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선교사 피터슨의 광주항쟁 현장기록>
http://blog.daum.net/jerom9401/5836710
필자 아놀드 피터슨 목사(50)는 침례교 선교사로 75년부터 81년까지 광주에서 활동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내내 현장에 있으면서 중요 장면을 지켜봤다.
지금은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그는 80년 당시의 메모와 기억을 토대로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한 기록을 작성했다.
2백자 원고지 4백장 분량의 이 증언록은 외국선교사의 현장기록이라는 점에서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전문을 입수, 주요 내용을 발췌, 소개한다.
5월 18일
뭔가 잘못되고 있다
17일 자정 전두환 소장이 주도하는 계엄사는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든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공공집회도 금지됐다.
그러나 교회 예배활동은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예정대로 한민전도대회 프로그램을 추진시켜 나갔다.
한국침례교와 미국 플로리다 침례교협의회는 이날부터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등지에서 일련의 복음전도대회를 열 계획으로 준비해 왔다.
전도대회 단원들이 묵고 있는 관광호텔을 나와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으로 갈 때 우리는 거리를 군인들이 차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회해서 가야 했다.
주요 거리들은 군인과 전경에 의해서 차단되어 있었다. 몇몇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큰 도로로 나가 시위를 하려다가 전경이나 군인들에게 쫓기는 모습이 보였다.
군인들은 전경과 매우 달랐다. 이들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해 터무니 없는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다. 이날 이후 내가 보고 듣고 느낀 바에 의하면 광주 민주화운동은 시위가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무방비 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잔혹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88년 광주청문회에서 군은 캠퍼스 주변지역에만 주둔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더구나 그들의 행동은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들도 무차별하게 공격했다. 한 가지 의문은 언제부터 공수부대원들이 광주시민들에게 잔혹행위를 저지르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18일 오후 5시 30분에 목격한 하나의 사건부터다. 며칠 후 만난 한 청년은 오전 9시부터라고 했다. 그는 다방에 앉아 있었는데 머리에 피를 흘리는 한 사람이 넘어지듯이 안으로 들어와서는 공수부대원에게 곤봉으로 심하게 맞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5시 30분쯤 우리는 관광호텔 근처에서 20대 청년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말끔한 평상복 차림이었는데 공수부대원들이 그를 둘러싸고선 조사하기 시작했다. 바로 우리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멈춰서서 지켜보았다.
공수부대원들은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갑자기 젊은 사람의 갈비뼈, 등, 어깨를 곤봉으로 치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꿇도록 했다.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으므로 가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는 시위에 참가했다는 어떤 물증도 없었으며 대학생으로 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계속 그를 때리다가 대검을 불쑥 갖다 댔다. 대검은 그의 목에서 불과 몇 센티 앞에서 멈췄다. 그후 거리에서 이 비슷한 광경을 세 번이나 목격했다. 한 택시운전사는 많은 학생들이 이날 오후에 공수부대원들에게 맞거나 찔려 죽었다고 했다.
5월 19일
그들이 우리 아이들을 죽인다!
광주기독병원과 수피아여고에서 예배를 드린 후 오후 1시 30분경 호텔에 돌아왔을 때, 전도대회 단원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많은 젊은이들을 8∼10줄로 나란히 세워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한 단원은 그 광경을 이렇게 표현했다. 『
우리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옷을 다 벗기우고 속옷만 입은 채 벨트로 손을 묶인 상태로 맞았습니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갔습니다. 전경들은 군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습니다』광주에는 평화봉사단원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친구들이 시위 학생들 사이에 끼여 있었다. 이들 평화봉사단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 위해 거리에 나왔다가 공수부대원들이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치고 대검으로 위협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몇몇 평화봉사단원은 다가가서 팔로 막았다.
그러자 공수부대원들은 다른 사람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의식적으로 외국인을 때리는 것을 피했고 저항할 수 없는 사람들만 골라 때렸다. 전도대회 예배에 참석한 목사부인 두 사람은 군인들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때렸다며 울었다. 우리는 모두 극단적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학생들 중 일부는 교회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버스는 위험하다며 집에 어떻게 갈지 걱정했다. 버스가 지나가면 강제로 정차 당해 젊은 사람들이 끌려 내려온다는 것이다.
나는 차에 사람들을 가득 태워서 그들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이렇게 이동하는 사이에 나는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거리는 피하고자 했지만 거의 불가능하였다.
