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과 사회
※위화도 회군
조선은 고려의 뒤를 이어 건국한 나라다.
후삼국이 40여 년 간
전투를 치른 뒤에 왕건이 최후의 승리로 고려를 건국했다.
조선의 건국은 전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지배층이 바뀜으로 태어난 나라가 조선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고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다.
고려는 문벌 귀족(호족)의 나라였고,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다.
1388년 음력 4월 요동정벌이 시작되자
고려의 지도층은 서로가 갈등 속에 있었다.
요동 땅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군사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다.
고려군의 지휘관에는 총사령관인 8도 도통사에
최영, 좌군 도통사에 조민수, 우군 도통사에 이성계였다.
우왕과 최영은 평양에 머물러 있었고 이성계와 조민수가 이끄는
7만의 병사는 압록강 한 가운데 위화도라는 작은 섬에 진을 쳤다.
요동은 한때 원나라의 쌍성총관부가 있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해 오다가
고려의 공민왕이 원과 싸워서 이곳을 되찾았다.
중국의 명나라가 이곳을 자기네 땅이라 억지를 부리며
철령위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려 하였다.
고려는 요동지방을 공격하여
명나라의 기세를 꺾으려 하였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이었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의 불가함의 4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하는 것이 불가함이요.
2. 여름철에 군사 동원이 불가함이요.
3. 백성들을 군사로 동원할 때 왜구가 침입할 것이므로 불가함이요.
4. 여름 장마철에 활에 먹인 아교가 풀리고
군사들이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어 불가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더 이상 요동으로 진격하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회군해 주기를 조정에 간청하였다.
그러나 평양에 있는 우왕과 최영은 빨리 진격하라고 재촉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향하였다.
이는 왕명을 거역하는 것으로 반역이었다.
우왕과 최영은 개경으로 급히 돌아와
이성계를 막아 보지만 천여 명의 군사로는 역부족이었다.
개경은 이성계의 손에 쉽게 떨어지고, 우왕은 강화도로 내쫓고
최영은 경기도 고봉(지금 고양)으로 귀양 보냈다가
두 달 후 개경으로 끌고 와서 처형을 당한다.(계몽사)
※신진사대부와 이성계
이성계를 지지하는 믿을만한 세력이 있어 위화도회군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들이 신진사대부들이다.
신진사대부들은 개혁을 바라면서
고려의 귀족문벌을 비판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이색, 정몽주, 정도전, 권근 등이다.
사대부는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관리들인데
공부하는 학자(성리학)들 출신이다.
사대부들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공민왕 때였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반원 자주화」의 개혁 정치를 실시하였다.
참신하고 유능한 인물들을
과거를 통해 뽑아 썼는데 이들이 신진 사대부들이다.
신진 사대부들이 이성계와 결속하여 조선을 건국한 것이다.
신진 사대부들의 공통된 특징은
1. 성리학을 공부하고 익히며 자신의 사상과 신념으로 삼았다.
2. 문벌 귀족처럼 벼슬이 보장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자력으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이다.
3. 반원친명(反元親明) 원측을 주장하였다.
고려의 문벌 귀족은 사대부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땅과 노비를 가진 부자였고 집안의 배경으로
관리의 길을 걸었으며 원나라와 가까운 친원파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의 귀족들이 소유한 땅을 회수하여
토지분배개혁과 친명 정책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귀족 문벌과 신진 사대부 외에도 홍건적과 왜구의 토벌에 공을 세운
유명한 장수들이 한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이성계가 대표적 인물이다.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사대부도 온건파와 급진파로 갈라진다.
온건파의 대표적 인물로 정몽주를 들 수 있으며 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게 죽고 만다.
급진파의 대표 인물로 정도전, 조준 등이 있는데
역성혁명으로 왕씨 왕조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왕조를 건설하는데 앞장섰다
.(계몽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