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용운의 옥중 한시 감상 -- 이승하
(시인·중앙대 교수)
1. 옥중 한시 탄생의 배경
만해 한용운이 1926년에 자비로 펴낸 시집 《님의 침묵》이 없었더라면 20년대의 우리 문단은, 아니 일제시대를 통틀어 보아도 아주 공허해지고 말았을 것이다. 일제시대뿐 아니라 100년 한국 근·현대 시문학사 전체를 조감해보아도 그의 업적은 그 어떤 시인보다 밝고 크다. 우리 시에 불교적 상상력이나 형이상학적 고뇌는 한용운을 빼고 거론할 수 없다. 게다가 한용운은 시인으로서의 업적만을 거론하는 데서 펜을 거두게 하지 않는다. 민족대표 한용운 선생이 없었더라면 민족자결을 내세운 3·1운동의 정신이 제대로 발아하고 개화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한용운 선사가 없었더라면 일제 36년 동안 한국 불교계는 만신창이가 되었을 것이다. 만해는 이 땅의 가장 위대한 시인 혹은 민족정신의 사표로 일컬어지고 있으며, 독립투사나 종교지도자, 아니 조직운동가나 혁명가로 불리어도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선생이 가신 지도 어언 57년이 되었다. 시인 한용운의 업적을 기리는 만해문학상이 제정되어 다년간 시상을 해오고 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만해축전과 만해시인학교가 열리고 있으며, 선생의 사상과 문학을 연구한 글을 모은 《만해새얼》이라는 간행물이 정기적으로 나오고 있다. 만해가 편집인과 발행인을 겸해 펴낸 불교 수양 잡지인 《유심》이 2001년 봄에 복간된 것도 뜻깊은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만해는 예순여섯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애를 사는 동안 시는 물론 장편소설·단편소설·시조·수필·한시 등 많은 문학작품과, 그에 못지않게 많은 논문·논설·잡조(雜俎:각종 일을 써 모은 기록)를 남겼다. 논저 《조선불교유신론》과 편저 《불교대전》 《정선강의 채근담》, 그리고 일제를 향한 선언서 〈조선 독립의 서〉를 작품 연보에서 뺄 수는 없다.
만해가 남긴 한시는 모두 163수로 알려져 있다. 시조 32수, 신시 108편보다 많은 수치이다. 그간 몇 사람 국문학자가 만해의 한시를 연구한 바 있는데, 김종균의 〈한용운의 한시와 시조〉(《어문연구》 제21호, 1979), 이병주의 〈만해 선사의 한시와 그 특성〉(《동국대 한국문학 학술회의》, 1980), 송명희의 〈한용운의 한시론〉(《한용운연구》, 새문사, 1982)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만해가 옥중에서 쓴 한시를 중심으로 해서 쓴 논문은 없는 것으로 안다. 그간 만해의 문학세계와 불교사상을 연구한 글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씌어질 것이다. 100편이 넘는 한용운론 가운데 옥중에서 쓴 한시가 전혀 논의된 적이 없는 이 땅의 문학연구와 문학사는 나를 오래 안타깝게 하였다. 만해의 한시에 담겨 있는 시정신을 탐색하여 고전적 가치를 논해보는 것이 이 글을 쓰는 작은 목적이다.
만해는 1919년 정월부터 가회동에 있는 손병희의 집을 수차례 방문하여 그로 하여금 3·1운동 민족대표 발기인의 서두에 서명하게 한다. 선생은 또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수정하고 행동 강령이라고 할 수 있는 〈공약삼장〉을 첨가한다. 거사일인 3월 1일 경성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곧바로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감금된 만해는 해를 넘겨 1920년 8월 9일에야 경성지방법원 제1형사부에서 3년형을 선고받는다. 3년의 옥살이를 마치고 1922년에 출감했으니 만해의 옥중시는 전부 《님의 침묵》을 펴내기 전에 썼던 작품임에 틀림없다. 투옥되고 재판을 받고 석방되는 과정에서 만해에 관한 일화가 몇 개 전해지고 있다.
