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란
지금까지 닫아 둔 것을 열고
열려 있던 것을 닫기 위해
선을 긋는 것이다.
또한 자유로웠던 것을 가두고
갇혀 있던 것을 해방하는 것이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혼생활에서 심각한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69.
혼인을 하는 것은 이온 결합을 뜻한다.
그러기에 제 3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면
그 혼인은 깨어져 버린다.
삼각혼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70.
주례가 결혼식을 주관하여 두 남녀를 맺어주는 것은
결혼의 파기를 스스로 할 수 없게 함이다.
`서로 사랑한다.`
`우리는 희로애락을 평생 같이 할 것이다.`
라는 그들의 맹세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례가 계속 이 일을 하면
결혼을 하는 것도 결혼을 파기하는 것도
그들의 책임이 아니게 된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스스로 결혼을 선포하여야
결혼이나 파혼이 그들의 책임이 되지 않을까.
71.
제사를 `차례(茶禮) 지낸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차례를 익힌다.`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차례란 순서를 의미한다.
차례란 순수한 우리말이다.
어느 학자가 평화와 전쟁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평화는 아들이 아버지를 묻으러 가고
전쟁은 아버지가 아들을 묻으러 간다.”고.
제사는 순서를 가르침으로써
질서를 세우는 데 목적이 있다.
어디서부터 와서 현재에 어디에 서 있는가를
일깨우는 것이다.
72.
가족 중에 누군가가 억울하게 죽었을 때
원한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원한이 일깨워지기 때문이다.
73.
제왕의 제사는 낮에 지낸다.
그런데 왜 백성의 기제사는 밤에 지내는가.
죽어서 귀신이 되었기에 닭이 울기 전에
제사음식 조금 얻어먹다가 후딱 달아나야 한다.
자기 선조의 영이 그런 신세다.
이것은 봉건사회의 유물이다.
봉건군주들의 백성에 대한 사고였다.
그들 외에는 모두가
그들의 소유물 내지 가축정도로 비쳐졌겠지.
죽어서까지도 그들의 영역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해뜨기 전에 농사터로 일나가야 했던 농경사회에서는
밤에 모두 모이기가 편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지금은 봉건사회도 아니고 농경사회도 아니다.
자신의 선조를 광명세계로 모셔와야 할 때이다.
해가 밝아오는 아침에 제사를 모시면
어린 자손도 제사에 참여시켜
혈연의 귀중함과 가계의 순서를 가르칠 수가 있다.
제사는 질서요, 권위이다.
과거에는 여성을 제사에 참여시키지 않기 위해서
음식을 장만하는데 묶어두었다.
물리적인 힘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던 시대에는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가.
앞으로는 어떨까.
여성들은 아마 당당하게 남성들의 영역에서
더욱 훌륭하게 활동할 것이다.
미래는 모계사회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도 어머니와 큰누나가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지니게 될까.
혹이나 여성 위에 군림하려 시도하다가
오히려 여성에게 천대받는 자가 되지나 않을까.
그 외에도 제사를 지내는 데는 여러 가지의 폐단이 있다.
제사가 많은 집안의 장손은 제대로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고
큰며느리는 제사음식과 손님접대로 찌들 수밖에 없다.
앞으로 장손은 아예 장가를 들 수 없을지도 모른다.
동서들간에도 속상하는 일이 많게 된다.
아직도 죽은 영령이 먹지도 않을 음식을 장만하면서 생기는 병폐를
그대로 계속해야 하는가.
생각해봐야 하고 그 병폐를 개선해야 하지 않을까.
74.
지묘는 농경사회의 유물이다.
문전옥답이 있고,
마주 보이는 산등성이에 선령의 지묘가 있고……
얼마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풍경인가.
그러나 지금은 정보사회, 지식사회, 이동사회이다.
물질에서 정보, 근육에서 신경, 육체에서 정신으로
주체가 변화하고 있는 시대이다.
이 때에도 한 생을 끌고 온 물질 육신을 보존하고
그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오히려 그 사람의 일생의 경력,
그 삶의 주도적인 사상과 철학 등이
존엄한 가치를 인정받게 되어야 하지 않는가.
토지손실, 교통문제, 황폐화하는 지묘……
이대로 계속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화장(火葬)을 해서
산이나 들에 뼛가루를 뿌려버리고 말 수도 없다.
