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가정의달을 시작하면서 1박2일의 가족테마여행을 준비하며 오전 8시에 교회에서 출발했다.
첫 쉼터인 칠곡휴게소를 지나서 상주에서 청원간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두번째 쉼터인 청원휴게소에 11시쯤 도착하였다.
목천IC를 나와서 병천 아우내장터에 들어가 유명한 아우내한방순대로 맛나게 점심을 먹었다.
병천하면 순대! 순대하면 병천! 순대가 유명한 병천인 만큼 순대가게도 엄청많았다.
천안명물인 천안호도과자 진품을 맛보기 위해 직접 찾아가 60개가 들어있는 1만원짜리 2박스를 사왔다.
점심식사후에 아우내장터를 지나서 유관순열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에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만세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4월 1일 3,000여 군중이 참여했던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만세운동인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중
끊임없는 옥중만세 시위운동을 주도 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다.
유관순열사 기념관은 유관순열사 탄생 100주년을 맞아 2003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기념관에는 열사의 출생에서 옥중 순국까지의 열사 일대기가 전시물과 함께 영상물로 꾸며져
이곳을 찾는 많은 참배객들에게 당시의 상황과 열사의 정신을 재조명해보는 기회가 되고 있다.
또한 열사가 벽에 서서 고문받는 모습을 직접 체험 할 수 있는 벽관체험코너와
태극기를 직접 찍어보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 체험공간을 마련 산교육의 장소가 되고 있다.
유관순 열사가 다니던 매봉교회인데 유관순 열사는 매봉교회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며 파고다공원 만세사건을 보고 고향에 내려와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
유관순 열사가 살고 있던 보존된 자택
유관순 열사는 1919년 3월 1일 만 17세의 나이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운동을 저지하려는
일본이 휴교령을 내리자 3월13일 독립선언서를 휴대하고 고향인 충남 천안으로 내려와
4월1일 아우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천안, 연기, 청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알렸다.
3월 31일 매봉산의 봉화불을 신호로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 수천명이 모여 유관순 열사는 선봉이 되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바로 이곳이 아우내 장날에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아우내 장터 모습으로 가던날이 5월 1일 바로 장날이었다.
독립기념관은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 남화리 흑성산 일대에 위치하고 있다.
한민족의 수난과 선열들의 외세에 대한 항쟁과 독립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역사의 교훈으로 삼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이다.
독립기념관 건립은 1982년 8월 일본의 교과서왜곡사건을 계기로 독립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정부에서는 건립부지를 매입하여 제공했고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는데 입장은 무료였다.
1987년 8월 15일 개관된 독립기념관은 총대지면적 99만 3,914㎡, 37개동의 각종 건물에
국난극복사와 독립운동 관계자료 1만여 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근래 기념관이 많이 업그레이드 되어 있었다.
겨레의 집 앞에서 사진촬영을 했는데 독립기념관의 상징이자 중심 기념 홀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길이 126m, 폭 68m로써 축구장만한 크기로 높이는 15층 높이(45m)에 이르는 동양최대의 기와집이다.
고려시대 건축물인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설계한 한식 맞배지붕 건물이며, 북경의 천안문보다 더 크다.
독립기념관에서 우리민족의 자주와 독립, 국난극복사와 국가발전사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싱그러운 자연과 어우러진 주변 휴식공간에서 나라사랑의 투철한 정신과 여유를 느낄수 있었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와서 독립기념관 외곽을 순회하는 차를 타고 한바퀴를 돌고나서 하루일정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