모든 주요 교차로에는 공수부대원들이 경찰 옆에서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내 차로 사람들을 데려다주는 사이에 나는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공격하는 것을 20번도 넘게 목격했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5월18일 이전까지 학생시위는 평화적이었다. 전경은 교통 통제만 했다. 공수부대원들이 18일 광주에 나타나기 전에는 광주에 어떤 무력투쟁이나 격렬한 시위도 없었다.
둘째 전경과 공수부대원들의 행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나는 광주의 경찰이나 전경들이 부적절한 행동을·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은 잔혹행위와 욕설을 반복하였다. 이날 오후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직접 정확히 보기 위해서 도시 이곳저곳을 차로 다녀 보았다.
내가 들었던 얘기들이 너무 극단적이고 가혹해서 과장된 듯 들리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도시 곳곳을 돌면서 직접 살펴보고 그 얘기들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군인들이 학생들을 체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학생들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인데도 심하게 구타당했다. 그날 저녁 공수부대원들이 가택수색을 하면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무작정 끌어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를 위해 일하던 한국인 아주머니가 전화를 해서 고등학생 아들과 친구가 그날 밤 우리 집에서 지낼 수 있는지 물어 보았다. 그렇게 하라고 했다. 자녀들을 도시 외곽으로 보내기 원하는 몇몇 교인들도 전화를 해왔다.
나는 그들의 집에 가서 학생들을 시골 친척집으로 보내는 일을 두 차례 도와주었다. 목사 한 사람이 전화를 했다. 그는 고등학생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데려오기 위해서 차를 몰고 갔다. 그 목사의 집에는 아무도 없어서 이웃집으로 가서 문을 두들겼다. 그들은 매우 두려워했다. 내가 정말 선교사이고 혼자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그들의 자녀들은 뒷방에 숨어 있었다.
5월 20일
총성 속 밤샘 시위
이날은 중대한 날이었다.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살상과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만일 이날 정부가 공수부대원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공수부대를 철수시켰다면 아마도 더 이상의 피흘림 없이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아침 8시 전도대회단과 나는 광주기독병원에 예배를 드리러 갔다. 찬송가를 부른 후에 의사 한 사람이 기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젊은이와 학생들을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간구했다.『사랑하는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의 군인들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와 아이들을 죽입니까 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대부분의 신도들도 울었다. 몇 분간 그는 침묵했다. 예배실은 우는 소리로 진동했다. 나는 그런 깊은 감정의 분출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한 목사는 19일 오후 집으로 가는 길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관광호텔 근처의 길 옆 가게에 갇혀 있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그 가게 창문을 통해서 한 군인이 검으로 어떤 젊은이의 목을 베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젊은이는 그 군인의 신경을 자극할 만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예배 후 집으로 가는 길에도 유사한 경험을 했다고 말해 주었다. 일단의 군인들이 한 중년 남자를 발길질해서 쓰러뜨린 후 걷어차고 가슴과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몇 분간 한 후 군인들은 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버려둔 채로 가버렸는데, 분명 그 사람은 죽은 것 같았다고 했다.
우리는 전도대회를 취소하기로 결정했다. 공수부대원들은 19일에서 20일 사이 광주에서 철수했다. 대신 20사단이 들어왔다. 이 사단은 5월 16일 미군 지휘하의 한미연합사에서 탈퇴했다.
연합사에서 이 병력이 탈퇴한 것이 광주 민주화운동 발생 이틀 전이며 계엄령 확대 하루 전의 일이라는 사실은, 한국군 수뇌부가 강력한 군사지원을 필요로 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나는 광주에서 사건을 유발한 것은 그들의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계획했던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는 빌미로 그 사건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군부측은 광주시민들이 반격에 나서 싸우리라는 것을 예상치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20사단 군인들은 공수부대들보다 나았다.
목사들 얘기에 의하면 이들은 불미스러운 행동을 저지르지 않았다, 그들은 시민들의 행동 추이를 면밀히 지켜보았다. 우리는 상황이 조용히 가라앉으리라고 기대했다.
