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평성당에서는 2018년 5월20일 성령강림 대축일을 맞이하여 신종호 (분도) 주임신부님, 정 이레네 수녀님을 비롯한 164명의 교우들이 함께 한 가운데 문경 '마원성지, 진안리 성지, 여우목 성지' 등 성지 세곳 순례와 하늘재 산책을 통하여 신심을 다졌습니다.
이번 행사는 신자들의 화합과 전신자들이 선교의 선봉이 되자는 의지를 다진다는 차원에서 선교위원회(위원장 김승룡 요셉)가 주간이 되어 실시 하였습니다.
행사일정은 성당에서 오전 8시10분에 출발하여, 고속도로에 진입하면서 아침기도와 한반도 평화 정착과 교구 쇄신과 발전을 위한 묵주기도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지순례는 시작되었습니다. 선산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마원성지로 이동했고, 성지에 도착하기 전에 봉사자를 통한 '하느님의 축복'을 위한 기도와 마원성지에 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0시 20분경에 마원성지에 되착하게 되었습니다.
곧 바로 야외 미사를 드리고, 신자들이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구역 및 반별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화합과 친교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12시 50분경부터 '진안리 성지와 여우목 성지'를 순례하고 '하늘재' 산책으로 힐링의 시간을 가지고, 오후 3시 50분에 문경일원에서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하였으며, 이동하면서 묵상과 마침기도를 바치고, 오후 6시 30분 성당에 복귀함으로써 모든 일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오늘 행사는 주임신부님과 수녀님의 지도아래 김성룡(요셉) 선교위원장이 중심이 되어 봉사자분들이 역할을 충실히 해 주심에 따라 알차게 이루어 졌습니다. 정평성당의 '빛과 소금'의 슬로건처럼 서로 배려하고 화합하고 단합하는 모습을 충분히 보여준 성공적인 순례였습니다.
특히 마원성지 야외미사 강론 중에 신부님께서 '날씨가 살아 있다'고 하신 말씀과 '마원성지는 신부님과 평신도와의 관계형성의 성지로 순종순명의 얼이스며 있고 주님께서 흘리신 피와 물이 평화의 상징이라는 강론 말씀'은 성지순례의 목적을 잘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날 미사 봉헌예물은 적액 문경성당에 전달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교선열들의 얼과 사방의 아름다운 자연이 더욱 의미 있는 성지순례를 할 수 있게 하였고, 신자들의 얼굴에는 살아 있는 신앙을 실천하겠다는 의지가 역력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문경성당 회장님의 성지에 대한 설명에 더욱 진지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들었으며, 밝으면서도 더욱 엄숙게 순례에 참여하였습니다. 성지에서 나름대로 느낀 바를 생각하면서 다시 한번 성지에 스며있는 얼을 되새기면서 우리 정평성당의 슬로건인 '빛과 소금'의 신앙생활이 될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고 화합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원성지는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하리 백화산(白華山, 1063.5m) 자락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이다. 영남의 관문인 새재 아래 위치한 문경시 마원에는 일찍이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충청도 지역의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어 인근 교우촌처럼 화전을 일구며 살던 유서 깊은 교우촌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새재를 넘어 마원까지 미쳤고, 이때 마을의 교우들이 체포되어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되어 갖은 고문과 혹형을 당한 끝에 순교했습니다.
현재 마원에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남아 있습니다. 칼래 신부의 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가 일어난 뒤 박 마티아는 좁쌀을 사기 위해 한실 교우촌에 갔다가 그곳에 숨어 있던 칼래 신부를 더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집을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사람에게 발각되어 3일 만에 새벽을 틈타 새로운 은신처를 찾기 위해 다시 한실로 가야 했는데, 한실 교우촌이 보이는 산에 오르자 칼래 신부는 박 마티아가 위험에 빠지는 것을 염려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명했습니다. 칼래 신부의 명에 순명하여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온 박 마티아는 그 해 12월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갔고, 옥에 갇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문경 인근에서 잡혀온 교우들을 권면하며 순교의 용기를 북돋워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867년 1월 옥중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했고, 가족들이 그의 시신을 찾아 고향에 안장했습니다.