왜경에 끌려갈 때 그는 이른바 ‘옥중투쟁 삼대원칙’을 제시했으니 ① 변호사를 대지 말 것, ② 私食을 취하지 말 것, ③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 등이 그것이다. 법정의 심문에서 “조선인이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는데 왜 일인의 재판을 받느냐”고 대답을 거부, 그 대신에 쓴 것이 명논설 〈3·1독립선언이유서〉였다.
같이 수감된 독립운동의 동료들이 극형을 받으리란 소식을 듣고 안색이 파래지자 “독립만세를 부르고도 살아날 생각들을 했단 말이야?”고 외치며 옆에 있던 변기를 던지기도 했다. 그들이 출옥할 때 얼싸안고 환호, 위로하는 영접 인사들에게 만해는 침을 뱉으며 일갈했다.
“더러운 자식들, 오죽 못났으면 영접을 해? 너희들은 왜 영접을 받지 못하니!” - 김병익, 《韓國文壇史》(일지사, 1973)에서 다소 과장된 부분이 있을지라도 생애 단 한 번도 훼절한 적이 없이 일제의 강압 통치에 불굴의 기개로 맞서 싸웠던 만해로서는 충분히 하고도 남았을 말이요 행동이다. 그런 만해가 옥중에서 쓴 한시에는 선생의 애국애족사상과 일제에 맞서 싸우려는 불퇴전의 용기가 충만해 있다. 그와 아울러, 옥중 생활에서 느끼는 쓸쓸한 감회 같은 것도 담겨 있다.
2. 옥중 한시 감상
만해는 3년의 옥살이 가운데 적지 않은 한시를 썼으나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보건대 옥중에서 쓴 것이 확실한 것은 다음의 아홉 수가 아닌가 한다. 각 시편을 국역한 뒤에 해설해보면 다음과 같다.
獄中吟(옥중에서 읊는다)
七言絶句칠언절구
농山鸚鵡能言語농산앵무능언어
농산의 앵무새는 언변도 좋네그려
愧我不及彼鳥多괴아불급피조다
내 그 새에 못 미치는 걸 많이 부끄러워했지
雄辯銀兮沈默金웅변은혜침묵금
웅변은 은이라지만 침묵은 금
此金買盡自由花차금매진자유화
이 금이라야 자유의 꽃 다 살 수 있네.
이 시에 나오는 ‘농산’은 중국 섬서성 농현 서북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농산의 앵무새’가 어떤 고사에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하는 말을 흉내 잘 내기로 이름난 새였던 모양이다. 만해가 과거에는 그 새의 언변에 못 미치는 것을 많이 부끄러워했지만 옥에 갇혀 침묵이 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자경록을 쓰듯이 이 시를 쓴 것이라고 생각된다.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계의 대표였으니 일제가 만해를 회유·포섭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 것인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이곳에서 침묵을 지켜야 종국에는 자유의 꽃을 몽땅 사게 될 것이라고 자신을 경계했던 것이다. 옥중에서 쓴 한시였으니 옥리의 눈에 띄어 고초를 겪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만해는 계속해서 시를 쓴다.
見櫻花有感―獄中作(벚꽃을 보고 느낌이 일어―옥중작)
五言絶句오언절구
昨冬雪如花 지난 겨울 꽃 같던 눈 今春花如雪 올 봄 눈 같은 꽃 雪花共非眞 눈도 꽃도 참이 아닌 점에서는 같은 것을 如何心欲裂 어찌하여 마음의 욕구 이리 찢어지는지.
이 시에서 만해는 자신의 눈을 현혹했던 꽃 같았던 눈과, 눈 같았던 꽃을 ‘참’이 아닌 점에서는 같은 것이라고 한다. 눈은 산천을 백색으로 수놓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녹아버리고, 일본의 국화인 벚꽃은 피었다가 금방 난분분 흩날리며 떨어진다. 감옥 창살 밖으로 떨어지는 벚꽃을 보며 생각하니 이 나라는 완전히 일본인의 식민지가 되어 있고 해방이 될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이다. 만해는 어느 봄날 “심욕열(心欲裂)”이라며 자신의 비통한 심정을 이 시에다 토로해보았던 것이리라.
