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반지 끼고 / 은희 ◈
생각난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끼고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가버린 가슴 아픈 추억
생각난다 그 바닷가
그대와 둘이서 쌓았던
모래성 파도가 밀리던 그 바닷가도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그대가 만들어준 이 꽃반지
외로운 밤이면 품에 안고서
그대를 그리네 옛일이 생각나
그대는 머나 먼 하늘에 저별
음~ 음음음~
☞ 꽃반지끼고 / 은희
▒ [꽃반지 끼고] 가요계를 강타한 비바리..[은희]
은희만큼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모았던 1세대 포크 여가수는 없었다.
1년후에 데뷔한 국가대표급 포크가수 양희은도 은희의 인기를 능가하지
는 못했다. 1970년대 초반 발표되는 곡마다 트로트 가수들을 제치고 가요
차트의 상위군에 랭크되었던 통기타 가수는 은희가 유일했다.
애간장을 태울만큼 달콤하고 상큼했던 그녀의 노래들은 학생층에 국한되
지 않은 폭넓은 계층의 사랑을 받았다. 대표곡인 [사랑해]. [꽃반지 끼고]
등은 국민적인 연가로 지금은 애창되고 있다. 하지만 높은 인기 만큼이나
당돌하고 튀는 행동으로도 유명했던 그녀는 대중의 관심을 몰고 다녔던
뉴스 메이커였다.
본명이 김은희인 은희는 1951년 5월13일 제주도 모슬포의 평범한 집안에
서 2남1여 중 막내로 태어났다.6살때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 제주지점장
이던 부친의 정년퇴직을 한 이후 집안사정은 어려워다.
하지만 제주남 초등학교 시절 제주방송국의 어린이 합창단원과 어린이
성우로 활약할 만큼 그녀는 예능부문 솜씨로 인기 만점의 소녀였다. 그녀
는 뛰어난 예능소질로 입학료를 면제받고 제주여중에 진학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그녀는 방과후 음악실에 홀로 남아 피아노를 연습할
만큼 음악에 빠져 들었다. 제주여고 때는 민속예술단의 일원으로 전국민
속경연 대회에 참가, 제주 해녀의 춤 솜씨를 뽐내기도 했다.
1967년 12월 여고1학년 겨울방학때 은희는 서울구경을 위해 내무부(현
행정자치부)에 근무하는 작은 오빠 집에 상경했다. 어머니가 선물한 손목
시계를 잃어버렸다는 이유로 작은오빠에게 꾸지람을 듣자 고향으로 내려
온 후 집안으로 발칵 뒤집어 놓는 대사건을 터뜨렸다.
1968년 1월, 홧김에 어머니에게만 귀뜸을하고 가족들 몰래 여군에 지원한
것이다. 뒤늦게 집안이 난리가 났지만 그녀는 이미 서울에서 여군훈련을
거친 후 대구에서 육군 제2군사령부소속 여군타자병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충동적으로 여군에 입대했을 만큼 그녀는 당돌하고 자유분방한 소녀였다.
군에서도 작지만 노래잘하고 귀염성 있던 은희는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 여군생활에 싫증이 났던 그녀는 또 한번 사건을 터뜨
렸다. 1968년 6월15일 보름간의 정기휴가를 얻는 김은희 일병은 귀대하지
않았다. 탈영을 한 것이었다.
가정으로 돌아온 후에는 서울예고 2학년에 전학해 학업을 마쳤다. 1970년
3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은희는 서울의 [살롱]가에서 무명가수생활을 시작
했다. 당시 새롭게 결성된 이필원, 박인희로 구성된 혼성 듀엣 뚜와에무와의
인기는 대단했다.
이에 자극 받은 세기음악학원 기타 강사 출신 무명가수 한민은 혼성 듀엣
결성을 위해 여성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무명 통기타 가수 김은희는 세기
음악학원 오르간 강사 김학성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었다.
그의 소개로 한민을 만났다. 맑고 청아한 고음으로 노래하는 김은희의 목소
리에 반한 한민은 이탈리아어로 개구리와 두꺼비라는 뜻의 [라나에로스포]
란 이름으로 혼성듀엣을 결성했다.
대학가에 흘러 다니던 주인이 분명치 않던 [사랑해]를 타이틀곡으로 1970
년 8월부터 화음연습을 하며 녹음작업에 들어갔다.
1971년 1월, 첫 음반 [사랑해-성음]이 발표되자 마자 그녀는 [한민과는
성격이 맞지 않다]며 돌연 솔로가수로 독립해 버렸다. 당시는 남녀 혼성
듀엣에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시기. 석연치 않은 이유로 팀을 탈퇴해 미
8군 무대와 청개구리 홀에서 미니 리사이틀을 벌이며 솔로가수로 활동했던
은희에게 [미국 유학생인 남자친구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탈퇴를 했다]는
소문이 뒤늦게 나오기도 했다.
