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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과 드라마 <별을 따다줘>를 통해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는 이순재.
톱스타 부럽지 않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그는 정극과 시트콤을 오가며 다양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그의 연기 행보는 지붕도 뚫고, 나이와 편견도 뚫었다.
때문에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귀엽다는 호칭이 따라 붙는다. 남세스럽게 여겼을 황혼의 멜로 라인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이 모든 것이 이순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늘 연기만 해온 인생이니, 다른 것을 생각해본 적도 없고 재주도 없습니다.
다만 제가 연기를 처음 시작했던 게 연극이기 때문에 다시 무대에 서고픈 마음은 있어요.
연극이라는 것은 배우에게 고향과도 같죠. 드라마나 영화는 연출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니 감독의 예술이에요.
연극이야말로 진짜 배우의 몫이죠. 극이 시작되면 배우가 무대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거든요.
감독이 무대로 뛰어들어 중간에 컷, 하고 소리칠 수 없죠.”
그의 연기 경력은 반세기에 이른다. 지칠 만도 한데 연기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활화산이다.
촬영장에서도 나이와 경력으로 특권을 행사하거나 특별대우를 바라는 일은 없다. 주어진 상황에 그저 열심히 임할 뿐이다.
“연기자에게는 작품을 선택할 권한은 있지만 조건과 환경을 바꿀 권한은 없어요.
그래서 연극 작품을 보면 배우로서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기곤 합니다.
깊이 있고 내용이 있는 작품을 통해 심층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죠.
기회가 되면 연극의 중심이 돼서 제대로 된 연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배역과 장르를 가리지 않는 노력 때문인지 배우 이순재에게는 고정된 이미지가 없다.
젊은 시절에는 문희, 남정임, 윤정희 같은 당대 최고의 여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잘나가는 멜로 배우였고,
시간이 지나 ‘대발이 아버지’나 ‘유의태’처럼 가부장적이고 개성 강한 역할도 했다.
그러다 최근에는 귀엽고 엉뚱한 할아버지 역할까지 소화하고 있으니
그의 연기 행로야말로 그가 말한 ‘연기의 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배우는 다양한 역할을 해야 해요. 배우가 예쁘고 깨끗한 것만 해서 되겠어요?
고정적인 이미지만 유지하면 다양성이 없어지고 연기의 폭이 좁아져요.
특수한 역할만 전문으로 맡으면 안 되고 배우라면 모든 걸 해야 해요.
미친놈도 하고, 도둑놈도, 깡패도 연기할 수 있어야죠.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끝까지 노력해야 돼요.”
어느 분야건 변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다.
맛있는 음식도 연달아 먹으면 물리게 마련인데 시시각각 변하는 방송가야 말해 무엇하랴.
이순재는 흐르는 물과 같다. 한곳에 고여 있는 법 없이 물길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화한다.
그래서 젊다. 그에게 귀엽다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다.
영화 읽어주는 男子 이미도
“스티븐 킹, 파블로 네루다, 알랭 드 보통이 늘 그립습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떠오르는 이름 ‘번역 이미도’. 그의 이름은 브랜드다.
1993년 외화 번역을 시작한 이래 그가 자막을 단 영화는 4백60여 편.
매달 두 편이 넘는 엄청난 양이다. 때문에 그의 이름을 두고 ‘번역회사’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그는 최근 작가와 칼럼니스트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
산문집과 영어 학습서를 비롯해 벌써 7권의 책을 냈다.
그의 첫 번째 버킷리스트는 바로 ‘스티븐 킹과의 만남’이다. 직접 만나는 것은 물론 편지 형식이라도 좋다.
실현되지 않는다고 해도 일순위로 꼽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영화 <스탠 바이 미>의 원작인 스티븐 킹의 <더 보디The Body>라는 소설 속 첫 문장이 제 인생을 바꾸어 놓았어요.
‘The most important things are the hardest things’. 가장 고백하기 힘든 것이 그 사람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거든요.
방황하던 시기에 이 문장을 접했는데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하는 것이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깨달았죠.”
