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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과 민간인 학살 문제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조교수
1. 머리말
우리는 흔히 우리 한민족을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 또는 “단 한번도 다른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민족”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위대한 정복군주로 불리우는 광개토대왕의 예만 보아도 이런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데올로기가 집중적으로 전파된 박정희 시대에는 정작 우리 역사 상 최대의 해외파병인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리고 그 기간, 한국군에 의해 베트남의 민간인 다수가 학살되었다는 의혹이 최근 들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게 한국이 잊혀진 전쟁이었다면, 우리에게 베트남전쟁은 또한 잊혀진 전쟁이었다. 최대 5만, 연인원 32만명이 이국의 전선에 파병되어 전사자 5천여명, 부상자 1만여명을 낳아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인명피해를 가져 온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이 갖는 의미는 격동의 현대사를 겪는 동안 응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의 이른바 국교정상화와 함께 이루어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흔히 한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 이 파병을 계기로 한미관계와 남북관계에도 상당한 변화가 왔으며, 박정희가 유신독재권력을 수립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최근들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재평가 문제가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박정희 시대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위치를 점하는 베트남 파병의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연구가 되지 않았다. 과연 베트남전쟁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박정희 시대의 형성에 어떤 식으로 기여한 것일까? 그리고 최근 제기되고 있는 민간인학살의 의혹이 한국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본고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몇가지 논쟁점을 중심으로 베트남 파병의 성격과 역사상 초유의 대규모 해외파병이 한국현대사에 남긴 명암을 시론적이나마 짚어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2.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 빛과 그림자
(1) 파병 경위: 미국의 압력인가 자발적인 파병인가?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의 보도의 충격 뒤에 남는 것은 당시 한국의 젊은이들이 꼭 베트남의 그 자리에 있어야 했는가에 대한 의문, 아니 회한이다. 한국군은 베트남전에 꼭 가야만 했는가?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압력을 이야기한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당시의 한국 상황에서 미국의 압력을 거절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은 한국에 대한 압력 수단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주한 미군 2개 사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베트남으로 이동시키겠다는 압력을 가해왔다. 박정희도 1967년 4월17일 대통령 선거 유세에서 “미국과 월남이 한국군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우리가 보내기 싫으면 안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여기에 있는 미군 2개 사단이 갔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미국의 압력을 강조하는 이런 주장은 한국군의 베트남파병을 설명하는 지배적인 담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베트남 파병을 설명하는 공식적인 담론과도 많은 차이가 있다. 당시 박정희는 베트남 파병의 이유로 1) 전 아세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집단안전보장에의 도의적 책임의 일환, 2) 자유 월남에 대한 공산침략은 곧 한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므로 우리의 월남지원은 바로 우리의 간접적 국가방위라는 확신, 3) 과거 16개국 자유우방의 지원으로 공산침략군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우리는 우리의 눈앞에서 한 우방이 공산침략의 희생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한국민의 정의감과 단호한 결의를 들었다.
그러나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의 진실은 미국의 압력 때문이라는 지배적인 설명이나 한국전쟁 당시 우리를 도와준 미국 등 우방에 대한 도덕적 의무 때문이라는 공식적 담론과는 다른 곳에 있다. 최근 공개된 미국의 비밀문서를 토대로 이루어진 연구들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을 처음 요청한 것이 미국이 아니라 한국측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사실 한국군의 파병이 미국의 압력 때문에 이루어진 것으로만 볼 경우, 한국이 그토록 적극적으로 나서 연인원 30만이라는 많은 병력을 파견한 사실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한국은 당시 -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 남북의 대치 속에서 독자적으로 국방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외국군대에 의존하고 있는 처지였다. 한국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역시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던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베트남전의 귀추가 자기 나라에 한국에 비해 훨씬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파병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거나 마지 못해 응했을 뿐이었다.
