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파/ 베짜는 처녀 고마부작사 전수린작곡
이 노래를 부른 이은파는 6.25 동란때 행방불명됨
권번[券番]출신 妓生 列傳
권번[券 番]
조선시대 기생을 총괄하던 기생청 또는 교방[敎坊]청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권번[券番]은
검번[ 檢 番] 또는 권반[券 반>班]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조선말 을사조약으로 나라에서 관리를 했던 교방이 없어지면서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자연스럽게 생겨났으며
교방에서 관장하던 전통 예술의 전승 통로 역활을 하게 되었다.
권번의 학습은 '교양학습' '일본어학습' '기예학습'을 주로 받았다.
교양학습'은 처음에 걸음걸이로부터 시작하여 인사하는 법, 앉는 법, 말하는 법, 옷 입는 법 등 기초적인 예의 범절에 대해 배우는 필수과목이었다.
기예학습'은 악(樂), 무(舞), 기(器)로 나누어 몇명씩 조별로 나누어 학습을 했으며
소리는 시조, 단가, 진양조, 판소리의 단계를 배우고
판소리 단계에 와서는 개별적으로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만들어진 기생조합은 서울의 광교조합[廣橋組合]이었다.
광교조합은 남편이 있는 기생 즉 유부기[有夫妓]들로 조직된 조합이였는데
뒤에 한성권번[漢城券番]으로 개칭을 하였다.
이들 기생조합이 '권번[券番]'이라고 하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뀐 것은 1914년 때였다.
당시 서울에는 한성권번[漢城券番] ·대동권번[大東券番] ·한남권번[漢南券番] ·
조선권번[ 朝鮮券番],평양에는 기성권번[箕城券番]등이 있었고,
그 밖에 부산 ·대구 ·광주 ·남원 ·개성 ·함흥 ·진주 등에도 각각 권번이 있었다 .
1. 현매홍, 2. 김옥엽
평양 기성권번 출신의 현매홍과 김옥엽은 서울 상경 후 한성권번과 조선권번에 적을 두며 많은 활동을 했다. 현매홍은 가곡, 가사, 시조에 능통했으며
김옥엽은 초창기에는 궁중무용과 서도잡가와 경기잡가
그리고 30년대 중반부터는 가곡, 가사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했다. 특히 김옥엽의 '수심가'는 워낙 뛰어나 당시 장안 최고의 인기를 누린
연예인중 한명이었으며
문학가 김동환과의 로맨스는 인구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현매홍은 기생조합 최초의 잡지인 '장한' 편집인중 한명으로 활동했으며 일동축음기레코드 등에 그녀의 목소리가 전해온다. 김옥엽 역시 빅타, 콜럼비아, 태평 레코드 등에 수십장의 음반을 취입했다.
3. 오산월
산월이란 이름은 기생중에 가장 흔한 이름중 하나였다. 손병희 선생의 후처가 명월관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그 유명한 평양기생 주산월이며 1920, 30년대 배따라기로 일세를
풍미한 소리꾼이 서도기생 김산월이었다.
특히 김산월은 배따라기 같은 민요, 장한몽 같은 가요곡 외에도 도월색과 '이풍진 세상을(희망가')을 음반으로 녹음하기도 했다. 오산월은 이들 두 산월만큼 유명한 기생은 아니었으나 외모로 볼때 상당히 유명한 기생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4. 김영월
서도소리로 일세를 풍미하며 많은 일화를 남긴 장학선 등과 함께 대표적인 평양기생으로 평양의 기성권번에서 학습을 한 김여월은
소리에도 능통했으나 연기쪽에 일찍부터 소질을 보여 많은
활동을 한 기생이었다.
1927년 개봉한 영화 '낙양의 길'의 주인공이었다.
5. 윤채선
요즘 활동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로 현대적인
마스크를 가지며 많은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윤채선은 대정권번
소속의 예기로 특히 조선무용에 능통했다. 활동시기가 짧아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6. 이옥란
소박하면서도 애수가 넘치는 목소리를 지닌 이옥란은 한성권번에 적을 두고 있었으며 국악과 양악 양쪽을 오가며 활동했다.
특히 콜럼비아레코드에 취입한 가요곡 기생수첩, 눈물의시집, 꽃같은 순정 등의 노래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7. 장연홍
최근 일제시대 최고의 얼짱이라고 평가받으며 붐을 일으키기도 했던
장연홍은 평양기생으로예능계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의식기생, 사상기생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 유학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6,25 동란때 행방불명된 권번가수 / 이은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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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 이쁨니다.............
어디가면 만나용?
이미 모두 땅속에서 빨리 오기를 기다리겟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