산) 마을에서 응우옌 3형제가 봉기하여 지방정권과 레 왕조를 타도하고 베트남 역사상 최대 규모의 농민운동에 성공한다. (79)
1887년에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메콩강 중부국가들을 포괄하는 식민국가 ‘인도차이나 연합’을 세우고, 이 세 나라를 자기 멋대로 ‘인도차이나’라 불렀다 1897년부터 1902년까지 총독을 지낸 폴 두메(Paul Doumer, 1857-1932, 암살)는 베트남의 행정구조와 양식을 확정했다. (86) [프랑스의 베트남 총독이 하는 짓이 일제의 조선 총독과 유사하다. -이는 로마의 총독이 하는 짓과 닮았다. 로마 총독은 식민지 수탈의 양에 의해 로마의 황제로 들어간다.]
III. 호찌민의 고향; 빈의 낌 리엔 90 [Kim Liên]
자연경치는 ‘산수화’처럼 매혹적이지만, 자연조건은 가혹하다. 여름에는 서쪽 라오스에서 불어오는 열풍에 땅이 갈라지고, 나무들은 메마른다. 평야는 땅거죽이 얇고 자양분이 부족한데다가, 우기가 되면 하천은 금방 범람하고, 태풍이 심하게 물어올 때문 바닷물이 평야를 삼켜버린다. (96) [마르케스 백년간의 고독에서 주인공 부부가 정한 터가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땅이었으나 우기는 황토 속에 있다는 표현이 있다.]
이 지역 인민들은 오래전부터 ‘응에 안(Nghệ An / 省乂安)의 고집센 물소’라는 별명을 들어왔다. (97) - [불교의 영향일까? - 숫타 니파타(Sutta Nipāta) 큰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 물에 젖지 않는 연꽃처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제3경]
44년 ‘쯩 자매[남매]’가 ... 저항했다. 722 소금제조업 호족인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梅叔鸞 매숙란, 670k-722)이 스스로 흑제라 칭하며 반기를 든 곳, 15세기 레 러이 황제가 중국 지배에 대항하여 ‘해방전쟁’을 감행한 곳도, 응에안이다. / 20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응에안은 반프랑스 저항 운동의 중심지였다. (97)
반항아 ‘응우옌 신 삭’과 유순한 아내 ‘호앙 티 로앙’ 사이의 셋째 아이인 ‘응우 옌 신 쿵’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몹시 똑똑하고 무척 다정했다. 철이 든 후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가장 원대한 꿈을 꾸었고, 눈을 감을 때 그 꿈을 기어기 이루어냈다. 채플린을 닮은 가련한 외모에 170여 가지 별명 중에서 호찌민으로 가장 유명해진, 20세기를 관통한 ‘불멸의 혁명가’이자 ‘혁명의 성자’다. (98)
식민지 체제가 으레 그렇듯, 프랑스는 베트남 재래의 행정조직과 사법제도를 개편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짓고, 길을 뚫는 등 겉으로는 베트남을 발전시키려는 듯이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통문화를 말살하고 인민을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려는 저의였다. 그때 베트남 극소수 엘리트를 제외하고, 대다수 인민들은 프랑스의 흉계를 간파하지 못했다. 프랑스는 전토의 삼자(대지, 민중, 왕)의 조화를 교묘히 파괴했다. (99) [일제의 총독이나 미제의 주둔군이나 마찬가지로 인민이 잘 모르게 개돼지 취급하는데, 제국의 마름인 우리나라 관료가 공공연하게 자국 인민을 개돼지라고 부른다.]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1867-1940)가 탓 타인에게 일본유학을 권할 때], 어떤 자료에서는, 프랑스를 추방하기 위해 일본인에 기대는 것은 ‘앞문으로 호랑이를 몰아내고 뒷문으로 이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고 한다. ‘... 일본의 원조에 의지하는 판 보이 쩌우의 의도에 모종의 함정이 있음을 감지했기 때문’이라 했다(108-109)
[누나의 말] “내가 그동안 열흘을 지내면서 동생이 식사하고 생활하는 것을 지켜봤다. 주석이면 다른 나라로 치면 대통령이고 왕인데, 비서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식사하는 것을 보니 이제 내가 돌아가도 될 것 같다. 마음의 근본을 잃지 않았으니, 내 동생이 탐관오리가 되는 일을 결코 없을 게야.” (115) .