그가 뽑은 버킷리스트 두 번째는 ‘이슬라 네그라로 떠나기’였다. 그가 인상 깊게 본 영화 <일 포스티노> 속 배경이다.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를 산책하며 한 마리도 잡힐 것 같지 않은 성긴 그물질도 해보고,
투박하고 촌스러운 선술집과 네루다가 집필을 했던 그 집에도 가보고 싶다.
“지금까지 4백60편이 넘는 영화를 번역했는데 마감 시간을 어겨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일을 하다 보니 여행을 할 수가 없었죠.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은 곳은 영화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머물렀던 그 섬마을이에요.”
그의 마지막 리스트는 바로 ‘그림 그리기’이다.
일러스트레이션을 할 정도의 실력이 되면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글도 쓰고 그에 맞는 그림도 그리면서 책을 내고 싶기 때문.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림과 배고픔을 동의어로 생각했던 아버지는 미술 도구 자체를 사주지 않았고,
언제나 준비물 없이 빈손으로 가서 미술선생님께 뺨을 맞기도 했죠.”
여행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생활을 꿈꾸는 이미도. 여행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가 ‘알랭 드 보통’을 참 부러워합니다. 그는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을 쓰잖아요.
최근에 그가 쓴 <공항에서 일주일을>을 읽다 보니 이런 말이 있더군요.
‘창의적인 생각이나 어떤 고유한 사고는 수줍은 동물과 같아서 동굴에서 잘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디론가 떠나면 그 동물이 밖으로 나온다’는 말이에요. 멋지고 정확한 은유죠.”
하모니카로 시를 쓰는 음악인 전제덕
“제 이름으로 된 음악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전제덕이 등장하기 전까지 하모니카는 안개꽃 같은 존재였다.
홀로는 주목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하모니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없었다.
가끔 통기타 가수가 하모니카를 액세서리처럼 목에 걸고 나왔을 뿐.
전제덕은 그런 편견 속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뒤흔들었다.
조그만 하모니카에서 그토록 깊고 풍부한 감성이 나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으랴.
그가 몰고 온 반향은 조용했지만 그 파급은 작지 않았다. 하모니카로 인해 음악의 폭과 생각이 넓어졌다고 고백하는 전제덕.
그의 버킷리스트에도 하모니카는 빠지지 않았다.
“제가 조금 더 유명해져서 음악상 하나를 만들면 좋겠어요.
그게 재단으로 만들어지든 제 이름으로 만들어지든 상관없어요.
하모니카 경연에 관한 상도 좋고, 제가 대중음악을 하고 있으니까 대중음악 부분도 좋아요.
어쨌거나 그런 음악상이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면 상을 주고받으면서 저를 생각해주지 않겠어요?”
주변에서는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느냐며 비웃었다.
하지만 전제덕은 앞으로 30~40년 더 산다고 가정하면 그렇게 못할 일도 아니라고 웃으며 말한다.
“무엇보다 음악적 소신이 있는 사람을 선정하고 싶어요.
과거 LP시대에서 CD시대로 왔고 이제는 MP3시대도 가고 웹에서 음악을 거는 세상이잖아요.
음악의 시대가 달라지면 사람들의 생각도 점점 달라지죠. 앞으로 사람들의 생각이 또 어떻게 달라질지 모르잖아요.
그럴수록 음악적 소신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죠.”
전제덕은 죽기 전에 자신이 묻힐 묏자리를 하나 사야겠다고 말했다.
너무 일상적이고 담담한 어투라 하마터면 흘려들을 뻔했다. 마치 ‘겨울도 오는데 코트나 하나 사둬야겠어’라고 말하듯….
화장을 권하는 이 시기에 매장이라니 LP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감성적 발언일까?
“모두들 납골당으로 가니까 특징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너무 오밀조밀해서 단순한 집합체라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요. 그래서 저는 아파트도 싫어해요.
