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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는 프랑스 로코코 미술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화가이다. 루이 15세가 직접 나라를 다스린 시기(1726~1774)와 대개 일치하는 활동 기간 동안 부셰는 그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가장 정확하게 반영한 작품으로 궁정과 귀족, 상층 부르주아 후원자들뿐 아니라 서민 대중에게까지 폭넓은 인기를 누렸다. 18세기 초중반의 프랑스 문화를 지배한 취향은 ‘예쁜 것(le joli)’에 대한 탐닉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시대 사람들이 선망한 이 아름다움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부셰의 그림이 보여주는 가볍고, 밝고, 호화스럽고, 우아하고, 세련되고, 장식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였다.
로코코는 르네상스 이래의 다른 미술 흐름과 달리, 이탈리아에서 수입해온 것이 아니라 프랑스가 만들어 전유럽에 전파시킨 미술 양식이다. 중세 고딕 건축 이후 다시 한번 프랑스가 유럽의 문화적 유행을 선도하게 할 계기를 만든 로코코의 시대 이후,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지로 자리를 굳혀 그 위치를 20세기 중반까지 이어간다. ‘프랑스의 세기’로 불린 이 18세기에 유럽이 받아들인 ‘프랑스적인 것’의 가장 전형적인 이미지가 바로 부셰의 그림에서 나왔다.
화가 자신이 회화 1천점과 드로잉 1만점을 제작했다고 추산할 정도로, 부셰는 40여년에 걸친 오랜 활동 기간 내내 왕성한 생산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직접 만든 작품뿐 아니라 그것에 기반해 만들어진 태피스트리, 동판화, 책의 삽화, 도자기 그릇을 장식한 그림, 도자기 인물상(biscuit)과 후배 작가에 의한 모방작 등의 형식으로 증식되어 퍼져나간 부셰의 그림이, 프랑스의 모든 계층에 궁정의 문화를 퍼뜨리고, 유럽의 전역에 ‘프랑스풍’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 |
프랑스의 세기, 가장 프랑스적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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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날도와 아르미다] 1734년 캔버스에 유채, 135.5cm×170.5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부셰는 1703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도 화가였는데,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소속된 본격적인 화가가 아니라, 장인 길드와 유사한 성 누가 아카데미(Académie de Saint-Luc)에 소속되어 각종 장식물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우던 부셰는 17세쯤 되었을 때 역사화가 르무안느(François Lemoyne)의 제자가 되었다. 본격적인 도제 생활을 하지는 않았고 제대로 그림을 배운 기간도 짧았으나, 베로네제와 유사한 스승의 화풍은 그의 초기작에 흔적을 남겼다. 1723년에는 그의 권유로 아카데미의 로마상(Prix de Rome)에 도전, 수상하여 이탈리아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국고에 여유가 없어 유학이 미뤄지는 동안 그는 생계를 위해 판화 작업을 했는데, 그 중에는 1백 개가 넘는 와토(Watteau)의 드로잉 연작을 동판화로 옮기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와토의 드로잉은 그의 양식을 만드는 데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특히 부셰의 주요 조형 어휘가 될 여성의 인체에 대한 우아하고 균형 잡힌 묘사능력이 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1727년부터 4년간 머물렀던 이탈리아에서 부셰의 행적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다른 