오후 3시 통금은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으나 다음주 전도대회를 개최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큰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공수부대원들이 저지른 행위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시위는 택시운전사들이 주도하고 있었다.이 시위는 처음부터 매우 감정적인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군중들은 도청건물 앞에 모여서 광주시장과 전남도지사가 나와 지금까지 일어난 것에 대해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어떤 만족할만한 응답도 받지 못했다. 시장과 도지사가 이미 광주를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시민들은 계엄사령관 면담을 요구했다. 군인들은 군중들에게 해산하라고 했다. 그래도 해산하지 않자 중무장한 장갑차를 군중 속으로 몰고 들어가 강제로 해산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다치게 됐다. 군인들은 또 군중을 향해 공포탄을 쏘아대었다. 이 시위가 정확히 언제부터 격렬하게 되어 교전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가 각기 달랐다.
어느 목사의 얘기에 따르면 오후 3시 이전에 계림동에서 교전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전도대회 단원인 빌리 사우서는 오후 3시쯤 총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오후 5시경 우리는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때 총소리와 빵빵 거리는 소리와 군중의 외침이 들리기 시작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총소리가 점점 더 거세졌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앉았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우리 집 정원 벽에 사다리가 놓이고 다섯 사람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웃집 사람들이었다. 부인은 내 자녀를 치료했던 소아과 의사였고, 남편도 전남대 의대 교수였다. 그 부부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들이 우리 집에서 밤을 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군인들이 가택수색을 하면서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을 누구 할 것 없이 끌어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군인들에게 붙잡힌 학생 중 3분의 1이 무차별 살상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우리 집은 이미 13명의 피신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까지 우리와 함께 지낼 만한 공간은 없었다. 근처에 다른 선교사 집이 있어 그리로 보냈다. 그날 밤에 부모들이 느낀 공포감이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광주 시민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군인들에게 끌려가 죽을 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시위는 밤새 계속되었다. 9시 통금은 시위대에 의해 사실상 무시되고 있었다.
밤 11시 총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우리는 광주 전역에 공습경보 사이렌이 울리는 것을 들었다. 이날 밤부터 다른 지역과의 통신이 두절되었다. 광주 시내는 괜찮았으나 시외전화는 걸 수 없었다.
5월 21일
우리가 이겼다
총소리와 빵빵거리는 소리, 군중들의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시위대가 우리 단지 쪽에 들어와서 군인들이 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내 바바라에게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깨워서 5-10분 후 내가 돌아오면 곧장 광주를 떠날 준비를 하도록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거리로 내려가 보았다. 내 생각과는 영 딴판이었다. 반정부 시위로 쫓기는 것이 아니라, 승리의 기쁨을 마음껏 분출시키는 축제였다.
시내버스 트레일러 트럭 지프차들이 학생들과 시민들을 태우고 이리 저리 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막대기와 파이프를 흔들고, 플래카드와 깃발을 날리고 소리치며 전날 밤 시위의 승리를 기뻐하고 있었다. 물어보니 전날 밤 도청을 방위하는 일부 군인들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다는 것이었다.
이제 시민들과 군인들 사이의 싸움이 도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다른 곳에 있었던 군인들은 외곽으로 물러났다. 거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겼다』고 외쳤다. 시민들의 분위기는 거의 축제판이었다.
나는 우리의 안전에 즉각적 위험이 없다고 결론짓고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과 전도대회단은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본 상황을 얘기하자 모두들 남아 있기로 했다.
시골로 피신하려는 학생이 또 있어서 남평까지 데려다준 뒤 집에 돌아온 나는 주위를 살펴보기 위해서 근처에 있는 장로회신학교 옥상으로 갔다. 세무서 건물이 불타고 있었다.
오후 2시쯤 헬리콥터 한 대가 광주 전역을 날아다니면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계엄사령부가 시민들에게 전하는 경고문이었다. 시민들이 해산하지 않으면 엄청난 결과가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경고였다.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어딘가 불길한 느낌이었다.오후 2시경 일부 시민들이 화순에서 무기를 뺏어 무장하기 시작했다.
정오가 막 지난 후 민간인 사상자들이 기독병원에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매우 혼란스러웠다
. 첫번째 민간인 희생자는 낮 12시쯤 도착했다. 그는 실종된 자녀들을 찾다가 등에 대검을 맞은 중년 남자였다.
오후 3시 15분쯤 광주 영공에 몇 대의 전투용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상자들이 병원에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 30분경 들어온 여중생이었다. 헬리콥터는 계속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오후 내내 총을 쐈다.
