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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9 경북교육삼락회 문화유적답사 계획
일시 : 2014년 9월19일(금)
장소 : 거창 일원
반월당(08:00 출발) - (76.6km. 1시간10분) - 양평리석조여래입상(거창읍 양평리. 09:10 도착. 관람30분. 09:40출발) - (4.3km. 10분) - 거창박물관(09:50 도착. 관람40분. 10:30 출발) - (3.1km. 10분) - 상림리석조보살입상(거창읍 상림리. 10:40 도착. 관람 30분. 11:20 출발) - (16.7km. 30분) - 가섭암지마애여래삼존입상(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11:50 도착. 관람 40분. 12:30 출발) - (5.2km. 15분) - 거창 동계 종택(居昌 桐溪 宗宅)(12:45 도착. 관람 15분. 1:00 출발) - (1.5km. 5분) - 수승대관광단지(1:05도착. 점심1시간. 2:05 출발) - (0.7km. 4분) - 황산리고가(2:09 도착. 관람 30분. 2:39 출발) - (0.8km. 3분) - 수승대. 구연서원관수루. 요수정(2:42 도착. 관람 50분. 3:32 출발) - (2.8km. 8분) - 용암정(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3:40 도착. 관람 20분. 4:00 출발) - (1.2km. 5분) - 농산리석조여래입상(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4:05 도착. 관람 30분. 4:35 출발) - (10.9km. 20분) - 월성계곡(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4:55 도착. 관람 30분. 5:25 출발) - (27.1km. 30분) - 거연정(5:55 도착. 관람 30분. 6:25 출발) - (102.9km. 1시간30분) - 반월당(7:55도착)
* 현지 사정에 따라 변동 될 수도 있습니다.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377호.경남 거창군 거창읍 노혜3길 6-33 (양평리))
이 불상이 서 있는 부근에 금양사(金陽寺) 혹은 노혜사(老惠寺)라고 부르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상의 주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고, 불상 앞에 석등 재료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사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전체 높이 3.7m의 거대한 석조상으로 따로 마련된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서 있는 형태이다. 머리 위에 얹어 놓은 모자 모양의 천개(天蓋)는 근래에 만들어진 것이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크며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은 모습이다. 얼굴은 둥글고 원만하며 눈·코·입 또한 솜씨있게 처리되어 있다. 신체의 굴곡이 충실히 드러났으며, 날씬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얇게 걸치고 있는 옷자락에는 U자형의 옷주름이 흐르다가 두 다리에서 긴 타원형을 그린다. 오른손은 내려 옷자락을 잡았고, 왼손은 배에 대어 검지 손가락만 펴고 있다. 두 팔은 몸에 붙어 있어 조금은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발밑에는 대좌에 꽂기 위해 만들었을 뾰족한 촉(觸)이 나와 있는데, 대좌는 지금 윗부분만 보이며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원통형의 신체, 굴곡진 허리와 두 다리 등에 양감이 잘 표현된 통일신라 후기의 우수한 불상이다. 원형으로 솜씨있게 처리된 얼굴을 제외하고는 긴장미가 줄어들었지만 대체적으로 세련미가 드러나는 작품이다.
거창 상림리 석조보살입상(居昌 上林里 石造菩薩立像. 보물 제378호. 경남 거창군 거창읍 미륵길 19-61 (상림리))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전체 높이 3.5m의 거대한 보살상으로 연꽃이 새겨진 8각의 대좌 위에 서 있다. 이 부근에 건흥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절에서 모시던 보살상으로 추측된다.
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보계(寶髻)가 솟아 있으며, 보관(寶冠)은 없어진 상태이다. 양감이 줄어든 얼굴에는 작고 가는 눈, 다문 입이 표현되어서 다소 업숙한 모습이다. 어깨는 각이 져 있으며, 신체는 장방형으로 보살상 특유의 유연성은 부족해 보인다. 가슴에 장식된 목걸이와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천의(天衣)는 매우 형식적으로 처리되었다. 허리에는 굵은 띠가 있고, 그 아래로는 양 다리에 걸쳐 U자형 옷주름이 엇갈리게 배치되어 있다. 오른손은 몸에 붙여 물병을 들고 있고, 왼손은 가슴에 대어 연꽃송이를 쥐고 있다. 이런 모습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에 유행하였던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소가 줄어든 얼굴, 어색한 몸체, 좌우대칭의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거창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居昌 迦葉庵址 磨崖如來三尊立像. 보물 제530호. 경남 거창군 위천면 상천리 산6-2번지)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기고 있다.
