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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장 주석
구유에 나신 메시야 (누가복음 2:1-7)
"때가 차게"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사, "여인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하신 그 때가 온 것이다. 그리고 그는 베들레헴에서 나리라는 사실이 예고되어 있었다.
이제 여기서는 그 출생의 시기, 장소, 방식을 살펴보자.
Ⅰ. 우리 주 예수께서 출생하신 때를 보자. 이 대목이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는 바를 종합하면, 그 때는 "적당한 때"였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 그가 태어난 때는 "제 4의 군주 국가"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이다. 즉 이전의 3 군주 국가보다 이 제4의 군주 국가야말로 "세계적인 국가"가 이제 막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구스도 황제 "시대에" 태어났다. 그 때는 로마 제국이 그 어느 때보다는 영토를 확장해서, 한쪽으로는 페르샤와 다른 한쪽으로는 영국에까지 그 힘이 뻗쳤을 때이다. 따라서 당시의 로마는 Terrarum orbis imperium - 온 지상의 제국이라고 불리웠다. 그래서 여기서도 로마를 "온 세계"라고 칭했다(1절). 왜냐하면 로마에 부속되어 있는 나라를 빼놓고는 문명이 개화된 곳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어제 다니엘의 예언에 따르면, 지금이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할 시기인 것이다(단 2:44). "이 왕들의 시대에," 즉 제4의 군주 국가 시대에, "하늘의 하나님께서 결코 파괴되지 않을 나라를 세우시리라"고 했다.
2. 그는 유대가 제국의 한 도(道)요 부속국으로 되어 버린때에 탄생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 전체가 국세 조사를 받을 때에 유대인들도 역시 국세 조사를 받은 것이 분명하다. 예루살렘은 로마의 장군 폼페이(Pompey)에 이해서, 이 일이 있기 전 약 60년 전에 점령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나서 교회의 치리권은 힐가누스(대제사장)에게 맡겼다. 그러나 국가의 치리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국가의 치리권은 점점 약화되어, 마침내는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왜냐하면 유대는 수리아의 로마인 총독 구레뇨가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2절). 바로 이 때야말로 메시야가 탄생해야 될 시기였다. 야곱의 유언 예언이 바로 그렇게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실로가 오실 터인데, 그가 오시면, "홀(왕권의 상징)이 유다를 떠나지 않으며, 율법 수여자가 그의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창 49:10).
이 호적 조사는 유대에 "처음 있는 호적"이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노예성을 말해 주는 첫 신호였다. 그러므로 이제 실로가 와서 자기의 나라를 세워야 된다.
3. 그 시기에 대한 또 다른 사정이 엿보인다. 그것은 로마의 시민 전체가 등록을 했다는 사실인데, 그것은 그 제국에 현재로서는 세계적인 평화가 존립해 있다는 뜻이다. 야누스의 성전은 이제 닫혔는데, 지금까지는 어떤 전쟁이 발발했더라도 결코 문이 닫힌 적이 없던 성전이다. 그리고 이제 "검을 쳐 쟁기를 만들어야 할" 때를 초래할 평화의 임금이 나실 적합한 시기가 된 것이다.
Ⅱ. 우리 주 예수의 탄생 장소는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 그렇게 예언되어 있었다(미 5:2). 서기관들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마 2:5, 6). 또 일반인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요 7:42). 그 지명에는 의미 있는 뜻이 들어 있다. 베들레헴이란 "떡집"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떡,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신 분이 출생하기엔 아주 적합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베들레헴은 다윗 성이었다. 즉 그가 태어난 곳이요, 따라서 "다윗의 자손"인 "그"는 거기서 출생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시온도 역시 "다윗 성"이라고 불렸다(삼하 5:7). 그러나 그리스도는 거기서 탄생하시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비천한 모습으로 하나의 "목자"로서 태어난 그 다윗 성은 베들레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리의 구주는 그가 스스로 겸비해지셨을 때, 자기의 출생지를 그곳으로 정하셨던 것이다. 출생지는 시온이 아니었다. 시온은 그가 권능과 번영을 누리며 통치하던 곳이요, 그리스도의 교회를 상징하는 모형이 될 곳, 곧 "시온 산"이었다.
