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엄경이 흔감하다
“광제사 스님에게 이 염불소리 아느냐고. 그 이야기만 해”
비구니 스님들은 벌써 웃음 가득히 인사를 올리고 제자리로 가셨는데 큰스님이 일부러 보살님을 보내셨다.
“대전 광제사에 있는 스님들이 화엄경 사경 운동을 해. 스님들이 200명이나 돼. 신도들에게도 열심히 선양하는 스님이래.” 하고 설명해 주셨다.
광제사 이야기는 보살님들에게도 들었다. 12권짜리 큰스님의 『한글화엄경 완역본』세트책이 일시절판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 끝에 대전의 광제사에 전화를 드리면 영인본 책을 구할 수 있고, 한글 화엄경을 사경해 오면 사경노트도 새로 바꿔주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
큰스님이 항상 ‘금세기 최고의 도량석’이라고 표현하시는 설정스님의 독송이 선원에 은은하다. 30년 전 어느 날 새벽의 독송이라는데 물흐르듯 언제나 새롭다. 그중에서 화엄경 약찬게 부분만 편집해서 큰스님이 씨디로도 테이프로도 제작해서 늘 나눠주고 계신지도 벌써 오래다.
독송하신 설정스님이 지금 수덕사 방장스님이기 때문에 대전에 사시는 스님들께 일부러 물어보신걸까? 보살님 말씀으로는 스님들이 이 약찬게 독송을 누가 했는지 모르시는 모양이었다.
“씨디 줬어? 복사해서 나눠주라고 하지.”
“한 5천개 복사해서 나눠주라는 이야기도 꼭 덧붙여야 돼.” 하셨다.
*
화엄사에서 60일 동안 공부하고 나오신 거사님을 오늘 우연히 버스에서 만났다면서 비구니 스님이 함께 오셨다. 연세 많으신 거사님은 화엄경 공부를 꼭 하고 싶다고 하셨고, 스님이 마침 오늘 화엄법회에 오시는 길이어서 모시고 왔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매달 첫째, 셋째 금요일 오전 열시 반에 이곳 문수선원에서 <불자를 위한 화엄경>법회가 열린다고 설명해주셨다. 버스를 내려야 할 곳에서 못 내리는 바람에 스님을 만났다고 거사님이 말씀하시자, ‘처음 오는데 그 정도 공은 들여야 한다’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
불국사에서 여름 결제를 났다는 스님이 오셔서 인사를 하셨다.
“불국사,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찰!” 하고 큰스님이 반가와 하셨다.
*
9월 27일 오전 10시에 부산 UN 기념공원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희생자를 위한 위령수륙재’를 홍보하러 범어사 부주지 스님이 내려오셨다.
“아이고 오셨어요. 공부하러 오셨어요?” 하고 큰스님이 웃으셨다.
“날짜는 다가오고 간이 쫄립니다.” 부주지 스님도 웃으면서 걱정하시자
“공덕만치 되겠지.” 하셨다.
*
문득 큰스님이 ‘흔감하다’는 말을 아느냐고 물으셨다.
“어째서 이렇게 화엄경을 공부하게 되어가지고 나는 너무 흔감해. 흔감하다는 게 과분하다? 기쁘다? 뜻이 여러 가지가 있지. 화엄경은 보면 볼수록 좋아요. 이런 경전이 있나. 세상에 이런 법문이 있어.” 하고 다시 음미하듯 말씀하셨다.
*
부주지 스님의 홍보인사가 끝나고 마이크를 이어받은 입승스님이 대중스님들께 “시간이 남아있죠?”하셨다. 큰방에서 하시는 말씀은 들릴 리가 없는데도 큰스님은 무릎을 내려다 보며 “다 됐어.”하셨다. “그래도 시작하겠습니다.” 하고 목탁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大方廣佛華嚴經 卷第十六
須彌頂上偈讚品 弟十四
八, 菩薩偈讚
화엄경 제 16권부터는 세존이 수미산정으로 올라가서 제석천왕의 영접을 받는다. 제석천왕이 부처님을 찬탄하고 궁전을 찬탄하는 노래를 부르고 시방의 보살들이 수미산정에 와서 게송으로써 부처님과 부처님의 깨달음과 불법전반에 관해서 찬탄하는 과정이 오늘 공부하는 수미정상게찬품에 이어진다.
*
불찰 미진수 보살대중들이 시방에서 모였는데 열 명의 대표보살들은 지혜 혜(慧)자라고 하는 돌림자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있던 세계는 전부 꽃 화(華)자가 들어가 있는 세계이고 그 세계에 있던 부처님의 이름에는 전부 월(月)자가 들어간다.
화엄법회는 사바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시방일체 세계에서도 공히 똑같은 현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화엄법회가 지금 수미산정에서도 이루어지는데 이 법회에서 부처님이 하실 법문은 십주법문이다.
