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적은, 저 깊이 정적은 우리에게 시간 너머입니다.
그 정적에서는 모든 움직임이 멈춥니다.
움직임에게만 시간이 있습니다.
움직임이 멈추면 시간도 정적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나를 위해 시간 있니, 라고 질문할 때,
그렇다고 대답하면, 하나의 움직임이 시작합니다, 호의의 움직임이 양쪽에서 시작합니다.
반대로 시간이 없다고 말해도 하나의 움직임이, 이번에는 서로 헤어지는 움직임이 시작합니다.
시간 너머의 것은 머물러 있습니다. 멈춰 있습니다.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시간 너머는 우리에게 비게 나타납니다.
이 빔에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하거나 알아채야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간 너머 빔을 우리는 무한하게 경험합니다.
그 빔에서 시간이 옵니다. 그 빔에서 그 시간이 옵니다.
그 빔에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 빛으로 드러나자마자 그 시간이 옵니다.
빛나는 어떤 것과 빛으로 드러나자마자 시간이 옵니다.
빔을 우리는 오직 어둡게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무한한 밤으로, 깊은 밤으로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빔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빛으로 옵니다.
빛과 함께만 존재의 움직임이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도 시작합니다.
그 움직임이 끝나면, 그 시간도 끝납니다.
무엇때문에 제가 이 생각을 하게 됩니까?
우리 시간도 끝나길 우리는 깊이 갈망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생이 끝나길 갈망합니다. 시간 너머를 향하는 갈망이 끝나길 갈망합니다.
생이 정말 지나느냐가, 질문입니다. 혹 한 단계가 지나는 건 아닙니까?
죽음과 함께 다르게 더 계속 가기 때문입니다.
아마 무한하게?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조상과 계속해서 하나라고 경험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서 사자들이 계속 산다는 것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가끔 우리를 도우려고 서두르는 것을 어떻게 경험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붙어서 우리를 자신들의 죽음으로, 그 시간으로, 계속 더 가는 시간으로 끄는 걸 어떻게 경험합니까?
그럼 여기에서 우리에게 갈망되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시간이 지나 그 시간이 끝나는 그 빔으로 다시 되돌아가면, 우리가 어떻게 자유롭게 느끼겠습니까?
우리 시간으로부터도 우리가 자유롭게 됩니까?
우리 근원으로, 영원한 무로 되돌아가기 위해 자유롭게 됩니까?
이미 여기에서 우리가 시간 너머를 가끔 경험합니까? 가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가끔 멈춰 정적에 있습니까?
축복의 순간에 우리는 시간이 정적에 있는 걸 경험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의 시간에 그렇습니다. 하나되는 모든 경험은 시간 너머입니다.
아마 분리된 것만이 시간을 갖습니다.
하나는, 하나가 된 움직임의 끝은 시간 너머가 됩니다.
여기에서 제 생각은 끝납니다.
어디로 어떤 것이 계속 더 가야 합니까?
여기에서 영원한 시간이 시작합니다.
어떻게? 시간 너머.
- 버트헬링거의 가족세우기에서 얻어진 통찰 중 284번 글 - 《박이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