동정녀 마리아는 임신했을 때, 해산의 때가 가까워 오자. 섭리자는 황제로부터 발령된 명령을 통해서 그런 일을 명령하시사, "로마 황제"의 치하에 있는 모든 백성들에게 "호적 하게"하였다. 즉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이름을" 정해진 관서에다 가족별로 "등록하고" "기록해야"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매우 적합하다. 그들이 "호적을 올리"는 일은 부차적인 일이었다. 그 국세조사는 그들로 하여금 로마 제국에서 신하로서의 고백을 하게 할 목적이었다. 즉 어떤 정해진 짧은 공식문을 통해서나 최소한 어떤 소작료와 같은 자기들의 충성의 표시로서 작은 공물을 바치게 함으로써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등록된 종이 되었다. 그것은 스스로의 탓으로 돌리게 되었을 것이다.
이 "영(令)"에 따라서(자기들의 가문이나 족보를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이름이 등록되게 될 때 특별한 신경을 써서 족보나 가문이 잘 보존되도록 대비했다. 이와 같이 어리석게도 저들은 "본체"를 잃고 나서도, "그림자"라고 붙잡으려고 안간힘을 다 썼던 것이다.
아구스도의 계획은 자기 백성의 숫자를 알아서 그것을 세상에 공포하는 것을 "자랑"하고픈 교만심에서 나왔었든가, "정책"적으로 했을 것이다. 즉 자기의 권세를 보강하고, 자기의 정권이 더욱 막강하게 보이도록 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섭리자는 그 일을 통해서 다른 것을 계획하셨다. 요셉과 마리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호적"하느라고 고생을 겪어야 했다. 이리하여 그들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올라와야 했다. 그들은 "다윗 집 족속"이었기 때문이었다(4,5절). 그리고 아마 그들은 가난하고 지위가 낮은 자들이었으므로, 자기들의 혈통이 왕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으로보다는 부담과 비용이 드는 일로 여겼으리라. 왜냐하면, (남자는 물론이나 여자도) 모든 유대인은 자기들의 선조들이 살던 성읍에 가야 했고, 지금으로서는 자기들의 지파의 경계를 지키고 있지도 않으면서, 거기에서 호적을 해야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황제는 "다윗 족속"에게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특별한 명령을 내렸으며, 그 족속에게는 아주 정확성이 기해졌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다윗 족속은 왕족이었고, 지금까지도 그들이 왕이 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그래서 황제는 그들의 숫자와 힘을 알아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섭리의 여러 가지 목적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 이로써 "이미 잉태하고"있던 동정녀 마리아는 베들레헴으로 가야 했다. 예언에 따라서 거기서 아기를 "낳게끔"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아이를 낳으려 계획했던 것이다. 실로 "계획은 인간이 하나 그 성사(成事)는 하나님께 있음"을 기억하자. 또한 섭리자는 만물을 성서의 말씀을 이루시도록 명령하시며, 인간들이 자기들의 목적을 위해 세운 계획까지도 본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섭리자 자신의 뜻을 이루는 데에 이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2.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에 속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제 무엇이 그의 모친을 베들레헴으로 가게 했겠는가? 그녀가 "다윗의 집 족속이었다"는 사실밖에 무엇이 또 있겠는가"
이것은 입증되어야 할 실질적인 일이요, 이와 같이 신빙성 있는 증거를 요구하는 문제였다.
기독교 신앙을 위한 가장 초기의 대변자들이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와 터툴리안(Tertulliam)은 (그리스도의 혈통이 다윗家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위해서) "로마 제국"의 호적 또는 "기록"을 들었다.
3. 이것을 통해서 그리스도도 "율법 아래" 있는 자임이 밝혀졌다. 그는 나자마자 로마 제국의 신하, 곧 "관원들의 종"(사 49:7)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는 국세 조사 기간 중에 출생했으므로, 그의 부모와 같이 호적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스스로 아무런 명예도 취하지 아니하며," "종의 형체를 취하였다"는 점을 보여 줄 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왕들의 그에게 공물을 바쳤어야 하는데, 그 대신 그가 세상에 왔을 때는 친히 공물을 바치는 자(종)가 되었다.
Ⅲ. 그의 탄생의 주위 사정을 보자. 그것은 지극히 비천했고, 온갖 멸시의 표지가 다 붙어 있었다. 그는 실로 "장자"였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이 그렇게 초라한 여인의 장자가 되는 것은 아무런 영예가 못되었다. 그녀에게는 장자가 될 자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었다. 단지 "선천적인" 것밖에는 없었다.