한국이 미국에 대해 본격적으로 베트남전 파병의사를 밝힌 것은 1961년 11월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와 회담한 때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군사정권이 어떤 이유로 파병문제를 대미협상카드로 제기하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다음과 같은 추론은 가능할 것이다.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의 당면 과제는 미국의 신임을 얻는 일이었다. 미국의 신식민지적 지배를 받고 있는 나라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인사들로서는 미국의 지원을 얻는 것이 사활적인 이해가 걸린 일이었지만, 박정희의 경우는 그 이해의 정도가 남달랐다. 왜냐하면 박정희의 좌익 전력 때문이었다. 쿠데타 성공 후 박정희는 자신의 좌익경력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는 미국의 신임을 얻는 데 전력을 경주했고, 마침내 미국의 초청을 받아내어 1961년 11월 중순 케네디와의 정상회담의 일정을 잡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 회담을 코앞에 둔 1961년 10월 박정희에게 뜻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김일성이 이북정권의 무역성 부상을 지낸 황태성을 박정희에게 밀사로 파견한 것이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형으로 1946년 10월민중항쟁에 연루되어 살해된 박상희(김종필의 장인)의 절친한 친구로써, 박정희가 어린 시절부터 몹씨 따랐던 인물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한미정상회담을 앞둔 박정희는 황태성이 서울에 왔다는 소식에 그를 만나는 대신, 그의 체포를 지시했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만나지 않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미국의 정보당국은 박정희가 극비리에 황태성을 3차례 만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에 내밀 카드가 없어 고심하던 박정희에게 밀사 황태성의 등장은 악재 중의 악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케네디에게 제안한 것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었다. 이 때는 아직 미국이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파견하여 대규모 개입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기 이전이었다. 그러니 파병에 대한 미국의 압력이란 것은 있을 수 없는 때였다. 그런 때에 박정희는 “미국이 너무 혼자서 많은 부담을 지고 있다”면서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 준다”는 명목으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제안한 것이다. 이 뜻밖의 제안에 케네디는 박정희와 예정에 없던 정상회담을 또한번 가졌고, 베트남 파병 제안으로 박정희가 자기를 아주 기분좋게 해주었다고 치하했다. 박정희로서는 미국대통령과의 면접시험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베트남 파병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직 미국은 베트남전에의 본격적인 개입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제3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더구나 자기 국방을 외국군대에 의존하는 나라인 한국이 다른 나라에 파병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보나 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 이 점은 미국이 우방국에 대한 군사지원요청을 위한 초기단계에서 전투병력을 요청하는 국가들의 명단에 한국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그러나 1964년 4월 23일 죤슨 대통령이 “보다 많은 깃발(More Flags)" 정책을 발표하면서 한국군 참전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이 정책은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동맹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국제사회와 미국인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으로, 베트남전에의 미국의 개입은 내전에 개입한 것이 아니라 국제적 전쟁에 개입한 것이라는 점을 보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UN을 통해 16개국의 동맹국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미국의 "More Flags" 정책에 대한 동맹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한 동맹국 25개국 중 이 정책에 호응하여 파병의지를 표명한 것은 한국과 대만 뿐이었다. 동맹국들의 저조한 참여는 상대적으로 박정희의 위치를 미국을 도와주는 실질적인 전략파트너로 격상시켰다.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미국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일부의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파병에 관한 결정은 강대국의 요구에 의한 약소국의 불가피한 참전이라는 기존의 시각을 벗어나 박정희 대통령의 명백한 필요에 의해 개발되고 적극적으로 추진된 정책의 결과였다. 최근 국방부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간행한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 관한 연구서 역시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 요구에 대해 동남아시아 조약기구(SEATO) 회원국들의 미온적 반응을 보인 반면 SEATO 회원국도 아닌 한국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파병을 결정한 것은 미국의 강압 때문이 아님을 시사한다고 밝히고 있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가담했다고 해서 베트남전의 성격이나 우리 군이 가서 맞이할 사태에 대해 충분한 연구를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젊은이들의 목숨이 걸린 파병 문제를 다루면서 정부는 베트남의 역사나 사회, 또는 베트남전의 성격에 대해 이렇다할 보고서 하나 제대로 작성하지 않았다. 베트남전에서의 실패의 원인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나 미국의 관리들은 미국이 베트남전에 대해 너무 몰랐다고 입을 모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베트남전에 대해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제 베트남전의 참전용사이자 한국군의 4성장군 출신인 김진선 장군 같은 분조차 베트남전의 성격을 민족해방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당시 한국정부는 그런 전쟁의 성격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당시 한국정부가 관심을 둔 것은 베트남전 파병을 미국과의 관계에서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의도와, 일본이 한국전쟁에서 그랬던 것 처럼 베트남을 하나의 시장으로 보려고만 했다.
