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름한 날/ 정수자
울다 깬 새벽이면 다른 생에서 왔나 싶게
서름한 그림자가 창 너머에 우련 섰다
꿈인 척 따라가버릴까 발가락이 달달거렸다
후생의 손짓만 같아 꽃노을에 마냥 취하다
햇귀 잡고 이슬 터는 지붕들 날갯짓에
후다닥 눈곱을 떼며 이생의 문을 잡곤 했다
문고리를 잡고 서면 덜미가 다시 선뜩해져
고치다 지친 사춘기적 유서를 복기할 듯
울다 깬 서름한 날이면 고아인 양 서러웠다
-[시조시학] 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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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장/ 홍성운
30년 된 마당 주목, 오늘 화장했다
붉디붉은 속살에서 나이를 가늠하며
사리를 찾을까 하다 그냥 멈추었다
백두대간 사내를 뜬금없이 하산시켜
치솟는 성깔을 죄다 둥글려놓고
금속성 가위 소리도 이냥저냥 견디랬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그러게 요절이다
신은 공평하다 외치는 나무들 앞에
불잉걸 내밀어본다 한 줌 재를 뿌린다
-[시조매거진] 2014년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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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파 화장품/ 박성민
찢겨진 달력들은 왜 과거만 노래할까
시들이 시들어갈 때 신서정, 당신이 왔어
전위란 전희인 거야 긴 울음을 달래는
헤어진 방울방울 유리창에 허물어지는
빗방울의 혈액형은 아마도 A형일 거야
당신이 붉은 비 같아 지혈을 할 번했지
전복을 전복하면 정상위일 뿐인데
당신이 네게 건넨 알약은 풀라시보
오래된 화장품처럼 닦아내는 미래파
-[시조시학]2014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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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 이송희
할머니는 나에게 그릇 하나 내주셨다
주름지고 거친 숨결 고스라히 새겨진,
이 빠진 그릇 속에서 나는 점점 커갔다
금 간 시간 틈새로 거세지는 겨울바람
그 추운 방 안에서 호호 불며 쓰던 일기
매일 밤 나를 지우며 또 나를 적었다
내 안에 그릇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다
두 손 모은 꿈들이 둥글게 휘감기는
바닥은 덜어낼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불교문예]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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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곶 야경/ 박영식
어둠을 쓸고 쓰는
등대 불빛 잦은 비질에
흰 갈기 세운 파도
아기 고래 떼 업고 온다
내륙은
사부작사부작
밤새 젖 물려주고
띠배에 실어 보낼
젯밥을 지으려고
수만 섬 별을 쏟아
스륵스륵 씻는 소리
끝없이
헹궈낸 뜨물
해안 띠로 둘렀다
-[개화]2014년 2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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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간/ 박지현
아는 길도 오래 걸으면 모르는 길이 된다
익숙한 돌멩이도 낯익은 풀들조차
발길을 가로막으며 불심검문 깜박인다
내 생의 어느 행간을 잇는 갈래길인가
오래 전 걸어왔던 미간에 갇힌 시간들
우거진 환삼덩굴에 표지석도 숨어버린
햇살도 숨을 고르는 너덜겅에 오른다
묵언수행에 몸 맡기면 고요도 낯설어서
미간의 돛 없는 길이 자만치 앞서간다
-[시조시학] 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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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그 그림자 사이에서/ 선안영
오지 않는 발자국 그 소리를 기다렸던가
우는 천둥 납작납작 눌려 있던 그리움아
숨기어 구불구불해진 설레임아, 환해져라.
알전등을 켜놓은 채 부재중 다녀갔던가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던 봄 그늘의 시간들
길 끝에 잎 없는 나를 열어놓고, 열어놓고.
점멸하는 붉은 신호등 횡단보도를 건너
끝끝내 그리우면 당신에게 갈 것이다
위험한 낙화 혹은 낙하의 길어지는 절벽이다
-[서정과현실]2014년 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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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읽는 시/ 서연정
빚어 숨 불어넣고 뜨거운 펜 놓았겠지
뒤에서부터 한 행씩 더듬어 올라간다
깊은 산 시의 탯자리 분화구를 찾아서
도착이 출발인 길 정상(頂上)은 원점이다
씨앗 속 꽃잎 같은 휘파람을 물고서
아름찬 벼랑을 날아 발자국을 지운 새
-[시조21]201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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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 적으면서-
박성민 시인의 작품 <미래파 화장품> 3수 중장
'당신이 네게 건넨'이 난해하다.
당신이 너 스스로에게 건넨이라는 의미일까....
'당신이 내게 건넨'이면 의미가 너무 드러나 피했을까?
수록 문예지를 뒤져 본다.
"당신이 네게 건넨"이다.
시인의 시작의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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