1.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으로 당하는 비천한 모습을 지녔다. "그는 강보에 싸였다." 그것은 다른 아이들도 갓 태어났을 때는 그런 법이다. 마치 그리스도를 단단히 지켜야 하고 또 그래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듯이었다. 암흑 에"바다를 싸매는 강보로" 삼았던 바로 그분이 이제 "강보에" 싸이게 된 것이다(욥 38:9).
저 영원하신 아버지께서 시간의 아기가 되셨다. 그리고 사람들은 저 영원에 기원을 두고 있는 분을 보고, "우리는 그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고 있다(요 7:27)고 했다. 상제(上帝·날들의 태고)께서 잠시 동안의 시간의 어린아이가 되셨다.
2. 그에게는 특유하게 비천한 면이 있었다.
(1) 그는 "사관(舍館)에서" 났다. 아버지의 집에서 영광을 누리던 다윗의 아들에게 그가 주장할 만한 유산이 없었다. 다윗 성에서도 없었고, 곤경에 처한 그의 모친을 데려다가 높히는 편의를 제공할 친구도 하나 없었다. 그리스도가 "사관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관(여인숙)에 들르는 것처럼 잠시 동안 체류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일이요, 또한 우리도 그렇게 살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여인숙은 오는 사람 모두를 받는다. 그리스도도 그러하시다. 그는 사랑의 깃발을 자기의 상징으로 내걸었고, 자기에게 오는 모든 사람을 결코 박대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돈 없이 값없이" 오는 자들을 환영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무료이다.
(2) 그는 "구유에서" 났다. "구유"로 번역된 원어는 가축이 들어가서 먹이를 먹는 장소를 가리킨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사관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시설이 필요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요람에 눕게 되는 대신에 "구유에" 눕게 된 것이다.
"강보"라고 번역된 원어는 "찢다"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그 말은 그리스도에게는 아기들이 입는 고운 의복 따위는 전혀 없었고, 단지 그의 강보는 넝마 조각이나 헤어진 옷 조각이었다는 말이다.
그가 구유에서 났다는 것은
[1] 그의 부모의 극빈성을 예시해 준다. 그들이 부자였더라면, 방을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난했기 때문에,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전진해야"했다.
[2] 그것은 또한 그 당시인들의 도덕이 부패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그렇게 덕과 영예로 존경받는 여인이 그토록 가혹한 처분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만일 상식적인 인간미라고 있었더라면, 여인을 구유로 보내는 고생은 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3] 그것은 우리 주 예수의 겸비를 나타낸다. 우리는 죄로 인하여 버림을 받고 절망에 처해 있으며, 고독에 빠져 있는 젖먹이 같이 되었다. 이제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꼴이 되었다. 이리하여 그는 모세, 곧 저 위대한 구약 성서의 예언자요, 율법수여자인 모세가 보여 준 모형을 이루려 하신 것이다. 모세는 젖먹이었을 때 갈대 상자 속에 버려졌었고, 이제 그리스도도 "구유에" 버려 것이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을 멸시하고자 했고, 우리들도 그것을 중시하지 않도록 가르치시고자 하셨다.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그들이 "우리도 영접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자.
목자와 천사의 방문 (누가복음 2:8-20)
그리스도의 겸비에 따른 가장 비천한 사정에는 모두 그의 영광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는 여건들이 동반되었고, 그 영광은 그 비천함을 상쇄하는 것이요, 그 굴욕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바로 그 4에도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를 굳게 하려 했고, 그가 장차 높이 들리우게 되리라는 전조를 보여 주셨다. 우리는 그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눕게" 된 것을 보면, "분명히 이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고 말하고픈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보는 대로, 그의 출생에는 천사의 합창이 동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러면 우리는 "분명히 그는 하나님의 아들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이 그에게 경배한다고 했다"(히 1:6).
마태복음에는 이 사실, 이 하늘의 임금의 도래가 이방인들인 현자들에게도 별을 통해서 알려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 사건이 천사 통해서 유대 목자들에게 알려진 사실을 보게 된다. 그들 각자에게 하나님은 그들이 제일 잘 아는 언어를 선택하여서 말씀해 주신 것이다.