寄學生―獄中作(학생에게 부친다―옥중작)
五言絶句오언절구
瓦全生爲恥 헛된 삶 이어가며 부끄러워하느니 玉碎死亦佳 충절 위해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답지 않은가 滿天斬荊棘 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 長嘯月明多 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
제목으로 보아 면회를 온 학승에게 전해준 시가 아닌가 여겨진다. ‘와전(瓦全)’과 ‘옥쇄(玉碎)’는 정반대의 뜻이다. 아무 보람도 없이 헛된 삶을 이어가는 ‘와전’과 명예와 충절을 지켜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는 ‘옥쇄’를 시에다 써 감옥 바깥으로 전하는 일 자체가 큰 모험이었을 것이다. 목숨을 보闊愍?기개를 굽히고 사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옥중에서 시로 썼으니 만해의 용기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없는 실력을 발휘해서 해본 번역이라 “하늘 가득 가시 자르는 고통으로/길게 부르짖지만 저 달은 많이 밝다”라는 뒤의 두 행이 영 어색하다. 아무튼 만해가 현재의 고통을 이겨내면 언젠가 이 옥문을 나서게 될 것이라고 달에 빗대어 다짐하고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다.
雪夜(눈 오는 밤)
七言絶句육언절구
四山圍獄雪如海 감옥 둘레 사방으로 산뿐인데 해일처럼 눈은 오고 衾寒如鐵夢如灰 무쇠처럼 찬 이불 속에서 재가 되는 꿈을 꾸네 鐵窓猶有鎖不得 철창의 쇠사슬 풀릴 기미 보이지 않는데 夜聞鐵聲何處來 심야에 어디서 쇳소리는 자꾸 들려오는지.
눈 내리는 밤의 감회를 읊조린 시이다. “무쇠처럼 찬 이불 속”이니 그 겨울 만해의 옥고는 인간 인내의 한계점에 다다를 정도였나 보다. “재가 되는 꿈”(아니면 재 같은 꿈?)은 자신이 죽는 장면을 꿈에서 보았기에 표현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철창의 쇠창살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눈은 해일처럼 엄청나게 내리고 있다. 심야에 들려오는 쇳소리가 다른 방 옥문을 여는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 모두가 만해를 비감한 심사에 휩싸이게 해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秋懷(가을 감회)
七言絶句칠언절구
十年報國劒全空 십년 세월 보국하다 칼집 완전히 비고 只許一身在獄中 한 몸 다만 옥중에 있는 것이 허용되었네 捷使不來?語急 이겼다는 기별 오지 않는데 벌레는 울어대고 數莖白髮又秋風 또다시 부는 가을바람에 늘어나는 백발이여.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마지막 행이 아니다. 옥에서야 머리를 기를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사십대 초반의 나이였으니 백발 운운은 과장법을 동원한 것일 듯. 그런데 “첩사불래(捷使不來)”라는 대목이 있다. ‘첩보(捷報)’는 싸움에 이겼다는 보고나 소식이다. 만해는 고통스런 영어의 나날을 살면서도 ‘첩사(捷使)’가 오지 않음을 못내 애통해 하고 있었다. 죽음과 절망의 그림자에 휩싸여, 탄식과 눈물로 시를 수놓던 옥문 바깥의 20년대 초의 낭만파 시인들과는 사고의 기본틀이 이토록 달랐던 것이다.
贈別(이별 노래)
天下逢未易 하늘 아래 만나기 쉽지 않은데 獄中別亦奇 옥중에서 하는 이별 기이할밖에 舊盟猶未冷 옛 맹세 아직 안 식었으니 莫負黃花期 국화 피면 다시금 부담 없이 보세.
