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여행17 - 중산릉을 보고 혁명열사관을 지나 고풍스러운 사찰 영곡사를 구경하다!
10월 20일 난징 지하철 2호선 무쑤위안 苜蓿园站 역에 내려 언덕길을 올라 매표소에서 10위안
하는 표를 끊어 관광차 를 타고 중산릉남역에 내려 10분을 걸어 손문 의 중산릉 을
보고는 영곡사 를 보기로 하고 5분을 걸어서 중산릉동역 에서 고풍스러운 관광차 에 오릅니다.
관광차 는 숲속을 달려서 연못을 지나고 10분후 영곡사 정류소 에 도착해 입장권을 사서
다시 연못을 지나고 호젓한 길을 걸어 "패방" 이라 불리는 문을 지나서 오른쪽에
엄청 큰 돌거북 이 서 있는데 한글 로는 “돌거부기” 라고 적혀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합니다.
“무량전” 이라고 적힌 건물로 들어가니 영곡사 절 이라고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국민혁명열사지영위” 라, 절에서 위패 를 봉안하고 있나 싶어 보니 청나라 황제
의 그림 옆에 저 여인은 얼핏 보아도 눈에 익은게..... 실력자 “서태후” 인 것 같네요?
배 갑판에 탄 중국인과 서양 여자 셋에 “중산출양” 이라... 그럼 "손문" 이 바다 건너 일본과 미국이며
영국 으로 건너가는 그림 일러나? 옆에 독립지사 들을 잡아 고문하는 일본군 이라....
이거 영곡사 절 에 간다는게 잘못 들어왔나 싶어 밖으로 나와 관광객에게 물으니 "절" 이 맞답니다???
여긴 “혁명열사관”이고 뒤로 돌아가니 거기 건물 뒷문으로 해서 영곡사 로 가는 길 이 나
있습니다. 다시 10여분을 걸어 영곡사 절 에 도착하니 향냄새 가 진동하는 가운데
불경소리 가 크게 울려 퍼지는게...... 어떤 중국인 가족이 "재" 를 올리러 왔나 보네요?
靈谷寺(영곡사) 는 514년 창건한 절을 1381년 이전했다는데 60m 9층 영곡탑 에 오르면 중산릉이
보인다고 하는데..... 공산당 정부가 "종교는 아편" 이라고 탄압하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가는
절 마다 으리으리하게 치장하고 "BMW 등 고급 외제차" 가 줄지어 늘어선데 "상전벽해" 를 느낍니다.
“혁명열사관” 을 거쳐 왔거니와 그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면 빈부격차가 엄청나게 벌어지고
호화로운 절 의 모습을 보노라면 "사회주의" 를 위해 싸운게 허망 하리라? 손문이 2차례나
봉기에 실패하니 많이 죽었고, 1911년에 신해혁명 성공후 마침내 손문이 대총통 에 오릅니다.
무력이 약해 청조 타도를 위해 원세개 에게 대총통을 양보했는데 원세개는 황제 가 되었다가
죽으니 부하 군벌 들은 이홍장의 회군에 뿌리를 둔 안휘파 와 원세개의 신군에 뿌리를
둔 직례파 에다가 만주를 배경으로 등장한 봉천파 등으로 갈려 피터지는 싸움 을 하게 됩니다.
국공 합작을 이루고 북벌을 추진하던 손문이 죽은 후에 광저우의 국민당 을
장악한 장개석 은 군벌들의 자중지란을 틈타 1926년 7월 제1차
북벌에 나서 오패부등 직례파 군벌을 침몰시킨뒤 남경 정부 를 발족시킵니다.
그리고 1927년 장개석 은 공산당 세력의 성장을 두려워해 국공 합작으로 함께
싸우던 공산당 동료(?) 들에 대해 상해에서 쿠데타 를 일으켜서는
공산당원을 수없이 처형 하니 살아남은 공산당원들은 도망쳐서 농촌으로 들어갑니다.
국민당을 완전히 장악한 장개석 은 제 2차 북벌 에 들어가 산서의 염석산과 광서의 이종인
등과 연합해 만주출신 봉천파를 공격하니 장작림 은 황급히 만리장성 밖으로 패퇴합니다.
장작림 은 봉천 부근에서 일본군이 설치해놓은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열차에서 폭사 하고
아들인 장학량 이 뒤를 잇는데.... 장개석은 북경을 장악하고 중국 통일 을 이룹니다.
장학량 은 17일간이나 부친의 죽음을 숨기고 사태를 장악한후 상을 치른후 동북군의
사령관 에 취임하고는 동북 3성의 독립을 포기 하고 남경 정부에 귀순 하게 됩니다.
“대원수 장작림의 유지 를 받들어 중국의 통일과 평화에 힘쓰겠다. 오늘부터 삼민주의
를 준수하고 남경 국민 정부 의 명령을 따르며 동북의 깃발을 바꿔 달겠다.”
장작림이 폭사할 당시 충동을 이기지 못해 섣불리 대응했을 경우에는 만주는 일시에 혼란에
빠져들어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을 공산이 크니 그의 냉철한 대응 이 빛나는 대목 입니다.