음반 발표가 되고 몇달이 지나자 [사랑해]는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또한 [사랑해]의 애절한 노랫말은 중앙대생 오경운이 백혈병으로 죽은
애인을 그리며 지은 곡이라는 애틋한 사연과 더불어 여자 목소리의 진짜
주인공이 2기 라나에로스포로 활동하고 있던 최안순이 아닌 은희로 알려
지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가요계의 기인으로 유명했던 우주 프로덕션의 황우루가 관심을 보이며
찾아왔다. 그는 1971년 3월 은희를 스카우트해 자신이 경영하던 그랜드레
코드사에 전속시켜 첫 독집음반 [꽃반지 끼고-유니버셜]를 발해했다.
오랫동안 변혁 편곡, 은희 작사로 알려진 이 노래는 일본 곡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김세환도 제목만 [오솔길]이고 [꽃반지 끼고]와 가사내용이 같
은 곡을 몇달후에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누가 진짜 주인이냐는 의문을 품게 되자 장안의 화제
로 떠올랐다. 사실 이 노래는 60년대말 마닐라 아시아 잼보리 대회에 일본
팀의 일원으로 참가한 한 재일교포가 작곡한 곡이었다.
이 곡은 은희 이전에 이미 김세환이 방송과 밤무대에 불렀다. 김세환은
[종로의 출연업소에 은희가 찾아와 이 노래를 취입하고 싶다고 했지만
취입을 앞두고 있는지라 거절했었다. 헌대 원제목인 (오솔길)을 (꽃반지
끼고)로 바꾸고 가사도 조금 수정해 먼저 음반을 발표해버려 황당했다]
고 털어놓았다.
◈ 인기와 염문을 먹고 자란 신델렐라 ..[은희]
단순하고 쉬운 멜로디에 애절하게 여성적인 매력을 발산한 은희의 [꽃반지
끼고]는 김세환의 [오솔길]을 누르고 빅 히트를 터뜨렸다.가히 폭발적이었
다. 1970년대 초반은 포크 음반의 경우 5천장만 팔려도 큰 사건이었던 시절.
그러나 은희의 첫 독집 음반은 7만장 이상이 팔려 나가며 일약 스타의 디딤
대가 됐다.
출연 업소였던 극장식 클럽 [라스베가스]는 6만원이던 개런티를 27만원으
로 올려 주었고 지방공연은 [보수가 적다]는 이유로 거절할 만큼 그녀는 톱
클래스 가수로 대접 받았다.
이에 한국연예개발협회는 주목받던 트로트 가수 이현과 함께 은희를 [10월
의 가수]로 선정, 인기 가도에 가속을 붙였다. 순식간에 인기 가수로 떠오른
은희는 이때부터 눈 수술을 하는 등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비유될 만큼 은희는 모든 음반회사의 영입대상 1순
위에 올랐다. 법정 사건으로 까지 비화된 [스카웃 사건]은 대표적 예다. 1년
반 동안 월 1만원(당시 쌀 한 가마 값)씩 개런티를 주기로 하고 전속계약을
맺었던 우주 프로덕션의 황우루는 신인 가수 은희를 과소 평가했다.
그는 음반이 예상치 못했던 빅 히트를 기록했음에도 추가 보너스를 일절 주
지 않았다. 불만을 느끼고 있던 그녀에게 지구 레코드는 거금 100만원을 들
여 이중 계약을 맺는 스카웃 전을 펼쳤다.
이에 [50배의 위약금을 물게 하겠다]며 격분한 황우루와 지구레코드 간에
맞고소 시비가 빚어지자 이번엔 오아시스에서 [120만원을 주겠다]며 뛰어
들면서 사태는 점입가경으로 치달았다.
삼파전 최후의 승자는 계약금 130만원을 제시한 지구레코드. 둥지를 옮긴
은희는 곧 이어 작곡가 홍현걸과 함께 [꿈길]이라는 지구레코드 전속 기념
음반과 캐롤집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연속으로 발표했다.
