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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공파(贊成公派)는 문정공(文靖公, 諱 恒)의 둘째 아드님이신 찬성공(贊成公, 諱 永灝)의 후손으로서 정경부인(達城徐氏)께서 찬성공을 성혼시켜 서울 남산밑 훈도방 죽전동(현재의 中區 저(苧)洞)에 분가시키신 이후, 대대로 벼슬을 하면서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삭녕최씨 경파(京派)라 일컬어 왔다.
찬성공께서는 어려서부터 총명이 절륜(絶倫)하시었는데 성종(成宗)8년(1477, 丁酉) 21세의 약관(弱冠)으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시자 성종께서 총애하시고 벼슬을 사옹원정(正3品)에 제수하시었으며 왕명으로 경차관(敬差官)이 되시어 민정을 살피러 지방에 내려가셨다가 급병을 얻어 고성(固城) 임소(任所)에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시니 임금을 위시하여 조야(朝野)가 다같이 애통해 하였다 한다.
그 때 공의 장인되시는 시임(時任) 이조판서(吏曹判書)인 정효상(鄭孝常: 慶州人)이 자기가 잡아 놓았던 묏자리를 불쌍한 자기의 사위인 찬성공에게 양도해 주었다고 전해온다. 그로 말미암아 그 곳이 찬성공파 선산(先山)이 되었고 후손들이 차츰 선산 아래 모여 살게 되었으니 지금의 파주시 금촌읍 아동리 (옛 交河 衙洞 鵠嶺)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던 것이다.
찬성공의 손자이신 충정공(忠貞公, 諱 興源, 號 松泉)께서는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맡으시어 미중유의 국난(國難)을 훌륭히 수습하신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시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시었으며 영평부원군에 책봉되신 명신이시다. 시호(諡號)는 충정(忠貞)이라 하였다.
찬성공파는 충정공(8世)이래 현재(26世)에 이르기까지 종손(宗孫)이 400여 년 동안 적자사손(嫡子嗣孫)으로만 계대(系代)를 계승해 오고 있으며 충정공의 음덕(蔭德)으로 공의 종손들에게는 8대 봉군(八代封君)이 내려진 가문으로서 한말(韓末)에 이르기까지 관작(官爵)이 한 대(代)도 끊이지 않고 계속된 명문중의 명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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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3년(1457년)에 서울 서소문안에서 문정공(崔恒)의 2자로 출생. 총명 절륜하여 성종8년(1477년) 21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특명으로 사제감, 정(司宰監, 正)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도시, 정(司饔寺, 正)을 거쳐 사옹원, 정(司饔院, 正)에 전임되었다. 성종12년(1481) 10월에 경차관(敬差官: 왕명으로 지방에 파견하는 특수직책으로 전곡(田穀)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을 살피는 임무)으로 경상남도 고성(固城)임지에서 급병을 얻어 25세의 젊은 나이에 서거하자 조야에서 애통하여 마지않았다.
조정에서는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지경연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사 판의금부사 세자이사(世子貳師)에 증직되었으며 찬성공파(贊成公派= 京派)의 파조가 되었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둔전골에 임좌(壬坐)로 있으며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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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부원군의 자는 정보(挺寶)로 성종9년(1478년) 서울 훈도방 죽전동에서 찬성공(휘 永灝)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여 연산군 7년(1501년)에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되고 곧 주부(主簿)로 승계되어 사헌부 감찰, 의빈부도사와 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내자시, 첨정(內資寺僉正: 종4품) 내섬사, 첨정(內贍寺 僉正)종친부 전첨(宗親府 典籤: 정4품) 을 역임하고 명종2년(1547년) 향년 70세에 졸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조12년(1579년)에 이조참판 선조19년(1586년) 이조판서. 선조25년(1592년)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에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부로 증직되고 선조37년(1604년)에는 순충적덕 보조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영천부원군으로 봉군되었다. 묘는 파주시 아동동 곡령 간좌(艮坐)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배위 정경부인 창령성씨(昌寧成氏)는 판서를 지낸 허백당 성현(虛白堂 成俔)의 따님으로 무육하고 재취인 정경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세신(世臣)의 따님으로 1남 1녀를 두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아동 곡 령 간좌(艮坐)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아드님은 송천공 흥원(松泉公 興源)으로 의정부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공신과 청백리에 녹훈되고 영평부원군으로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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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은 중종24년(1529) 정월 초닷새날 서울 훈도방 죽전동에서 영천부원군 수진(秀珍)의 아들로 태어났다.