〈증별(贈別)〉은 먼저 출옥하는 사람에게 정표로 써서 건네준 시이다. 옥중에서 하는 이별이라 기이하다고 한 뒤 만해는 “구맹유미랭(舊盟猶未冷)”이라고 썼다.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 했던 맹세가 아직 안 식었으니 국화 만발한 바깥 세상에서 다시 만나고 싶지만, 누가 먼저 나가고 누가 늦게 나갔는가에 대한 부담감을 피차 갖지 말고 만나자고 상대방을 오히려 위로한 작품이다. 해석의 여지가 있는 마지막 행이지만 나는 이런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砧聲(다듬이 소리)
何處砧聲至 어디서 나는 다듬이 소리인가 滿獄自生寒 감옥 속을 냉기로 가득 채우네 莫道天衣煖 천자의 옷 따뜻하다 하나 도가 아니다 孰如徹骨寒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감옥에까지 들려온 다듬이 소리를 소재로 해서 쓴 시이다. ‘천의(天衣)’는 천자(天子)의 옷, 선인(仙人)의 옷, 비천(飛天: 신선이나 선녀)의 옷 중 어느 것을 택해도 무방하겠지만 일제치하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여 ‘천자의 옷’으로 해석해보았다. 즉, 천자는 천황의 다른 말로 쓴 듯하다. 천의가 제아무리 따뜻하다고 한들 그것은 ‘도’가 아니며, 나는 지금 뼛속까지 냉기를 느끼고 있을 뿐이라며 일제의 침탈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다.
??燈影(등불 그림자를 보며)
夜冷窓如水 추운 밤 창에 물이 어리면 臥看第二燈 두 개의 등불 누워서 보게 되지 雙光不到處 두 불빛 못 미치는 이 자리에 있으니 依舊愧禪僧 선승인 것 못내 부끄럽기만 하다.
만해는 이 시에서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등과, 물 어린 창이 반사하고 있는 두 개의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누워 있는 자리는 두 개의 불빛이 다 못 미치는 곳이다.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은 감옥이라는 공간을 생각해보면 이 시를 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선승이므로 구도의 길을 걸어가야 하거늘 지금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 곧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인 것이다. 그것을 애통해한 시가 바로 〈??燈影〉이다.
??雁二首―獄中作(기러기 노래 두 수―옥중작)
一雁秋聲遠 가을 기러기 한 마리 멀리서 울고 數星夜色多 밤에 헤아리는 별 색도 다양해 燈深猶未宿 등불 짙어지니 잠도 오지 않는데 獄吏問歸家 옥리는 집에 가고 싶지 않는가 묻는다. 天涯一雁叫 하늘 끝 기러기 한 마리 울며 지나가니 滿獄秋聲長 감옥에도 가득히 가을 바람소리 뻗치는구나 道破蘆月外 갈대가 쓰러지는 길 저 밖의 달이여 有何圓舌椎 어찌하여 너는 둥근 쇠몽치 혀를 내미는 거냐.
문학적 향기가 가장 짙은 작품이다. 시 앞쪽에서 만해는 가을 밤의 스산한 심사를 절묘하게 노래하는데, 그것으로는 무언가 미진했던 모양이다. 시 뒤쪽의 마지막 두 행에 주제가 담겨 있는 듯한데 번역하기가 쉽지 않다. 달에 견주어 만해는 “원설추(圓舌椎)”라고 표현하였고, 나는 그것을 “둥근 쇠몽치 혀”로 해석하였다. 달은 차면 기우는 속성을 갖고 있으므로 만해는 말을 아끼자는 결심을 해본 것이 아닐까. 달이 내 신세를 알고 혀를 차고 있다고 생각해본 것일 수도 있다. 달은 밤길을 밝혀주므로 길 잃은 자를 안내하는 이로 상정해본 것일지도 모른다. 기러기와 갈대를 부화뇌동하는 존재로, 달을 은인자중하는 존재로 그려본 것일까. 해석은 여러 가지로 해볼 수 있다. 아무튼 만해는 자연 상관물 몇 가지를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깊어가는 가을 밤에 자신의 처연한 심사를 읊어보았던 것이다.