묏자리로는 어디 아담한 곳을 찾고 싶어요. 무덤에 비석 하나 세우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중에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 앞에는 ‘하모니카 연주자 전제덕의 묘’라고 새길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한 뼘의 하모니카를 통해 마치 심해에서 끌어올린 듯 깊은 감성을 끌어올리는 전제덕.
그의 하모니카에서는 귀로 읽을 수 있는 시가 흘러나온다.
작지만 깊은 울림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하모니카처럼, 그는 버킷리스트를 위해 오늘도 조금씩 움직인다.
내면을 찍는 사진작가 조선희
“아이와 함께 세계를 돌고 싶습니다”
그녀의 인지도는 이미 톱스타급이다.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그녀의 앞에 줄을 서니 그 이상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듣는다면 그녀를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비전공, 어린 나이, 여자….
그녀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언제나 비주류 속에 있었다.
하지만 노력 앞에서는 장사 없는 법. 한 컷이 필요하다는 편집장에게 스무 컷을 가져다줄 정도의 열정으로 맞섰다.
그렇게 편견과 가난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지금의 명성을 얻어냈다. 그녀의 버킷리스트는 얼마나 뜨거울까?
“질문 받고 괜히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는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게 뭐유?’ 하고 물어봤어요.
글쎄요, 저는 일단 세계일주를 하고 싶어요. 우리 아들과 함께. 언젠가 세계여행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있거든요.
여행을 통해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싶은 게 제일 큰 목적이고, 같은 장소에서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보고 싶어요.
그래서 서로 다른 앵글과 느낌을 보는 거죠. 사진 작업을 바탕으로 책을 내고 싶기도 해요.”
현장에서 전사처럼 진두지휘하는 그녀도 아들 기휘에게만큼은 부드럽고 다정한 엄마라는 걸 숨길 수 없다.
최근 방영 중인 한 케이블 티브이 프로그램에서는 아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엄마 조선희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아이를 낳고 배려심이 많아졌다고 고백했다.
“일에 대한 나의 욕심과 열정. 그런 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몰랐어요.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그걸 알게 되었죠. 앞만 보다가 애를 낳으면서 비로소 옆을 보게 된 거에요.
내 마음에는 안 들지만, ‘이 사람이 좋다면’ 하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게 됐다고 할까요?”
사진은 자신에게 공기 같은 존재라는 그녀. 사람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사람을 담을 수 있는 카메라는 최상의 도구다.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피사체를 사랑하는 게 그녀의 방식이다.
피사체이기 전에 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그녀의 사진에는 억지스러움이 없다.
사진작가답게 마지막 바람은 사진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사진을 보고 ‘이건 조선희만이 찍을 수 있는 것’이라는 감탄사를 내보일 그런 사진이다.
“정말 좋은 것을 보는 눈은 똑같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진이 될지는 아직 저도 모르죠. 하지만 그런 사진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한 발 더 가까이’는 물리적 거리만은 아닐 것이다. 한 발 성큼 다가가면서 심리적 거리마저 좁히려는 그녀의 마음이 담겨 있다. 진심을 찍으려는 그녀의 노력은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시간을 거스르는 형님 밴드 봄여름가을겨울
“ ‘하우스 오브 블루스’에서 공연하고 싶습니다”
봄여름가을은 시간을 거스른다. 데뷔 20년차를 맞은 김종진, 전태관. 순리대로라면 이제 가을 즈음에 도달해야 맞는데
이들의 감성은 봄을 맞은 듯 점점 더 따뜻해지고 있다.
겨울부터 시작한 감성이니 회춘이 아니라 상큼한 ‘새봄’이다. 7집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지난해 발매된
8집 <아름답다, 아름다워!>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감성 그대로다. 라디오를 진행하며 “인생 뭐 있다”고
외치던 따뜻한 시선이 앨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많은 이들이 결국 돌아갈 곳은 음악이다.
“음악가인데 음악 학교를 다닌 적이 없어요. 음악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네요.