천부의 기품이 특이하여 10여세에 문사(文辭)를 성취하고 동고 이준경(東皐 李逡慶)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대성하였다. 자(字)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명종10년(1555) 3월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선공감주부, 호조좌랑, 군자감판관, 평양판관등을 역임하고 선조1년(1568) 증광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경상도사등을 역임하고, 선조2년(1569) 호조정랑(정 5품)과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 연경에 다녀와서 선조 5년(1572)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장령, 집의를 거쳐 사간원 사간을 누차 연임하고 동래부사에 부평부사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충청, 황해, 함경, 평안감사와 개성유수, 한성부좌윤을 역임하였으며, 승정원 도승지에 올라서 호조, 형조, 병조, 이조판서와 대사헌을 역임하면서 이도를 바로 잡았고 개성유수 재임 시에는 청백덕치(淸白德治)로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황해 양도(兩道)의 도순찰사가 되고 이어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어 선조대왕)을 의주로 호종(扈從)하고 성천(成川)에서 분조행궁(分朝行宮)하면서 비변사를 설치하여 백성을 위무하고 군병을 모집하여 국난극복에 전력을 다하였고 이로 인하여 신병이 깊어져서 선조26년(1593) 10월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체임되었으며 세자시강원빈객으로 물러나 정양하면서도 국가대사에 참여하였다.
선조36년(1603) 2월 16일 향년 75세로 서거하여 파주시 금촌읍 아동리 곡령에 예장하였다. 충근정량갈성효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竭誠孝節協策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영평부원군(寧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 되었으며 충정(忠貞)의 시호가 내려졌고 청백비가 하사되었으며 파주시 아동동에 수비되어 있다. 묘는 경기도 파주시 아동동 곡령 자좌(子坐)이고 묘비가 있다. 배위 정경부인 안동 권씨는 이조참판 권응창(權應昌)의 따님으로 2남 3녀을 두셨다.
아드님, 산립(山立)은 호조참판, 영안군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호종원종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또한, 아드님, 순립(順立)은 자산군수를 지내고 한성부좌윤에 증직되었으며 호종원종공신3등으로 녹훈되었다. 따님은 직장을 지낸 은진인 송흥조(恩津人 宋興祚)와 현감을 지낸 진주인 류순(晋州人 柳淳)과 현감을 지낸 전주인 이춘형(全州人 李春馨)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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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군은 명종13년(1558) 서울 훈도방 죽전동에서 충정공의 첫아들로 태어나 음보(蔭補)로 감역과 전설사 별좌를 역임하고 선조23년(1590) 진사에 급제하였으며 등등곡을 작사 작곡하였다. 선조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의주로 호종하고 국토회복에 진충보국하였다. 수원부사, 광주목사, 성주목사, 서흥부사, 강릉부사등 12대주의 수령으로 재임하면서 선정덕치하여 서흥부사 재임시에는 백성들이 거사비를 세워서 송덕하였다.
광해4년(1612) 내직으로 들어와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가 호조참판(戶曹參判) 에 제수되고 영안군(寧安君)으로 봉군되었다. 임진왜란 때에 국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원종공신1등에 녹훈되었으며 인조반전에 참여한 공으로 정사공신3등에 책록되었다. 인조12년(1634) 3월 12일 향년77세로 졸하니 좌찬성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으로 증직되었다.