(2) 한미관계의 변화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동기의 하나는 한국정부가 파병을 통해 대미관게에서 한국의 위치를 개선해 보려는 것이었다. 실상 한국과 베트남과의 관계를 살펴서는 베트남 파병을 이해할 수 없다. 실상 베트남 정부는 한국군의 참전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거의 모든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듯이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은 한국-베트남 관계가 아니라 한국-미국 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한국이 베트남에 파병한 것은 베트남의 우방국으로서가 아니라 미국의 우방이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많은 젊은이들의 피의 대가로 미국과의 관계에서 오랜 기간 한미 간에 현안이 되어 온 한미행정협정(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 SOFA)의 체결, 군원이관계획의 중지 등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 및 한국에서 북한의 침공이 있을 때 미국의 자동개입 문제 등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베트남전 참전은 분명 한미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고,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거둔 성과가 과연 한국군 참전의 대가로 합당한 것이었는지는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또한 그 성과가 국가이익으로 평가될 수 잇는 것인지, 아니면 정권의 이익으로 그친 것인지에 대한 검토도 필요하다고 본다.
1) 미군 철수 문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관련하여 한국정부가 미국으로부터 최우선적으로 얻어내고자 했던 사항은 바로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확실한 보장이었다. 한국정부의 줄기찬 노력으로 한국정부는 1966년 2월 서울을 방문한 미국 부통령 험프리로부터 “군사분계선에 1명의 미군이라도 주둔하고 있는 한 미국은 전국력을 다하여 한국의 안보 및 방위공약을 이행하겠다. 한국은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합친 만큼이나 강력하다. 미국은 오늘날 미국과 한국을 합친만큼이나 강력하다. 우리는 우방이며 친구다. 여기에는 아무런 이론이나 의문도 있을 수 없다.”라는 발언을 끌어냈다. 험프리의 이런 립서비스는 미 의회의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풀브라이트 의원으로부터 “이 따위 미사여구로 표현된 조약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며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바란 것은 단지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만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존재가 갖는 의미였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몬로주의 방식에 따른 것으로 이에 의하면 한국이 북한으로부터 무력공격을 받을 때 미국은 자동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헌법절차에 따라 미국이 취할 행동이 결정되도록 되어 있었다. 한국정부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북대서양조약, 즉 한 조약국에 대한 공격을 조약 가맹국 전체에 대한 공격, 즉 미국이 직접 공격을 받지 않았더라도 미국은 미국 본토가 공격당한 것과 같이 행동하도록 되어 있는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미국정부가 베트남 파병에 대한 대가로 한국에 제공하기로 한 군사적, 경제적 지원내용을 담은 1966년 3월 4일자 「브라운 각서」는 한국에서의 무력충돌상황 발생시 미국의 자동개입은 물론이고 주한미군의 계속주둔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이는 한국정부를 자극했고, 한국정부의 계속된 요구에 따라 브라운 주한미국대사는 3월 7일과 8일에 이동원 외무장관 앞으로 연거푸 서한을 보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을 약속했다. 그러나 브라운은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이 서한의 의미를 “한국측은 항상 미국이 한국의 동의없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지 않도록 확약받길 원했는데 이것(앞의 서한들-인용자)은 이 확약을 거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브라운의 후임으로 주한미국대사가 된 포터는 “우리(미국-인용자)는 군대를 철수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그들(한국-인용자)에게 한 일은 없다”며 “우리는 협의없이 철수하지 않겠다는 말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과 주한 미군의 계속 주둔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공약도 없으며, 미국정부가 한국에 새로운 다짐을 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는 1969년 닉슨대통령의 괌독트린 발표 이후에 주한미군의 철수로 현실화되었다. 미국은 1970년 7월 52,000명의 주한미군 중 1개 사단 2만여명을 1971년에 철수할 것이라고 통보했다. 주한미군의 철수에 관한 사전협의를 한국정부는 동의로 생각한 반면 미국은 이를 사전통보 정도로 여긴 것이 이 때보다 분명해진 적은 없었다. 한국정부는 주한미군의 부분철수 계획이 전면철수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 속에서 미국에 대해 주한미군의 철수는 우방국에 대한 배신행위라며 철회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미국은 예정대로 1971년 3월 휴전선 서부전선의 방위를 담당해 온 7사단을 철수시켰다.
이 무렵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북한을 극도로 자극하여 1968년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등이 일어나고, 군사분계선에서의 남북간의 무장충돌이 급증한 직후였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단행한 것은 박정희가 가장 주력했던 주한미군의 현상유지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증명한 것이다.
