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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10월 14일 월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홍] 성 갈리스토 1세 교황 순교자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여종이 아닌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라며,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갈라티아서 말씀입니다. 4,22-24.26-27.31─5,1
형제 여러분, 22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3 그런데 여종에게서 난 아들은 육에 따라 태어났고,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난 아들은 약속의 결과로 태어났습니다.
24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26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27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아!
기뻐 소리쳐라, 환성을 올려라, 산고를 겪어 보지 못한 여인아!
버림받은 여인의 자녀가 남편 가진 여인의 자녀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31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5,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이 세대는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9-32
그때에 29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30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32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요나 예언자의 표징을 보면 이 사람들이 믿을까요? 표징이라는 낱말을 보면서 몇몇 성경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12,37).
사람들은 표징을 청하지만, 표징을 보고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믿지 않습니다. 표징이 없는 믿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지만 그는 청하지 않습니다(7,10-12 참조). 그는 주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신에게 표징이 주어지면 그 표징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여야 하기에 자신을 그런 위험에 빠뜨리지 않으려 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시험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표징이 없을 때는 자신의 불신을 감추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시]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표징을 청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라는 하나의 표징이 던져졌고, 이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갈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세대를 악한 세대라고 말씀하시지만 어쩌면 그 세대는 지금까지 세상에서 살았던 이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험을 치른 세대입니다. 이날 저 날 미룰 수도 없이,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 앞에서 결단을 내려야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표징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 표징은 나의 믿음을 확인시켜 줍니까, 아니면 나의 불신을 드러나게 합니까?(안소근 실비아 수녀)
주님 경외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나가 살던 시대, 아시리아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한 제국이었습니다. 아시리아는 동서로는 인도에서 시작해서 이집트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시작해서 러시아까지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요나가 찾아간 니네베는 당시 아시리아의 수도였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뉴욕이나 도쿄, 북경이나 런던 정도 되는 대도시였습니다.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마차 3대가 동시에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습니다. 성벽의 높이는 23미터였는데,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 앞에는 너비가 24미터인 방어용 연못까지 건설할 정도였습니다.
요나 예언서도 니네베라는 도시의 규모와 위용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니네베는 가로지르는 데에만 사흘이 걸리는 아주 큰 성읍이었다.”(요나 3,3)
예언자로 불림 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가 바로 그 잘나가던 도시, 당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던 것입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 들 뭐하겠어? 귀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집단적 회개 사건을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날 주님께서는 또 다른 잘 나가는 우리들의 대도시를 향해서도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돈과 명예, 소비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든 거대 도시민들의 집단적인 회개를 기다리고 계실 것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렇게 번창했고 잘 나갔던 대도시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발굴된 오벨리스크나 벽화에는 저마다 새겨놓은 무용담이나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끝도 없이 군사력을 증강시키면서 지상의 평화를 위협하는 몇몇 강대국들, 아시리아와 니네베의 멸망을 눈여겨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모르며, 약소국들을 우습게 여기는 나라들의 회개가 절실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 저는 두 가지의 동화를 읽었습니다. 하나는 ‘미운 오리 새끼’이고, 다른 하나는 ‘병아리와 함께 자라는 독수리’입니다. 두 이야기의 동기는 비슷합니다. 원래 백조인데 오리들 틈에서 자라는 미운 오리 새끼와 원래 독수리인데 병아리들 틈에서 자라는 독수리의 이야기입니다. 어찌하다 보니 백조의 알이 오리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백조는 생긴 모습이 오리와 다르니 오리 사이에서는 미운 오리 새끼로 불리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는 호수에서 우아하게 움직이는 백조들을 보았습니다. 물가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백조가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미운 오리 새끼는 자기가 같은 백조들과 함께 호수에서 지내게 됩니다. 오리들이 볼 때는 미운 오리 새끼였지만, 사실은 아름다운 백조였습니다. 병아리와 함께 지냈던 독수리도 비슷합니다. 어찌하다 보니 독수리의 알이 병아리의 알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면서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를 보면 숨어야 했습니다. 독수리가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독수리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와 자기의 모습이 같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제 두려움에 떨고, 숨어야 했던 독수리는 다른 독수리들처럼 하늘 높이 날아올랐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제가 읽었던 동화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여종에게서 났고 하나는 자유의 몸인 부인에게서 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별과 구름을 만드셨습니다. 땅과 물과 숲을 만드셨습니다. 하늘과 물과 땅을 다니는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호수에서 춤을 추는 아름다운 백조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높이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독수리입니다.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날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날개를 꺾어버리는 유혹과 죄입니다. 죄의 결과인 죽음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였을 겁니다. 권력과 명예 그리고 성공과 재물로 치장한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은 날지 못하는 독수리처럼 보였을 겁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당신을 믿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것을 보여 주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이 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수 있는 것도 큰 표징입니다. 우리는 밤에 잠을 자면서 죽음을 체험합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자는 동안 우리는 깊은 어둠을 체험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은 어쩌면 늘 새로운 부활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의 뜻으로 바라볼 때, 내가 만나는 이웃, 내가 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표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육의 눈으로 바라볼 때, 교만함과 원망의 눈으로 바라볼 때, 서로를 믿을 수 없고, 서로를 이용하려 하고, 모두가 경쟁의 상대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서 지내야 하겠습니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당신과 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루카 11,30)
당신
나를 믿으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믿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당신
나를 바라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바라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당신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되시니
나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이 되렵니다
오늘의 성인
성 갈리스토 1세(Callistus I)
신분: 교황,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222년
같은이름: 갈리스도, 갈리스투스, 깔리스또, 깔리스뚜스, 칼리스토, 칼리스투스
성 칼리스투스(또는 갈리스토)는 로마(Roma)의 트라스테베레(Trastevere) 태생인 로마인이었으나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의 노예로서 재정을 담당했었는데, 사업에 실패해 그리스도인 예금자들에게 큰 손실을 입히자 도망쳤다가 포르토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여기서 석방된 후에 그는 또 안식일에 회당에서 싸우다가 다시 체포되어, 이번에는 사르데냐(Sardegna) 섬의 광산에서 일하는 중노동형을 받았다.