IV. 호찌민 기념관 130
4. 1968년 초에 “조만간 미 제국주의가 B-52폭격기로 하노이를 폭격하다가 패전을 인정할 것이다. 조선에서 미 제국주의가 평양을 초토화한 일이 생각난다. 베트남에서는 미국이 반드시 진다. 그러나 미국은 오직 하노이 공중에서 진 다음에야 졌다고 인정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3) - [미국 군수산업은 자신의 소모품을 소모해야 전쟁을 끝낸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
호찌민은 카스트로, 체 게바라, 김일성 같은 이삼십 대에 성공한 젊은 혁명가가 아니었다. 마오쩌뚱처럼 외국에 나가본 적이 없는 혁명가도 아니었다. 호찌민이 미래에 던진 말은 선지자적 예언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으로 체득한통계로 확언했다. 30년 동안 전 세계를 누비며 내공을 축적한 다음, 레닌이 죽었을 때의 나이가 되었을 때 조국의 혁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철저히 ‘준비한 혁명가’다. (134)
“...베트남 사람들은 지구는 사각형이고 하늘은 둥글다고 생각했습니다. ..” 호찌민 기념관 해설자 ..(136) - [세계가 공통적으로 .. 고대에는 천원지방(天圓地方)]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이 비엣족만의 단일 민족국가가 아니라 다민족 국가임을 항상 강조한다. 그래서 소수민족의 관습과 자치권을 존중하고 있는 모범적인 나라로 꼽힌다. (139) [자연 속에서 다양체의 인정, 그리고 그 속에 개인의 자유로운 활동,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가 바라는 길이 아니었던가. ]
호찌민 길은 아크릴 벽면을 이용해 미로처럼 만들었다. 아크릴 벽 양면에 19세기와 20세기의 주요 인물과 문명의 상징물의 사진, 그리고 베트남 역사적 상황의 사진을 전시하한다. 왼편에는 맑스, 엥겔스, 레닌 사진과 오른편에는 아인슈타인과 뀌리부인과 같은 과학자, 채플린과 같은 예술인, 자동차와 비행기 같은 발명품 사진을 걸었다. (141)
안내원 해설.. “... 호찌민 주석은 혁명을 주도하는 당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24년 소련을 떠나 당을 창립하기 위해 중국 광저우에 갔습니다. .. 여기서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창립했습니다. 그리고 간부를 양성했습니다. 이건 호찌민 주석이 쓴 베트남 혁명의 의미를 담은 ‘혁명의 길’이라는 책입니다. ...” (151)
[1919년 6월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을 위해(1월에 시작되었다)] 윌슨은 의 ‘14개 항’의 선동적인 ‘평화강령을 들고 나왔는데, 그것은 미국의 침략정책을 위장하는데 기여했다. .. (155)
서구의 자본주의는 약육강식의 체제였다. 반면 사회주의는 전체 인민 공동의 노력, 소박한 생활, 부와 기회의 평등을 강조했다. 조국을 구하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뿐이라는 게 응우옌 아이꾸옥(院愛國, 원애국)[호찌민]의 신념이었다. (156) - [(상해) 임시정부는 4월 11일 김규식을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파리위원'의 정위원으로, 이관용을 부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오스트리아 공산당 운동가] 모스크바에서 만났던 루스 피셔(Ruth Fischer, 1895-1961)는 .. “.. 아이 꾸옥은 이론 투쟁보다 실제 활동을 통하여 배우는 경험주의자였는데, 이 때문에 동료의 존경을 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마오쩌뚱이 등장하지 앟은 당시의 아시아에서 그만큼 중요한 역할 완수한 혁명가는 없었다.” (158)
박보 동굴 .. 여기를 혁명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166)
“이 몸은 비록
옥중에 갇혀 있지만
정신은 결코
감옥에 구속되지 않네
큰일을 하려면
정신을 더욱 크게 가져야지
身體在獄中, 精神在獄外. 欲成大事業, 精神更要大” (174)
이 시는 옥중일기의 책머리(卷頭) 시다. 미국이 만든 베트남 감옥의 벽에 베트남 애국자들이 가장 많이 남긴 낙서이도 하다.
쌀을 찧어질 때
몹시도 아프겠지만
다 찧어진 뒤엔
솜처럼 새하얗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와 같은 것
고난은 너를 연마하여
보석이 되게 한다. (175) [한문 원본이 있을 것 같은데, 찾을 수 없다. - 순수전승일 수 있다.]
호찌민 주석은 10년의 이익을 위하여 나무를 심어야 하고 100년의 이익을 위하여 사람을 심어야 하다고 했습니다. (185)
V. 까오 방의 박 보 동굴 186 [까오방 시(Thành phố Cao Bằng/城舖高平) Pac Bo]
1960년 4월 레닌 탄생 90주년, 호찌민은 소련의 평론지 동방문제에 “레닌주의자가 되기까지” 논문을 기고했다. (199)
“... 나의 확고한 주장은 ‘동지여, 만약 식민주의를 배척하지 않고, 피압박 민족을 옹호하지 않는다면 당신들이 지향하는 혁명이단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 (201) ”
“이 마을이 박 보 동네이고 이 동굴을 곡 보 동굴이라고 합니다. 박은 백을 뜻하고 보는 온천을 뜻합니다. 백 개의 온천, 다시 말해 온천이 많다는 동네입니다. (204)
호 아저씨는 이때 항전에 대비해서 간부를 양성하고 훈련했다. ‘소비에트공산당사’, ‘손자병법’을 철저히 공부하고 레닌 개울 옆 천연석 탁자에서「게릴라전술」, 「중국에서 전개한 게릴라전의 경험」같은 논문을 썼다. (207)
이에 호찌민은 동료에게 임무를 수행할 때 항상 비밀을 지켜야 한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비밀이란 3물(勿)을 뜻하는데,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아무것도 듣지 말 것, 아무것도 보지 말 것,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늘 다니던 길도 아주 조심했다. 그러나 ‘대중에게는 비밀이 불가능하다. 대중은 우리를 지켜주고 정보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208)
1960년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중국에서 전투를 지원해 주겠다고 제의한 적이 있다. 호 아저씨는 “돈은 갚을 수 있지만 피는 갚을 수 없다”며 정중히 사양하였다. 다급하다고 도움을 받는 것은 곧 종속을 자초하는 일임을 호 아저씨는 숙지했으리라. (213)
호 아저씨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동료들과 똑같이 곤궁한 생활을 감수했다. 동료들이 지치거나 흥분하면, “인내, 냉정, 경계, 이것이 혁명가가 항상 지녀야할 생활 철학이다.”고 조언하였다. (215)
1943년 9월에, 마침내 고난의 역정에 종지부를 찍고 감옥문을 나섰다. ‘호찌민의 추억’을 쓴 호앙 꾸앙 빈(s.d.)은 감옥에서 나온 호찌민을 만나러 갔을 때... (220)
호치민이 [중국에서] 감옥살이 하던 1943년 무렵에, 스탈린그라드를 포함한 각 전선에서 소련군이 대승하자, 제2차 세계 대전은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파시스트 운명이 끝나려 하자, 이들에게 고통 받아 온 민족들에게는 봉기의 호기가 다가왔다. 1943년 2월 호찌민이 없는 베트민은 일제히 봉기했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222) [호찌민은 중국 국민당에 체포되어 18개월 감옥에서 지내다가 1943년 9월 10일에 석방되었다.]