그렇게 해버리면 선조와 자손의 연결고리가 없어지고 만다.
또한 미국에, 남미에, 중국에,
형제들이 흩어져 살 수도 있다.
자주 고향을 찾을 수가 없다.
여기에 해답이 있다.
화장을 하여 사리를 만들어 봉안하는 방법이다.
멀리 가서 살 형제가 부모의 사리를 나누어 가져 갈 수도 있다.
제사 때에도 지방을 써 붙일 필요가 없다.
사리를 모시면 된다.
그러면 교통, 토지, 후손과의 단절, 지묘 황폐 등등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아울러 눈곱만큼의 피부조직만 보관해도
미래에 복제되어 환생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되지 않을까.
75.
부모는
자식이 토라지거나 투정하게 용납치 말고
거칠지는 않으나 강하게 되게 하며
사정을 호소하게 하지 말고 사정을 극복하게 하며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하되 정(情)에 묶이지 않게 하며
쓰러져도 금방 일어날 수 있게 가르치며
모든 사물에 관심을 갖고
더욱 확대해 보며
더욱 멀리 보며
서로 이어 보게 하는
습성을 길러 주라.
76.
부모는 자식을 대할 때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말라.
한 몸 중에 차별할 부분이 없고
젖 주는 모습이 다를 수 없듯이
자식은 다 같이 태어나 점점 자라 또 부모가 되니
머리 속에 토라짐과 투정을 심지 말고
절대로 자식을 차별하지 말라.
형제가 서로 정답게 되도록 가르치는 것은
모두 부모의 몫이니
부모가 서로 존중하고 받들면
자식은 자연스레 존중과 사랑을 배우게 된다.
77.
형제는
부모의 기가 퍼져 여러 형(形)이 된 것이니
튼튼하고 정다우면서도
서로의 형(각자의 삶의 형태)을
중요하게 보장해 주어야 하며
도울 수 있게 되어야 하며
도움을 거부하거나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게 되어야
튼튼한 형제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형제 중에 하나가 불쾌하게 서 있으면
다른 형제들이 달래고 정답게 하여야 하며
무관심하게 팽개쳐서는 안 된다.
때로는 다른 형제의 좋지 않은 기운들을 혼자 다 받아서
고통받고 일그러지고 쓰러져 슬퍼하는 형제도 있다.
오염된 하수구는 폐수를 버린 자들이 청소할 책임이 있듯이
서로가 도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78.
자식과 부모는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아니라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따르는 관계이다.
79.
작은 효도는
부모에게 맛있는 음식 드리고
좋은 옷 입혀 드리며
마음 편히 해 드리는 것이고
큰 효도는
부모가 살아 계실 동안
영혼을 깨우쳐 드려
맑고 밝은 영혼으로
인생을 가치 있고 보람되게 살게 해 드리고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는
부모가 못 다 이룬 뜻을 이루어내며
영을 천도하여 높은 차원으로 구해 드리는 것이다.
80.
형제간의 기조정은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니
부모는 형제간에 차별을 두지 말고
형제 중에 어느 편을 특별히 들지 말고
특별히 어느 누구만을 칭찬하거나 지적하지 말며
형제를 서로 비교하지 말고
공정하게 조정해야 하며
서로의 거처를 잘 조정해 주며
형제들 모두가
부모의 삶을 좋은 표로 삼을 수 있게 되면
형제들은 서로 사랑하고 뭉쳐서 큰 힘을 가지게 된다.
81.
부부간의 기조정은
서둘러 결정하지 말고
힘든 짐을 같이 지며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말고
상대를 지도하려 말고
타인이 간섭하게 하지 말며
모든 것이 다 좋아지게 바라지 말고
포기할 것은 포기해 버리며
움츠리지 말고 먼저 안아 주면 된다.
82.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기조정은
시아버지와 아들의 역할이 중요하니
시아버지는
며느리의 잘못을 같이 지적해서는 안되며
며느리를 감싸주면서도 아내는 달래 주어야 하고
아들은
먼저 아내를 나무라고 어머니께 용서를 빌며
나중에 아내를 달래 주어야 한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영역을 보장해 주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따돌리지 말라.