그녀의 히트 퍼레이드는 그칠 줄 몰랐다. 1971년 말, 은희는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과 함께 MBC 10대 가수상에서 여자 신인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무궁화 인기상과 광주기독교방송의 신인상 등 서울과 지방의 언론사
가 수여하는 신인상을 휩쓸어 버렸다. 하늘을 찌르듯 치솟는 인기로 모든
야간업소의 구애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불발로 그치기는 했지만 영화 출연
제의도 들어왔었다
주간한국 연예기자 출신인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정홍택씨는 [데뷔시절
은희는 그야말로 상큼했다. 큰 눈망울로 항상 웃고 있는 모습에 노래까지
(꽃반지 끼고)였으니 자신의 이미지와 딱 맞아떨어졌다. 사방에서 출연 교
섭이 밀려들 만큼 인기가 대단했다. 또한 돈이 생기면 우선 기타부터 살 정
도로 기타 사랑도 유별났다. 작은 키에 높은 구두를 신은 채 커다란 기타
케이스를 옆구리에 끼고 뒤뚱뒤뚱 명동을 휘젓던 다니던 모습이 기억난다]
고 회상했다.
하지만 1972년 초 KBS라디오의 신년 특집 프로에 서유석과 함께 출연해
[트로트 가수도 가수냐]는 튀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는 앳되고 여린 목소리와는 달리 당차고 자기 주장이 강했던
여성이었다. [트로트 가요 시비] 이후 가요계의 신데렐라 은희는 온갖 루
머에 시달려야 했다.
방송국에 근무하는 A라는 30대 청년과의 염문설도 그 중 하나였다.
또 [미국 콜롬비아대학에 유학중인 한 살 연하의 강호동을 ‘호’라는 애칭
으로 부르며 애인으로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악의적인 동거설로 확산돼
당시 모든 주간지의 지면을 뜨겁게 달궜다.
뒤이어 72년 3월, 4년 전에 저질렀던 [여군 탈영병]문제가 발각되어 군
관계 기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높은 인기는 끝임 없는 구설수라
는 가혹한 대가를 요구했다.
하지만 1972년 8월 평양 남북 적십자회담장에서 남과 북의 대표단장이
손을 맞잡고 데뷔 곡 [사랑해]를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념과 사상
의 색깔이 없이 화합을 이끌어내는 긍정적인 내용을 담은 [사랑해]는 자연
스럽게 남북회담장에서 합창되었다.
분단 이후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 [사랑해]는 불멸의 국민가요로 자리
잡게 되었다. 용기를 얻은 은희는 72년 말, 20일간의 일본 공연을 치러냈다.
이와 함께 변혁과 [사랑의 자장가], 박춘석과 [호반의 메아리], 정민섭과
[쌍 뚜아 마미], 남국인과 [꿈속의 소녀], 이민우와 [잊을 수밖에] 등 여러
작곡가들의 곡을 받아 음반으로 발표하며 정상의 인기를 회복하려 했지만
데뷔 때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은희는 1974년 결혼 후 1976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적극적인 성격의
그녀는 평범한 주부의 길보다는 뉴욕 주립대에서 패션 공부와 더불어 문신
제거 등 특수 미용술을 배우며 자기 개발을 꾀했다.
1985년, 10년 만에 제주도로 돌아와 제주시 중앙로에 개업한 미용실 [백악
관]은 새출발의 시험대였다.사업 경험을 쌓아가던 1988년 강남구 신사동에
국내 최초의 토털코디네이션 업소인 [스톤 아일랜드]를 개업하며 사업가로
일신했다.
지난 1991년에는 매장의 지하에 [돌 섬 사랑]이란 사진 전시장을 마련해 화
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는 제주의 전통 옷감인 갈옷을 독점 개발하여 서울
인사동에 [봅데강]이라는 의상 스튜디오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노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녀는 1996년 KBS TV의 [빅쇼]를
통해 20여 년 만의 재기를 이뤄냈다. 이어 2002년 7월 31일에는 MBC FM 라
디오 [즐거운 오후 두시]에 김세환, 양희은과 함께 출연하는 등 적극적이진
않지만 가수의 끈을 결코 놓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근 은희씨는 서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산남리, 옛 손불남초등학교 터에 천연염색 문화공간 [민예학당]을 꾸며서
천연염색 전문가로 변신하여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큼큼~
☞ 자료출처 / 주간 한국에서..
◈ 당신의 마음 / 은희
☞ 아래의 곡은 은희의 모음곡임돠~!
한곡이 끝나면 다시 재생 플래이를 클릭하여 감상하시길..^(^
01. 이별이라 하지마오
02. 쌍뚜아마미
03. 학창시절
04. 연가
05. 꽃반지 끼고
06. 사랑해 당신을
07. 등대지기
08. 물망초
09. 축제의 노래
10. 에델바이스
11. 하얀 모래위의 발자욱
12. 오솔길(꽃반지 끼고)
13. 회상
14. 사랑의 기쁨
15. 마리아
16. 꿈길
17. 고향생각
18. 그리움
19. 꿈은 사라지고
20. 진실한 사랑(Over And Over) 2009/03/04 - 헛제비 -
첫댓글 추억의 꽃반지 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