*
본론인 십주법문의 내용을 상징하는 뜻에서 부처님이 두 발의 발가락인 양족지(兩足指)에서 광명을 놓았다. 그 광명은 백천억 묘색 광명인데 시방일체 모든 세계와 수미산 제석궁중에 부처님과 모든 대중들에게 두루두루 빠짐없이 다 잘 비췄다.
불교경전에서 광명은 언제나 지혜를 상징한다. 깨어있는 마음이 불교적인 지혜다. 깨달음의 지혜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설사 거기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불교를 공부한 이론적인 지혜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광명이라고 할 수 있다.
八, 菩薩偈讚
1, 東方의 法慧菩薩
(1) 種種善事
爾時에 法慧菩薩이 承佛威神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曰하사대
佛放淨光明하시니 普見世導師가
須彌山王頂의 妙勝殿中住로다
一切釋天王이 請佛入宮殿하야
悉以十妙頌으로 稱讚諸如來로다
彼諸大會中에 所有菩薩衆이
皆從十方至하야 化座而安坐로다
彼會諸菩薩이 皆同我等名이며
所從諸世界도 名字亦如是로다
本國諸世尊도 名號悉亦同하시니
各於其佛所에 淨修無上行이로다
그때 법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놓으시는 깨끗한 광명으로
널리 보니 세간의 도사가
수미산왕 정상의
묘승전 가운데 머물도다
모든 제석천 왕들이
부처님께서 궁전에 들어오시기를 청하여
모두 열 가지 묘한 게송으로
모든 여래를 칭찬하네
저 모든 큰 모임 가운데
있는 보살대중이
모두 시방으로부터 와서
변화한 자리에 편안히 앉으셨네
저 모임의 모든 보살들이
모두 함께 나와 같은 이름이며
온 곳의 모든 세계도
이름 또한 이와 같네
본 국토의 모든 세존께서도
명호가 다 또한 같으시니
각각 그 부처님 처소에서
위없는 행을 깨끗이 닦으셨네
*
보살게찬(菩薩偈讚): 보살들의 찬탄
*
보살들이 게송으로써 부처님과 불법의 이치를 찬탄한다.
열 보살이 등장 하는데 앞의 ‘보살명’에서 등장했던 보살들이다. 이 보살들이 한 보살당 각각 열 개의 게송을 읊는다.
그래서 수미정상게찬품은 시방의 보살들이 모두 100개의 게송으로써 부처님을 찬탄하는 노래라고 보면 된다.
늘 느끼는 바지만, 불교에 이런저런 경전이 많이 있어도 화엄경이 불교의 총서이다. 불교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다 담아 내는 경전이 바로 이 화엄경이다.
청량스님의 서문에서도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는 것은 무진수다라지총명(無盡修多羅之總名)이’ 라고 했다. 무궁무진한 팔만대장경의 전체를 한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할 때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화엄경하면 그 속에 팔만대장경이 다 포함된다. 그런데 금강경하면 거기에는 화엄경이 포함되지 않는다.
화엄경에는 아함경이니 능엄경의 일체 뜻이 다 포함된다.
공부를 계속 해 보면 아함부 경전, 부파불교, 대중불교, 비밀불교 할 것 없이 화엄경 안에 총망라 되어 있으며 심지어 후대에 발달한 선불교 까지도 다 포함되어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불교를 논할 때는 사상론으로 이야기를 한다. 화엄경을 사상적으로 본다면 그 안에 정토사상, 일심사상, 밀교사상 등등의 다양한 사상들이 다 포함된다. 화엄경을 불교의 총서라고 거침없이 표현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공부하면 할수록 ‘이런 훌륭한 가르침이 세상에 있구나’하고 탄복한다. 훌륭한 화엄경을 천 분의 일, 만분의 일이라도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인연이 된 것은 참으로 다행중의 다행이고 복중의 복이다. 다이아몬드의 광맥을 혼자 발견해서 애착을 하고 흐뭇해 하고 기뻐하고 심지어 한편으로는 혹시 남이 알까 염려하는 정도의 마음까지도 갖게 된다.
아주 흔감한 마음이다. ‘흔감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화엄경을 보면 아주 흔감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이제 날로 하늘은 높아가고 청명한 계절이 돌아왔다. 더욱 화엄경에 깊이 침잠하는 시간들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 그것이 사람으로 태어난 최고의 복이다. 화엄경과 깊이 인연을 맺고 화엄의 바다속에서 허우적대고 헤매고 하는 것이 우리들 각자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보람이고 최고의 복이다. 여러분들이 그런 느낌을 가졌으면 한다.
*
동방(東方)의 법혜보살(法慧菩薩): 동방 법혜보살의 게송
*
종종선사(種種善事): 부처님의 광명
그 열 개의 게송을 내용별로 소제목을 하나씩 달았는데 여기는 ‘가지가지 좋은 일이다’ 라고 하는 제목을 달았다.