오후 4시 30분 광주기독병원을 나설 때까지 50명 이상의 부상자와 9명의 사망자가 들어왔다. 팔다리에 총을 맞은 어린 소녀와 머리에 총을 맞은 소년, 얼굴이 뭉그러진 성인 남자도 있었다.
부상자 수는 광주기독병원에서만 1백 명이 넘어섰으며, 사망자는 14명에 달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지붕에 있는 발코니로 갔다. 거기서 나는 광주 상공을 날아다니면서 거리의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광주 민주화운동 10일 간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 중에서, 군중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발포하는 모습이 내게는 가장 잔인해 보였다.
88년 8월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국회 조사때 나온 보고서에는 당시 상황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군은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 처음으로 시위자들을 향해 발포했다. 계엄군들은 무장한 시위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면서 달려오자 공포탄으로 발포했다. 계엄군 지휘관은 그날 오후 7시 30분에 군대가 중무장한 시위대로부터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내가 경험한 진상과는 아주 다르다. 발포는 5월 21일이 아니라 5월 20일 오후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5월 21일 아침 도청에서 두 구역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거기서 나는 총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시민대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30분 경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그날 저녁 군인들이 가택수색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서울에서 광주로 오던 학생들이 담양에서 대량 살상되었다는 소문도 들렸다.
아내 바바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전도대회단과 함께 다음날 아침 광주를 떠나기로 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전투 소리는 밤까지 계속되었다. 어둠이 내리자 대부분의 집들은 어둠에 싸였다.
공식적인 등화관제가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이 켜져 있으면 포격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날 저녁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내일을 기다렸다. 포격이 주위 모든 곳에서 행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5월 22일
시민,학생들의 해방구
일어나자마자 일행들과 가족을 탈출시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시민이나 군인들의 총격을 받을지 모른다고 모두 걱정했다. 떠나기 전 하나님께 우리의 안전과 도시의 평화를 간절히 기도했다.
오전 7시 30분 경 우리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양림동을 빠져나갔다. 성조기를 꽂고 「외국인의 차」라 쓴 우리 차가 거리에 나섰을 때 시민들이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다.
불안과 두려움이 안도감과 기쁨으로 변했다.송정리로 가는 길은 큰 전봇대와 버스, 트럭들로 차단되어 있었다. 교차로에 들어서자 군중이 우리 차를 둘러쌌다.
우리는 송정리역에 가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기관총을 장치한 지프차가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또 다른 중무장 차량이 우리 뒤를 따라왔다. 그들이 에스코트해 줘서 송정리까지 갈 수 있었다. 송정리에는 기차가 안 다녀 신흥까지 갔다. 일행을 열차에 태운 후 나는 광주로 되돌아왔다.
많은 학생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광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그 사이 광주에는 매우 엄청난 사건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내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정확하리라 확신한다.
5월 22일 아침 일단의 복음주의 계열 목사들이 중앙장로교회에 모여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논의했다. 도청을 장악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누군가 가서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벌이도록 설득해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시민들이 무장한 군인들과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학생들에게 가서 협상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세 명의 침례교 목사들이 가기로 했다. 장세균 목사와 박영복 목사와 신순균 목사는 도청으로 걸어가서, 학생들에게 협상하도록 설득했다. 학생들은 협상하는 데 동의했다.
이들 세 침례교 목사는 협상의 초기 단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시민수습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중앙 장로교회에 모였던 여덟 명의 목사와 변호사, 사제, 학생대표, 시민투사, 교수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와 계엄사령부 사이에 사태 해결에 대한 동의가 이뤄져 시민들은 무기류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오후 5시 송정리에 있는 미공군기지의 데이브 힐이라는 하사관이 전화를 했다.
그는 미 공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들어와서 양림동에 있는 미국사람들을 구하는 계획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런 구출계획은 광주를 떠나 공군기지로 간 광주 주재 미국 공사 데이비드 밀러가 전한 상황보고에 의해 세워진 것인 듯했다.
TV와 라디오는 저녁 뉴스에서 잘못된 보도를 했다. 군인들이 유혈 대결을 피하기 위해 21일 밤 도청지역에서 철수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미 유혈 대결이 있었다.
기독병원은 시체 13구를, 전남대 병원은 시체 27구를 안치하고 있었다. 적십자병원이나 조선대병원에서 보고를 들은 것이 없으나 다 합친다면 최소한 80∼100명의 사람들이 21일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은 유혈 대결을 피하겠다는 의도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해준다.