시어머니는
타인에게 며느리의 결점을 말하지 말고
며느리는 타인에게 시어머니를 비난하지 말며
타인에게 서로 칭찬하고 화목함을 보이려 하라.
83.
아버지와 자식간의 기조정은
엄마의 역할이 중요하니
엄마는
자식의 편을 들어 변호해 주거나
아버지의 편에서 같이 나무라서는 안 되며
아버지의 잘못을 자식의 앞에서 지적하거나
자식과 같이 뭉쳐서 아버지께 대항하거나
아버지의 훈계를 중도에 가로채거나
도중에 꺾어서는 안되며
자식이 아버지에게 따지고 대들도록 용인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아버지의 훈계가 감정에 치우치지 않도록
분위기를 잘 만들어 주어야 하며
표정이나 태도를 단정히 하여
진지하면서도 서로 잘 통하여
정답게 되도록 보조해 주어야 한다.
84.
훌륭한 어버이는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하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들이 무엇인지도 알려주어
자식을 자기보다 크고 온전하게 되도록 기르려 하고
그렇지 않은 어버이는
자신의 것을 답습하게 하고
자신의 한풀이, 분풀이를 자식에게 하며
자신의 틀에 맞추어 다루기 쉽게 하려 한다.
어버이는 자식의 영혼을 구속하여 자기의 틀에 맞추려 말라.
그 영혼이 감옥에 갇혀 제한 받으면
`난쟁이`, `좀팽이` 영혼이 되고 만다.
85.
자식을 자기 그늘 속에 두고 싶어하는
침엽수적인 부모와
자기 품에서 밀어내어 온갖 경험을 쌓게 하는
활엽수적인 부모가 있다.
강한 활이 화살을 멀리 날려보내듯이
부모는 자식에게 열린 세계를 제공하고
많은 것을 경험하고 여러 곳을 여행하고
여러 사람들을 사귀면서 많은 것을 시도하게 해 주어야 한다.
86.
자녀를 키우는 어버이들이여!
자식을 훌륭히 키우려면
육신만 키우려 말고 영혼을 키워 주며
불평하는 것이 습관이 되게 하지 말고
힘들여 행하면 힘이 들어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세상 사람 모두가 가는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틀린 길이라면
그 길에서 벗어나
혼자라도 과감히 바른 길을 가게하며
힘을 써야 할 때와 힘을 써선 안될 때를
구분하여 가르쳐 주고
남을 비방하는 것을 용서치 말며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의 기쁨을 가르치고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을 가르치고
정리와 정돈을 명확히 하도록 가르치고
큰 뜻을 위하여 작고 부질없는 것을
과감히 놓을 수 있게 가르치라.
87.
부모는
불몸의 근원이기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무시하거나 적대하면
바로 자신에게 돌아간다.
자식은 탓을 부모에게 돌리지 말라.
탓은 부모가 아니라
불타는 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라.
자식은 구르지만 부모는 이미 굴렀으니라.
자식은 부모를 공경하고 계통을 이으며
뜻을 잇고 받들어 모자라지 않게 하려 해야한다.
자식은 부모에게 나쁜 표정을 짓지 말라.
쩔쩔매는 태도도 보이지 말라.
섭섭해하도록 하지 말라.
자식이 잘 자라고 병들지 않고 다치지 않고 추락하지 않고
삐뚤어지지 않고 어긋나지 않고 올바르게 되기를
부모는 바라고 있다.
88.
가족은 혈연관계이지만
영적인 인연으로까지 발전케 되면 좋다.
혈연은 전(傳)하여 져서 대를 이어가는 관계이지만
영적인 인연은 통(通)하여 지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혈연이 영연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대는 이어가지만 서로 통하지는 않는다.
118.
중국은 라디오의 시대에서
흑백 TV시대를 건너뛰어 칼라 TV시대로,
유선전화에서 바로 핸드폰시대로 건너뛴다.
99년 중국의 작은 도시 황산에 갔을 때 sign board에
`PDA Software 개발은 우리의 손으로`
라는 표어가 흐르고 있었다.
컴퓨터는 Desk-Note-Palm으로 간다.
Note book 시대를 건너뛰겠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나라에서 시행이 한창인 것은
중국에 오면 막바지에 이를 것이다.
그런 것은 건너 뛰어 버린다.
그것이 도약(跳躍)이다.