화가들과 달리 고전 고대의 걸작이나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착실히 학습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에게 기존 권위를 타파하고자 하는 혁신가적 면모가 있어서였다기보다, 기질상 고전과 르네상스 양식에서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소 게으르게, 호기심 닿는 대로 움직였던 이 기간에 그는 제노바, 페라라, 베네치아, 파르마, 볼로냐, 로마 등에서 주로 바로크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거나 도시 풍경을 사생했는데, 특정 경향을 깊이 추구하기보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선택적으로 빨리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파리로 돌아와 종교와 신화 주제 그림을 그려 명성을 쌓아가던 그를 아카데미 회원으로 만든 입회 작품이 1734년의 [리날도와 아르미다 Rinaldo and Armida]이다. 그림의 주제는 16세기 이탈리아 시인 타소(Torquato Tasso)의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 Gerusalemme Liberata]에서 취한 것으로, 화가는 십자군 원정에 나선 리날도와 사라센 무녀 아르미다가 서로의 임무를 잊고 사랑에 빠져 있는 순간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는 명확한 형태감이 돋보이는 드로잉 기술, 활력과 안정감을 동시에 보여주는 구성력, 밝고 선명한 색채, 부드럽고 회화적인 명암과 붓질, 풍요로운 세부 등 역사화가 부셰의 명성을 가져다 준 조형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삽화가로서도 인기를 얻게 한 자질인 타고난 극적 감각으로 그는 인물의 순간적인 동작과 표정을 정확히 잡아내는 데 장기를 보였는데, 아르미다의 요염한 시선과 자세가 그 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에 산재한 날개 달린 어린 아기 역시 부셰 작품의 한 특징이다. 본래 신화의 큐피드에서 유래한 날개 달린 사내 아이 도상은, 기독교 미술에도 영향을 미쳐 (성서적 근거가 없는) 아기 천사를 만들어냈다. 회화에서는 큐피드인지 천사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아, 어린 사내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푸토(putto)로 통칭되곤 한다. 부셰의 경우는 푸토를 독립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이 그림에서처럼 맥락과 상관 없이 화면의 흥취를 돋구기 위해 자주 사용해, 이들은 ‘부셰의 아이들(les enfants de Bouch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
시대의 취향과 유행을 그리다
1735년부터 왕실의 주문을 받고 궁궐의 벽화 등을 그리기는 했지만, 그는 공식 주문이 주는 명예보다 개인 소장가들의 요구에 맞춘 작품들이 주는 경제적인 보상을 더 추구하는 듯한 활동을 했다. 그는 판화집으로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고, 이름이 난 신화와 푸티 그림 외에 풍경, 목가, 실내 정경 등 다양한 주제를 개발하여 소규모 회화로 제작했다. 1739년 작품인 [아침 식사 Le Déjeuner]는 그 대표적인 예로 파리의 상류 부르주아 가정을 묘사한 장르화이다.
화가의 아내와 두 아이들, 유모가 모델이 된 이 그림에서, 가족들은 당시 파리의 성공한 부르주아들 사이에서 유행한 음료인 초콜릿을 배달시켜 마시고 있는 중이다. 화면 왼쪽에 서 있는 카페 배달원(garçon limonadier)이 초콜릿을 따라주는 데 쓰인 은제 주전자, 벽에 고정된 촛대와 시계, 벽난로 위의 거울 등이 모두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을 보여주는 공예품들인데, 화가는 이를 정물화를 그리듯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런 물건들 외에 아이가 (시골의 유모 집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식사하는 장면 자체가 ‘가족사의 전환기’였던 당시에 새로 등장한 유행이었다.