이날 밤 나는 월산동과 방림동과 문화동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화순으로 가는 곳에서 총소리가 집중적으로 들렸는데, 그 소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5월 23일
외국인들의 안전 확인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밤새 걱정했던 군인들의 광주 공격이 분명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나는 어떤 총성도 듣지 못했다.
오전 내내 도심지역을 걸어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시민들은 거리에서 쓰레기들을 치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분명 평온하고 고요한 느낌이 사람들 사이에 생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협상 결과로 타협안이 생겨서 모든 일이 정상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날 아침 장세균 목사가 화정동에 있는 50명의 급진투사들에게 가서 총을 내려놓고 협상하도록 무릎을 꿇고 설득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날 오후 대부분은 미대사관의 부탁으로 광주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시민과 다른 외국인들을 찾아내 안전을 확인하는 일을 했다.
5월 24일
6.25, 4.19보다 더 끔찍한 경험
새벽 5시 30분쯤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났지만 대체로 조용하였다. 군인들이 아직 도시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문제가 풀리고 사건이 이제 끝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인들이 도시를 포위한지 꼬박 이틀이 지났다. 이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언제쯤 군인들이 무력으로 진입할 것인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모두 끝났을 때 보복이 있을 것을 두려워했다.
자전거를 한 대 빌려서 오전 9시쯤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청 근처에서 나는 광주지역에서 일하던 평화봉사단원 주디 챔버린을 만났다. 그녀와 함께 도청근처의 작은 여관에 가서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을 만났다.
앤더슨은 목포로 온 뒤 택시와 자전거를 타고 군인들의 행렬을 통과해서 광주로 간신히 들어왔다고 했다.
그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여러 병원과 다른 단체들에 의해 107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한다. 이 숫자는 5월 18일과 19일 군인들이 잔혹행위를 저질렀을 때 발생한 사망자 수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물론 5월 23일 이후의 사망자 수도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들과 헤어진 후 몇 군데 교회를 방문했다. 일신교회로 가서 나이 든 한 목사를 만났다. 그 목사는 자신이 사는 동안 전쟁이나 여러 번의 사태를 경험했다고 얘기했다.
해방 전 일제의 잔혹함을 겪었고 6·25 당시의 엄청난 파괴행위도 기억하고 있었다. 4 · 19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대학생으로 시위에 가담했다. 5 · 16때는 군인의 입장에서 사태의 추이를 목격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의 사태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사악하고 음산한 경험이 되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이 좁은 지역에서 이보다 많은 인명의 손실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는 도청 앞 광장으로 왔다. 둥근 연단처럼 바뀐 분수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연단 위에는 전두환 장군의 초상 인형이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인형에 불을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오후 내내 도청 앞 광장에 머물렀다. 장세균 목사는 분수대 위에 앉아 있었다. 모인 사람들은 수습위원회에 의해 진행된 협상과정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5월 25일
광주시민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
일요일 아침,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밤새 비가 몹시 내렸다. 나는 덕성침례교회에 출석했다. 이경남 목사가 수습위원회의 총무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배 후 이목사와 나는 도청까지 걸어갔다. 2층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외국기자들이 시민지도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장세균 목사가 도청에 있는 사실상의 리더였다. 나이 든 변호사가 수습위원회의 공식적인 대표였다.
나는 잠시 통역관 역할을 했다.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 때마다 나이 많은 변호사는 계속해서 대답을 장목사에게 떠맡겼다. 장목사는 수습위원회를 대신해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는 주요 인물인 것 같았다.
오후 늦은 시간에 미군 하사인 데이브 힐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모든 미국인들이 철수해야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 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기 때문에 남아 있으면 안전이 보장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공군은 헬리콥터를 우리 집 정원에 착륙시켜 우리를 탈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위사람들과 의논한 결과 철수를 원하지 않는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가 지금 떠나면 우리 스스로에게 한 공약, 곧 광주시민과 함께 사건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나는 장목사에게 전화해서 우리가 들은 얘기를 해주었다. 한국군은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광주에 곧 진격할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두려움을 느끼면서 주일 밤 잠자리에 들었다.
5월 26일
내일 내가 살아 있을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광주는 평화스러웠다. 놀라울 정도로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없었다. 일단의 군인들이 이날 아침 광주로 들어와서 수피아여고가 있는 지점까지 진입했다가 철수했다는 미확인 소식도 들었다.