그는 황제 코모두스의 첩인 마르키아의 요청으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석방되었고, 노예 신분에서도 풀려199년경에 그는 대부제가 되어 아피아 가도(Via Appia)의 교회 묘지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때 그는 교황 성 제피리누스(Zephyrinus, 8월 26일)의 친구이자 고문관이 되었다.
그는 217년에 성 제피리누스 교황을 승계하여 교황이 되었으나, 교황직에 가장 유력시되던 히폴리투스의 심한 반발을 받았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또 규율적인 입장에서 교황을 공격하여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몇 년 후 그가 운명함으로써 이 싸움은 끝이 났다.
4세기경부터 그는 순교자 축일표에 나타나 순교자로 공경을 받았는데, 그 당시에는 박해가 없었지만 아마도 시민 폭도들에 의하여 살해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성 가우덴시오 (Gaudentius)
활동년도 : +360년
신분 : 주교, 순교자
지역 : 리미니(Rimini)
같은 이름 : 가우덴시우스, 가우덴씨오, 가우덴씨우스,. 가우덴티오,가우덴티우스
아시아 출신의 성 가우덴티우스(또는 가우덴시오)는 332년 로마(Roma)에서 성직에 들어선 후 346년에 이탈리아 중부 리미니의 주교가 되었다. 그는 357년의 공의회를 지배한 아리우스파(Arianism)에 의해 많은 고통을 당하였고, 결국 그들에 의해 순교의 길로 들어섰다.
성 도나시아노(Donatian)
활동년도 : +390년
신분 : 주교
지역 : 랭스(Reims)
같은 이름 : 도나시아누스, 도나씨아노, 도나씨아누스, 도나씨안, 도나티아노, 도나티아누스, 도나티안
로마(Roma) 태생의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또는 도나시아노)는 프랑스 랭스의 제7대 주교로 축성되어 30년 동안 교구를 돌보았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아미앵(Amiens) 근교에 모셔졌다가 9세기에 벨기에의 브뤼헤(Bruges)로 옮겨졌고, 그곳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고 있다.
성 도미니코 로리카토 (Dominic Loricatus)
활동년도 : +1060년
신분 : 은수자
지역 :
같은 이름 : 도미니꼬, 도미니꾸스, 도미니쿠스, 도미니크, 도미닉, 도밍고
성 도미니코(Dominicus)의 부모는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주교에게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하여 아들이 사제직에 나아가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젊은 신부가 나중에 이런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크게 느끼고 앞으로는 결코 미사나 성무를 집행하지 않으리라 결심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 아펜닌 산 중에는 몬테펠트로의 요한이라는 성자가 일단의 은수자 무리를 지도하고 있었다. 수많은 제자들이 18개에 달하는 움막 속에서 엄격한 은수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도미니코는 원장을 찾아가서 자기도 이 고행의 대열에 끼워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이곳의 선배 은수자들도 놀랄 정도로 열심히 보속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몇 년을 살다가 그는 폰테 아벨라나(Fonte Avellana)로 갔는데, 이곳은 성 베드로 다미아누스(Petrus Damianus, 2월 21일)가 지도하는 은수소였다. 이곳의 원장도 오랜 동안 영웅적인 보속생활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양과 생활 태도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염소 가죽으로 행낭을 만들어 입었고(이 때문에 행낭이란 뜻의 로리카토라는 별명을 얻었다), 편태는 물론 손발에는 쇠사슬을 묶었고, 음식은 극히 소량을 섭취하고, 맨땅에서 잠을 잤다. 이런 고행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하였다. 그는 나중에 산 세베리노 근방의 어느 은둔소의 원장이 되었다. 죽는 날의 마지막 밤에도 그는 밤기도를 형제들과 함께 바치고, 1시경을 바치면서 운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