Ⅰ. 어떻게 이 목자들이 개입되었는지를 보자. 그들은 베들레헴 근방에 있는 "들에서 유하면서,"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다(8절). 그 천사는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그들은 이 소식을 받을 준비를 못하고 있었다)에게로 가지 않고, 야곱과 같이 "장막에 거하는 평민들"이요, 에서와 같이 "교활한 사냥꾼들"인 초라한 목자들의 무리에게로 보내졌다. 적장들도 목자들이었다. 모세와 다윗은 특별한 의미에서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라는 소명을 받은 자들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도 저 순결한 직업을 가진 자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이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라는 소식이 모세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아마 지극히 경건했을 이 목자들에게 "큰 구원"의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이 소식이 전해지던 그 때에, 그들은 침실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비록 많은 사람들이 "잠자리에서" 하늘의 지식을 받기는 하지만). 그들은 "들에서 유하면서 지키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은 자들은 "자신들을 깨우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바짝 깨어 있었다. 그러므로 자기들이 보고 듣는 것을 잘 못 알아서 졸고 있는 자들처럼 기만을 당할 수는 없었다.
2. 이제 그들은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예배 행위가 아니라 자기들의 직업을 이행해 나가고 있는 중에 받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양떼를 지키면서," 도적이나 죽음의 밥이 되지 않도록 감시하면서 있었다. 아마 여름철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오늘날처럼 양떼들을 우리에 가두지 않고 밤새도록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정직한 직업에 열중하고 있는 그 직업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유한다만,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길은 결코 막히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Ⅱ. 그들은 천사의 출현에 놀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9절). "보라. 주의 천사가" 홀연히 "그들 위에 임했도다" 즉 evpe,sth - 그들 위에 섰도다. 아마 하늘로부터 직접 내려와서, 그들의 머리 위 공중에 나타났을 가능성이 지극히 크다.
(영어) 성경에는 "그 천사"라고 했으므로, 앞에서(1장) 나왔던 천사가 다시 한 번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즉 "가브리엘 천사"가 급속히 날아온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불확실하다. 천사가 "그들에게 임했다"(곁에 섰다-한글)는 것은, 그들이 그런 일을 거의 생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하늘로부터 은총이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보다 "앞선" 길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천사가 하늘에서 온 천사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그들 주위에 주의 영광이 둘러"있음을 보고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밤을 낮과 같이 밝게 하는 영광이요, 하나님의 현현에 동반되곤 하던 영광이요, "하늘의 영광" 즉 "지극히 큰 영광"이요,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밝은 영광이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크게 무서워하게"되었다. 마치 어떤 불길한 소식을 듣고 놀라듯이 겁에 질리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죄책 의식이 그 만큼 분명하면, 하늘로부터 오는 모든 징조는 진노의 사자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의당 느끼게 된다.
Ⅲ. 천사가 그 목자들에게 전해 준 전갈은 무엇이었는가?(10-12절).
1. 천사는 그들의 "두려움"을 "중지하라는 영장"을 가져왔다 - "두려워 말라. 너희들에게 겁을 줄 필요가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또한 너희의 친구들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2. 그는 그들에게 풍요한 기쁨의 제목을 주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하노라. 내가 엄숙히 선언하노라. 너희에게는 그것을 영접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느니라. 그 소식은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만 기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소식이란, 너희에게 오늘, 이 시간에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구원주, 그리스도 주이신 구주가 다윗 성에 나셨다는 것이니라"(11절). 예수는 그리스도, 곧 메시야(구세주)요, 기름부음 받은 자이다. 그는 "주"시다. 만민의 주이시다. 그는 절대 주권을 지니신 임금이시다. 아니 그는 하나님이시다. 구약 성서에서는 "주"가 "여호와"를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영어 성경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서 하나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주"라고 했으나, 우리 성경은 "여호와"로 나옴 -역주). 그는 구주이시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주로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구주가 되실 것이다.
"구주가 탄생하셨다. 그는 오늘 나셨다. 그리고 그것이 온 백성에 큰 기쁨의 제목이 되므로, 비밀로 간직할 것이 아니라, 이 소식을 선포해야 하며, 너희가 원하는 자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는 미리 예고된 곳, 곧 다윗 성에 나셨다. 그리고 그는 너희에게 나셨다. 너희 유대인에게 그가 먼저 보내지셨으니, 너희들, 곧 비록 세상에서는 천하고 가난하지만 너희 목자들을 축복하기 위해서 보내지셨다." 이것은 이사야서 9장 6절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주셨도다"고 했다. "너희 인간들에게이지, 우리 천사들에게 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천사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으셨다. 이 사실은 실로 모든 사람들에게 큰 기쁨의 제목이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분이 마침내 오신 것이다. 하늘과 땅이여, 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하라. 그가 오시기 때문이니라."