그 큰 대륙이 도약을 시도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떤가.
실패한 것일지라도 꼭 다른 나라의 전철을 밟는다.
외국에서의 선례가 없으면 아예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지도자들이 더 그렇다.
누군가가 새로운 제안을 하면 제일 먼저 묻는 말이
“외국에 선례가 있습니까?” 라고 한다.
이런 기막히고 한심한 일이 있나.
왜 우리가 세계 최초이면 안 되는가.
모두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종속에 길들여져 있는 것이다.
일제 종속의 꼬리는 길기도 길다.
정말 통탄할 일
은 이미 서양에서
자유방임교육이 실패였음을 자인하고 있는 데도
우리는 그 길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매를 없앤 것이 실수였음을
뼈아프게 반성하고 있는 데도
우리는 학교에서 매를 없애고
학생 모두에게 상을 준단다.
상이 무엇인지, 벌이 무엇인지
왜 상과 벌이 필요한지를 모르는 자들의 수작이다.
그저 힘든걸 하기 싫어하는 학생들과
제 새끼밖에 모르는 동물적 본능만 강화된 학부모들의
비위를 맞추기에 급급하다.
정말 우리가 시행착오를 건너뛰어 도약을 하지 않는다면
언제 인류문명을 선도하는 선진국의 꿈을 꿀 수 있겠는가.
119.
일년은 하루가 삼백 예순 다섯이 모인 것이야.
A : 그렇게 밖에 되지 않아?
B : 아니 그렇게 많아?
C : 누구의 느낌이 맞지?
느낌을 잣대로 삼는다는 것은 이렇게 불확실하다.
124.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가 되면 좋은가?
아니다.
해야할 것은 신나게 할 수 있고
해서는 안될 것은 정확하게 제어할 수 있는 사회이어야 한다.
125.
공용주차장마다
차가 꽉찼음을 알리는 팻말에 ‘만차’라고 써놓고 있다.
고속도로의 ‘안개상습지역’ 팻말을 ‘안개 잦은 곳’으로
‘사고다발지역’을 ‘사고 많은 곳’으로
사격장의 ‘일발필살’ 구호를 ‘일발백중’으로
바꾸도록 건의했더니
모두 그렇게 바꾸어 주었다.
모두가 스쳐 지나버리지 말고
깊이 생각하고 건의하여 고쳐나가게 해야 할 것이다.
공용주차장의 ‘만차’라는 팻말을
‘다 찼음’으로 고쳐 쓰면 어떨까.
126.
TV에서 남녀가 모여 앉아
낯뜨겁게 性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아예, 그런 방송을 계속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 性은 그래도 신비로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노골화되어 버린 지금 신비란 없다.
더 이상, 인간이 환상을 지니고 떠날
탐험의 대상이 없어졌다.
인간에게는 기대도 희망도 환상도 없다.
자연을 사랑해서 자연을 찾는다는 사람들이
사랑하기 때문에 찾아가서
오염시키고 망가뜨려 버리듯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왔던 性도
더 이상 추락시키지 말고
인간이 환상을 안고 떠날 신비의 곳으로
좀 묻어 두어 주었으면……
127.
요사이 사람들은
성행위와 사랑을 동일시한다.
심지어 동물이 교미하는 것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TV방송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사랑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말이다.
사랑이란 고귀한 단어를 너무나 저속하게 추락시켜 버린다.
인간도 다른 동물처럼 본능밖에 없는 것처럼 말해 버린다.
사람은 신체적으로는 동물적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영적 존재이다.
사랑을 원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행위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교미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교미가 단순한 수정 행위를 말한다면
성교는 성을 통해
인성, 영성, 감성 등을 교류함을 말하는 것이다.
128.
입자(粒子)와 반입자(反粒子)는
무게 등의 성질은 완전히 같으나,
전기적인 부호만 반대인 소립자라 한다.
원래 입자와 반입자는 대등한 것이어야 할 텐데
우주에는 입자의 수가 반입자의 수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우주가 균형을 잃고, 운행을 하게 된
태초의 동기가 된 것이다.
이것이 `태초불`이 아닐까.
완벽한 균형은 정지를 의미하고,
완벽한 열평형은 죽음을 의미한다.