박상근 마티아의 묘는 1983년 초 처음 발견되어, 1985년 9월 현재의 위치에 조성한 새 무덤으로 이장했습니다. 1995년 초 문경지구 사목협의회는 성지 개발을 위해 주차장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로를 새로 개설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북도의 사도인 칼래 신부와 순교자 박 마티아의 장한 믿음과 숭고한 우정을 상징하는 동상과 부활하신 예수상, 십자가의 길, 성모상 등을 세우고 1996년 10월 3일 동상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박상근 마티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마원성지에서 백화산 중턱의 힌대미 교우촌을 거쳐 백화산 너머의 한실 교우촌까지 박상근 순교자와 칼레신부가 박해를 피해 넘었던 길을 따라 걷는 순례코스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원성지는 우리 정평성당에서 2007년 10 월 28일 가을에 왔던 곳이라 더욱 의미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 순례지인 '진안리 성지'는 소백산맥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조령(일명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숙종 34년에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이곳이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1836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49년 4월 15일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활동은 12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울주군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습니다. 그 해 11월 초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을 중심으로 1999년 진안리 오리터에 마련한 356평 규모의 부지에 대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2000년 5월과 11월에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를 설치했습니다. 이어 조경공사를 마친 후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제대 뒤에 조형 벽체를 세우는 등 순례자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순례지인 '여우목 성지'는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으로 예로부터 경상도 동쪽 지방의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위해 이 여우목 고개를 넘어 문경읍내와 새재로 넘어갔던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충청도 홍주 출신의 이윤일 가정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지방의 첫 신자인 서광수의 손자인 서치보 요셉 가정도 박해를 피해 이곳에 와 살기 시작했습니다. 여우목에서 살다가 상주와 경산 등지로 피난 갔던 서치보의 아들 서인순 시몬, 서익순 요한, 서태순 베드로는 병인박해 때 순교했습니다.
당시 여우목 교우촌의 회장이었던 이윤일은 농사를 짓고 살면서 외교인들을 권면하여 30여 명을 입교시켜 큰 교우촌을 만들었습니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1월 문경 포졸들이 들이닥쳐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문경 관아로 끌려갔다가 상주 진영으로 압송되어 수차례 문초를 받고 ‘사학의 두목’이라 하여 다시 대구로 이송되어 1867년 1월 관덕정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여우목 성지를 관리하는 문경 성당은 서공석 신부의 도움으로 교우촌 터 부근에 1255평 규모의 부지를 마련하여 1999년 9월 서치보와 서인순의 묘를 이장하고 다음해 4월 대형 십자가, 11월 제대·성모상·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꾸준히 조경 작업을 실시하여 2002년 9월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 특히 여우목 성지는 베로니카 할머니의 신앙 증거병인박해 때 이윤일 성인 등 30여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갈 때의 일을 기억할 필요가 있는 곳입니다. 중평리 여우목 밑의 마을(현재 개신교 교회가 들어서 있는 곳)에 살던 베로니카란 80대 할머니도 함께 포졸들한테 붙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고령의 베로니카 할머니는 다리를 절면서 잘 걷지를 못했습니다. 자연히 끌려가는 대열에서 자꾸 처지자 포졸들이 고함을 지르며 나무랐습니다. "왜 할머니는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놓아줄텐데 절뚝거리며 따라 가느냐?”고. 그렇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베로니카 할머니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포졸들에게 되물었습니다. “살아계신 천주님을 어떻게 계시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느냐?”며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증거했습니다.노쇠한 베로니카 할머니와 포승줄을 끌어당기는 포졸들과 실랑이가 세 번째 오가다 우두머리 되는 자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래, 죽는게 소원이라면 죽여주지” 베로니카 할머니는 끌려가다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베로니카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 자리에‘여기는 중평리, 여우목 성지 1.5km’라는 표지석이 세워져있습니다.
문경하늘 재는 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에서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525m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뚫린 고갯길로 삼국시대(156년) 때 신라의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하였다. 고구려 온달과 연개소문은 빼앗긴 하늘재를 다시 찾기 위해 끈질긴 전쟁을 벌였으며, 고려 공민왕은 홍건적을 피해 몽진(蒙塵)할 때 이 길을 이용했다고 한다. 이렇듯 교통의 요지이며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으나 조선 태종 때 새재길이 열리면서 그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전에는 계립령(鷄立嶺), 대원령, 지릅재 등으로 불렀으나 요즘에는 거의 모든 지도에 하늘재라 표기하고 있다. 오래된 세월만큼 길 양쪽에는 전나무, 굴참나무, 상수리 등 다양한 나무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문경 쪽에서 오르는 길은 고갯마루 가까이에 사는 주민들을 위해 포장을 해 놓았으나 미륵리 쪽은 비포장도로이다. 2001년에 문경시에서 세운 계립령유허비가 있다.
첫댓글 소상하고 간결한 문장의 홍보위원장님의 글은 다시 순례 현장에 와 있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청하한 사진들이 큰 화합의 우리들 모습입니다. 고맙습니다. 홍보위원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