*
이시(爾時)에 : 그 때에
법혜보살(法慧菩薩)이
승불위신(承佛威神)하사: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 시방을 널리 관찰하고
이설송왈(而說頌曰)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셨다.
*
불방정광명(佛放淨光明)하시니: 부처님께서 청정한 광명을 놓으시니
보견세도사(普見世導師)가: 세상을 인도하는 리더.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는 스승이 세도사다. 그 세도사가
수미산왕정(須彌山王頂)의: 수미산 꼭대기에서
묘승전중주(妙勝殿中住)로다: 부처님이 묘승전에 머물고 계시는 것을 보듯이. 묘승전은 궁전이름이다. 절에는 아무리 작은 법당이라도 법당의 이름들이 다 있다. 불교의 참 좋은 점인데 여러분이 살고 있는 방사에도 이름들이 있다. 비록 화장실이라고 하더라도 이름을 짓고, 조그마한 전각이라도 거기에 불교적인 의미를 담는 편액을 써서 붙인다. 편액을 밖에 걸기 미안하면 방안에라도 붙여서, ‘이 방은 어떤 방이다’라는 것을 표현한다. 불교가 갖는 아름다운 관습이다. 여기에 수미정상에 있는 제석천왕의 궁전은 두 말할 것 없이 훌륭한 이름을 가졌다. 그 이름도 아름다울 묘(妙) 수승할 승(勝) 묘승전이다.
광명이 있음으로 거기에 부처님이 계시는 것을 본다는 것인데 이것의 숨은 의미로는 지혜가 있어야 인생을 안다는 것이다.
지혜를 통해서 인생의 가치, 인생의 의미,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이해하게 된다. 지혜를 통해서 인생을 사랑하게 되고 인생을 애착하게 되고 존중하게 된다. 자기의 인생을 그렇게 하듯이 다른 사람의 삶도 이해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게 된다.
마치 부처님이 광명을 놓아서 빛을 통해서 부처님이 묘승전에 머물고 계시는 것을 보듯이 지혜가 있어야 그렇게 할 수가 있다.
*
일체석천왕(一切釋天王)이 : 일체 제석천왕이
청불입궁전(請佛入宮殿)하야: 부처님의 궁전에 청해 들어가서
실이십묘송(悉以十妙頌)으로 : 모두들 열 가지 미묘한 아름다운 노래로써
칭찬제여래(稱讚諸如來)로다: 모든 여래를 칭찬하는 도다.
화엄경 391쪽(민족사 刊) 승수미산정품을 보면, 부처님이 맨 처음 수미산정 올라갔을 때 제석천이 게송으로써 찬탄하는 노래가 있었다.
그 처음 게송이 ‘석가여래는 큰 자비를 갖추셨으니 모든 길상 가운데 최무상이다. 일찍이 그 부처님께서 이 궁전에 들어오셨으니 이러한 까닭에 이곳이야 말로 최길상이다’ 라는 식의 내용이었다. 또 이어지는 노래는 ‘구나모니 부처님은 견해에 장애가 없으시니 모든 길상 가운데 최무상인데 그 부처님도 일찍이 이 궁전에 들어오셨을새 그러므로 이곳이야 말로 가장 길상스러운 곳이다’라는 구절이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뜻도 쉽고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던 것을 여기에서 그대로 재론하고 있다.
*
피제대회중(彼諸大會中)에 : 저 모든 대회 가운데
소유보살중(所有菩薩衆)이: 계시는 바 보살들이
개종시방지(皆從十方至)하야 : 모두 시방으로부터 이르러 와서
화좌이안좌(化座而安坐)로다: 사자좌를 변화시켜서 그 자리에 앉았도다. 자리를 화작(化作)한 것인데 뚝닥거리고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있으라’ 하니 착 나타나는 것이다.
*
피회제보살(彼會諸菩薩)이 : 그 모임 가운데 모든 보살들이
개동아등명(皆同我等名)이며: 다 같이 나와 같은 이름이며
소종제세계(所從諸世界)도 : 좇아온 바 모든 세계도 또한 이와 같다.
보살들이 수미산정 묘승전이라고 하는 이 한 곳에 들어가듯시방세계에서 똑같이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 이것도 앞에 나온 이야기다. 여기 보살 이름이 법혜보살이면 다른 데에서도 역시 법혜보살이다. 이곳에서 일체혜 보살이 게송을 읊는다고 하면 그가 왔던 다른 세계에도 역시 일체혜보살이 게송을 읊는다.
명자역여시(名字亦如是)로다: 똑같은 세계, 똑같은 부처님, 똑같은 보살, 똑같은 궁전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인다라망의 이야기다. 그물을 하나 딱 들면 전체 그물이 다 딸려오는 법계연기를 표현한 것이다.
요즘은 개론서 같은 데서 그런 이론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데 참 따분하고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런데 전통 경전에서는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는 전부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내용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어느 한 곳의 부처님이 다른 어디 어떤 궁전에 들어가면 일체 세계 모든 부처님이 그 궁전에 들어가는 모습이 촥 영상으로 그려진다. 전 세계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부처님이 이 자리에 있다가 저 자리로 가면 거기에 그 영향이 다 반영이 된다고 하는 내용이다.