잡은 석방된 호찌민을 만나러 박 보로 갔다. 사업은 힘을 얻었지만, 정규군이 아직 없어서 무장투쟁 역량은 미미했다. 호찌민은 잡이 ‘사물을 전체적[총체적]으로 종합해보지 못하고 단순하게 지엽적으로만 본다’라고 꾸짖고 ... “혁명을 평화적으로 전개하는 단계는 이미 지나갔다. 그러나 전 인민이 총봉기할 때는 아직 아니다.” .. 그리고 웅우옌 잡의 귀에 대고 신중하라고 당부했다. “극비로, 항상 극비를 명심하라. 공격은 반드시 적의 허점을 찌르고, 적이 반격해 오기 전에 후퇴하며…” (223) [마오의 게릴라 전법: 敵進我退(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적이 후퇴하면 추격)]
불과 34명으로 시작한 게릴라 부대가 30년 동안 .. 불과 3개월 뒤인 45년 3월에는 각 성마다 대규모 베트민 부대를 창설하였으며 주민 10만명이 해방운동에 참여했다. (224)
장차 ‘1946년 대구 10월 봉기’, ‘1948년 여순 봉기’, ‘4.3제주 항쟁’,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가 독립 기념관에서 정당한 대접을 받을 때 감동의 물결이 도도히 흐를 것이다. (227-228)
VI. 하노이 바 딘 광장 232
원주 110: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1911-2013)의 Unforgettable Days, 1975, 역사가들 다수가 호찌민이 미국독립선언문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알아왔지만, .. 그러나 “all men are created equal”이 “.. all people..”로 되어 있다. (238) - [아마도 호찌민은 인민 속에서 인민이 주체가 되는 세상을 바랐을 것이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베이징의 천안문처럼 하노이의 상징은 바 딘 광장이다. 이 바 딘 광장의 상징은 호찌민의 영묘다. (241) [호찌민은 영묘를 만들지 말라고 했다는데.. , 스탈린이 문제인 것 같다. 레닌을 방부처리 했으니... 숭배의식이 남아있는 것은 정교의 영향일 것이고... 마오의 영묘도 있는데 ... ]
평생 투쟁을 함께한 미망인 크룹스카야 그런 식으로 레닌을 찬양하는 일에 반대하여 이렇게 충고했다. “레닌 기념관을 건립하지 마십시오.… 레닌은 평생토록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블라디미르 일리치의 이름을 기리고 싶다면, 탁아소, 유치원, 주택, 학교, 도서관, 보건소, 병원, 장애인 복지관을 건립하시고, 무엇보다 고인의 유지를 실천에 옮기십시오.” (242)
호치민이 남긴 위대한 유산은 승리한 혁명뿐만 아니라,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검소한 생활 습관과 높은 도덕성이다. 근검, 간소, 겸손에 욕심 없는 무소유 그 자체다. - (253)
VII. 베트남 군사 역사 박물관 254
역사박물관은 주로 이런 모습이다. 베트남에는 기나긴 전쟁으로 온전한 유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토가 참혹하게 황폐했을지라도 인간의 피에서 피로 전하는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베트남 박물관은 기억을 담은 박물관이다. (263)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 1911-2013)은 1945년에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내무부장관, 46년에 국방장관, 47년에 베트남 인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호찌민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졸업장이나 간판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능력일 뿐이다. 우리 베트남 인민군대는 싸움에서 소장이기면 소장을 주고 대장을 이기면 대장을 준다.” (269)
다음은 2005년 3월 4일 구수정 선생이 베트남 종전 30주년을 맞아 한겨레 21전문 위원 자격으로 하노이 후앙 지에우 거리의 잡 장군 자택을 찾아가 대담한 내용이다. “... 역사는 결코 반복되지 않아. 역사는 쉼 없이 흐르는 거대한 물줄기 같은 거야. 그러나 인간의 잘못은 반복될 수 있지.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하지만 종국에는 역사의 단죄를 받게 될 거야. 그것이 역사의 묵연한 법칙이지. ...” (270-271)
1973년 1월 23일 파리에서 미국은 평화협정을 서명했고, 베트남에서 철군을 단행했다. 이 공로로 키신저와 레둑토(黎德壽)는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로 지명되었지만 “베트남에는 아직 진정한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레 둑 토는 수상을 거부했다. (271)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해방(Liberation of Saigon)이 진정한 독립이며 평화였다.]