2) 작전지휘권 문제와 한국군에 대한 ‘용병’ 논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1950년 7월의 대전협정으로 미군에 이양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고 명령을 집행했다. 한국과 베트남은 1964년 10월 31일 한국군의 베트남 내 주둔군 지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국군이 독자적인 작전수행권을 갖게 되었다. 미국은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이 미군에게 있음을 들어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역시 장악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당시 국방장관 김성은은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주면 한국군은 위험지역에 투입되기 쉬우며 전투손실만 증가하고 실익을 얻지 못한다. 만약 한국군이 독자적인 지휘권을 가지고 비교적 안전한 해안지대에 배치된다면 전투손실을 줄일 수 있고 국내업체의 월남 진출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한국군에 oe한 지휘권이 주월한국군사령관에 있다는 사실은 1965년 9월 6일 각각 체결된 「주월 한ㆍ미군사실무약정서」와 「한ㆍ월군사실무약정서」에서 확인되었다.
그런데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독자적인 작전지휘권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베트남군이 미군에 의해 지휘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상황에서 한국군이 베트남에서조차 미군의 지휘를 받을 경우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미국은 주월미군사령관 웨스트모어랜드가 한국군에 대한 전적인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을 성문화할 것을 원했으나, 이를 문서화할 경우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비난을 불러와 한국을 곤혹스럽게 할 것이며, 주월한국군의 채명신 사령관이 웨스트모어랜드 장군의 ‘사실상의’ 작전지휘권 행사에 전적으로 동의했기 때문에 문서화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이 미국의 ‘용병’이라는 비난은 북베트남이나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은 물론이고, 국내에서 파병을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 뿐 아니라 심지어 미국 관리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다. 1970년 2월에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도 바로 한국군에 대해 미국이 비밀리에 지급해 온 해외복무수당이 바로 한국군을 미국이 ‘용병’으로 고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 때문에 열리게 된 것이다.
국제법상 ‘용병’이란 충돌당사국의 국민 또는 그 지배지역의 거주자가 아닌자로서, 본질적으로 사적 이득에 대한 욕망으로써 모집에 응하여 전투행위에 응하여 직접 가담하는 자를 말한다. 이렇게 볼 때 국제법상의 용병은 개인이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행한 참전행위를 말하는 것으로, 외국의 요청에 따라 정부가 자국 군대를 해외에 파견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국군의 경우 미국에 의해 모든 경비가 지출되었고, 미국의 경비부담이 없었을 경우 파병이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용병’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특히 한국이 자유세계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참전했대고 대외적으로 공언한 명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해 줄기차게 한국군에 대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한 사실은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풀브라이트 의원 등으로부터 “만약 한국군이 자신을 용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한 애국적 이유에서 파병된 것이라면 우리는 왜 이런 협정(해외복무수당 지급에 관한 약속 - 인용자)을 만들었는가?”라며 “한국은 우리의 요청과 촉구에 따라 좋은 상거래를 하고 있을 뿐”이라는 비난을 초래했다.
한국군이 과연 ‘용병’이었는가 여부는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풀브라이트 의원이 집요하게 추궁한 것처럼 돈과 명예를 모두 다 가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국군의 ‘용병’ 논란과 관련하여 한가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당시 박정희 정부가 국가의 부름을 받고 베트남의 전선으로 파견된 장병들의 이익을 지키는 데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당시 외무장관 이동원은 “월남은 전장터이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이라며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를 취할 것을 건의했다. 이에 대해 박정희는 “미국이 어려운 틈을 타서 우리가 타산적으로 나간다면 너무 야박하지 않은가”라는 입장을 보였다. 누구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대통령인지 모를 박정희의 태도가 낳은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군 사단장인 소장이 미국으로부터 받는 월 급여가 354$인 반면, 필리핀군과 태국군의 소대장인 소위는 각각 매월 442$, 389$를 받았다. 일반 사병들의 경우는 남베트남군의 월 급여에도 미치지 못하는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또한 미국은 한국군의 파병으로 자기네의 인명손실을 줄인 것은 물론, 보다 많은 깃발을 추구한 정책에서도 큰 성과를 얻었다. 미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막대한 비용절감 효과를 보았다. 주월한국군 1인당 유지비가 연간 5천$인 반면, 미군 1인당 유지비는 13,000$였으니, 그 차액 8천$을 한국군 파병 연인원 30만으로 곱하면 미국은 무려 24억$의 경비절감 효과를 본 것이다. 미국은 한국정부의 재정지원 요구를 터무니없는 액수라고는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는 한국군의 참전으로 미국이 얻게되는 여러 가지 정치적 효과, 즉 베트남전에서 미국의 개입이 국제적 지지를 얻고 있다고 과시할 수 있는 점과 한국군이 미군이 흘릴 피를 대신 흘리고 있다는 점 등 이외에도 경제적인 면에서도 미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정부는 미국과의 교섭에서 한국장병들에게 더 많은 보수를 가져다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정부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포터 주한미대사는 “미국의 재정지원 내용에 관한 협상이 일단 끝난 뒤로는 한국정부는 딴 국가가 한국보다 더 받고 있느니 어떠니 하는 따위의 문제를 가지고 미국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외국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얻는 파병 자체의 정당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일단 자기나라 군대를 파병했다면 그들의 생명보호와 정당한 처우 보장에 힘써야 하는 것이 대통령과 정부의 책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 박정희 정권이 보인 행태는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것이다.