*
본국제세존(本國諸世尊)도: 본국에 있는,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세존도
명호실역동(名號悉亦同)하시니: 명호가 다 또한 같더라.
각어기불소(各於其佛所)에 : 각각 그 부처님 처소에서
정수무상행(淨修無上行)이로다: 최상가는 행을 청정하게 닦더라. 무상행은 부처님의 행인 불행(佛行)이다.
간혹 기회 있을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화엄경의 수행은 특별히 주문을 외우거나 참선을 하거나 염불을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화엄경 수행은 간단하다. 어찌보면 가장 쉽고 또 어떻게 보면 참으로 어렵기도 하다.
화엄경 사상은 가장 가까운 인연으로부터 가능하면 내 마음이 닿는 데까지 부처님으로 이해하고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자는 것이다. 가정의 행복, 주변의 행복, 그리고 세계평화의 모든 열쇠가 거기에 있다.
모든 사람 모든 생명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이 화엄경의 수행이다. 우리에게 그것이 아직 썩 쉽게 납득이 안되어서 실천에 옮기기가 어렵지 화엄경의 수행은 이렇게 간단하다.
(2) 自在力
佛子汝應觀 如來自在力하라
一切閻浮提에 皆言佛在中이로다
我等今見佛이 住於須彌頂하시며
十方悉亦然하니 如來自在力이로다
불자들이여, 그대들은 마땅히 볼지니라
여래의 자재하신 힘으로
일체의 염부제에
부처님이 계신다 말하네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께서 수미산 정상에 계시는데
시방에서도 다 또한 그러하니
여래의 자재하신 힘이셔라
*
자재력(自在力): 부처님의 자재한 힘
*
불자여응관(佛子汝應觀) :불자여 그대들은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하라: 여래의 자재한 힘을 응당히 관찰하라.
일체염부제(一切閻浮提)에 : 일체염부제에
개언불재중(皆言佛在中)이로다: 다 부처님이 거기에 계신다고 말하는 도다. 부처님이 안 계신 데가 없다.
흔히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이라고 한다. ‘곳곳이 부처님이고 하는 일마다 모두 불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이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청소를 하고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보고 목욕을 하고 하는 하찮은 일상사도 다 불사다. 그것이 다 법당을 잘 관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밥 한끼 먹여주고 세수해 주고 용변 봐주고 이 모든 것이 그야말로 살아있는 법당을 관리하는 일이므로 이보다 더 좋은 불사가 없다. 사사불공이다. 낱낱이 불사고 불공이다. 화엄경은 큰 조건 없이 불교의 진리를 이해시키는 가장 명확한 가르침이다.
*
아등금견불(我等今見佛)이 : 우리들이 지금 보니 부처님이
주어수미정(住於須彌頂)하시며: 수미정에 계시는 것을 보게되고, 우리가 지금 부처님이 수미정상에서 계신 것을 보듯이
시방실역연(十方悉亦然) 하니: 시방세계에서도 똑같다.
여래자재력(如來自在力)이로다: 이것은 여래의 자재한 힘이다.
말은 어떤 특정한 부처님을 등장시켜놓고 또 특정한 보살들을 등장시켜서 실재하는 인물들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 해야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면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법계에 있는 모든 존재가 사사건건 전부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곳에서 우리가 한걸음 떼는데 아프리카 오지에 있는 사람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다. 예를 들어서 세계 경제를 이야기 할 때 ‘뉴욕 월가에서 기침을 하면 우리 나라에는 감기가 걸린다’고 하는 표현도 신문 지상에서 잘 쓴다.
그것이 법계연기다. 우리나라에만 사는 시대가 아니다. 본래 그런 연관관계를 다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 전에 화엄경은 어찌 이러한 이치를 이야기 했는지 참 탄복할 일이다.그래서 유명한 서양학자들은 화엄경을 보고는 ‘화엄경은 인류가 남긴 최대의 걸작이다’라고 하였다.
(3) 擧因現果
一一世界中에 發心求佛道하시니
依於如是願하야 修習菩提行이로다
佛以種種身으로 遊行遍世間하사대
法界無所碍하시니 無能測量者로다
慧光恒普照하사 世暗悉除滅하시니
一切無等倫이라 云何可測知리오
낱낱의 세계 가운데서
발심하여 불도를 구하시니
이러한 서원을 의지하여
보리행을 닦으셨네
부처님께서 가지가지 몸으로
세간에 두루 노니시되
법계에 걸림이 없으시니
능히 측량할 이가 없네
지혜의 빛이 항상 널리 비치어
세간의 어두움 다 소멸 하시니
아무도 짝할 이가 없어
어떻게 가히 헤아려 알리오
*
거인현과(擧因現果): 원인을 들어서 결과를 말하다
*
일일세계중(一一世界中)에 : 일일 세계 가운데
발심구불도(發心求佛道)하시니 : 발심해서 불도를 구하니
의어여시원(依於如是願)하야 : 이와 같은 원을 의지해서
수습보리행(修習菩提行)이로다: 깨달음의 행을 수습하는 도다.
