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만진 장편소설
일장기를 지워라
차례
Ⅰ. 압록강을 건너는 현진건 ‧ 9
Ⅱ. 백마를 타고 달리는 초일류 기생 ‧ 32
Ⅲ. 강남 갔던 제비는 박씨도 물어 오건만 ‧ 88
Ⅳ. 나를 여인으로 말고 동지로 여겨주오 ‧ 124
Ⅴ. 영사관 마차를 타고 바라본 위화도 풍경 ‧ 163
Ⅵ. 푸른 강물을 휘젓는 두 여인 ‧ 199
Ⅶ. 마음에 병을 얻어 죽고 마는 S ‧ 9
Ⅷ. 그 잘난 사내의 아내는 누구인가? ‧ 62
Ⅸ. S를 죽인 내가 죄인입니다 ‧ 94
Ⅹ. 이렇게 환한 웃음은 10년 만에 처음 ‧ 118
ⅩⅠ. 설렁탕 한 그릇, 막걸리 한 사발 ‧ 142
ⅩⅡ. 현진건이 알지 못하는 후일담 ‧ 151
1. 압록강을 건너는 현진건
1918년 6월 어느 날, 열 살쯤 될 성부른 남자아이 하나가 책보를 둘러맨 채 압록강 인근 좁다란 들길을 뛰어가고 있다. 때와 차림새로 미루어 학교를 파한 후 집으로 돌아가는 낌새다.
‘어린 녀석이 무에 급한 일이 있어서 날씨도 이토록 무더운데 달음박질을 하고 있을까?’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싶어서 현진건은 공연히 애가 탄다. 작년에 태어난 이복동생 성건이보다는 일곱여덟 살 많겠지만 그래도 어린 아이임은 분명하고, 그래서 애처로운 감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마음이 얼굴에 진솔하게 나타났는지, 맞은편 좌석에 앉아 진건을 바라보는 젊은 일본 여성의 눈길도 공감하는 빛깔로 가득 채워진다. 하지만 진건은 그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창이 뚫어져라 아이 쪽에만 몰두해 있다.
‘아이가 기차 쪽을 쳐다보면 눈길이 마주칠 수도 있으련만 ….’
진건의 기대에 부응할 의무가 없는 아이는 조금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저 전진, 또 전진할 뿐이다. 자세히 보니, 가끔 손등으로 땀을 닦기는 해도 별로 지친 기색은 아니다.
‘예사 아이가 아니군 ……. 아무리 시골에서 태어나 걷고 뛰는 일에 이골이 났다 해도 저 나이에 저 정도 뛰는 건 특출한 천부의 능력을 타고 났다고 할밖에 …….’
이때 젊은 일본 여성이,
“이치지칸니 도레쿠라이 이쿠카 ……? (한 시간에 얼마나 갈까 ……?)”
하고 진건에게 묻는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지 모호한 말투로 기차의 시속을 궁금해 한다. 창 밖 아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승객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기차가 완행이라는 뜻이다. 물론 지금은 신의주역 정차를 앞두고 있는 탓에 운행 속도가 유난히 느려진 순간이기도 하다.
“도오데쇼오 …, 지소쿠와 도노쿠라이다로오카… (글쎄요, 시속이 얼마나 되려나 ...)”
진건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엉거주춤한 대답을 내놓자 그녀는,
“니주우 키로메에토루 쿠라이니와 나루카나 …? (20km 정도는 되려나 …?)”
하고 자문자답한다. 진건이 또 엉거주춤한 말로 화답을 한다.
“소레요리와 하야이자 나이데쇼오카? (그보다는 빠르지 않을까요?)”
이렇게 말을 주고받느라 시간이 흘렀으니, 아무리 기차가 늦다 해도 아이가 같은 자리에 변함없이 머물러 있을 리는 없다. 아이는 어느샌가 기차 뒤쪽으로 아스라이 사라져버렸다. 아쉬운 느낌을 애틋하게 다스리던 진건은 아이가 무엇 때문에 그리 부지런히 달린 것일까, 그 까닭을 짐짓 헤아려본다.
‘조금이라도 빨리 엄마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겔까?’
아마도 지금 이상화가 옆에 있으면 틀림없이 ‘소설가 지망생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그건 알아서 무엇에 쓰려나?’ 하고 놀려먹었을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