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원의학(金元醫學) 4대가 중 장자화張子和)는 공사(攻邪)학설을 주장한 학자이며 이동원은 온보비위(溫補脾胃) 해줌으로써 각종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의 의견은 서로 날카롭게 맞서 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상대를 설득할 수 없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동원을 보토파(補土派)의 종사(宗師)라고 일컬었다. 이동원은 실제로 고전을 깊이 연구하여 다른 의사들과 판이하게 다른 치법(治法)을 발견해 내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거의 죽어가는 환자들도 많이 구제했다.
어느 날 북송(北宋)의 서울 변경(汴京 : 현재 하남성 개봉(開封)) 주관酒官) 왕선포(王善浦)는 소변이 잘 나오지 않았으며 안구가 돌출되어 있었고 배는 장구통처럼 불렀다. 그는 무릎 위가 터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호소했으며 식음을 전폐하여 생명이 위독했다. 의사들을 초청하여 치료해 보았으나 의사들은 한결 같이 감담삼설(甘淡渗泄) 작용이 있는 이뇨(利尿) 약물 만 복용시켰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병정은 점점 위독하여져서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병가에서는 이동원을 불러 치료하였다. 이동원은 자세히 환자를 관찰한 후 "환자의 병은 아주 복잡합니다. 일반적인 치료방법으로는 치유 불가능입니다. 심사숙고해야 되므로 내가 집에 돌아가 재차 생각할 기회를 주십시오." 라고 말했다. 병가에서는 이동원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었으므로 이동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이동원은 집에 돌아가서 환자의 증상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경을 암송해 보며 심사숙고 했으나 해답을 얻지 못했다. 밤이 깊어갔다. 이동원은 옷을 입은 채 잠이 들었다. 새벽녘에 이동원은 이불을 젖히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계속 "방법이 있다! 방법이 있어!" 하고 소리쳤다.
소문(素問)의 영란비전론(靈蘭秘典論)에 "방광자(膀胱者), 주도지관(州都之官), 진액장언(津液藏焉), 기화즉능출의(氣化則能出矣)"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생각해 내었다. 그리고 이동원은 환자가 소변을 보지 못하는 것은 기화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방광은 수액이 모이는 곳이며 진액이 저장되어 있는 곳이다. 방광 스스로 수액을 배출하지 못하며 다만 하초하초의 기화작용기화작용의 도움을 얻어야 만 수액을 밖으로 배출할 수 있다." 는 뜻이다.
이동원은 "환자가 소변을 배출하지 못함은 기화작용이 불리한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 의사들이 모두 담삼적(淡渗的)인 양약(陽藥) 만을 썼기 때문에 하초의 기화작용이 촉진되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아무런 효험이 없단 말인가?" 하고 혼자서 깊이 생각해 보았다.
왕빙(王冰)이 내경을 주석해 놓은 것을 보면 "무양자(無陽者), 음무이생(陰無以生), 무음자(無陰者), 양무이화(陽無以化)" 라고 기록해 놓았다. 이동원은 왕빙의 내경주석(內經注釋)을 읽고 나서 기화작용은 음정(陰精)과 양기(陽氣)의 공동작용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터득했다. 물론 감담삼설약은 기화작용을 촉진시켜 주었지만 환자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는 동안 음(陰)이 상하였다. 그러므로 양은 있지만 음이 부족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기화작용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을 이동원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 이튿날 이동원은 기쁨이 가슴에 가득하였으며 자신만만하여 환자의 집을 찾아갔다. 이동원은 즉시 음(陰)을 보(補)해 주는 음약(陰藥)을 처방하여 환자에게 복용시켰다. 환자는 과연 점점 질병으로 부터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