세상에 사는 우리들 중에도 모습과 인성 등은 같아 보여도
기작용으로는 反粒子 같은 역할을 하는 자들이 있고,
기의 불균형으로 인해 인간 세상이 운영되며,
이 불균형의 동력에 의해 세상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것이다.
모든 국민을 다 균형 되게 살도록 하겠다던 공산주의는
이미 70년도 안되어 몰락해 버리지 않았는가.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의 모든 분야에서
이 불균형의 역할에 대한
좀더 깊은 연구와 이해, 응용 등이 되었으면 한다.
129.
고속도로 휴게소에 버려진 창당준비위의 신문을 보았다
.
거기엔 `우리가 주인이 되는 날`이라고 크게 쓰여 있었다.
누군가가 주인이 된다면 또 누군가는 종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모두가 잘 사는 날`
이렇게 쓸 수는 없었을까.
그러면 혹, 공격대상이 없어 힘없는 구호가 되고 말았을까?
130.
전에 중앙청으로 쓰다 박물관으로 쓰던 건물을 헐어 버린다는 말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건물이 무슨 죄가 있어 그렇게 허물어뜨리려 하는가.
왜인들이 설계했고, 왜인들이 쓰던 건물이라서 헐어낸다면
대륙침략에 쓸려고 만든 철도들도 다 뜯어내야 하지 않는가.
그야말로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 가서 눈흘긴다는 식이 아닌가.
우리를 압박하고 우리의 것들을 강탈해 간 그놈들에게 한을 품어야지,
왜 그들이 다 떠나고 없는 건물에다 한풀이를 하려는가.
또, 누군가는
`풍수지리상 근정전이 있어야 할 곳에 그러한 건물을 지어
우리 국토의 기를 꺾어 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해방 후 20년 남짓 넘으면서부터 경제적으로 부자가 되고,
풍수지리에 맞추어 근정전을 세웠던 이조는
왜 멸망해 버렸으며,
그 건물을 헐어 버린 지금 우리는 왜 IMF로 허덕여야 하는가.
진실로 미워해야 할 것과 미워할 필요가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겠다.
131.
고고학자들은
과거 그 당시의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사물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봤을까 보다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떤 집에서 살았고,
어떤 그릇과 도구들을 썼을까에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언젠가 도산서원에 갔을 때도 그랬다.
그냥 덩그러니 빈집들과 문방구 몇 점.
`내가 여기까지 와서 뭘 봤지?`
하면서 발길을 돌렸던 때가 생각난다.
132.
우리는 삶을 생각하는 것만큼 죽음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한다.
지지리도 어렵게 질질 끌면서 죽어 가는 사람을 볼 때에
째째파리를 생각하였다.
수면병, 거의 사망
얼마나 고통 없는 쉬운 죽음인가. 고마운 째째파리.
그런데 실은 그렇지 않다.
2주정도 고열로 시달리다가 뇌가 마비되어 죽는다.
어쩌면 심장마비로 죽는 것이 가장 깔끔하지 않을까.
삶에 대한 연구 이상으로
죽음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133.
세상에 살고있는 모든 자에게 한 표 씩 권리를 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여러 번 물어도 대답을 확실하게 할 수가 없었다.
134.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에 대해 걱정한다.
자꾸 편리하게 해주려고 노력하니까 모여드는 것이다.
불편하게 그대로 두면 왜 모이겠는가.
135.
서울로의 인구 집중을 어떻게 하면 억제할 수 있을까.
이것이 항상 도시정책의 중요한 문제였다.
개미들이 모여 있는 중심에는 먹이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먹이는 `돈`이다.
그러므로 돈의 근원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모두가 따라간다.
돈의 근원은 중앙 은행이다.
중앙 은행을 다른 도시로 옮기면 된다.
지방은행의 본점들도 따라가야 편리하기 때문에 옮길 것이고
은행에 가까이 있어야 편리한 업체들도 따라간다.
잘만 하면 전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 한남대교를 건너 도심으로 들어가기 위해
서로 머리를 들이박고 있는 자동차를 보며 -
136.
성경에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지 않으면
어찌 이삭 얻기를 바라리요.”
이 말은 이렇게 바꾸어야 되지 않을까.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썩어버린다면
어찌 이삭 얻기를 바라리요.”
137.
