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화가 쓴 소설 『세종대왕』에는 이런 장면이 그려져 있다. 동생인 방원이가 맏형인 방우에게 “아버님의 만세 후에는 형님이 용상에 오르셔야 합니다” 라고 말하자, 방우는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며 아내에게 물을 가져오라 해서는 그 물로 귀를 씻는다.
“부인, 이 물은 더러운 물이니 마당에 뿌리지 말고 똥통 속에 버리시오.” 정안군은 무안했다. 더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방우의 앞에서 물러났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의 일이었다. 방우는 돌연 괴나리봇짐 하나를 어깨에 메고, 삿갓을 쓴 후에 사랑방에서 나왔다. 부인 지씨는 깜짝 놀라 물었다. “의관도 아니 하시고 어디로 가십니까?” “정처없이 나가겠소.”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그려져 있다. “여필종부라 합니다. 당신 아니 계신 이 땅에 누구를 바라고 살겠습니까. 막지 마십시오.” 아내 지씨는 도랑치마에 은붙이를 추려 가지고 남편의 뒤를 따랐다. 아들 복근이도 가만히 있지 아니했다. “아버지와 어머님이 아니 계신데 제가 누구를 의지하고 살겠습니까.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여기서 정안군이란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조선을 세운 다섯째 아들 방원이고, 정처 없이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떠난 인물은 큰아들 방우다. 방우는 스스로를 고려의 망국대부라 칭하며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식솔을 거느리고 신분을 감춘 채 떠난다. 황해도 장수산과 구월산을 거쳐 강원도 철원을 지나 금강산에 머물던 그는 이름마저 감춘 채 고향인 함흥으로 가 숨어 지내지만 종내 그곳에서 가난을 벗삼아 죽고 만다. 그 속내야 어찌 되었던, 그대로만 있었다면 세자에 책봉되고 머지않아 왕좌에도 오를 것이 분명했던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내치고 홀연히 떠난 것이다.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임에 분명하다.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는 왕좌에다 아버지와의 정리마저 다 버리고, 힘겨운 삶의 여정으로 아내와 아들까지 끌고 들어간 그 심정이야 실로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리했다. 과연 나라면 어찌 했을까? 물론 나는 방우도 아니고 세자일 가능성도 없다. 게다가 모든 것들을 다 버렸다는 사실 하나만을 똑 떼내어 생각하는 것도 그리 마땅하지는 않다. 그래도 한번쯤 나를 방우에 빗대어 보게는 되는데, 나라면 결코 그리 쉽게 떠나지는 못했을 듯하다. 설령 떠난들 그리 마음이 편안했을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불편한 것을 알면서도, 저리 팽개치고 떠날 수 있었던 마음을 한 편에서는 옹호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오늘은 마침 새해의 시작이다. 방우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은 많지만, 그 중에 하나만 건져 내어 나의 오늘에 비추어 본다. 혹시 묵은해에 버려야 할 것들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고 말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하지 않았던가. 행여 내게 아직 버리지 못한 욕심이나 집착이 있다면 과감하게 비워 보는 것도 좋겠다. 김효경 시인의 이 시처럼. 그리 하는 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나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바람직한 예의가 아닐까 싶다. |
첫댓글 문선생님 감사합니다. 저 원고료 95,000원 받았시유, 맛있는 점심 쏠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