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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게시판 ★ 스크랩 신라 선화공주-백제 무왕 ‘사랑의 유물’ 대거 찾았다
손미경 추천 0 조회 49 09.01.22 08: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라 선화공주-백제 무왕 ‘사랑의 유물’ 대거 찾았다
금제사리호

미륵사지 금제사리봉안기

사리장엄 출토 상태

은제관식 및 금제소형판 등 유물

 

익산 미륵사는 백제 서동왕자가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후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기록을 통해 전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도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시기와 목적 등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동안 설화로만 전해져온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러브스토리를 사실로 입증해주는 유물들이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대거 발굴됐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국보 11호인 익산 미륵사지석탑에서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등 무려 500여점에 달하는 국보급 유물이 대거 쏟아져 나왔다고 19일 밝혔다.

 

국립문화재연구소측은 “지난 14일 미륵사지석탑을 해체보수하던 중 석탑 1층 심주 윗면 중앙에서 사리공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백제 왕실의 안녕을 위해 무왕 왕후(선화공주)가 조성한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 사리장엄을 통해 그동안 창건시기와 내력이 삼국유사 등에 ‘시선을 끄는 설화’로만 전해져온 익산 미륵사가 설화가 말하는 골격 그대로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 때 무왕의 지원 아래 왕후(선화공주)가 창건한 것으로 규명됐다. 그동안 익산 미륵사의 정확한 창건연대는 이같은 백제와 신라를 뛰어넘는 러브스토리를 설화로 채록한 삼국유사는 물론이고, 삼국사기에도 보이지 않지만 이번 사리장엄 발굴로 무왕 재위시대의 기해년(己亥年), 즉 서기 639년(무왕 재위 40년)으로 확인됐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사리공에서는 사리를 담은 ‘금제 사리호’(金製 舍利壺)와 석탑 조성내력을 적은 금판인 ‘금제 사리봉안기’(金製 舍利奉安記), 백제 특유의 머리꽂이 장식인 은제관식 등 다양한 유물 500여 점이 나왔다. 이중 금제사리호는 백제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여실히 입증해주는 병 모양의 사리호. 사리장엄의 핵심으로 사리공 중앙에 모셔져 있었던 금제사리호는 높이 13㎝, 어깨 폭 7.7㎝의 작은 병 형식이며 보주형(寶柱形) 뚜껑이 덮여 있었다. X선으로 사리호 내부를 투시한 결과 내외함의 이중구조로 이루어져 있음이 확인하됐다.

 

금제사리봉안기는 가로 15.5㎝, 세로 10.5㎝ 크기의 금판에 음각하고 붉은 칠(주칠)을 해 글씨가 명확하게 드러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가람(伽藍)을 창건하고, 기해년(639년)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처럼 미륵사의 창건목적과 시주(施主),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문헌사 연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금석문(金石文) 자료로 평가된다. 동시에 백제시대 서체 연구에도 큰 획을 그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건무 청장은 “미륵사지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다양한 종류가 일괄 출토됐고, 가공수법도 정교하고 세련돼 국보급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국보급 유물로 평가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이번 사리장엄의 발견으로 미륵사 창건에 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기록의 정확성이 입증됐고 백제석탑의 사리봉안 기법과 의례를 새로이 밝힐 수 있게 됐다"고 반겼다. 아울러 매납(埋納)된 유물의 절대연대 확정을 통해 동시기 유물의 편년(編年)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문화재청은 이번 발견이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지역 최대의 고고학적 성과라고 보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백제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영란 기자/yrlee@heraldm.com

익산 미륵사지서 금제사리기 발견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9.01.18 14:19 | 최종수정 2009.01.18 14:22

문화재청 19일 발굴성과.현장 공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동 왕자'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재위 600-641년)이 창건한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서탑(西塔)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탑 창건 내력을 밝혀주는 금제(金製) 사리기(舍利器)를 비롯한 중요 유물들이 확인됐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18일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면서, "구체적인 내용은 19일 오후 발굴현장에서 유물과 함께 공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륵사지 서탑 해체 발굴조사단인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문화재청 주요 관계자들은 이건무 청장의 함구령에 따라 이와 관련한 모든 취재에 응하지 않고 있다.

백제 사리기는 지난 2007년 부여 왕흥사지 목탑터에서 발견된 창왕(昌王) 시대(577년 제작) 사리기 이후 두 번째다.

1995년 부여 능산리 절터 목탑터에서도 같은 창왕 시대인 567년에 제작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百濟昌王銘石造舍利龕.국보 288호)이 출토됐으나, 이 사리감 안에 있었을 사리기는 없어진 상태로 발견됐다.

사리기(舍利器)는 석가모니 부처의 유골인 사리(舍利)를 담는 그릇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불교에서는 탑(塔)을 부처의 무덤으로 간주하는 까닭에 탑을 만들 때는 거의 예외없이 심초석(心礎石) 주변에 안치하며, 탑을 조성한 내력을 적기 마련이다.

왕흥사지 사리기의 경우, 청동합(靑銅盒) 안에 좀 더 작은 은제(銀製) 사리호(舍利壺)를 넣고, 다시 그 안에다가는 금제(金製) 사리병(舍利甁)을 안치하는 3중 구조로 제작했다.

이번 미륵사지 서탑 금제 사리기 명문은 연구소에서 판독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익산 미륵사(彌勒寺)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미모가 특히 빼어난 선화(善花)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백제 서동 왕자가 나중에 왕이 된 뒤에 이 왕비를 위해 용화산(龍華山) 아래 지었다고 하며, 그 정확한 창건시기는 밝히지 않았다.

따라서 이번 금제 사리기는 이와 관련한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의문점을 해결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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