3) 한국정부의 대미교섭력과 독재권력의 강화
한국이 베트남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1965년은 그동안 일방적인 관계였던 한미관계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룬 해로 평가된다. 죤슨행정부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의 정통성에 관한 모든 유보조치를 해제하고 박정희의 통치능력에 대해 지나칠 정도의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8년 이후 관례적으로 계속해 온 한국의 국내문제에 관한 압력을 중단했다.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미국의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또한 베트남 특수와 무관하지 않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상당히 고무되었다. 이에 박정희는 3선개헌을 추진하며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선다.
그러나 1968년 1월에 이틀 간격으로 일어난 두 사건은 박정희로 하여금 미국과의 관계에서 위기감을 가져다 주었다. 북한 특수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에 대해 미국은 극히 소극적으로 대한 반면, 푸에블로호 납북사건에 대해서는 한국의 기대와는 달리 북한에 대해 아무런 군사적 보복행위를 하지 못한 채 간첩행위를 인정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두 사건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미국과 동반자 관계에 들어섰다고 자만해 있던 박정희 정권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여기에 1971년 주한미군의 일방적인 철수가 이루어지면서 박정희 정권의 미국에 대한 불신은 증대되었다. 박정희는 미국 행정부 뿐 아니라 의회에 대해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을 모색했고, 그런 움직임은 1970년대 초반 이래 박동선 등의 맹렬한 한국식 로비로 나타났다. 또한 박정희는 이 시기의 국제적 위기에 대한 대응의 일환으로 10월유신이라는 친위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런데 박정희는 3선개헌과 유신체제의 수립 등 독재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별다른 제재나 간섭을 받지 않았다. 또한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의 로비활동 등에 대해 미국은 효과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주한미대사 포터는 이를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참작한 행정부 고위관리들의 관대함 때문이었다고 프레이저 청문회에서 증언했다. 즉,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으로 박정희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얻어 이를 독재권력 강화에 이용한 것이다.
비록 박정희가 1970년대 들어 미국과의 관게에서 불만을 갖고 나름대로의 자구책을 모색했지만, 그가 당시의 국제정세에 정확하게 대처하거나 아니면 미국과의 관계에서 구조적인 종속성을 탈피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국제정세 변화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국가들이 베트남전의 종전과 더불어 펼쳐지는 새로운 국제체제의 변화에 적응하고자 노력했지만, 한국은 오히려 미국의 태도변화에 충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미의존을 줄여 나가지 못했다. 한국의 경우 미군철수 불가만을 되풀이할 뿐, 미국의 국내여론이나 국내정치적인 요구사항을 읽는 데 실패했다.
또한 박정희 정권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교섭력을 증진시키려는 애초의 목적을 거의 달성하지 못했다. 먼저 베트남 파병을 자청하고 나선 한국정부로서는 미국에 대해 강력한 요구를 하기 힘들었으며, 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브라운 각서」를 통해 한국의 요구조건들이 일부 반영이 되기도 했지만 미국은 이러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명시규정이 없는 모호한 내용의 「브라운 각서」를 담보로 한국측으로서도 더 이상 미국의 약속이행을 요구하기 힘들었다. 요컨대 박정희 정권은 한국의 구조적인 대미 종속성과 그에 따른 허약한 교섭지위 때문에 베트남 파병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도 미국으로부터 어떠한 공식적 보장도 이끌어내지 못한 것이다.