중앙의 본존불은 얼굴이 비교적 넙적하며, 얼굴에 비하여 작은 눈·코·입, 밋밋하고 긴 귀 등에서 둔중하고 토속적인 인상을 풍긴다. 신체의 표현은 각지게 처리된 어깨, 굴곡 없이 차분한 가슴, 막대 같은 다리와 좌우로 벌린 발 등에서 고려시대의 형식화된 면이 보인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거의 같은 형식으로 조각되었지만 어깨의 표현이 본존불보다는 부드러운 곡선을 하고 있다.
끝이 날카로워진 연꽃무늬 대좌(臺座)와 새의 날개깃처럼 좌우로 뻗친 옷자락 등은 삼국시대의 양식과 비슷하지만, 형식화되고 도식적인 요소가 보인다. 결국 이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다.
거창 동계 종택(居昌 桐溪 宗宅. 중요민속문화재 제205호. 경남 거창군 위천면 강동1길 13(강천리))
조선 중기의 문신 정온(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안쪽으로 '一'자형의 안채가 자리하였다. 안채의 오른쪽에는 뜰아래채가, 왼쪽에는 곳간채가 있다. 안채의 뒷쪽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3문을 설치한 후 사당을 세웠다.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집의 학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으며, 조선 후기 양반주택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거창황산리신씨고가(居昌黃山里愼氏古家.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17호.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1길 109-5 (황산리))
거창 신씨 집성촌인 황산마을에 있는 옛 집이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7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것으로 ‘원학고가(猿鶴古家)’라고도 부른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소한 양식에 서민 전통한옥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거창 수승대(居昌 搜勝臺. 명승 제53호. 경남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890번지)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수승대’ 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이다
"경내에는 구연서원, 사우,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함양재, 정려, 산고수장비와 유적비, 암구대 등이 있다"
수승대는 삼국시대 때 백제와 신라가 대립할 무렵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사신을 전별하던 곳으로 처음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근심하였다 해서 근심 ‘수’(愁), 보낼 ‘송’(送)자를 써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수송대라 함은 속세의 근심 걱정을 잊을 만큼 승경이 빼어난 곳이란 뜻으로 불교의 이름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 후 조선 중종 때 요수 신권 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당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이라 하였다.
지금의 이름은 1543년에 퇴계 이황 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영승리에 머물던 중 그 내력을 듣고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는 못하고 이름이 아름답지 못하다며 음이 같은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는 사율시(四律詩)를 보내니 대의 면에다 새김에서 비롯되었다.
경내에는 구연서원, 사우, 내삼문, 관수루, 전사청, 요수정, 함양재, 정려, 산고수장비와 유적비, 암구대 등이 있다. 이는 거창군과 거창 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으며, 솔숲과 물과 바위가 어울려 경치가 빼어나다. 또한 자고암과 주변에는 희귀식물인 고란초가 자생하고 있다.
용암정(龍巖亭.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3호. 경남 거창군 북상면 갈계리 63번지)
용암정은 조선 순조 1년(1801)에 용암 임석형(1751∼1816) 선생이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임석형이 지은 『용암정 창건기』와 이휘준의 『중수기』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고종 1년(1864)에 보수 공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자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아름다운 풍경과 더불어 고결한 선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정자 안에는 ‘용암정(龍巖亭)’, ‘반선헌(伴仙軒)’, ‘청원문(聽猿門)’, ‘환학란(喚鶴欄)’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거창 용암정 일원(居昌 龍巖亭 一圓. 명승 제88호.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63-0 일원)
용암정’은 조선 후기 용암(龍巖) 임석형(林碩馨)이 경남 거창군 월성계곡 위천변의 자연경관이 뛰어난 큰 바위에 지은 정자와 위천의 계류, 소, 암반 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는 조선 시대 전통격식을 갖추고 있는 별서이며, 주변 자연환경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배치된 전통경관과 역사문화환경이 복합된 자연유산으로 가치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거창 농산리 석조여래입상(居昌 農山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1436호. 경남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 산53번지)
거창 농산리의 낮은 야산 기슭에 있는 이 석불은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입불상으로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윗면에 두 발을 새겨 놓은 1매의 대석과, 대석에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한 돌에 광배를 함께 조성한 불신 등 두 개의 돌로 구성되었다.
