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주전에 일때문에 경주를 다녀왔다.
이 도시는 수없이 왔다갔다했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남산의 겨울이 을씨년스러운거하며~
반월성을 발굴한다고 난리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출토품으로 발굴팀이 애를 태우고 있다나^^
월성은 원래 궁전터가 아니고 호공의 저택이 있던 곳인데 탈해가 이를 빼앗아 이후부터 쭉 궁전으로의 기능을 해온 곳이다. 얼핏 보면 작고 아담해보이지만 위에 올라가보면 제법 너른 터에 깜짝 놀라게 된다. 저택지로서는 아주 제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물관에 들를 일이 있엇는데 여전히 성덕대왕신종이 그 자리에 떡하니 매달려 있다.
속칭 에밀레종이라 불리는 웅장한 종~
그 소리가 에~밀~레에~~ 한다고 에밀레종이라하고 주조시에 아이의 시신을 공양했다고 잘못 알려져 오고 있는 국보중의 국보
언젠가 국내굴지의 언론사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많이 웃겼다.
문화란에 이렇게 적혀 있어서 ~ 기자의 수준을 의심한 적이 있다
성덕대왕신종. 할아버지 혜공왕의 업적을 기려 성덕왕이 주조한 보물, 천년을 그자리에 그대로 매달려 아시아를 울리는 신종~~ 어쩌고저쩌고~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국내 최대의 일간지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쓴다는 것은 나라의 수치다.
성덕대왕신종은 김융기(성덕왕)의 업적을 기려 그 아들 김승경(효성왕) 이 주조하기 시작하였다가 마치지 못하고 그 손자 김건운(혜공왕)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 종이다.
기사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아예 뒤바꿔 놓았다^^
또 1000년을 그 자리에 매달려 운운... 가소롭다^^
그 종은 그 자리에 1000년을 매달려 있지 않았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성덕왕대는 신라 국력의 최절정기였다.
북으로 압록에 이르고 만주로도 군대를 파견하던 시절, 각지에 소경이 설치되고 진골귀족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사찰이 서라벌경내에만도 200여개에 이를 정도로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시기..
성덕왕의 아들 효성왕은 그런 아버지를 기려 큰 종을 주조하기를 원했고 살아생전에 이를 완성하지못하고 손자 혜공왕대로 이어졌다. 혜공왕대에 드디어 종을 완성하여 아버지 효성왕이 성덕왕을 위해 봉헌한 봉덕사에 이 종을 걸게 된다.
그런데 봉덕사에 큰 물난리가 발생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경주는 원래 못이고 습지였다. 곳곳에 못을 메워 도시가 형성되엇고 항상 비가 오면 북천과 서천 남천이 범람했다. 그래서 북쪽 북천가와 서천가에 거대한 수방림을 조성하게 되었다. 황룡사도 원래 물난리를 방지하고자 홍수에 대한 수방의 목적으로 건립된 절이다.
김헌창(김주원의 아들로 아버지 김주원이 김경신에 밀려 즉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으로 김경신의 아들 헌덕왕 김언승의 대에 난을 일으킨 자) 도 공주도독으로 있다가 김언승이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경주로 왔으나 마침 북천의 물이 불어 건너지 못해 왕위를 놓치지 않았던가.!
항시 홍수의 위협에 노출된 땅이 경주습지였다.
봉덕사가 큰 물난리로 소실되고 성덕대왕신종은 그 절터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그 후, 이 종은 700여년을 그대로 흙속에 나뒹굴었다.
조선조 세조때 경주부사가 이 종을 흙속에서 발굴하여 영묘사란 절에 다시 걸게되었다. 그러나 영묘사마저 불에 타 사라지자, 경주부사는 이를 중앙에 보고하지 않고 그대로 이 종을 봉황대앞에 걸어 시간을 알리는 타종기로서 사용하고 만다.
봉황대는 경주 노서동에 위치한 단일봉분으로는 국내 최대의 봉분이다. 높이 20미터 밑변의 지름이 250미터에 달한다. 아직 발굴되지 않아 누구의 무덤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 봉황대는 경주에 주둔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의 위수부였다.
이런 우여곡절끝에 성덕대왕신종은 그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태, 그 웅장한 규모에 맞지 않게 겨우 시간알리는 타종의 역할만을 해오던 터였는데~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이 종을 봉황대에서 내려 경주경찰서 뒤켠에 보관하였다가 일본으로 반출하려 하였는데 어떻게 옮기지를 못해 그대로 세월만 묵히고 있었다. 이후 해방이 되고 경주경찰서 뒤터에 덩그러니 무방비로 방치되다 드디어 1973년 경주박물관이 건립되면서 이 종을 박물관에 걸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이 종를 박물관에 매어달아야 하는데 당시 기술로는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포항제철에 연락하여 쇠기둥으로 고정을 하려고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학계에서는 예전 방식대로 나무기둥에 종을 달자..라고 의견이 모아졋고 전국의 학예사 고전학자 역사가 고고학자들이 모여 다는 방법을 숙의한 끝에 박물관 내실이 아닌 마당에 , 즉 외부에 이 종을 위한 간단한 지지건물을 짓고 나무로 이 종을 매어달자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드디어 그 결실을 보아 지금 그 자리에 이렇게 저 성덕대왕신종이 위치하게 된 것이다.
또 쇠기둥으로 달았을때는 그 소리가 둔탁하여 깊은 맛이 없었는데 예전 방식대로 외부에 종을 달고 타종하자 그 맑은 소리가 천지사방을 진동하여 모든 이들이 감탄하였다한다.
이런 사연을 가지고 어렵시리 성덕대왕신종이 그 자라에 있게 된 것이다.
이 신종의 타종소리는 세계에서도 그 유래가 없다.
은은하면서도 애절하여 잔영이 오래 남는다. 실제 이 종을 주조할 때 아이의 시신을 넣지는 않았겟지만, 어쨋든 성덕대왕신종은 우리의 문화유산만이 아닌 세계의 문화유산이다. 얼핏보면 박물관 한 켠에 어정쩡하게 매어달려 있어 저것이 에밀레종이구나~ 하면서 무심코 지나치지만, 성덕대왕신종이야말로 신라의 상징과도 같다.
불교문화와 정복의 유목문화가 어우러진 황금기의 신라!
오랜 정복전쟁과 그 고단한 말발굽을 그제야 내려놓고 오색칼집 화살통 내던지고 그제야 만끽하는 정복후의 평화~전쟁의 끝!
그것이 저 성덕대왕신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