(3)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와 남북관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가져 온 성과의 하나로 공통적으로 지적되는 것은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이다. 실제로 한국군의 군사력은 미국 군사원조의 증대, 군원이관계획의 중지, 실전 경험의 축적 등을 통해 상당히 증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효과가 과장되어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냉전 체제 하의 군사적 대치의 특성 상 한국군의 군사력 강화는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가져와 제로섬 게임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 극히 예민하게 반응했다. 김일성은 “월남문제에 대한 태도는 혁명적 입장과 기회주의적 입장,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민족이기주의를 갈라 놓는 시금석”이며, 조선로동당은 “월남 인민의 투쟁을 자신의 투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월남 민주정부가 요구할 때에는 언제나 지원병을 파견하여 월남형제들과 함께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돕겠다는 김일성의 발언은 곧 군사분계선에서의 긴장고조로 나타났다. 1965년과 1966년 각각 88건과 80건이었던 군사분계선에서의 충돌은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1968년 1월에는 청와대 습격사건과 프에블로호 납북사건이라는 초대형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워싱턴과 서울의 당국자들은 이런 움직임이 베트남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고 있는 한국에 대한 압력이라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실제로 한국군을 베트남에 증파하려던 논의는 한반도에서의 급격한 긴장고조로 인해 사그러들었다.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한국에 유신체제라는 권위주의 체제의 성립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북한의 체제 역시 고도로 경직되게 만들었다. 1967년 4월의 조선로동당 4기 15차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계기로 북한 체제는 그 이전과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유일사상체계로 변질되었다.
(4) 경제발전과 베트남 특수
한국은 베트남 파병으로 인해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보았고, 이는 한국경제가 도약하는 데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는 데에는 모든 연구자들이 일치를 보고 있다. 자료와 계산방식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한국은 이른바 베트남 특수를 통해 약 10억$ 내외의 외환수입을 올렸다. 베트남의 정글에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벌어들인 10억 달러가 한국경제의 발전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에서 베트남 참전이 유일한 독립변수가 아니었다는 점 역시 강조되어야 한다.
한국경제의 발전에서 베트남에서 피흘린 참전용사들의 기여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전쟁이라는 불행한 기회를 틈타서 경제적 이익을 본다는 것이 갖는 도덕적 문제는 잠시 미루어 두더라도, 과연 한국군의 참전으로 얻은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는 우리가 치른 대가와 기회비용, 즉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지 않았더라도 얻을 수 있었던 이익을 고려하여 냉철한 평가를 내려야 할 필요가 있다.
과연 베트남에 한국군이 파병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베트남 특수에서 완전히 배제되었을까? 미국 시장이 열린 것도 베트남 파병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베트남 특수의 최대의 수혜자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매년 우리가 베트남 특수의 전 기간 벌어들인 금액을 훨씬 넘는 달라를 벌어들였다. 물론 한국과 일본의 경제규모나 발전수준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을 수평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베트남의 하늘에 보다 많은 깃발이 휘날리길 원했던 미국의 요구에 따라 단 20여명의 상징적 병력을 파견한 대만, 한 사람의 병력도 파견하지 않은 싱가포르나 홍콩이 베트남 특수를 누리지 못하거나, 냉전의 정치경제적 논리 속에서 선택적으로 개방된 미국시장에서 배제되지는 않았다. 한국이 연인원 32만명을 파견하여 5천여명의 전사와 1만여명의 부상자, 그리고 2만여명의 고엽제 피해자라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명피해에 민간인 학살이라는 멍에에 미국의 ‘용병’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아가며 베트남전에서 얻은 경제적 소득은 겨우 20여명의 병력을 파견한 대만이 얻은 소득을 악간 상회하는 것이었다.
3. 민간인 학살 논란
한국군의 베트남파병과 관련하여 아직까지도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두가지 문제는 대를 이어 계속되는 고엽제 피해와 최근에 강력하게 제기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이다. 이 중 민간인 학살 문제는 아직은 진상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의혹 수준이지만, 우리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서는 문제이다. 지금까지 약 80여건의 학살 사례가 발굴되었지만, 참전용사 전체가 학살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 공포와 혼란과 광기의 현장에서도 대다수의 참전용사들은 민간인 보호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월한국군 사령부의 「3훈5계」에서 잘 지적한 것처럼, 김소령이나 최일병이 잘한 일도, 박대위나 이병장이 잘못한 일도 다 따이한이 잘했다 못했다라고 불리어지게 되어 있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문제가 작년 가을부터 우리 사회에서 제기되면서 우리는 당혹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고, 또 거센 강도로 반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민간인 학살이라니, 그런 일은 없었고, 듣도 보도 못했다” 처음에는 이런 식의 완강한 부인이 반론의 대세를 이루었다. 그러나 아주 구체적이고 생생한 베트남에서의 현장취재 앞에 이런 반론은 힘을 잃었다. 사실 30대 후반 이상의 사람이라면 민간인 학살은 공공연한 비밀이지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동네 이발소에서, 중국집에서, 교련시간에, 군대에서, 예비군 교육장에서 우리는 그럴싸한 무용담으로 포장된 한국군의 보복전술과 민간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입장에서 돌이켜 볼 때 더 끔찍한 사실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빨갱이는 죽여버려야 한다”는 생각에,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태도까지 더하여 이런 이야기를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한국군이 거쳐간 베트남의 마을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죽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논란은 민간인의 죽음이 없었다는 전면적인 부정을 넘어서 그 죽음의 성격을 둘러싼 논쟁으로 나아가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에서의 민간인피해는 불가피하다. 의도적인 학살은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적군과 민간인이 구분이 안가는 전쟁, 전선이 따로 없는 전쟁이었다”라고.