배위 증정경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제용감 정 한진(韓璡)의 따님이고 청천위 한경우(韓景祐)의 손녀이며 슬하에 1남4녀를 두었다. 아드님 윤조(胤祖)는 상원군수를 지냈으며 우찬성과 좌의정에 증직되고 영창군(寧昌君)으로 봉군되었다.
1녀는 남양인 좌랑 홍여량(洪汝亮)에게, 2녀는 동래인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에게, 3녀는 광주인 세마 이문징(李文徵)에게, 4녀는 달성인 감사 서원이(徐元履)에게 출가하였다. 묘는 충정공묘앞 자좌(子坐)에 모시었으며 묘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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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공은 서울 훈도방 죽전동에서 충정공의 차자로 태어나 한의학을 공부하여 내의원봉사(內醫院奉事)를 시작으로 직장 주부 판관등을 역임하고 중군의관으로 허준 선생을 도와 의학 분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외직으로 나가 자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치민으로 많은 치적을 남겼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왕을 의주로 호종하였고 구국전선에 앞장서서 국토 회복에 헌신하여 호성원종공신3등에 녹훈되었으며 사후에 국가유공으로 한성부좌윤에 증직되었다.
묘는 파주 아동리 마무서록 묘좌(卯坐)에 모셔져있으며 묘비가 있다. 배위 증정부인 문화 유씨(貞夫人 文化柳氏)는 현감 유대춘(柳帶春)의 따님으로 4남 3녀를 두었는데 1자 윤서(胤緖)는 봉직랑에 호성원종공신 3등이며 2자 윤적(胤績)은 별제를 지내고 수직으로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3자 윤순(胤純)은 수직으로 중추부동지사가 되었으며, 4자 윤신(胤紳)은 중추부첨지사가 되었다. 따님, 첫째는 해주인 찰방 오도동(吳道東)에게, 둘째는 진주인 별제 강석주(姜碩周)에게, 셋째는 함양인 무과 여두영(呂斗永)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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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군은 영조21년(1745)에 서울 훈도방 죽전동에서 영은군 경(寧恩君 炅)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영조51년(1775)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삼사 응교 사인검상 서학 교수 등을 역임하고 정조3년(1979)부터 병조좌랑겸 춘추관기주관, 사헌부지평 홍문관부교리 지재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사관 사간원정언 헌납, 사헌부 집의 강원도사황해중군특보등을 역임하고 정조19년(1795)사간원 대사간에 오르고 정조21년(1797) 안동도호부사로 나가고 “ 어제오륜행실도윤음친서”를 인쇄배포하였다.
정조24년(1800)에 승정원 좌부승지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을 7차 연임하고 순조2년(1802) 경주부윤겸 병마절제사로 나갔다가 순조5년(1805) 병조참판(종2품)이 되고 영춘군(寧春君)으로 봉군되었다. 공께서는 고려중기 평장사공 때부터 대대로 살아왔던 삭녕군 마장면 대전리 괴음촌 옛터에 유허비를 세워 표시하였다.
문정공의 태허정(太虛亭) 옛터인 김포군 양촌면 학운리 삭시(朔是)에 후손들의 장사(葬事)를 금할 것을 사정공파 종손 치중(致重)으로 하여금 엄중 수호케 하였다. 순조6년(1806)에 한성부 우윤이 되고 순조9년(1809)족보간행에 기사보(己巳譜)서문을 쓰고 이 해 7월 25일 향년 75세로 졸하였다. 묘는 파주시 월롱면 영태리 둔전골 임좌(壬坐)에 있으며 묘비가 있다.
사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정2품)으로 증직되었다. 묘는 파주시 월릉면 영태리 둔전골 찬성공묘 계하 임좌(壬坐)이다. 배위 정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병조판서 남태회(南泰會)의 따님으로 무육하고 재취부인 정부인 풍산 홍씨(豊山洪氏)는 홍정한(洪井漢)의 따님으로 1자를 두었다. 묘는 파주시 월롱면 덕은리 덕현 임좌(壬坐)에 모셔져있으며 전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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