3. 옥중 한시의 의의
이상 살펴본 만해의 아홉 수 옥중시 가운데에는 저항의지가 뚜렷한 〈기학생(寄學生)〉 같은 작품도 있고, 일제의 탄압에 꺾이지 않는 그다운 기개가 느껴지는 시구도 여러 곳에서 보인다. 하지만 이보다는 옥살이 도중에 느낀 만해의 외로움, 그리움, 안타까움, 부끄러움 등 인간적 고뇌를 동반한 시들이 많아 《님의 침묵》과는 또 다른 자리에서 논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한글로 쓴 〈님의 침묵〉이 절대자에 대한 헌신과 예찬의 성격이 있어 신비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반면 옥중 한시는 현실에 훨씬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는 것도 다른 점이다.
다시 말해 《님의 침묵》이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면이 강하다면 옥중 한시는 구체적이고 형이하학적이라는 것이다. 1879년생이므로 만해는 마흔한 살부터 마흔세 살까지 옥살이를 하였다. 만해가 투옥되어 있던 시기에 동인지 《폐허》와 《백조》가 창간되었고, 바로 전에 나온 《창조》도 계속 간행되어 우리 문단에서는 3·1운동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근대시가 등장하고 활발히 발표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기에 작품 활동을 한 남궁벽·오상순·황석우·변영로(이상 《폐허》 동인)와 홍사용·박종화·박영희·이상화(이상 《백조》 동인)의 작품을 보면 거의 예외 없이 비탄과 절망, 감상(感傷)과 회한의 정조에 사로잡혀 있다. 《폐허》 창간호에서 오상순이 한 “우리 조선은 황량한 폐허의 조선이요, 우리 시대는 비통한 번민의 시대이다”라는 말은 그 무렵 대다수 지식인과 문학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당시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시인의 몸과 마음이 모두 ‘밀실’과 ‘동굴’과 ‘관’ 속에 갇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대는 ‘말세’요, 계절은 ‘가을’이 아니면 ‘겨울’이었고, 시간은 늘 ‘밤’이었다. 같은 시기 ‘감옥’에 갇혀 있던 만해는 그러나 한겨울의 추위에도 정신의 칼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었다. 그 시기에 만해가 쓴 시가 한글로 쓴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문학적 가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옥중에서 쓴 것이 확실한 이들 아홉 수 외에도 수많은 한시가 새로운 해석과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보자.
黃梅泉황매천
七言絶句칠언절구
就義從客永報國 의로운 그대 나라 위해 영면했으나 一瞋萬古?e花新 눈 부릅 떠 억겁 세월 새 꽃으로 피어나리 莫留不盡泉坮恨 황매천 엄청난 한을 다하지 말고 남겨둡시다 大慰苦忠自有人 사람됨을 스스로 괴로워했던 것 크게 위로하고프니.
매천 황현은 한일합병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한 한말의 문장가요 역사가이다. 만해는 황현의 엄청난 한을 늘 생각하며 시를 썼음을 알 수 있다. 다수 문인이 비탄에 잠겨 슬픔과 좌절을 노래하고 있을 때 만해는 흔들리지 않는 자존심으로 자신을 성찰하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음을 증명하는 시가 바로 〈黃梅泉〉이다.
만해의 민족운동은 석방 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일제의 극심한 탄압 속에서도 국산품을 애용하여 민족기업을 일으키려는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운동의 결집체인 신간회 결성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청년 법려(法侶)들의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당수로 추대되었으며, 신채호의 묘비를 건립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반대운동과 조선인 학병 출정 반대운동을 목숨을 내놓고 전개하였다. 만해의 반일감정은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된다고 성북동에 집을 지을 때 북향으로 지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는데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일제가 창씨개명과 징병을 강요하면서 불교계를 대표하는 만해의 찬성을 얻고자 회유책을 쓴 적이 있었다. 성북동 일대의 넓은 국유지를 한용운의 이름으로 불하하려 하자 만해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였다. 친일의 족적을 한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진정한 지식인 한용운이 옥중에서 쓴 한시 아홉 수가 오늘 내 가슴을 치는 것은 내 나이가 투옥 당시 만해의 나이와 비슷한 마흔둘이기 때문일까. 나는 만해가 쓴 한시 중 옥중에서 쓴 것이 확실한 아홉 수를 우리 문학의 빛나는 고전으로 자리 매김하고 싶다. <출처> http://yousim.buddhis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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