구수정 선생은 호찌민 시 전쟁 박물관에서 베트남의 독립 선언문을 독특하게 해설했다. ..“.. 제가 겪었던 베트남 사람들의 특징을 두 가지로 들자면 첫째 위트가 있고 둘째 낙관적이라는 것이다. ...”(280)
베트남인들은 자평하기를 “우리 민족은 자존심이 강하다. 농민들은 체면을 중시한다. 순박하고 영리하다. 성격이 온순하고 융통성이 있으며, 농담을 즐긴다. 그리고 흉내를 잘 낸다.”고 했다. (280)
바티칸이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지배력이 약해질 경우 가톨릭교세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 미국에 프랑스를 도우라고 압력을 가하자, 미국은 바티칸의 말을 잘 알아듣고 행동했다. // 1945년 10월 15일 생뜨니(Jean Sainteny, 1907-1978)는 호찌민과 협상을 진행했는데 부족한 평화의 역사(Histoire d'une paix manquée : Indochine, 1945-1947)(초판 1953)에서... “내가 호찌민을 처음 만났을 때, 그 금욕고행하는 인사는 지성이 넘치고 섬세하며, 몹시 치밀한 지략을 가진 최고수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높은 지성과 풍부한 교양, 비범한 실천력과 청렴결백한 모습은 인민의 절대적 존경과 신뢰를 얻은 확실한 조건인 듯했다. 언사와 행위로 볼 때 매사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가히 인도차이나의 간디라고 할만 했다.” (294)
“나는 해마다 빅톨 위고와 미슐레의 작품을 반복하여 읽지만, 그 속에 나오는 인물은 확실히 당신들 나라의 소시만 그 자체의 모습으로 우리 베트남 인민과 불가사의할 정도로 비슷합니다.” (297) [문학자 위고와 역사가 미슐레에게는 인민의 이야기가 있다.]
후인 툭 캉이 호찌민에게 “주석님이 안 계신 이 나라를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안의 불변으로 만변하는 세계에 대응하라(이불변응만변 以不變應萬變)” (302)
VIII. 디엔 비엔 푸 332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
1954년 이 지역에서 북베트남과 프랑스가 치열하게 겨론 전쟁을 세계 전쟁사는 역사의 흐름을 바꾼 약소국가의 희귀하고도 위대한 승리로 기록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침략자 프랑스가 아시아의 군대 베트남군에 굴복한 것은 3백년에 이르는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서 최초의 사건이다. (336)
“모든 성취는 일시적이니 끊임없이 추구하라.”라는 부타의 마지막 말씀처럼 호찌민은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않고 최종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자고 호소했다. (370)
디엔 비엔 푸 전투가 개시하기 직전인 1953년 9월 25일 ‘정치 교서’ ... “혁명은 먼저 가슴으로 해야 한다. .. 먼저 자신을 갈고 닦아, 조직 내부를 교화하고 끝으로 대중을 계몽해야 한다. / 호찌민” (390-391) [큰수레를 같이 끌고 가야 한다. 호찌민의 인민과 더불어는 유교보다 불교 영향이 더 큰 것 같다.]
* 끝머리에 400
한반도만이 지구촌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인 현실을 우리는 정직하게 부끄러워하자. (403, 마지막 문장) (7:21. 55TMH)
(10:35, 55TMI) (11:14, 55TM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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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송필경(1955-), 「호치민: 반제국주의 투쟁의 불꽃」, 현대사상(호치민), 제18호, 2017. 07. 현대사상연구 5-. (P. 172.) 왜 전태일인가 사람 전태일. 2020, 왜 이재명인가 기본소득과 억강부약.
1955k 함종호(사회운동가), 「호치민 혁명과 아시아적 특수성」, 현대사상(호치민), 제18호 2017. 07. 현대사상연구소. pp. 89-112(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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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쯩짝(徵側, 징측)은 여동생 쯩니(徵貳, 징이)와 함께 중국에 항쟁하였다. 42년 중국의 마위안 장군에게 패했다. 44년까지 저항했다. - 항쟁에서 여성 장군이 75명이라 한다.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Ngô Quyền, 鳴權, 명권)이 오대십국의 하나인 남한(南漢)과 싸워 이겨 독립하였다.
1019 리트엉끼엣(李常傑, 이상걸, Lý Thường Kiệt, 1019-105) 베트남 리 왕조의 군인, 환관. 중국 송나라 군대와 싸워 홍강에서 대승하였다.
1228년 말 원의 군대가 다시 쳐들어오자 쩐 흥 다오(Trần Hưng Đạo / 陳興道, 1228-1300)는 군사를 탕롱에서 철수시키고 원의 보급선을 격파시킨 다음 바익당강 바닥에 말뚝을 박고 썰물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 원나라의 함선을 궤멸(바익 당 전투) / 쩐흥다오가 남긴 말 “산속에 길을 뚫어 오래 쓸 기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1259 쩐 빈 트룽(Trần Bình Trọng (chữ Hán: 陳平仲, 진평중, 1259–1285) 몽골 침입에 항전하다 포로되어 참수됨
1380 응우옌짜이(Nguyễn Trãi, 阮廌, 완치, 1380-1442) 베트남 레 왕조의 건국공신이다. 학자로도 이름이 높으며, 몇 차례 명나라를 왕래하였다. 대서사시 「빈 응오 다이 까오, 平鳴大誥, 평명대고」
1427 레 러이(Le Loi: 黎利, 여리) 명나라 10만 대군을 물리쳤다.