부셰는 당대의 유행과 취향을 그림에 단순히 반영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취향을 갖고 그 유행을 적극적으로 따랐던 철처한 로코코인이었다. 이 그림에서 아침을 차려 놓은 중국산 칠기 식탁, 거울 옆 장식장에 놓인 중국산 도자기 인형(magot)은, 로코코 시대를 전후해 유럽에서 유행한 중국의 유물과 모티브의 유행인 쉬누아즈리(Chinoiseries)의 한 예를 보여준다. 부셰는 아름다운 것은 다 좋아했고 연극과 여자, 진기한 광물과 동물 표본 수집 등 개인적인 쾌락에 많은 지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특히 수백 점의 중국 유물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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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프랑스의 미술 시장에 유통된 대다수의 중국 관련 유물들처럼, 그가 수집한 것도 그 자체로 큰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거의 없었으나 도자기, 공예품, 판화집 등에 등장한 이미지는 그를 매혹하여 이를 토대로 회화 작품까지 제작하게 만들었다. 부셰는 1742년 살롱전에 중국 주제 그림 8점을 제출했는데 [중국의 정원 Le Jardin Chinois]은 그 중 하나이다. 진짜 중국과 중국 그림을 알고 있는 우리의 눈에 이 그림 속 세계는 국적과 시대 불명의 공상으로 보일 뿐이지만, 이 ‘상상의 중국(imaginary Cathay)’이 보여주는 이국적인 우아함은, 로코코 시대가 만들어내어 즐긴 수많은 판타지 중의 하나였다. 부셰는 새로운 유행을 활용해 그러한 판타지를 구체화시키는 탁월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 |
이 작품들은 모두 태피스트리로 만들어졌다. 그는 1736년부터 보베(Beauvais)의 태피스트리 공장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처음 만든 것은 ‘이탈리아 축제(Fêtes Italiennes)’라고 알려진 연작으로, 이상적인 야외에서 목가적인 사랑을 나누는 인물들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이 그림들이 성공하여 파산 위기의 보베 태피스트리 공장을 살려냈고, 파리의 고블랭(Gobelins) 공장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20여년간 보베에 그림을 제공하던 부셰는 1755년에 고블랭의 책임자가 되었으나, 그 즈음 프랑스에서는 실내를 태피스트리로 장식하는 것이 이미 유행에 뒤진 일이 되어 이전만큼 성과를 내지는 못했고 제작된 것은 거의 해외로 팔려나갔다. | |
사랑의 신화, 빛나는 누드
[디아나의 목욕] 1742년 캔버스에 유채, 56cm×73cm, 루브르 박물관, 파리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작품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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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로서 부셰의 전성기는 1740년대이고, 1742년 살롱에 출품한 [디아나의 목욕 Bain de Diane]은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로마 신화 속 달의 여신이자 수렵과 순결의 수호신인 디아나와 님프를 그린 이 작품에서, 신화라는 주제는 여성의 누드를 그리기 위한 구실일 뿐으로, 사실상 그림의 초점은 벌거벗은 여성의 몸이다. 신화를 주제로 한 부셰의 그림은 ‘사랑의 신화’라는 뜻의 미솔로지 갈랑트(mythologie galante)라고 불렸는데, 그 대부분이 이렇게 메시지보다 화면의 감각적 아름다움이 부각되는 특징을 가졌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고전적 균형감을 가진 여신의 누드는 인상파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어 모사와 칭송이 이어졌다. 특히 르느와르는 이 작품을 “나를 흥분시킨 최초의 그림”이자 “첫사랑처럼 평생 사랑해 온 작품”이라고 했고, 그에게 부셰는 “여성의 몸을 가장 잘 이해한 사람”이었다.
이 그림을 비롯해 부셰가 그린 많은 신화 주제 그림에 등장하는 여신의 모델이 된 것은, 그가 서른 살이 되던 1733년에 결혼한 17살의 아내 마리-잔 뷔소(Marie-Jeanne Buseau)였다. 미모로 유명했던 아내와의 사이에 그는 딸 둘과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들은 모두 그의 제자였고 아들은 가구 디자이너가 되었다. 아내는 나이를 먹어 갔지만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신들은 나이를 알 수 없는 모습이다. 부셰 그림 속에 등장하는 누드 여성은 나이뿐 아이라 개성이나 감정도 잘 드러나지 않는 그냥 몸, 즉 남성 관람자의 시선의 대상일 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1752년 작품 [금빛 오달리스크 L’Odalisque blonde]에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 |
[금빛 오달리스크] 1752년 캔버스에 유채, 59cm×72cm, 알테 피나코텍, 뮌헨
소파에 엎드려 누운 이 어린 소녀는 아일랜드계의 루이즈 오머피(Louise O’Murphy)로 알려져 있다. 관람자를 훔쳐보는 위치에 서게 하는 시선과 자세의 이 여성은, 1740년대 중반부터 부셰 부인의 뒤를 이어 그의 작품의 모델로 자주 등장했다. 1753년에는 루이 15세의 하렘으로 알려진 ‘사슴 정원(Parc aux Cerfs)’에 들어가, 화가는 뚜쟁이짓을 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1750년대는 그에 대한 적대적인 비평이 시작된 때이고 그 대표적인 인물은 최초의 미술평론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계몽 사상가 디드로(Denis Diderot)였다.