기회가 된다면 아마 외국으로 가게 되겠죠?”(전태관)
“저는 정통 재즈 기타를 배우고 싶어요. 돈벌이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일 년 정도 학교만 다닐 수 있으면 좋겠어요.”(김종진)
일반 분야라면 달인이라는 호칭을 듣고도 남았을 경력인데 음악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이들의 열망이 특수해서인지 20년차 형님 밴드는 배움에 대한 갈증을 토로했다.
초등학교 때 기계체조 선수였다는 김종진은 ‘턱걸이 1백 개 하기’라는 사소하고도 엉뚱한 제안을 했다.
“제가 평행봉, 철봉을 진짜 잘했는데 그때는 하루 종일 철봉에 매달려서 살고 그랬어요.
그런데 얼마 전에 턱걸이를 했는데 10개도 제대로 못했다니까요.
그때 날아다니던 관절과 근력을 잃어버린 게 어쩐지 슬프더라고요.
그래서 철봉을 다시 해서, 턱걸이 1백 개 하기를 넣었어요. 열심히 하면 가능하지 않겠어요?”
전태관은 레드 제플린의 드러머 존 본햄을 따라하다가 손목 인대가 늘어난 일화를 공개하며
쇠파이프로 단련된 팔이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존 본햄의 연주가 워낙 파워풀하다 보니 드럼 소리는 저래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죠.
그때는 드럼 스틱 넣는 가방에 쇠파이프를 넣고 다니기도 했어요.(웃음)”
소소한 것들을 이뤄낸 후 최종적으로 이루고픈 이들의 소망은 공연이다.
전설적인 가수 비비 킹이 운영하는 ‘하우스 오브 블루스’ 라이브 클럽에서 미국 투어 공연을 갖는 것.
실현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은 게, 이들은 이미 “미국 전역에 걸친 체인인데다 돈을 내고 빌릴 수가 있다”며 치밀함을 보였다.
“나름 의미 있는 곳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이름을 걸고 공연을 여는 거죠.
3백 명에서 5백 명 정도 들어가는 규모의 공연장인데 출연료 생각하지 않고 우리 돈으로 진행하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공연을 연다고 하면 한국 사람들이 그 정도는 채워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있고요.
이런 꿈 하나가 오늘도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클래시컬 엔터테이너 김동규
“자동차로 국경 넘는 여행, 생각만 해도 설레지 않나요?”
김동규만큼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까?
콧수염을 기르는 사람은 많아도 잘 어울리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오페라 공연을 위해 기르기 시작했다는 수염은 이제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CBS FM의 <아름다운 당신에게>를 진행하는 그는 요즘 라디오의 매력에 푹 빠져 있다.
재치 있는 입담으로 청취자를 사로잡는 것은 물론 현장에서 즉석으로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음악의 열쇠는 즐거움이에요. 클래식이 어렵다고 하지만 그 당시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싸이나 비 같은 존재였어요.
관객이 그 앞에서 하품을 한다면 아무리 클래식이라도 무슨 소용 있을까요?
제일 중요한 건 관중이에요. 관중이 찾아주지 않으면 공연의 의미도 없어요.”
그는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을 믿는다며 만인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게 옳다고 생각한다.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해 파격 행보도 불사하는 김동규의 버킷리스트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 있을까?
“여행을 많이 해보고 싶어요. 결혼도 해보고 싶고. 결혼은 한 번 해봤는데 잘 안 됐으니까 이제 잘해봐야죠.(웃음)
여행은 사람들이 많이 가는 관광지나 신혼여행지 같은 곳 말고 휴대전화도 잘 터지지 않는 곳.
아마존이나 아르헨티나 등 남미 같은 먼 곳으로 가고 싶어요.”
김동규는 승마와 바이크를 좋아한다. 그는 바이크를 이용해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바이크의 매력을 묻자 ‘자유’라는 대답이 용수철처럼 튕겨 왔다. 자
동차처럼 어떤 룰을 따르지 않고 때로는 길을 만들기도 하며 사람의 몸과 영혼을 자유롭게 한다고 말했다.