*
불이종종신(佛以種種身)으로: 부처님은 가지가지 몸으로써
유행변세간(遊行遍世間)하사대:다니면서 세간에 두루한다.
우리가 관세음보살의 32응신을 이야기 하는데 그 또한 중생들의 근기, 중생들의 수준과 인연에 맞춰서 나타내는 몸이다.
부처님의 몸 또한 마찬가지다. 부처님은 가지가지 몸으로써 다니면서 세간에 두루한다.
우리 가까운 주변에, 어떤 부처님이 나를 교화하기 위해서 어떤 모습으로 내 옆에 있는지 모른다. 불교는 기본적으로 그런 관념으로 사람을 대한다.
내가 예전에 해인사에서 산감을 하고 있을 때 거지가 살았다. ‘문수보살은 항상 거지 형상으로 산문에 계신다’고 하는 말을 나는 어려서부터 들어서 지나칠 때마다 ‘저 사람이 혹시 문수보살이 아닌가’ 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늘 합장하고 지나갔다. 그 사람이 진짜 문수보살이면 어떻게 우리가 그냥 지나치겠는가. 내가 가끔 “문수보살입니까?” 하고 물어도 그 사람은 늘 무심하고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있었다.지금도 그 사람 얼굴이 생각 날 정도다.
법계무소애(法界無所碍)하시니: 법계에 걸리는 바가 없으시니
무능측량자(無能測量者)로다: 능히 측량하는 사람이 없더라. 법계에 걸림이 없으니 측량할 길이 없다. 그러니까 도대체 문수보살인지 그냥 거지인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
혜광항보조(慧光恒普照)하사 : 지혜의 광명이 항상 널리 비추사
세암실제멸(世暗悉除滅)하시니 : 세상의 어둠을 전부 제해서 멸하시니
일체무등윤(一切無等倫)이라 : 일체 같이 짝할 이가 없다.
운하가측지(云何可測知)리오: 어찌 가히 측량해서 알겠는가.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듣고 배웠음에도 깜박깜박 잊어서 모를 뿐이지 중생들의 어리석음의 어둠을 소멸하는 데는 부처님의 가르침 이상이 없다.
내 지혜로써 해결 못하는 어떠한 문제에 봉착해도 화엄경을 펴 놓고 거기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빌린다면 틀림없이 해결법이 있다. 부처님의 지혜는 우리 어리석음의 어둠을 제거한다.
2, 南方의 一切慧菩薩
爾時에 一切慧菩薩이 承佛威力하사 普觀十方하고 而說頌言하사대
(1) 不得見佛
假使百千劫에 常見於如來라도
不依眞實義하야 而觀救世者인댄
是人取諸相하야 增長癡惑網하며
繫縛生死獄하야 盲冥不見佛이로다
그때 일체혜보살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 널리 시방을 관찰하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설사 백천 겁 동안에
항상 여래를 보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구원하는 자를 볼진대
이 사람은 모든 모양에 집착하여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증장하며
생사의 지옥에 얽매여서
눈이 멀어 부처님을 보지 못하리라
*
남방(南方)의 일체혜보살(一切慧菩薩): 남방 일체혜보살의 찬탄
*
이시(爾時)에
일체혜보살(一切慧菩薩)이
승불위력(承佛威力)하사 :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들어서
보관시방(普觀十方)하고: 시방을 널리 관찰하고
이설송언(而說頌言)하사대: 게송을 설해 말씀하셨다.
*
부득견불(不得見佛):부처님을 보아도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
가사백천겁(假使百千劫)에 : 가사백천겁에
상견어여래(常見於如來)라도: 항상 여래를 본다 하더라도
불의진실의(不依眞實義)하야: 여래라고 하는 진실한 뜻을 의지하지 못해서, ‘진실한 뜻을 의지해서’라는 말이다.
이관구세자(而觀救世者)인댄: 세상을 구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할진댄. 구세자는 부처님이다.
*
시인취제상(是人取諸相)하야 : 이 사람은 모든 상을 취해서
증장치혹망(增長癡惑網)하며 : 어리석음의 그물을 자꾸 증장시키며
계박생사옥(繫縛生死獄)하야 : 생사의 지옥에 얽히고 얽혀서
맹명불견불(盲冥不見佛)이로다: 캄캄하고 캄캄한 것이 부처님을 보지 못하는 도다.
개경게에 나오는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까지는 우리가 다 한다. 무상심심미묘법을 백천만겁에 만나기가 어려운데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다음 과제가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意)’다. 여래의 진실한 뜻 알기를 원한다. 정말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가.