1847 판딘풍(Phan Đình Phùn / 潘廷逢 반정봉, 1847-1896) 베트남에서 프랑스 식민지군에 저항하는 봉기군을 이끈 베트남 혁명가. 그는 19세기 반프랑스 군사 운동에 관여했던 유교적 조정 학사들 중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었으며, 20세기 민족주의자들은 사후에 그를 국가 영웅으로 지목했다.
1867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1867-1940) 호는 사오남(Sào Nam / 巢南, 소남)혁명적이지만 군주제 옹호. 일본 유학, 유신제 도입 그러다가 베트남 광복회로.
1872 판 쭈 찐 1872-1926 진보주의자는 아니지만 군주제 폐지를 생각했다.
1901 응오딘 지엠(Ngô Ðình Diệm / 吳廷琰 오정염, 1901-1963) 카톨릭신자, 반공주의자, 남베트남의 정치인. 쿠데타로 정권잡음, 1954년 베트남 초대 수상, 1956년 초대 대통령. [1963년 11월 CIA가 살해] 지엠 사후 8번 꾸데타, 그리고 티우 등장
1906 팜반동(Phạm Văn Đồng, 1906-2000) 베트남의 정치인이자 반프랑스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사상가로, 호찌민의 동료.
1907 쯔엉찐(Trường Chinh, 長征, 장정, 1907-1988) 베트남 독립운동가, 공산주의 정치인, 사회주의 경제 이론가이다. 북베트남 노동자당 서기장(1941년-1956년), 북베트남 부총리, 북베트남 국민의회 주석,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석,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1986년) 등의 요직을 지냈다.
1911 보 응우옌 잡(Võ Nguyên Giáp, 武元甲, 무원갑, 1911-2013) 반(反)식민지 성리학자 집안, 베트남 장군, 정치가.Unforgettable Days, 1975
1911 레둑토(Lê Đức Thọ, 黎德壽 여덕수, 1911-1990) 베트남 정치가, 독립운동가로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립 초기 일원이다. 본명은 판딘카이(Phan Đình Khải)이다. 1956년에서 1973년까지, 1976년에서 1980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서 베트남 공산당 중앙집행반 중앙조직부장을 지냈다. 1973년 파리에서 키신저와 평화협정의 베트남 대표였다.
1934 보 티 사우(1934-1952) 16세에 반미 활동한 여성, 18세 사형선고.
1940 응우옌반쪼이(Nguyễn Văn Trỗi/阮文追, 1940-1964)[스물넷]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소속으로 1964년 5월, 당시 베트남 공화국을 방문한 미국의 국방부 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를 살해하려 한 혐의로 체포된 뒤 총살. 통일된 베트남에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김종석(金鍾碩, 1918-1949), 남로당원, 여순 봉기의 연루자로 총살]
1946 비엣(1946-): 1965년 호찌민 장학생, 조선으로 유학갔다. 함흥대학교 전기화학 공학부,
1946 탄타오(Thanh Thao, 1946-) 베트남 시인, 1978년 『초원을 건너는 발자국』이란 시로 베트남문인 최고상, 1996년 장편 서사시 ‘미 라이의 아이들’이 실린 시집 『태양의 파도』로 두 번째 베트남 문인 최고상을 받았다.
1948 팜티엔 반(1948-) 주한국 베트남대사, 김일성대학 조선고전문학 전공.
1949 반레(1949-2020) 베트남의 전설적 게릴라 출신 작가 겸 영화감독인 반레가 2020 9월 6일 오후 10시45분(한국시각) 호치민에서 별세했다. 향년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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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 이탁오(李卓吾: 1527-1602)[일흔다섯] 중국 명나라의 양명좌파 사상가. “잘나신 나”라는 뜻의 “탁오”는 자이고, 휘는 이지(李贄)다. 초명은 임재지(林載贄)였으나 이후에 종가의 성(姓)을 따라 이지로 개명했다. 유학자이면서 이슬람교도였다. 감옥에서 자살.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년)의 심학계열이다.
1835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복택유길, Fukuzawa Yukichi 1835-1901) 하급무사 출신, 일본 메이지 시대[明治時代]의 계몽사상가․교육자․출판가. - 게이오(慶應(義塾)大學) 대학을 세우다. 히로부미의 정신적 리더, 조선과 만주를 복속시키자는 대륙정벌론자.
1866 쑨원(孫文 손문, Sūn Wén, , 1866-1925) 중국의 외과 의사, 정치가. 신해혁명(1911년)을 이끈 혁명가, 중국국민당의 창립자. 호(號) 이셴(逸仙, 일선). 별명 중산(中山, 중산).
1887 장제스(蔣介石, Jiǎng Jièshí, 장개석, 1887-1975) 중화민국 국민정부 정치가.
1893 마오쩌둥(毛泽东, 모택동, 1893-1976) 중화인민공화국 혁명가, 정치인. 초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을 지냈다. 자는 룬즈(潤之 윤지), 융즈(咏芝 영지), 호는 쯔런(子任 자임).