미국 CBS 방송기자가 오전 9시 30분쯤 와서 직접 녹화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요청했다. 나는 이번 사건을 조장한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군인들임을 분명히 밝혔다.
이후 나는 인터뷰가 22시간 후 미국 CBS 저녁뉴스 시간에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녹화테이프가 인편으로 서울로 보내져 동경까지 전달되고, 동경에서 위성으로 미국에 보내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와서 공군기지에 있는 데이브 힐과 연락을 취했다. 데이브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떠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지만 밝힐 수 없는 어떤 사실에 대해 불길한 어조로 말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 공군이 광주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미군측은 분명 한국군이 그 계획을 변경하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 같다. 나는 도청 근처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서울의 한 신문사에서 온 기자도 만났다. 그는 광주에 숨어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카메라를 가져올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필름은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카메라를 빌려줬다. 장목사는 학생들과 시민들에게 무기를 넘겨주고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군인들을 믿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들은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장목사는 문제가 협상에 의해서 풀릴 수 없음을 감지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그는 군인들이 다음날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면서 집으로 갔다. 잠자리에 들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내일 아침을 맞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군인들이 광주에 들어오면 우리가 살고 있던 선교사 주택단지가 그들의 목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선교사 주택단지는 도시 중심가 근처 숲이 우거진 언덕에 있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숨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그래서 군인들이 이곳에 진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바라가 떠나기 전날 밤에 우리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에게 남길 메모를 써서 침실 장롱 미닫이문 뒤에 테이프로 붙여놓기로 했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녀와 아이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들이 결코 읽지 않아도 될 편지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편지를 장롱 문 뒤에 붙여놓은 후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5월 27일
군인들이 점령한 도청에는...
새벽 3시 30분경 군은 광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진입해 들어온 곳 중 하나는 우리 단지가 위치해 있던 산언덕이었다. 후에 내가 들은 얘기에 의하면 군인들은 자동소총을 무차별하게 쏘면서 단지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혹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그 소리엔 깨어나지 못했다. 도청 쪽에서 나는 아주 거센 총소리를 듣고 4시 30분쯤 깨어났다.
그 소리는 마치 대포소리나 탱크에서 발사되는 포탄소리 같았다. 자동소총으로 아주 오랫동안 퍼붓는 소리도 들렸다.
포탄의 사정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 치명적인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2층에서 빠져나가기로 했다. 옷을 입고 지하에 있는 침실로 갔다.
포탄 소리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왔다. 마치 우리 집 바로 근처에 포탄이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병사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면서 지하 침실에 있는 장롱 위에 앉아 30분쯤을 보냈다.
새벽 5시 45분쯤 총성이 멈췄다. 도시는 조용해졌다. 라디오에서 군인들이 새벽 5시 10분 도청을 접수했다는 보도가 들렸다. 아침 9시경까지 헬리콥터로 엄청난 수의 군인들이 계속 이동했다.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나는 도심지역을 걸어 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멈칫거리면서 다녔다. 거리 대부분은 아주 황량했다.
도청 앞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 지역은 탱크로 엄격히 경계되고 있었으며, 아무도 도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광장으로 가는 거리 입구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광경이 하도 이상하여 마치 다른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저녁 기도모임에서는 이날 아침 도청에서 죽은 사람들 중에 장로회신학교 학생도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는 제일장로교회의 전도사였는데 수습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화스러운 해결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수습위원 대부분은 자정 전에 도청에서 나와 안전한 곳으로 돌아갔다.
이 젊은 전도사는 자원해서 도청에 남아 있으면서, 시민들이 며칠 전 넘겨주었던 총기가 보관되어 있는 방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이 도청을 접수했을 때, 그들은 그가 총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그 자리에서 총을 쏴 죽였다고 한다.
5월 28일
광주로 다시 돌아오다
28일 아침 우리는 계엄사령부로부터 여행허가증을 발부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침례교 목사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대전으로 갔다. 대전에서 사흘을 보낸 후, 가족을 데리고 광주로 돌아왔다.