여기에서는 백천만겁에 항상 여래를 본다 하더라도 진실한 뜻에 의지해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면 이 사람은 모든 형상만을 취하고 그 형상에 눈이 멀어서 어리석고 미혹한 그물만 자꾸 불어나게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천불만불 불상을 만드는 것이다. 천불만불 불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중생을 또 인도한다. 어떻게 보면 온갖 눈먼 사람들이 또 더 많은 눈 먼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사의 지옥에 엉켜서 캄캄하고 어두워서 진짜 부처님이 뭔지 진실한 뜻이 뭔지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이런 법문을 한 번 듣는다고 얼른 그 생사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로되 그러나 법문만은 정말 뛰어난 법문이다. 여기까지는 부득견불(不得見佛), 부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를 말했다.
(2) 知法乃見佛
觀察於諸法컨댄 自性無所有니
如其生滅相하야 但是假名說이로다
一切法無生이며 一切法無滅이니
若能如是解하면 諸佛常現前이로다
法性本空寂하야 無取亦無見이니
性空卽是佛이라 不可得思量이로다
若知一切法이 體性皆如是면
斯人則不爲 煩惱所染着이로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없으니
그 생멸하는 모양과 같이
단지 이 거짓 이름만 말할 뿐이네
온갖 법이 나지도 않고
온갖 법이 없어지지도 않나니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그 앞에 계시리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하여
취할 수도 없고 또한 볼 수도 없어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라
생각으론 얻을 수 없네
만약 온갖 법들이
자체의 성품이 모두 이런 줄 알면
이 사람은 곧
번뇌에 물들지 아니하리라
*
지법내견불(知法乃見佛):법을 보아야 참으로 부처님을 본다
*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고 하는 박칼리경에 있는 말씀은 천고의 유명한 말씀이다. 여기도 법을 알아야 부처님을 본다고 하였다.
*
관찰어제법(觀察於諸法)컨댄: 모든 법을 관찰하건댄. 제법은 모든 존재고 모든 사건이다. 제법 속에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다 들어 있다. 예를 들어서 여름이 지나가고 가을이 온다고 하는 것도 제법 속에 들어있고 지금 저렇게 초목이 무성해서 잎이 푸르다 못해서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변한 것도 다 제법속에 들어 있다. 불과 몇 달 전에는 저 잎이 아주 아름다운 연녹색으로 장엄을 했었다. 이제 멀지 않은 시간에 누런 단풍잎으로 또 변할 것이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니: 모든 법은 자성무소유다.
자성이 무소유다. 모든 법은 자성이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 푸르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대로 푸르게 있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녹색이라고 해서 녹색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소유다.
여기생멸상(如其生滅相)하야 : 그 생멸하는 모습과 같이
단시가명설(但是假名說)이로다: 다만 이 거짓 이름으로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생멸한다. 자연변화가 제일 큰 선지식이다. 자연현상을 보고 우리가 내 육신을 깨닫고 내 마음의 변화를 비추어서 깨닫는다면 공부하기가 제일 좋다.
성문 연각할 때의 연각은 자연변화의 현상을 보고 그대로 이치를 깨달은 사람을 말한다.
*
다음으로 나오는 네 구절, 한 게송에는 별표를 세 개쯤 해야 한다.
일체법무생(一切法無生)이며 : 모든 존재 일체법은 생한 것이 없으며
일체법무멸(一切法無滅)이니: 일체법은 무멸이다.
반야심경에도 ‘제법공상 불생불멸(諸法空相 不生不滅)’이라고 하였다. 그 구절과 딱 매칭을 시킬 수 있다.
약능여시해(若能如是解)하면 : 만약 능히 이와 같이 일체 존재가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제불상현전(諸佛常現前)이로다: 모든 부처님이 항상 그 앞에 나타나 있음을 본다.
별 세 개가 아니라 열 개를 쳐도 아깝지 않은 구절이다.
반야심경의 불생불멸과 함께 이 구절을 많이 인용한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법화경에는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 이 법이 법의 자리에 머물러서 세간의 모습이 상주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금방 시들어 버릴 이 꽃도 항상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모습은 변하지만 그 실상은 영원히 존재한다. 이것이 불생불멸이다. 불생불멸을 법화경에서는 상주(相常)라고 표현했다.
생긴 바도 없고, 소멸하는 바도 없고, 변하는 바도 없다. 그러면서 무한히 끊임없이 순간순간 변해가고 있다. 이것이 모든 존재의 중도성이고, 중도적인 안목을 가지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
화엄경의 이 구절과 반야심경의 불생불멸과 법화경의 ‘시법주법위(是法住法位)하야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모든 존재는 진리의 자리에 있어서 세간의 모습이 항상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존재의 불멸성을 말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공성(空性)이 나온다. 모든 존재는 그 내면에 공성을 깔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본질에 있어서는 불생불멸이다.불생불멸이면서 또한 공(空)하다. 공하기 때문에 역시 불생불멸이다, 라고 하는 이치를 설명하는 것이다.