행사 때에 케이크를 자르는 것은
결과에 대한 분배의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공경하는 대상에게는
케이크를 자르는 것보다
상위에 자신들의 정성을 쌓아 올려서 바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138.
누군가 크게 상처를 입었을 때
반쯤 죽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아직 반은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쯤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죽어 가고
반은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살아난다.
139.
중국의 남쪽지방을 여행하면서,
사람들의 체구가 작고 야위었음을 보았다.
북쪽에 가보니 사람들의 체구가 크고 뚱뚱했다.
추운 곳에는 열손실을 최대한 막기 위해서
표면적을 줄여야 하니 체구가 커야 하고,
더운 곳에서는 체표 면적을 늘여 열방출을 쉽게 하기 위하여
체구가 작아지는 것이 유리하다.
우주의 온갖 환경에도 불구하고
별들이 거의 구형에 가깝게 되어 있다는 것은
어떠한 환경에도 유리하게 적응하려면
구형이 가장 유리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무난하게 사는 방식을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노래했다.
`호박같이 둥근 세상 둥글둥글 삽시다.`
140.
Brain storming(창조적 집단사고)이란 말을 들으면서
교회에 걸린 `영적 대폭발`이란 프랭카드가 생각났다.
이제는 창조적 두뇌도 폭풍을 일으켜야 한다.
뭔가 무시무시한 시대다.
직장에서는 거칠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자가 출세한다는
통계도 나와있고
큰 상점에 붙어있는 `점포정리` `가격파괴`는 옛말이 되었다.
하다못해 `자살가격파괴` 라고까지 한다.
끔찍하기 그지없다.
교회도 폭발하고, 창조두뇌도 폭풍을 일으켜야 하고
상품들은 파괴를 당하면서 팔려가야 한다.
이렇게 가도 언젠가는
順한 사람들이 順한 용어를 쓰고
順하게 살아가는 시대가 올 수 있을까.
141.
이곳에 자율과 협동이
여기에 사랑과 평등이
이때에 슬기와 성실이
제2권
30.
나는 누구와 같이 삶을 이루고 있는가.
31.
누가 나를 지켜봐 주고 있는가.
32.
우리는 한 올, 한 올이 모여
서로 쓰고 쓰이며
어울려 살아가는 한울인이며
그 터전은 한울이다.
33.
우리는 한 올, 한 올이 바르게 되어
한울이 되는 것을 목표로 모인 공동체이고
무리는 한 올, 한 올을 파괴하므로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목표로 모인 집합체이다.
34.
어떤 조직 공동체가 형성되는 원리는
거대분자가 결합하는 여러 방법들
즉, 이온 결합하는 소금,
공유 결합하는 다이아몬드,
수소 결합하는 물 등과 같이
그 조직체가 지향하는 목표나 구성원의 성분 등에 따라
정치결합공동체, 경제결합공동체, 종교결합공동체 등으로
결합의 원리도 달라지게 된다.
그 결합의 원리를 잘못 선택했을 때
그 공동체는 와해되고 마는 것이다.
35.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하고 자유롭고 독립된 존재이기를 원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구에겐가 유용해지고
누군가를 위하여서 일하고 싶어하고
누군가에게 잡혀 있고 싶어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36.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내는 데는
정의의 실현이 필요하지만
정의의 실현만으로는 안 된다.
자비와 사랑 용서와 관용이 깃들여 있지 않다면
그 사회는 싸늘한 죽음의 얼음판일 뿐이다.
37.
한울(한울타리, 우주)이란,
공동체에 이루는데 있어서는
한 올 한 올(개체 개체)이 모여 한울이 된다는 자각과
한 올이 전체 질서 형성에 참여하고
그 질서에 포함되어 살고 있다는 공감이 필요하다.
스스로 질서 형성에 참여하면
자신이 원인이 되고, 또한 자신이 결과가 된다.
한 올, 한 올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한울은
존재할 수 없다.
38.
자신에게는
뚜렷한 목표와 성실한 노력이 있어야 하고
이웃에게는
따뜻한 신
뢰와 서로의 평화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39.
자신의 짐을 잘 챙기고
남의 짐에 간섭하지 않으면
서로 불화할 일이 없게 된다.
40.
인연은
생물학적 혈연과 사회학적 지연, 학연, 법연 등이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영적인 인연인 영연(靈緣)으로 귀착된다.