한국전쟁과 더불어 베트남전쟁은 평화애호가들에 의해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고 있다. 대대적인 무차별 폭격으로 인해 그 어떤 전쟁보다도 민간인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현대전은 불행히도 민간인 피해가 점점 더 커지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런 민간인 피해를 막자는 것이 우리가 전쟁을 반대하는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민간인 학살이란 일반적인 민간인 피해와는 의미를 달리한다.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에서 문제삼는 것은 민간인 학살이지 민간인 피해가 아니다. 물론 진실위원회는 전쟁과정에서의 민간인 피해도 근절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교전상황이 아닌 상태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베트남전이 베트콩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은 전선없는 전쟁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린 꼬마조차 사탕을 받아들고는 뒤돌아서 수류탄을 던지고 달아나는 일도 있었다하니 모든 민간인이 베트콩으로 보였을 것이다. 전선이 없는 전쟁, 민간인과 베트콩이 구분이 안되는 유격전쟁. 낯설은 베트남의 정글에 내던져진 한국군 병사들의 혼란과 공포는 극에 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논리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전선이 없는 전쟁, 유격대와 민간인이 구분이 되지 않는 전쟁은 우리의 근현대사 속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1894년의 농민전쟁, 의병운동,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운동,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빨치산 운동 등도 모두 전선이 따로 없었고, 유격대와 민간인의 복장이 구분되지 않는 전쟁이었다. 설혹 피살자가 베트콩 내지는 이른바 ‘통비분자,’ 즉 베트콩을 지원하는 민간인이었다 하더라도 교전이 끝난 상황에서의 학살은 분명 인류의 양심을 짓밟는 전쟁범죄일 뿐이다. 일본군이 우리 독립군을 돕던 마을에 들어가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노근리에서 미군이 우리 민간인들을 학살한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가 베트남에서 민간인을 죽인 것이 어떤 이유로라도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중잣대를 버려야 한다.
불행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에도 항변은 이어진다. “우리만 죽였나? 남들도 용서를 빌지 않는데, 왜 우리만 사죄해야 하나?” “베트남정부도 사죄를 요구하고 있지 않은데 왜 먼저 우리가 이런 문제를 들추어 내나? 누워서 침뱉기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간 우리가 학살자냐? 참전용사들의 명예를 짓밟지 말라.”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자는 전쟁을 이야기 말라!”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한국군을 베트남전에 파병시키겠다고 제안했다. 해외의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의 “용병”으로 미국의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참전한 한국군에 차례진 것은 귀찮고 인명손실의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민간인 학살의 위험성이 높았던 토벌작전이었다. 수백만의 목숨을 앗아간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민간인 5천명이라는 숫자가 전체 사망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사실 극히 낮은 것이다. 민간인 사상자의 대부분은 미군의 융단폭격에 의해 발생했다. 따지고 보면 융단폭격에 의한 대규모 살상이 더 참혹한 것이겠지만,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이루어진 대량학살보다 근거리에서의 민간인 처형이 더 큰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 “용병”이라는 부끄러운 위치가 민간인 학살이라는 부끄러운 역사를 낳은 것이다.
당시 한국군의 작전은 미국 의회의 사이밍턴 청문회에서도 누차 지적된 것처럼 순수한 전투와 토벌작전을 결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에서의 토벌전략은 유격대 활동의 근거지가 될 수 있는 자연촌락이나 산재호를 분쇄하고, 주민들을 신생활촌이라 불리는 전략촌으로 옮겨 유격대와 주민의 접촉을 차단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략은 1930년대 만주에서 일본군이 조선과 중국의 항일유격대를 대상으로 엄청난 폭력을 수반한 집단부락 건설 중심의 비민(匪民)분리전략을 그대로 빼닮았다. 한국군의 수뇌부는 일본군, 만주군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제의 유격대 토벌부대인 간도특설대 출신들은 한국군의 수뇌부에 대거 포진했다. 실상 한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채용한 토벌전술의 원형은 일본군이 만주에서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면서 개발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공비토벌 작전에서 한국군은 이 전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러나 만주에서는 물론,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공비토벌작전에서도 이 전술은 거창, 산청, 함양 등 숱한 지역에서 민간인 학살의 쓰라린 역사를 낳은 바 있었다. 자기 나라에서조차 민간인에 대한 오인 학살이 빈발했던 한국군의 전술적 특성 상, 낯설은 남의 땅에서 민간인 학살이 가능성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까닭에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의 토벌작전에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사르던 일본군의 잔재가 남아 있다가 발현된 것도 무리는 아니다.