1895 루한(卢汉; 논한, Lou Hahn; 1895-1974)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쪽에서 중요한 군사 및 정치 직책을 역임한 이족(李族)의 중국 장군. 1945년 8월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고, 루한은 60군단, 93군단, 관린징 9군단(총 20만명)을 이끌고 베트남 하노이로 갔다. 9월 28일, 루한은 하노이 본부(전 베트남 주재 프랑스 총독부)에서 연합국을 대표하여 일본 38군 사령관 츠치하시 유이쓰의 항복을 받아들이는 의식을 주재했다.
1896 장파쿠이(張發奎, 장발규, 1896-1980), 字向華,原名发葵,又名逸斌,廣東省南雄府始興縣清化鄉矮嶺村(今韶關市始興縣隘子鎮彩嶺村)客家人,中華民國陸軍二級上將,前陸軍總司令,國民革命軍北伐時期名將,中國共產黨在南昌起义的軍隊為其部下。
1898 저우언라이(周恩来, 주은래, Zhōu Ēnlái, 1898-1976)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주의 혁명가, 중국 공산당의 정치인, 마오쩌둥 시기의 중화인민공화국의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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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6 우드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28대 대통령(1913-1921). 독실한 장로교도, 역사가, 정치학자. [가짜]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개혁적인 민주당원으로서 윌슨은 1910년 뉴저지주 지사로, 1912년 대통령으로서 선출되었다.
1881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ürk, 1881-1938) 오스만 제국의 육군 장교, 혁명가, 작가이며 튀르키예 공화국의 건국자, 초대 대통령(아타튀르크는 "튀르크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1894 그레이시(Douglas Gracey, 1894-1964) 영국군 사령관, 45년 9월 12일 베트남 입성
1916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 1916-2009) 미국의 기업가, 제8대 국방부장관. 베트남 전쟁을 기획했다. 1968년부터 1981년까지 세계은행의 총재를 역임하였다. [남베트남의 고딘디엠 대통령이 1963년 10월 암살당하고 케네디도 같은 해 11월 암살되었다. 린든 B. 존슨 대통령 재임 후 이듬해 발생한 통킹 만 사건 이후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개입은 더욱 확대되었으며 맥나마라는 북베트남의 해군 시설에 보복 폭격을 지시하였고 미 의회 또한 북베트남 방위 공격을 승인했다.]
1923 키신저(Henry Alfred Kissinger, 1923-)는 독일에서 태어난 미국의 유대계 미국인 정치인이자 외교관이다.
Vietnam: The Ten Thousand Day War(카나다 CBS 1980-1981; 영국 Ch 4, 1984-1985). 카나다 기자인 맥클리어(Michael Maclear, 1929–2018)의 기록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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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1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1591-1660) 프랑스 아비뇽 출신, 예수회 선교사. 언어학자. 1624년 베트남 선교에 주력했으며, 1645년 추방됨. 현재 베트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로마자 기반의 베트남어의 표기체계인 《꾸옥응으》(Quốc Ngữ, 國語)를 고안한 인물이다.
1741 베엔(Pierre Pigneau de Behaine, Bá Đa Lộc), 1741-1799) 파리외방 선교회 소속, 프랑스 선교 신부. 주교.
1798 쥘 미슐레(Jules Michelet, 1798-1874) 프랑스의 역사학자.
1802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1885) 프랑스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노트르담의 꼽추(Notre-Dame de Paris, 1831)》,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1835 퓌지니에(Paul-François Puginier, 1835-1892) 하노이 대주교.
1857 뽈 두메(Joseph Athanase Doumer, dit Paul Doumer, 1857-1932, 암살) 프랑스 국가인물, 1897-1902 인도차이나 총독, 공화국 대통령(1931-1932). [암살자는 러시아 의사로서 고르굴로프(Paul Gorgulov, 1895-1932, 기요틴)인데, 인민전선 쪽은 아닌 것 같고, 프랑스가 볼세비키의 러시아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는 데, 트로츠키주의자도 아닌 것 같다. 러시아 나찌파의 조종을 받았다고 검사는 가정했다. 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동등하다고 믿고 있다.]
1868 모라(Charles Maurras, 1868-1952) 프랑스 기자 수필가, 정치가 시인, 아카데미 회원. “L'Action française” 편집장, 카톨릭극우파, 2차대전 후 전범.
1869 카생(Marcel Cachin, 1869-1958) 프랑스 정치가,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위마니테 편집장(1919-1958)
1869 크룹스카야(Nadezhda Krupskaya, 1869-1939) 러시아 교육학자, 레닌의 부인. 혁명가이자 교육학자, 정치인.
1870 레닌(Vladimir Ilitch Oulianov, dit 1901년부터 Lénine 1870-1924)[쉰넷] 공산주의 혁명가, 러시아 정치이론가,
1872 사로(Albert Sarraut, 1872-1962) 급진사회주의자. 신민지부 프랑스 장관을 지냄
1876 롱게(Jean Longuet, 1876-1938) 프랑스 사회주의 정치가. 맑스의 외손자(제니 맑스의 아들). Charles Longuet (1839-1903) +Jenny Marx(1844-1883), 국제노동자사회당(SFIO) /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는 로라 맑스(1845-1911)와 결혼]
1883 가스통 몽무소(Gaston René Léon Monmousseau, 1883-1960) 프랑스 조합주의자, 소목공장이, 정치가. 공산당원.