“여권을 가지고 육로를 통해 국경을 넘고 싶은 바람이 있어요.
유럽에서 살 때 밀라노에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 독일을 가는데 그게 참 신기했어요.
국경이라는 게 뭔가 싶기도 하고…. 우리나라가 처한 이 상황이 참 슬프죠.
대륙의 끝에 살면서 대륙으로 갈 수 없다는 게. 한 번 상상해보자고요.
휴전선을 넘어 여권심사를 받고 중국을 넘어 터키까지….
거기서 더 나아가 아르메니아와 폴란드를 거치면 프랑스까지도 갈 수 있지 않겠어요?”
우리는 이념이 만들어낸 섬에 살고 있다. 대륙에 살면서도 나라 밖으로 가려면 으레 비행기를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을 듣기 전까지도 외국에 나가는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나 바이크를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생각으로 굳어져버린 것이다.
“저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당시 그곳에 살고 있었어요. 역사 속에서 살다 온 셈이지요.
국경이 사라진다는 것, 그래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건 큰 의미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삶도 바뀌더라고요.
우리도 예전의 동독처럼 위로 통하는 길이라도 열리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음악은 장르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며 크로스오버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김동규.
그의 눈에는 장르의 구분도 국경의 경계도 의미가 없다.
보다 넓은 눈으로 바라보고 모두에게 좋은 것만 생각하는 게 그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활동영역을 허무는 아나테이너 이서영
“죽기 전에 장례 치르기, 상상해보셨습니까?”
채널을 돌리다 보면 참 다양한 곳에서 그녀와 마주친다.
연예, 시사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스포츠 채널에서도 가벼운 골프웨어 차림의 그녀를 만날 수 있다.
2006년도부터는 굵직한 미인대회의 MC를 맡으며 ‘미인대회 전문 MC’라는 별명도 얻었다.
최근에는 대학 강단까지 활동 영역을 넓히며 종횡무진하는 이서영.
대학 강의와 함께 스피치 및 이미지 메이킹에 관한 칼럼을 쓰고 있는 그녀는 오바마 대통령과의 만남을 원했다.
칼럼에서도 드라마가 담겨 있는 오바마의 말하기 방식을 자주 언급하곤 했다.
“석사 논문을 ‘오바마, 케네디, 마틴 루터 킹의 설득적 스피치의 메시지 구현 방법’에 대해 썼어요.
현존 인물은 오바마밖에 없는데, 그의 스피치뿐 아니라 인물과 삶에 대해 관심이 많아요.
더 나아가 제가 설립하고자 하는 이서영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에 특별 강사로 초청하고 싶기도 하고요.(웃음)”
이서영의 버킷리스트는 그녀의 키만큼이나 스케일이 컸다. 그녀가 두 번째로 꼽은 리스트는
‘이서영 커뮤니케이션 연구소’와 ‘이서영 장학재단’의 설립이었다.
죽기 전에 모은 재산 전부를 기부해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재단과 연계해 커뮤니케이션 연구소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바쁘게, 숨 가쁘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쉼표와 같은 리스트를 더했다. 바로 ‘죽기 전에 장례 치르기’였다.
“살아서 자신의 장례식을 치른다면, 그 후의 시간들은 다른 의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해요. 장례를 치르면서 진지하게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거죠.”
유서 쓰기가 혼자만의 다짐이나 다스림이라면 장례 치르기는 다소 파격적이며 적극적인 행동이다.
과거의 나를 묻고 새로운 나의 탄생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적극적 퍼포먼스는
그 자신은 물론 주변인의 생각까지 바꿔놓기에 충분하다.
이서영 아나운서가 좋은 사례를 남긴다면 앞으로 ‘살아 있는 동안 장례 치르기’라는 퍼포먼스가
우리 사회에 자리 잡게 되지는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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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난 죽기전에.... 뭘해볼까...? 딱! 떠오르는것은 알프스에 가보고 싶다~ 왠지~^^ 진지하게 생각좀 해봐야겠다.
고치며 읽고....난 누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