41.
옳은 조종자 내지 운영자는
합리적으로 기획하여 수지(收支)를 잘 관리하고
옳게 배치하며 마무리를 확실하게 한 후에
평가를 진지하게 검토, 수용할 수 있는 자이다.
42.
주는 것의 상대말은 가지는 것
던지는 것의 상대말은 받는 것
주다와 받다를 상대말로 쓰는 것은 잘못이지만
저절로 흘러가게 하려면 위상차(位相差)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주다`의 상위개념과 `받다`의 하위개념을
상대말로 씀으로서
위상차에 의해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전해지게 하는 것이다.
43.
왜, 자연스레 두 손을 모으면
좌우의 손이 중앙에서 만나
손끝이 위
를 향하는가.
서로 상대를 존중하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만나
함께 상승하자는 것이 아닐까.
나는 진지한 마음으로 상대를 만날 때에는 합장을 한다.
44.
이로운 벗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힘없고 고통받는 자를 도우려 하고
침착하고 지혜롭고 너그러우며
상대를 존중하고 아껴주며
자신의 문제보다 전체의 문제에 더 마음쓰며
자기 발전을 위해
계속 추구하는 자이다.
45.
해로운 벗은
자신에게 유리하면 누구든 이용하려 하며
남을 돕는 일에는 인색하고
하는 일이 옹졸하고 생각이 편협하며
결과에 대하여 조급하고
거짓되고 불성실하며 의존하려 하며
책임을 회피하고 변명하며
시기하고 이간질하며
새로운 시도를 피하고 트집잡고
게으르고 답답한 자이다.
46.
나는 지금까지 끊임없이 누군가와 만나고 또 헤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인상을 주었고
헤어질 때 어떻게 기억되게 하였을까.
47.
좋은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신뢰가 깊어지는 관계이며
나쁜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의혹이 심해지고 신뢰가 무너지며
감동이 사라지는 관계이다.
48.
상대가 자기에게 소홀히 대할 때
자기 중심적인 자는
자기에게서 멀어졌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이해하려는 자는
그가 어떤 것에 열중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49.
상대를 서운하게 대하면서
상대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50.
세상에서
죽여야 할 것을 산 채로 선물하지 말며
비린내 나고 상하기 쉬운 것을 선물하지 말고
쩔쩔매게 되고 다치기 쉬운 것을 선물하지 말고
한(恨) 서린 것은 선물하지 말라.
51.
자만심은
시야를 좁게 만들어
이웃을 이해하지 못하게 하고
많은 물질은
쌓아만 두면 벽을 만들어
이웃과 단절되게 한다.
52.
좋은 기억으로 서로 만났다가
나쁜 기억을 가지고 헤어지게 되는 이유는
1. 서로 말한 바와 행한 바가 틀릴 때
2. 흠을 파헤쳐서 상대를 무안하게 했을 때
3. 상대를 이용해 먹으려 했을 때
4. 서로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합당하지 않는 것을 고집할 때
5. 서로를 이간질하는 남의 꼬임에 넘어갈 때
6. 서로 너무 큰 격차를 느낄 때
7. 이해의 영역이 편협하고 옹졸할 때
8. 상대의 고마웠던 지난 기억들을 망각해 버렸을 때
9. 잡영이 들어와 모든 판단을 교란시켰을 때
10. 다른 자를 편애하는 것처럼 보일 때
11. 서운하게 대했을 때
등이다.
53.
진실을 말하고도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노골적으로 말하기 때문이며
진실을 말하여서 상대가 감동하는 것은
솔직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54.
불우한 자를 돕는다 할지라도
짐스러워 하지 않고 기꺼이 돕는다면
보람이 있지만
짐스러워 하면서 마지못해 돕는다면
아무 보람도 없고,
아무런 볼 앎도 없다.
55.
우리는 도처에서 폭력을 느낀다.
지친 병사들의 대열에서
폭력을 느낀다.
바짝 붙어 따라오면서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는 뒤차에게서
폭력을 느낀다.
동사무소의 무표정한 창구 직원에게서
폭력을 느낀다.
도로의 커브 길에 숨어 있다 튀어나오는 순찰차에게서
폭력을 느낀다.
교회에서 울려 나오는 큰 찬송가 소리에
폭력을 느낀다.