1966년 5월 25일 주월한국군사령부가 발간한 전훈집은 “부락은 모든 적활동의 근거지”이며, “게릴라의 보급, 인적자원 및 정보수집의 근원은 부락에 놓여 있으며 베트공 하부구조의 기반은 부락과 주민이다”라고 강조했다. 불행하게도 이 전훈집은 앞서 소개한 전시복무규정의 당위적 훈계에 비해 훨씬 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토벌에 나서 마을에 발을 들여 놓을 때, 적들의 잠재적 기반인 마을주민들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베트남전에서의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는 불행했던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베트남에 파병된 장병들은 중대장급이 1935년을 전후한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고, 일반 병사들은 대개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했다. 그들은 아주 어린 나이에 한국전쟁의 살육을 겪었고, 그들이 겪은 모든 불행은 빨갱이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교육받았다. 빨갱이는 인간도 아니고, 동족도 아니며, 빨갱이일 뿐이었다. 빨갱이는 죽여도 좋은, 아니, 죽여야만 하는 존재였다. 강력한 극우반공이데올로기의 세례를 받으며 자라난 세대에 속한 사람들은 빨갱이 사냥에 나설 심리적 준비를 잠재적으로 갖추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병사들은 식민지 시기 일제에 의한 학살의 피해자였다가, 냉전체제의 확립과정과 한국전쟁을 경험하면서 좌우익 상호 간의 동족 내부의 학살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급속히 변모한 불운한 민족의 가난한 아들들이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패배한 뒤 미국 내에서는 베트남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이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꼽은 실패의 원인의 하나였다. 그러나 우리는 베트남에 대해 몰랐을 뿐 아니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와 혼란 속에서, 왜 우리가 머나먼 베트남의 정글에 끌려와 남의 전쟁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빨갱이는 죽여도 좋다는 맹목적인 극우반공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일부 우리 병사들에 의해 분명히 민간인 학살은 자행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역에서 학살이 있었다고 해서 30만 참전용사 전체가 학살자 취급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 공포와 혼란과 광기의 현장에서도 대다수의 참전용사들은 민간인 보호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필자 역시 한국군에 의해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백명의 조선인을 죽이면 그 중에 적어도 한명은 공산주의자일 것”이라며 간도를 피바다에 잠기게 했던 일본군의 만행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의도적인 학살”이 아니었다는 것이, 민간인과 베트콩의 구분이 힘들었다는 상황논리가 결코 수천명의 민간인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덮을 수는 없다.
우리는 학살이란 말의 무게 때문에 학살을 아주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렇지만 모든 병사들이 각종 선진적인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현대전에서 학살은 별로 특별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주 우발적으로, 쉽게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학살보다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학살의 묵인과 동조, 은폐이다. 사실 베트남전에서 사이공 정부 관할하의 농촌 지역의 주민 대부분은 베트콩을 지원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우리 병사들은 그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전우들 밖에는 없었다. 그런 소중한 전우들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는 총탄에 쓰러졌을 때, 병사들은 자연 공포와 복수심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이다. 지금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진실위원회 사람들 역시 그 때 그 자리에 놓였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전투가 끝난 뒤 마을사람들을 다 모아 놓은 상황에서, 살상무기를 모두 갖고 있던 우리 병사들 중 어느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보복의 총탄을 날린다면? 지휘관은, 그리고 주변의 동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를 체포하여 상부에 보고하여 군법위반으로 재판에 회부하였을까? 황급히 그를 제지하고 마을에서 빠져나와 오늘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기로 하였을까? 누군가가 살아남아 있다면 뒤에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사람들을 깨끗이 정리하고, 그렇게 희생된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전과에 포함해 상부에 보고하였을까? 만일 복수심에 잠시 눈이 멀어 방아쇠를 당긴 부하나 동료를 상부에 보고하여 적법절차를 밟지 않게 하였다면 - 이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 그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학살의 은폐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