신체에 비하여 다소 머리부분이 큰데 얼굴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었지만 전체적으로 후덕한 느낌을 준다. 양어깨를 덮어 내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가슴에서 U자형 옷주름을 이루다 잘록한 허리 부분으로부터 Y자형으로 갈라져 양 대퇴부에서 대칭적인 의문(衣紋)을 이루는 이른바 우전왕(優塡王, Udyana王)식 옷주름의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통일신라 700년 전후 추정의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사암제불입상(砂岩製佛立像)을 비롯하여 719년명 감산사상(甘山寺像), 730년~760년 경 추정의 경주 굴불사지 사면석불(堀佛寺址四面石佛) 남면 불입상 등 8세기 이후 상들에서 나타나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불상의 조성시기를 추정하게 해 준다.
두 발은 불신과 별도로 대석 위에 조각되어 있는데 마멸과 손상이 심하여 왼쪽 발가락 일부만 형태를 유지할 뿐이다. 우측 상단부가 깨어져 나간 광배는 불신과 한 돌로 이루어진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舟形擧身光)으로 어느 정도의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화염문 등 구체적인 문양 표현은 알 수 없다.
비록 부분적인 파손이 있으나 이 불상은 야산의 구릉에서 원위치를 지키고 있는 귀중한 불상으로 규모가 비교적 크고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점에서 가치가 있다.
월성계곡(경남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창선리)
남덕유산(1507.4m) 동쪽 자락의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길이 5.5㎞의 계곡"
월성은 흔히 ‘하늘마을’로 통한다. 덕유산과 지리산, 가야산 등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거창에서도 지대가 높고 산세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월성계곡은 남덕유산(1507.4m) 동쪽 자락의 월성천을 따라 형성된 길이 5.5㎞의 계곡이다.
계곡의 폭은 그렇게 넓지는 않지만 주변 산세가 워낙 거대해 수량이 풍부하다. 계곡 물놀이와 더불어 젖은 옷과 몸을 말리기에도 좋은 바위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고 계곡물은 그 바위 사이를 헤집으며 작은 폭포도 만들고 여울도 만들면서 갈계리의 위천계곡과 수승대계곡으로 흘러내려간다.
상류로 올라가면 장군바위쉼터 등이 나타나고 월성1교에 이르기까지 계곡욕을 즐기기에 좋은 장소들이 계속 나타난다. 산수마을 입구에서 마학동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좁은 길로 우회전해서 가면 하늘과 맞닿아 있는 산수리 언덕의 절경을 감상하며 병곡리로 내려오는 코스도 권장할만하다
함양 화림동 거연정 일원(咸陽 花林洞 居然亭 一圓. 명승 제86호.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77 번지 등)
거연정(居然亭, 경남 유형문화재 제433호)은 조선중기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이곳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1872년 재건한 것으로,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12수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딴 것으로 물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거연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이 주변의 기묘한 모양의 화강암 반석, 흐르는 계곡 물 등과 조화를 이루는 등 동천경관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이다.
임헌회(任憲晦1811-1876)는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安義三洞)이 가장 빼어나고, 그 중에서도 화림동(花林洞)이 최고이고, 화림동의 명승 중에서 거연정(居然亭)이 단연 으뜸”이라고 거연정 기문에 적고 있다.
함양거연정(咸陽居然亭.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3호.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2006)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全時敍)선생이 1640년경 서산서원을 짓고 그 곁인 현 거연정 위치에 억새로 만든 정자를 최초로 건립하였으며 1853년 화재로 서원이 불타자 이듬해 복구하였으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자 1872년 화림재 선생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억새로 된 정자를 철거하고 훼철된 서산서원의 재목으로 재 건립되었으며 1901년 중수가 있었다.
거연정은 함양군 안의면에서 26번 국도를 따라 전주방향으로 9㎞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는 봉전마을 앞 하천내에 있는데, 이곳은 옛 안의 3동의 하나인 화림동 계곡으로서 농월정, 거연정, 용유담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는 곳이다. 거연정은 봉전마을 앞을 흐르는 남강천의 암반위에 단동으로 건립되어 있다.
참고 : 거창군청 자료,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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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전탐방자료안내 잘 들러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