우리 경험에 대한 대전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불쾌했다. 그래서 더 광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군사정부가 너무나 거짓말을 잘 퍼뜨려 놓은 탓인지 우리 얘기를 믿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광주로 돌아온 뒤 나는 장목사가 5월 30일 체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즉시 나는 그의 아내와 몇몇 광주지역 목사들과 함께 그를 찾아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그가 어디 갇혀 있는지 몰랐고, 더욱이 어떤 죄목으로 갇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사령관실에 전화를 해 장목사가 정당한 이유 없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외국언론에 공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그날 밤 10시에 장목사가 풀려났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있어서 계속 관심사와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나 하는 것이다. 공식적인 정부 발표는 2백명 이하가 죽은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시민들은 2천명에서 1만 5천명이 죽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얼마나 죽었단 말인가. 사건 직후인 80년 6월 중순 내가 들은 얘기에 의하면 사망자 수는 832명이라는데, 내가 보기에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내 곁에는 젊은 공직자가 앉았다. 항쟁 기간 내내 그는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서 학생들을 도와주었기에 신변이 위험하기 때문에 미국으로 가려 한다고 했다.
그와 함께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항쟁기간에 광주에 있었던 군인 친구 얘기에 따르면 당국에서 사망자 수를 8백 32명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희생자의 수가 8백 32명이건 혹은 2백명 이하건, 아니면 2천명 이상이건 간에 5 · 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잔혹행위를 영구화하는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수치를 남기는 사건이 되고 있다.
또한 광주 민주화운동은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씻을 수 없는 비극적 상징물이 돼 있다. 비록 10년이 지났지만 광주 민주화운동은 군사독재시대에 종말을 고하는 종소리요, 자유의 불길로 타올라 민주의 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으로 남아 있다.
유권소 제니퍼 리가 페이스 북에 올린 글을 퍼옴
아놀드 피터슨 목사의 80년 광주 증언록 요약
'5.18의 진상을 밝힌다'
저자 : 아놀드 A. 피터슨
옮긴이: 정동섭 교수
출판사명 : 풀빛
발행연도 : 1995년 05월 31일
저자소개
이 책의 저자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1969년부터 73년까지 미국 미조리주에서 목회하다가 지 금부터 22년전인 1973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미남침례교회 선교사로 자원한 피터슨 목사는 1974년부터 2년간 한국어를 공무한 후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배태선이라는 한국이름을 사용하였다.
광주민 주화 운동을 현장에서 체험한 후 그는 사역지를 대전으로 옮겨 1990년 선교사 생활을 은퇴하고 영주귀국할 때까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회역사를 강의하였다.
배태선 목사는 1983년 미국 미조 리주 캔사스 씨티에 있는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 득하였다. 현재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5.18의 진상을 밝힌다. 아놀드 피터슨 목사/ 정동채 교수 옮김. 풀빛
http://blog.daum.net/jerom9401/5836710
첫댓글 흔치 않은 소중한 증언입니다.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은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 형제 자매...아이들
보고도 알고도 - 설령 직접 못보았다한들,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인간이 인간으로 산다고 할수있는가.
총검을 손에들고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몰랐다고 할수있는가.
발포명령이 무엇을 의미하는것인지 몰랐다고 과연 말할수있는가.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 한들 그것을 인간이라고 할수있는가.
영령들이시여...당신들께서 잊혀질 날이 온다면
이세상에 이나라에 더이상 인간들이 살고 있지 않을 날 일것입니다.
인간에서 인간에로 심장속에 살아 전해질 것입니다.
17일 오전 국립5·18민주묘지 오른쪽 맨 위 모퉁이에 자리한 행방불명자 76명의 묘지. 이날도 비석만 덩그러니 세워진 묘지엔 유가족 100여명이 모여 조촐한 제사를 지냈다.
그래도 이들 76명은 '확실한 보증인' 등이 있어 '5·18 유공자'로 인정되면서 가족들의 아픔이 절반으로 줄어든 사례다. 그러나 '그날' 이후 돌아오지 않은 365명이 더 있다. 이들 441명은 모두 당시 계엄군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행불자 유족들의 바람은 시신을 찾아 5·18묘지에 안장하는 것이지만, 갈수록 더 어려워지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보증인'을 찾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계엄군 진압작전 기록 등도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런말 하기 참숙스럽지만
광주항쟁 사망자가 일이백명쯤 되는걸로 알고있었지만
실상은 신원확인사망자 약700명 미확인자 약600여명
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이건 피비린내나는 학살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이럴진데 전대갈은 호의호식하며 살고 죄의 댓가를 받았다며 대갈 빠빹이들고 다니네요.
죽어서도 편치안을것입니다.
소중한 글 ..목사님방으로 옮겨가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