회진하는 의사들이
자기들만이 아는 말을 하며 우르르 몰려 나갈 때
폭력을 느낀다.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도심의 철골 구조물에서
폭력을 느낀다.
시답잖은 상품의 거창한 포장과 화려한 상표에서
폭력을 느낀다.
안에서만 내다볼 수 있는 건물 사이를 지날 때
폭력을 느낀다.
고급 세단이 슬그머니 옆에 와 설 때
폭력을 느낀다.
한 사람의 사진이 지나치게 크게 신문에 실렸을 때
폭력을 느낀다.
식당에서 음식 그릇을 미끄러지게 놓고 갈 때
폭력을 느낀다.
약국에서 주는 약봉지가 유난히 클 때
폭력을 느낀다.
시계의 똑딱거림, 찢어 내는 달력의 장에서
폭력을 느낀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위압을 느낄 때이거나
구속을 느낄 때이거나
단절을 느낄 때이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행위들로서
상대가 받아들이기 힘들게 하면
그것이 바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56.
서로 평화롭게 살기 위하여
절대로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것
잘못을 고치기 위한 것
잘못을 예방하기 위한 것
좋은 도리를 실행하기 위한 것
트집잡히지 않기 위한 것
쩔쩔매지 않게 되기 위한 것
싸워서 미리 처리하는 것일 때는
싸울 수도 있다.
그것이 오히려 평화를 사랑하는
용기 있는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다.
57.
싸움도
서로의 기(氣)조정을 위해 필요할 때가 있다.
이것은 합금을 하기 위하여
강한 열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다.
58.
필히 싸우지 않을 수 없을 때는
후원자를 확보하고
인질 잡히지 말고
장기간 투쟁보다 단기간에 끝내며
파괴되는 것이 최소가 되도록 하며
전리품을 확실하게 챙기고
맥을 끊으며
우두머리를 치고
기동적이며 기습적으로 처리하여
확실하게 이기도록 하라.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하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59.
상대에 대한 배려가 없는 설득은
공허한 메아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60.
사람을 대할 때는
밝은 표정과 다정 다감한 말로 대하고
갈수록 더욱 더 신뢰하게 되어져 가고
다시 좋은 관계로 만날 수 있게 되어져야 한다.
서로 만나는 것은 씨실과 날실로 베를 짜는 것과 같다.
그러나 부질없는 만남은 피하고
상대에게 나쁜 인식을 심지 말고
쓸데없이 다투지 말라.
61.
어떤 사람의 이미 청산되어 버린 과거를 지워 주지 않는다면
새롭게 변환된 그를 지켜보지 않았다는 무관심의 표시이며
단절의 표시이며
새롭게 변화 성숙해 간 노력을 묵살하는
결례(缺禮)를 범하는 것이다.
62.
어떤 자를 도와야 하고,
어떤 때에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바르게 될 수 있는 자를 도와야 하고
사고나 위기나 병 등에서는 도움을 받아야 한다.
63.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 것은
그 집단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을 만큼의
먹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식동물들이 떼지어 사는 초원에는
사자들이 집단을 이루고 살지만
그
렇지 않은 곳에 사는 호랑이는
집단을 이루지 못한다.
64.
자신을 보잘것없이 평가하는 곳에는
머물지 말라.
당당하게 평가되지 못하는 곳에 계속 머물면
투정만 쌓이고
기회는 자신을 스쳐갈 뿐이다.
65.
오로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그에게 법과 질서를 강조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66.
어떤 조직, 어떤 단체가
어떤 방법으로도 질서를 이루어 낼 수 없다면
그것은 결정 안에 있는 원자배열이 문란한
격자결함 분자와 같다고 할 수 있어
조직체로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67.
너무나도 다른 차원의 인간들이
이 세상에 동등한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68.
예(禮)는 근원과 대사하면서
서로 영적 교감을 이루며 공존하는 법칙이다.
69.
사람이 탈을 벗으면
사랑이 나온다.
70.
人格이 잘 다듬어져 있고 靈格이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하며
동시에 인격과 영격이 엉망인 저질 인간을
상대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71.
진실로 달을 쳐다보고 별빛을 얘기하고
맑은 해를 맞이하는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 별동네, 해동네가 있으면 좋겠다.
첫댓글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