1883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예술가, 시인, 작가. 당시 오토만 시리아의 레바논의 브샤리 마을 출생. 예언자(Le Prophète, 1923)
1885 기트리(Alexandre Guitry, dit Sacha Guitry, 1885-1957) 프랑스 연극작가, 배우, 연출가, 영화제작자. 독일점령 시 활동에 대해 논쟁거리였다.
1889 다르장리외(Georges Thierry d'Argenlieu1, 1889-1964) 카톨릭 카르멜 수도원 신부였다. 프랑스 해군 제독. 1945년 10월 31일 사이공 입성 / 사촌 1892 다르장리외(Philippe d'Argenlieu, 1892-1977) 프랑스 정치가
1890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 카톨릭, 프랑스 군인, 대독 자유프랑스 힘(Forces françaises libres, FFL) 지도자, 5공화국 건설(1958)과 5공화국 대통령(1959–1969)
1892 바이앙 꾸뛰리에(Paul Couturier, 익명 Paul Vaillant-Couturier, 1892-1937) 프랑스 작가, 기자, 정치가, 프랑스 공산당 창설 회원.
1895 루스 피셔(Ruth Fischer, 1895-1961) 유대가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공산주의자 여성 운동가. 1918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의 공동창립자.
1898 나바르(Henri Eugène Navarre, 1898-1983) 프랑스 군인, 인도차이나 전쟁때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1899 마노니(Dominique-Octave Mannoni, 1899-1989) 프랑스 인종학자,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 Psychologie de la colonisation, Seuil, 1950, rééd. 2022 ; réédité sous le titre Prospero et Caliban, Éditions Universitaires, 1984, et Le racisme revisité, Denoël, 1997. - 이 저술이 흥미롭네, 판본에 따라서 제목을 바꾸었는데 1984년 판본은 셰익스피어의 The Tempest의 주인공(Prospero)과 하인(Caliba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노니는 안티프로이트인데, – 소개에서 마노니가 유대인이란 설명은 없다. 그런데 그의 벨기에 출신 부인(Maud Mannoni, 1923-1998)은 어린이 정신분석가인데, 그녀의 부친(네델란드인)이 세일론(실론)의 영사관이었을 때 어린 시절(6살까지)을 보냈다.
1899 조르주 비도(Georges-Augustin Bidault, 1899-1983) 프랑스 정치인, 레지스탕스, 전후 프랑스의 총리와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식민지 독립 (알제리, 인도차이나) 에 반대하는 극우 조직 비밀군사조직 (Organisation de l'armée secrète, OAS) 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00 토레즈(Maurice Thorez, 1900-1964) 프랑스 정치인. 프랑스 공산당(PCF)의 지도자(1930-1964).
1902 르클레르(Philippe Leclerc de Hauteclocque, 1902–1947)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의 장군, 1945년 프랑스 극동해외원정군의 사령관.
1902 카스트리(Christian de La Croix de Castries, 1902-1991) 프랑스 장군, 1954년 인도차이나 전쟁(디엔 비엔 푸Dien Bien Phu 전투)[당시 대령]에서 베트민에게 패배하여 항복.
1906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독일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이며, 반 나치운동가. 사형당했다.
1907 쌩뜨니(Jean Sainteny, né Jean Roger, 1907-1978) 프랑스 정치적 인물, Histoire d'une paix manquée : Indochine, 1945-1947(1953, 1967년 증보판), Face A Hô Chi Minh, 1970 ,
1920 보리스 비앙(Boris Vian, 1920-1959) 프랑스의 작가, 시인, 음악가, 가수, 번역가, 비평가, 배우, 발명가, 공학자.
1921 라꾸뛰르(Jean Lacouture, 1921-2015) 프랑스 기자, 작가, 좌파.
1926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 튀빙엔 대학교 신학대학 명예 교수로 있으며 에베하르드 융엘,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와 더불어 20세기 후반 대표적인 독일 개신교 조직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서남동, 안병무의 ‘민중신학’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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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 본관은 나주,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당호는 여유당(與猶堂).,
1912 성철(性徹, 1912-1993) 대한민국의 승려. 속명(俗名) 이영주(李英柱), 아호는 퇴옹(退翁). 해인사 경내에 성철 부도 공원 조성에 제자들 사이의 논란이 있었다. / 75대 경허조사(1849-1912), 76대 만공조사(1871-1946), 77대 전강조사(1898-1975)
1929 이영희(李泳禧, 1929-2010) 평북 운산군, 대한민국의 언론인, 교수, 사회운동가.
1941 신영복(申榮福, 1941-2016) 경제학자, 작가, 대학교수.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1946 김남주(金南柱, 1946-1994)시인, 시민·사회 운동가이다. 유신을 반대하는 언론인 「함성」(뒤에「고발」로 개칭)을 발간하였고 인혁당 사건,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되었으며, 민청학련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고초를 겪었다.
1955 문창옥(1955-) 연세대 교수,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과 명제이론, 연세대, 1994, 오영환.> [연세대: 박동환(朴東煥, 1936-), 김상봉(金相奉, 1960-)]
1955 김태일(金台鎰, 1955-) 영남대학교 정치학과, <한국의 농민운동과 국가, 1964-1990, 고려대, 1994. 한배호>
1958 김규종(金圭鍾, 1958-) 경북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1920-30년대 소련 보드빌, 고려대, 2009, 최선.>
1961 방현석(1961-), 경남 울산,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인천지역에서 노동운동, 2008년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하노이에 별이 뜨다: 소설가 방현석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여행(방현석, 해냄, 2002)
1961 최병욱(1961-) 서울대 동양사학과, 인하대 사학과 교수. 호주국립대학에서 베트남사 연구로 박사학위. 베트남 근현대사(창비, 2008)
1962 장정일(蔣正一, 1962-)은 대한민국의 문인, 소설가, 수필가, 작가이다. 1997년에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필화 사건을 겪기도 했다.
