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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당한약방 1대 정규헌 선생, 2대 정학진 선생 모습과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정관영 한약업사. ⓒ 무한정보신문 |
1907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점령하려 정미조약을 통해 군대를 장악한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된 것이다.
이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제국의 군인이었던, 충남 공주가 본향인 한 청년이 군복을 벗고 강원도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은거하며 의술을 배운 그는 1910년(경술국치) 나라를 잃은 슬픔을 안고 낙향하다, 고향인 충남 공주까지 가지 않고 예산땅에서 짐을 푼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배운 의술을 펼치려 한약방을 연다. 그가 바로 삼산당한약방 설립자 고 정규헌 선생이다.
그로부터 10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쌍송백이(충남 예산군 예산읍)로 자리를 옮긴 삼산당한약방은 초대 정 선생의 증손 정관영(70, 예산새마을금고 이사장)씨가 4대째 가업을 잇고 있다. 또 그의 아들 정윤성씨와 며느리 차지혜(한방내과 전문의)씨가 한약방 한지붕아래 삼산당한의원을 열고 고조할아버지의 ‘인술’을 잇고 있다.
“증조부께서 예산으로 오셔서 옛날 중앙극장 옆 지금은 식당하는 자리에 한약방을 열었는데, 왜 삼산당한약방이란 상호를 지으셨냐면 ‘이곳 주소가 예산군 예산읍 예산리 이렇게 산(山)이 3번이나 들어가니 삼산이라고 하자’ 그랬대요. 당신의 호(號)도 삼산이라 지었고…”
정관영씨가 할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삼산당한약방의 가게사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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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산당한약방과 한의원 전경. |
종기고름 입으로 빨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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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의원 초창기때 사용한 한약재함. 100년이 넘은 약재함으로 현재 한의원 안에 전시해 놓았다. ⓒ 무한정보신문 |
초대 고 정규헌 선생은 단명했다. 환갑을 못보고 59세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분의 큰 아들 고 정학진 선생이 가업을 잇는다. 95세까지 장수했고 한약방은 2대째에 가장 번창했다. 또한 명의로 알려져 서울과 부산에서도 환자들이 소문을 듣고 몰려왔다고 한다.
한약도매상도 크게 열었다. 한약원료를 썰고 계량해 포장하는 직원들만 대여섯명씩이나 있었고, 밤을 새워가며 약을 썰어 큰 창고에 약재가 그득했다. 공주, 당진, 서산, 보령, 아산, 천안 일대의 한약방에 약재를 공급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장항선 일대에서 제일 컸고 날리던 시절이었다. 특히 당시의 철저한 약재관리와 신용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약방을 처음 시작한 증조부께서는 종기가 난 환자 몸의 고름도 마다않고 직접 입으로 빨아냈어요. 정말로 철저한 직업의식과 철학이 있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지요. 가업을 크게 키우신 건 할아버지때예요. 30대에 시작해서 95세까지 한약방을 운영하셨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자손들에게 항상 ‘정직’을 강조하셨어요.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아직까지도 남을 속이고는 못살아요. 남한테 부담주는 것도 싫고”
정관영씨는 조부 밑에서 한약에 대해 배웠다. 아버지 정해운(91)씨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공무원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작년에 작고한 작은아버지 정해종씨는 약종상(양약) 도매업을 크게 벌여 대성했다(본정통 삼산약국 정상영씨가 그의 아들이다).
정관영씨도 외국어대에서 무역학을 전공해 사실 가업과는 무관한 행로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군대에서 원인모를 병을 얻었고, 고통과 좌절 끝에 꿈을 접고 낙향해 조부 밑에서 한의약을 공부했다.
“할아버지가 한의대 가기를 소망하셨는데…. 다른 길로 갔지만 결국은 가업을 잇게 됐어요. 아마도 운명은 정해져 있나 봐요. 인생의 부침이라는 게 아무리 발버둥쳐도 안되는 뭐가 있는거죠”
1983년도에 마지막 한약업사 자격시험이 있었다. 지역당 1명만 상대평가로 뽑기 때문에 경쟁률도 높았다. 조부 밑에서 약재에 대해 공부한 그는 한약업자 시험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자격증을 걸어놓고 당당히 가업을 잇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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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삼산당한약방의 문을 연 정규헌 선생때부터 간직해 온 한의학전서 동의보감을 꺼내 보였다. 인쇄본이 아닌 직접 필사한 고서로 상당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
한약업자 제도는 1953년 약사법 제정 당시 의료인력의 절대부족으로 만들어 졌다. 한약업사 시험을 거쳐 자격을 얻은 뒤 한약방을 개설해 기존 한약서에 실린 처방에 따라 한약을 판매할 수 있는 제도다.
‘정직’은 ‘신용’으로 이어져
한약방에서 사용할 수 있는 약재는 그 종류가 무려 300여개가 된다. 국내에서 약재를 채취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절반은 수입에 의존한다고 한다. 자연산도 극히 드물다.
“한약재 중 1g당 20만원씩이나 하는 사향(우황청심환 원료)의 경우 노루, 고양이, 쥐에서 채취하는데 국내산은 아예 없어요. 녹용만 해도 대부분이 수입산인데 러시아산 원용이 최고상품이예요. 같은 녹용이라고 해도 부위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지요. 우리 한약방에서는 러시아산 원용만 취급해요. 약재상들 얘기가 우리 약방만큼 좋은 재료를 쓰는 곳이 전국에 20%도 안된다고 해요. 우리는 그게 원칙이에요”
4대째 이어온 가업의 신조가 조부께서 강조한 ‘정직’이고, 그것이 곧 ‘신용’으로 이어져 왔음을 강조하는 그의 표정에서 자부심이 읽힌다.
장항선 일대에서 첫째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약재상이 번창했던 비결도 다름아닌 ‘정직’이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해 한약시장이 날로 쇠퇴하고 있다. 당장은 효과가 빠른 양약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시대에 천천히 몸을 제대로 살려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하는 한약은 뒤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제 탕약시장은 사양길이예요. 기업에서 쏟아내는 홍삼제품이 일반화 되면서 타격을 입었고, 강장제가 대거 출시되면서 또 약재가 안팔리고…. 많은 한약방들이 문을 닫고 있어요. 인술은 사라지고 상술만 있는 세상이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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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약원료를 썰 때 사용하는 약작두. 이밖에도 많은 기자재 옛 물건이 있었는데 두 번이나 이사를 하며 사라졌다고 한다. 정 한약업사는 ‘온고지신이 부족했다, 편리함만 추구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고 후회했다. ⓒ 무한정보신문 |
제도변화로 한약업사 자격시험도 완전히 사라져 정씨를 마지막으로 가업이 끊어지는 줄 았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아들이 중국으로 유학해 중의사 면허를 취득했고, 며느리까지 한의사 전문의가 들어와 5대째 가업을 잇게 됐다. 정관영 한약업사는 “그게 가장 기쁜 일”이라고 한다.
예산군에서 현재 한약업사 자격을 갖고 운영하는 한약방은 재생당(예산리), 다인당(덕산), 보건당(신양) 그리고 삼산당한약방, 이렇게 4곳이 남아 있다. 이제 머지않아 수백년 동안 민초들의 아픈 몸을 보듬고 치료했던 한약방들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다.
5대째 이르러 한약방에서 한의원으로 가업을 이은 삼산당한의원이 가훈인 ‘정직한 의술’을 끊기지 않고 이어가길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