*
법성본공적(法性本空寂)하야: 일체 법의 성품은 본래 공적해서
무취역무견(無取亦無見)이니: 취할 것도 없고 또한 볼 것도 없으니
성공즉시불(性空卽是佛)이라:모든 존재의 본성이 공한 이치가 그대로 부처다. 성공스님이 불(佛)이라고 했다.(웃음)
성공 즉시 불이라. 일체 법의 성품이 공한 것이 곧 부처다.
부처라고 하면 우리는 외형적으로도 사람보다 조금 더 우수한 어떤 모습으로 어떤 특정한 존재로서 딱 머리에 그리고 있다. 공한 자리가 곧 부처라고 하는 이런 법문을 무수히 들었어도 머리에 그리고 있는 그 의식이 도대체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조금만 문제가 있으면 부처님에게 매달리고 하다못해 부처님이 안되면 관세음보살에게 매달린다.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이나 그렇게 우리가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분들이 아니다.
성공즉시 불이다.
불가득사량(不可得思量)이로다: 존재의 공성은 생각이 미치지 않는 것, 사량분별로써 얻어질 자리가 아니다. 일체 존재의 공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
약지일체법(若知一切法)이 : 만약 일체법이 체성이 본체의 그 성품이
체성개여시(體性皆如是)면: 다 이와 같은 줄 알 것 같으면. 모든 존재의 공성이 곧 부처임을 알 것 같으면
사인즉불위(斯人則不爲) : 이러한 사람은 일체가 공한 줄 알 것 같으면
번뇌소염착(煩惱所染着)이로다: 번뇌에 염착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번뇌에 시달리지 않는다. 번뇌에 끄달리지 않는다. ‘그거는 공한 것인데 뭐’하고 가볍게 넘어가는 것이다.
아니할 예로 ‘내가 운영하고 있는 사찰의 화장실이 탔다’고 한다면 경제적으로 얼마나 손해가 많으며 속이 상하겠는가. 그래도 ‘사람 안다친게 천만다행이지. 화장실에 사람 없을 때 불 났으니까’ ‘아 본래 그건 공한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엉터리 예지만, 한 예로서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크게 고민할 것 없고 애쓸 것도 없다.
(3) 隨相不見佛
凡夫見諸法에 但隨於相轉하고
不了法無相일새 以是不見佛이로다
범부가 모든 법을 보면
단지 모양을 따라 구르고
법의 모양이 없는 줄을 알지 못할새
이로써 부처님을 보지 못하네
*
수상불견불(隨相不見佛):모양으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
상을 따라가면 부처를 못 본다. 남방의 일체 보살의 가르침과 서방의 승혜보살의 가르침 속에 금강경의 이치가 무르녹아 있다. 금강경 한 권이 요 두 분의 게송 속에 다 들어 있다. 상을 따라가면 부처님을 못 본다.
금강경 사구게인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해야 즉견여래(卽見如來) 상을 상이 아닌 것으로 봐야 부처님을 본다. 상 따라 가면 부처를 못본다’는 말 그대로다.
범부견제법(凡夫見諸法)에 : 범부가 모든 제법을 봄에
단수어상전(但隨於相轉)하고: 다만 상을 따라서 굴러다니고. 상을 쫓아서 다닌다. 우리는 상 따라서 굴러가기 때문에 처처의 상에 걸린다.
불요법무상(不了法無相)일새 : 법이 모든 존재가 형상이 없음을 알지 못할새
이시불견불(以是不見佛)이로다: 그러므로 부처를 못 본다. 그러니까 금강경에서 끊임없이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하고 또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 형상이나 음성을 좇아가면 끝내 여래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화엄경의 이런 구절은 고스란히 금강경의 엑기스다.
범부가 모든 법을 봄에 다만 상을 따라서 굴러다니고 좇아다니고 거기에 헤맨다. 상을 좇아다니니까 법의 무상을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상만 좇는 우리가 반성을 해야할 대목이다.
(4) 佛法一如
牟尼離三世하사 諸相悉具足하시며
住於無所住하사 普遍而不動이로다
모니께서 삼세를 여의시고
모든 모양 다 구족하시어
머무는 바 없이 머무시며
널리 두루 하셔도 움직이지 않으시네
*
불법일여(佛法一如): 부처님은 법과 하나이다
*
모니이삼세(牟尼離三世)하사 : 석가모니 부처님은 삼세를 떠나시사, 초월하시사
제상실구족(諸相悉具足)하시며: 초월한 상태에서 모든 상을 다 구족해서. 늘 중도를 말하는데 바로 그런 이치다.