1965 구수정(1965k-) 1988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소련 해체를 계기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사회주의 국가에 직접 가서 확인해보자는 생각에 베트남 유학을 결심했다고 한다. 1996년부터 베트남 호치민대 역사학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으나 1999년에 학업을 중단하였다고 이진순과의 대화에서 밝힌 바 있다.
1976 신형철(申亨澈, 1976-) 문학평론가. 대구광역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2007~)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2014~)로 재직 중이다. 현 서울대 영어영문학과?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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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의 폭풍(The Tempest)
1. 프로스페로와 두 하인 에어리얼 그리고 칼리반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 주었고,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
(You taught me language: and my profit on’t
Is I Know how to curse.)
* 영화 인도차이나(Indochine 1992) 바르그니에(Régis Wargnier, 1948-) 감독 작품. 드뇌프(Catherine Deneuve, 1943-), 페레(Vincent Perez, 1964-), 린 담판(Linh Dan Pham, 1974-). 이 영화 미테랑 정권이 베트남(하노이)정권에 보낸 우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런데 명칭이 그렇지 않구나. (55TMD)
(16:15, 55TMI) (16:29, 55TMJ)
**참조1. (저자가 원문을 보내 주었다)
聞舂米聲(문용미성) : 쌀찧는 소리를 들으며,
米被舂時很苦痛 旣舂之後白如棉 人生在世也這樣 困難是你玉成天
미피용시흔고통 기용지후백여면 인생재세야저양 곤난시니옥성천
쌀 찧는 소리를 들으며
쌀을 찧어질 때 몹시도 아프겠지만
다 찧어진 뒤엔 솜처럼 새하얗다
사람의 세상살이도 이와 같은 것
고난은 너를 연마하여 보석이 되게 한다.
최초 번역의 출전은 은박지에 새긴 사랑(김남주 번역시집 1)( 푸른숲, 1995)이라 한다.
1주년 추모 시집으로, 제1권에는 호치민, 네루다, 푸슈킨, 릴레에프, 오도예프스키, 로르카 등의 시와 함께 소개되어 있다.
제2권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에는 하이네, 브레히트, 아라공, 마야코프스키 등의 시가 있다. (55UKG).
* 1권.
1795 릴레예프(Kondratii Fyodorovich Ryleev. 1795-1826)[서른하나] 러시아의 시인. 귀족 집안 출신. 1818년까지 군무에 종사하였으나, 공화주의자, 1823년 데카브리스트(Dekabrist: 12월당원)의 북부회(北部會)에 가맹하여 급진적 동지들과 혁명적 선전활동을 하였다. 1825년 12월 14일에 일어난 봉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해 7월 교수형 당함.
1799 알렉산드르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서른여덟]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 소설가. 외조부는 표트르 대제를 섬긴 아비시니아(에티오피아) 흑인 출신 귀족이었다. 1812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고무된 러시아 민족의 애국주의 사상, 민족적 자각과 민족적 기운이 고조되는 역사적 시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러시아 국민 사상과 감정을 훌륭히 표현한 러시아 국민 문학의 창시자, 러시아 문학어의 창시자.
1803 블라지미르 오도예프스키(Bladimir Odoevskij, Odoyevsky, 1803-1869) 러시아 시인, 모스크바 대학의 교수로서 쉘링주의 철학자였던 다브이도프와 파블로프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큐헬베케르와 함께 ‘지혜를 사랑하는 모임’의 동인지 므네모시네발행. 그는 절대왕정 지지자이면서도 농노제 폐지, 공개재판제도, 감옥개혁, 계급평등을 위해 앞장섰다.
1890 호찌민(胡志明, 호지명, 1890-1969) 조국을 구하고 민족을 해방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뿐이라는 게 응우옌 아이꾸옥(院愛國, 원애국)[호찌민]의 신념이다.
1898 로르카(Federico García Lorca, 1898-1936)[서른여덟] 스페인의 시인, 극작가. 스페인 내전 때, 프랑코주의 경찰에 의해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1904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의 민중시인, 사회주의 정치가. 본명은 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Ricardo Eliécer Neftalí Reyes Basoalto). 칠레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
* 2권.
1797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 유대계 독일의 시인이자 작가, 기자, 문학 평론가.
1893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Vladimir Mayakovskii. 1893-1930) 소련의 시인, 극작가, 배우이다. 볼셰비키 혁명 운동에 가담, 2년간에 세 번이나 체포되었다. 그는 일상어의 교묘한 구사와 거친 유머의 사용이 혁명적이었다. 1930년 4월 권총 자살 직전에 쓴 유고에는 "사랑하는 작은 배는 세속에 충돌했다"고 씌어 있었다.
1897 아라공(Louis Aragon, 1897-1982) 프랑스 소설가, 기자. 1930년대 소비에트 옹호자.
1898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 독일의 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낯설게 하기라는 개념을 연극 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55UKG)
*수정 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