“구변” 에서 말하는 장수 오위론 을 좇은 것으로..... 사(死), 생(生), 분(忿),
렴(廉) 과 애(愛) 의 5가지 감정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장수의 요체라?
장개석의 국민당은 공산당을 포위 공격해 전멸시키려고 하자 홍군 은 강서성 서금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국민당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며 1만 2000km 를 걸어서
1935년 구사일생으로 서북 지방 연안 에 도착하니 이른바 "대장정" 이라 일컫습니다.
국제 코민테른의 지도로 주요 도시를 거점 으로 활동하던 공산당은 국민당군의 포위 공격으로
위기에 몰리자 마오쩌둥(毛澤東) 은 "농촌을 우선 포섭하고 이후 도시로" 라고 주장합니다.
모택동 은 공산당 패잔병을 이끌고 정강산으로 들어가 홍군을 편성하여 소비에트 를 건설
하나 섬멸되기 직전 까지 내몰리게 되자 장정 을 개시해 중앙당에서 지도하는
제1 방면군은 8만 병력을 가지고 1934년 10월 그들의 근거지인 강서성에서 철수합니다.
이에앞서 하룡 을 지휘자로 하는 제2방면군이 호남· 호북· 사천· 귀주성의 경계 지역에
진출하고 있어 제1 방면군과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국민당군의 공격을 받아 무산 됩니다.
1935년 모택동의 홍군 은 사천성에 진출하였던 제4방면군과 합류를 위해 대도하를 도하하고
대설산맥을 넘어 고난의 행군 끝에 소금에서 합류에 성공한후 북상을 계속해
368일간의 강행군 끝에 주력은 산시성의 북부 연안 에 도착해 새로운 터전을 개척합니다.
제2 방면군은 2만 병력으로 출발해 시캉성에서 제4방면군과 합류하고는 1936년 감숙에서
제1 방면군과 합류 11성을 통과하고 18개 산맥 을 넘어 장정을 마쳤는데...
국민당군 폭격과 전투로 죽고 험한 산맥을 넘느라 안전사고에다 병들고 굶어 죽어갔습니다.
공산당은 전군 30만 의 병력이 출발했으니...... 장정 도중에 이들에게 합세한 주민들로
병력을 많이 보충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정을 마치고 새로운 근거지 연안에 도착
했을 때는 10분지 1인 "3만" 에 지나지 않았으니 그럼 92% 는 도중에서 죽었던 것이라?
그러나 고난의 장정 으로 살아남은 병력은 최정예 부대 가 되어 공산혁명의 중심세력 이
되었으니... 위기를 느낀 장개석 은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독려차 서안 을 방문
하니 장학량 은 자신의 근거지인 만주가 일본군에 점령된지라 장개석을 감금한후
공산당과 힘을 합쳐 먼저 일본군에 대항하자고 역설하니 제2차 국공합작 이 이루어 집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한후 다시 국공내전 이 벌어지는데 미군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은
전투기와 탱크 에 대포와 함대등 430만 대군 인데 비해, 공산군 은 소련에서
지원받았으나 박격포와 소총으로 무장한 120만 이라 내란은 곧 끝날 것 처럼 보였습니다.
예상대로 병력과 무기에서 우세한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근거지 "연안을 함락" 하는데...
하지만 병력이 너무 분산되고 장교들의 사리사욕과 부정부패 가 심해 국민들이
등을 돌리니... 린뱌오(임표) 의 공산군은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를 패주시켰으며
이후 베이징을 함락하고 남하해 난징을 공격할때는 돛단배를 타고 양자강을 건넜습니다!
이 공산군 에 만주와 중국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이 12만" 이나 대거 지원해서 본토에서
국민당군대를 몰아낸후 북한에 보내져 6.25 때 주력으로 남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조선인들이 국민당을 외면하고 공산군에 가담한건 종전후 중국인들의 조선족 마을을
습격할때 공산군이 막아 준데다가 토지를 무상으로 분배하는 정책 때문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일본은 만주 점령후 5족협화 를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중국인들을 다스림에 있어 조선인들을
우대했으니 차별받았다고 생각했던 중국인들은 1946년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가 만주에
들어오자 조선인 마을을 습격해 그동안 쌓였던 분노를 표출한 것인데, 국민당군은 방관
한데 비해 공산군은 막아주니 조선인들이 공산군을 지지하게 되어 입대 하게 된 것 입니다.
모택동 은 1949년에 북경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는데...
이 때까지 죽은자 들이 바로 저 “혁명열사관”에 봉안된 것인가 보네요?
( 장개석은 대만으로 쫃겨간 후에 며느리 생일날에 선물 을 보내는데 입이 벌어진
며느리가 포장을 뜯으니 권총이라? 자살하는데 진작 대륙에 있을때 부패를 척결하지? )
그러고는 절을 나와 다시 산을 걸어 내려와서는 영곡사 정류소 에 이르러 매표소 에서 표를 끊어
다시 고풍스러운 관광차 를 타고는 중산릉 을 지나반대편에 "명효릉" 으로 찾아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