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화
성북구 성북동의 삼각산 남향 기슭에 자리한 배밭골 길상사(吉祥寺)에 들어섰다. 산중턱으로 마을버스가 드나들며 골짝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지난날 서울 3대 요정이었다는데 이 으슥한 곳에 누가 찾아오겠나 해도 그리 유명했다니 그런가보다. 여느 절과는 달리 일주문에 눈을 부라린 사천상이 없고 예전 문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 같다. 새로 지은 불교대학 강의실과 7층 석탑을 지나쳐 가운데로 오르니 중앙에 법당이 ㄷ자를 앞으로 놓은 것처럼 아담하게 앉았다.
정객과 재벌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드나들던 대원각(大苑閣)을 법당으로 만들었는가 참하게 생겼다. 그 뒤로 숙소였는지 잔잔한 집들이 보이고 좀 위쪽에 법정이 가끔 와 머물렀다는 진영각이 있었다. 개울 건너엔 선방인 듯 작은 집들이 숲속에 올망졸망 보였다. 그늘 아래 노천 기도처에 몇 분이서 고개 숙여 합장하는 게 보였다.
한 바퀴 돌아봐도 그저 잘 단장했구나 생각뿐이다. 다른 데와는 달리 두루뭉실한 잿빛 옷을 입고 연신 두 손 모아 고개 숙이는 불자들이 아니라 유월 중순 일찍 온 더위에 시원한 옷을 입고 삼삼오오 벤치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눈다. 모래를 깔아 다니기가 부드럽다. 터덜터덜 내려오다 방갈로와는 다른 큰 격자창이 있어 가까이 가 보니 김영한(金英韓)과 백석(白石)의 사진이 놓인 사당이었다.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났다. 금광하는 친척의 일로 집안이 기울자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간다. 남편이 병약해서 죽고 16세에 서울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된다. 일본에 잠시 머물 때 권번 해관 선생이 독립운동으로 투옥됐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으로 간다. 거기서 영생여고 영어교사로 있던 백석을 만난다. 훤칠한 키에 바람에 날리는 듯 퍼석한 머리칼이 참 매력적인 시인이자 축구선수인 그와 단번에 친해 졌다.
기생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의 강제 결혼을 세 번이나 하면서 뛰쳐나온 그와 청진동에 살림을 차렸다. 함께 만주로 떠나자는 권유를 받았지만 혼자 떠나게 한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피해 만주 신찡(장춘)에서 공직생활과 세관원 등 온갖 직업에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해방으로 남북이 갈라져 부득이 북한 고향 평북 정주로 들어간다. 6.25가 일어나고 어수선함 속에도 빨리 만나리라 믿었던 둘은 그만 소식마저 끊기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꿈결 같은 그와의 짧은 이태 생활이 가슴에 자꾸 새겨져 견딜 수 없다. 보채듯 찾아오는 백석이 곧 나타날 것만 같다. 남조선 자본주의 문학사상이 가득하다며 삼수갑산 집단농장에 유배됐다는 소식도 들려오고 김일성대학 교수로 있다는 말도 있다. 중앙대 영문과에 들어가 만학으로 공부한다.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과 <내사랑 백석>이라는 회고록과 진향(眞香)이란 기명을 준 금하 하규일 기록을 남겼다.
북으로 간 뒤 긴 세월동안 종적이 끊겼지만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창작과 비평사에 출연하여 백석문학상을 제정하기도 했다. 그가 지어준 이름을 세상에 알려 부르게도 했다 자야(子夜). 이백의 시구를 딴 말이다. 백석의 <사슴> 시집을 읽고 또 읽어서 외우게 된 자야는 그를 향한 사랑이 밤사이 내린 눈처럼 소복이 쌓이고 쌓여만 갔다.
함흥 술취한 밤에 내 손을 꼭 잡고 당신은 내 아내요 죽을 때까지 이별은 없소 하는 말이
귓전을 때린다. 만주로 가자는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기생을 들이기 싫어하는 부모 생각에 홀로 가게 했지만 이리 못 만날 줄이야 세월이 느닷없이 흘러 22세의 꽃다운 나이가 어언 팔순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고 묻어지건만 가물거리기는커녕 생생하게 되살아나 견딜 수 없다.
<어느덧 팔순이 가까운 내가 만상이 고요히 잠든 깊은 야심경에 혼자 등불을 밝혀놓고 당신과의 애틋했던 기억의 사금파리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동안 줄곧 이글을 써내려왔다. 이렇게 생각나는 대로 써 내려올 양이면 나의 두 볼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적시어지고 급기야 눈물은 원고지 위로 뚝뚝 떨어진다.>
1천억 원이 넘는 7천 평의 대원각을 송광사 법정 스님을 찾아가 보시하겠다고 말한다. 평생 무소유를 설법하던 그는 거절을 거듭하다가 10년 가까이 되어 받아들이면서 염주와 길상화(吉祥華) 불명을 내려 받는다. 대원각이 길상사 가람으로 태어났다. 8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뼈에 사무친 백석의 그리움을 안고 한줌 재가 되어 길상헌 뒤뜰에 뿌려졌다.
누가 그 돈이 아깝지 않느냐 하니 한줄 시만 못하다고 말한다. 둘의 나란한 사진 옆에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붉은 시구가 환히 웃고 있는 법정스님의 얼굴과 함께 지그재그 갈겨져 있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가 또렷하게 희미한 흑백 사진에서 울려 나온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자야는 7월 1일 해마다 백석의 생일날이 오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종일 생각에 잠긴다. 그가 배웠던 영어를 같이 수학하는가 하면 그를 따라 문학도가 되어 글도 썼다. 그가 원고를 맡기던 출판사를 도와 문학상 재단도 만들었다. 그가 오면 조용한 숲속에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별장을 사들여 안식처도 근사하게 꾸몄다. 그녀의 글은 온통 백석의 얘기로 가득하다. 그가 평소에 절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많은 재산을 몽땅 시주해서 왕생극락을 기원한 갸륵한 여인이었다.
백석은 난이란 여인을 사랑하고 통영 여인을 좋아라 했으며 동거 중에도 부모의 강권에 의해 세 번이나 결혼을 했다. 조선일보 직장을 잘 심복하지 못하고 들랑날랑했으며 만주로 가 여기저기 온갖 직장을 전전했다. 평양 권번기생과 살림을 차린 일도 있으며 함흥 영생학원 축구부를 맡았다가 말썽이 생겨 여고로 밀려난 뒤 사직하고 만다. 김일성대학에서 잠깐 영어와 러시아를 가르쳤다는 가족사진이 얼마 전 공개됐다. 통 지긋한 데가 없다.
문학도 소설로 등단하여 수필을 쓰다가 시를 많이 지었는데 고향 방언을 섞어 넣은 모더니즘이라고 하지만 당시 어느 유파를 따르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생활이 어수선하고 여자 편력이 복잡하다. 그는 해방 전에 올라갔는데 월북작가로 취급되며 일본에서 영어를 수학했고 러시아와 중국어 등 외국어를 여럿 해서 어중간하다. 주체사상과 거리가 있다하여 유배생활로 종적이 끊긴 그를 자야는 어디 그럴싸해서 그다지 좋아했는가.
내 모든 게 그 쾌남 아닌 훈남의 시 한 줄만 못하다 했으니 백석의 문학을 많이많이 사랑했는가보다.
첫댓글 백석과 길상사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알고있는 애기지만 오늘 문학교실에서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소개해야겠서요
박선생님 즐거운 강의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