디드로는 살롱에 출품된 작품에 대한 평론을 쓰면서 부셰가 “젖가슴과 엉덩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만 붓을 잡는” 화가이며 “진실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자연에 충실한 것 곧 ‘사실성’과 ‘도덕’을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디드로에게 부셰의 작품은 ‘비현실성’과 ‘부도덕’ 그 자체였다. 디드로의 지적대로 부셰 작품에서 자연스러운 사실성, 현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부셰의 장기는 근심 걱정 없는 세상, 아름다운 판타지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쉬고 있는 목동들 Shepherd and Shepherdress Reposing]과 같이 부셰 그림 중 수집가들이 가장 좋아한 주제인 ‘목가적 이상향(pastoral idyll)’ 그림에는, 이탈리아 유학 때를 빼곤 파리 밖을 나가 본 적이 거의 없는 도시인 부셰가 상상한 낭만적인 시골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의 목가에서 목동은 장미 꽃다발을 곁에 두고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아름다운 배우이고, 양과 염소는 방해되지 않는 소도구일 뿐이다. | |
계몽주의 시대의 판타지
[쉬고 있는 목동들] 1761년 캔버스에 유채, 76.6cm×63.6cm, 왈라스 컬렉션, 런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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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로코코 회화가 보여주고 있는 공상과 향락의 요소는 계몽주의가 추구한 것 중 하나인, 기독교적 윤리에서 해방된 세속적인 행복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또 부셰의 ‘목가적 이상향’ 그림을 복제한 판화와 도자기로 집을 치장했던 사람들과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신엘로이즈 Julie, ou la nouvelle Héloïse]에 열광한 독자는 같은 대중이었다. 그런 면에서 화가는 낭만주의적인 감수성 예찬에 매료된 18세기 후반의 문화적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과도하게 비난을 받은 데는 그의 위치 탓도 있었다. 루이 15세의 후궁으로 로코코적인 실내 장식과 미술의 유행을 선도했던 퐁파두르 부인(Marquise de Pompadour)의 후원을 20여년간 받으며 부셰는 그녀의 화가이자 실내 장식가, 동판화 선생, 연극 무대 제작자, 미술 컨설턴트의 역할을 하며 시각 예술 전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고, 어린 화가 지망생들은 그를 모방하느라 바빴던 것이다. 퐁파두르 부인이 사망한 후에도 그의 명성은 기울지 않았고, 1765년에 그는 루이 15세 궁정의 수석 화가로 임명되고,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선출되어 영광의 정점에 도달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일에 매달렸던 화가의 명성과 그림의 가치는 그가 죽은 지 10년도 안되어 완전히 땅에 떨어졌다. 부셰에 대항한 예술적 혁명의 주역이었던 다비드와 그의 제자들은 그를 조롱했고, 부셰라는 이름은 구체제(Ancien Régime)와 동일시되었다. 대혁명 기간에 퐁파두르 부인이 미술품으로 치장한 많은 성이 파괴되었고, 그 안에 있던 부셰의 작품들도 소실되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가 아카데미의 정통이 되자 이에 반발한 낭만주의자들이 로코코가 보여준 자유로움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 |
제2제정기(1852~1870)에는 캬바넬(Alexandre Cabanel), 부게로(William Bouguereau) 등이 부셰 모방작품들(pastiche Bouchers)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은 비평에서의 부침과 달리 시장에서 부셰가 인기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 문화의 절정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세계의 거부들은, 낭만주의 시대 이전부터 그의 작품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들에게 부셰의 그림은 귀족성의 표지(patent of nobility)로 여겨졌던 것이다. | |
- 글 김진희 / 미술평론가
- 연세대학교 신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9년부터 전시기획과 문화예술행정 분야에서 일하면서, 관람자의 눈에 근거한 미술 비평을 시도해 왔다. 미술, 역사, 제3섹터에서의 활동에 관심이 있고 이들의 접점을 찾는 중이다.
발행일 2011.02.05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