주어무소주(住於無所住)하사 : 주할 바 없는 곳에 머무사
보변이부동(普遍而不動)이로다: 널리 두루해서 동하지 아니하더라. ‘상이 없다’고 이야기하면 또 거기에 떨어지니까 이런 중도적인 안목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5) 了法見佛
我觀一切法하고 皆悉得明了하니
今見於如來에 決定無有疑로다
내가 모든 법을 관찰하고
모두 다 분명하게 요지하니
이제 여래의 뵈옴에
결정코 의심이 없네
*
요법견불(了法見佛): 법을 앎으로 부처님을 본다
*
아관일체법(我觀一切法)하고 : 내가 일체법을 관찰하고
개실득명료(皆悉得明了)하니: 다 다 명료함을 얻어서.
모든 존재를 보면 보는 대로 그 실상을 환하게 안다는 것이다. 꽃을 보면 꽃을 보고 산을 보면 산을 보고 하늘을 보면 하늘을 보고, 보는 대로 그 실상을 환하게 본다. 공성(空性)까지 안다는 것이다.
서양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해서 번역을 하는데 어떻게 번역을 했느냐. 유명한 미국의 칼럼니스트가 불교 책을 썼는데 ‘컵을 가지고 이 컵이 깨져있다고 생각하고 사용한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실컷 외우고도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른다.그런데 그것을 ‘이 컵은 내가 사용하지만 이미 깨져 있는 컵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한다’고 해석한 것이다.
나중에 언젠가 깨질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깨져 있는 컵이라고 생각하고 사용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이렇게 번역했다니 놀랄만한 일이다.
우리 불교가 이렇게 번역이 되어야 세상 사람들하고 접근이 잘 되고 소통이 잘 될텐데 우리 식으로 통하는 말만 가지고 자꾸 읊조리니 이것이 큰 문제다.
종교의 가르침이 다른 나라에 전파될 때 그 교리를 번역하는 것이 큰 영향을 끼친다.
이웃종교에서는 그 사람들이 말하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서 얼마나 큰 소득을 보는가. 단순히 신이라고 해도 우리한테 다 통하는데 ‘하나님’이라고 번역을 해버렸다. 아주 근사한 번역이다. 번역하나 잘해서 얼마나 큰 소득을 보는지 모른다. 그 번역 하나 때문에 그 종교가 그렇게 활개를 치는 것이다.
예를들어서 불교에서도 관세음보살을 어머니라고 번역을 해도 좋다. 그렇게 번역한 스님도 더러 있다. 물론 설명이 약간 필요하지만 그 편이 훨씬 관세음보살이 의미가 더 잘 다가온다.
금견어여래(今見於如來)에 :지금 여래를 보매. 또 여래의 가르침을 보매.여래를 본다고 하는 말은 ‘여래의 가르침을 우리가 공부 함에 있어서’라는 뜻이다.
결정무유애(決定無有碍)로다:결정코 의심이 없더라.
이치를 알고 보니까 전혀 의심이 없더라. 일체법을 관하는데 명료하게 본다. 그 실상까지 꿰뚫어본다, 컵이 깨져 있는 것으로 알고 사용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몸도 죽은 몸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그 삶이 보너스다.
실제로 그것을 뼈속 깊이 우리가 사무치게 이해하고 있다면 얼마나 가뿐한가. 지금 우리 사는 것은 하루하루가 그냥 보너스다. 가뿐하고 기분이 좋다.
감기 조금 걸리고 어디 조금 아프고 해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로가 덤인 것이다. 이미 나는 송장이다라고 생각을 하고 살면 그 순간 아주 횡재를 한 것이다.
화엄경 한구절 보고 호흡한 번 하고, 눈을 떠서 산천초목을 바라보고, 귀로써 온갖 소리 다 듣고, 텔레비전도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전부 덤이다. 그대로 횡재다.
‘야 나는 죽은 몸인데 이렇게 산다’ 이런 명상을 한 번 해 볼 필요가 있다.
(6) 推德法慧
法慧先已說 如來眞實性일새
我從彼了知 菩提難思議로다
법혜보살이 나보다 먼저
여래의 진실한 성품 말하시니
나는 그를 따라서
난사의(難思議)한 보리를 알았노라
*
추덕법혜(推德法慧): 공덕을 법혜보살에게 미루다
*
지금 남방의 일체혜보살이 게송을 읊는데 그 덕을 다 법혜보살에게 미룬다. 가끔 이런 식의 글이 나온다.
법혜선이설(法慧先已說): 법혜보살이 이미 여래의
여래진실성(如來眞實性)일새 : 여래의 진실성을 이야기 했을새
아종피요지(我從彼了知): 나는 그 분 법혜보살로부터
보리난사의(菩提難思議)로다: 깨달음의 불가사의한 이치를 알게 되었다.
|
첫댓글 _()()()_
處處佛像 事事佛供...화엄경의 안목 _()()()_
_()()()_
고맙습니다. _()()()_
화엄경을 만남이 내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보람이며, 최고의 복이다....많이 힘드셨지요? 혜명화 님!! _()()()_
_()()()_
고맙습니다.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_()()()_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