3. 천사는 이 사실을 그들이 믿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한 증거를 보여 주셨다. "우리가 어떻게 베들레헴에 있는 이 아기를 찾을 수 있나이까? 지금 베들레헴에는 다윗의 후손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너희는 이 표적을 보고 찾으라. 그는 구유에 누워 있느니라. 구유에는 분명코 다른 어떤 갓난아기도 눕혀 있지 않느니라."
그들은 아마 "너희는, 그가 비록 어린아기이지만 법의를 입고, 그 동네에서 제일 멋 있는 집에 위풍 당당히 누워 있으며, 부자들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아기를 보리라"는 말이 나올 줄로 기대했을 것이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너희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가 이 지상에 오셨을 때는, 그가 자신을 스스로 구별하셨다. 눈에 현저히 드러나게 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가 겸비함을 보여줌으로써였다.
Ⅳ. 천사는 이 엄숙한 시기를 맞이하여 하나님께 "찬송(doxology)"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축하"를 보냈다(13, 14절). 그 전갈이 한 천사의 입에 의해서 전해지자마자(이 소식이야말로 아주 급속히 전해졌다). 갑자기 "하늘의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했다. 분명히 그 목자들이 들은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합창" 소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노래는 "아무 사람도 배울 수 없는" 저 노래(계 14:3)와는 달랐을 것이다. 이 노래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하는 노래였기 때문이다.
1. 이 역사(役事)를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 "지극히 높은 데 계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나타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지극히 높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은 자기들이 비록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시지는 않았지만 - 그 사건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송축할 것이다(계 5:11, 12). 이러한 은혜를 정하신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 또 하나님의 한 속성이 다른 한 속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오히려 모든 속성의 영광이 실질적으로 더욱 확실히 되고 더욱 뛰어나게 되는 이러한 방식으로 이 사건을 만드신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하나님의 다른 여러 작품(솜씨)은 그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심은 "지극히 높은 그의 영광"을 위함이다.
2. 사람들이여, 그것을 기뻐하자. "땅 위에는 평화요, 사람들에게는 자비(good-will)로다"(한글과는 후반부가 다소 다름-역주).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가 이 낮은 세상에 평화를 도입했고, 그 사이에 평화로운 왕래를 개설하였다. 하나님께서 평화로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면, 모든 평화가 거기서 유래되어 나온다. 즉, 양심의 평화, 천사들과의 평화,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평화가 온다.
여기에서의 평화란 "모든 선"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으로부터 우리에게 넘쳐 나오는 모든 선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거나 희망하고 있는 모든 "선"은 하나님의 "선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자비의 위안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에 대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과 부조화되는 길에서는 어떤 "평화"도 "선"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악의 길에도, 또 중보자에 의하지 아니하는 모든 길에도 평화나 선은 없다.
여기에 보면, 지극히 엄숙하게 "선포된 평화"가 있다. 원하는 모든 자는 와서 그 평화를 향유하게 하라. 땅 위에 평화가 있는 것은 "선의(善意)의 사람"(어떤 사본은 그렇게 되었다)에게이다 ─ evn avnqrw,poij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께 대해 선의를" 가지고 있는 자요, 기꺼이 화해되고자 하는 자들에게 평화가 있다. 또는 하나님의 자비의 그릇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선의를 가지신 그들에게이다.
천사들이 사람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으며,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라. 그리스도는 비록 천사들의 성질을 벗어버리고 오셨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을 얼마나 기뻐하는가를 보라. 그렇다면, 우리들이야말로 이 사건으로 크게 감동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로다"하는 이것은 "신실한 말"이요,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가 실증한 바요, "모두가 받아들일 가치가 있는" 말이다.
Ⅴ. 목자들이 갓난 구주를 방문했다.
1. 그들은 의논을 했다(15절). 천사들이 찬송을 부르고 있는 동안은, 그들은 오직 거기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천사들은 나타나서 결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용무를 마치면 즉시 돌아간다), "목자들은 서로 '베들레헴으로 가자'고 이야기했다."
윗 세상에서 온 특별한 전갈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에는,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갈로 스스로 노력하여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지속하도록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관찰과 경험으로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그 전갈(메시지)을 확증한다는 것은, 결코 천사들의 증언이나 거룩한 증언 그 자체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목자들은 의심쩍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하자. 즉 "가서 정말인지 아닌지 알아봅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을 가지고 "가서 이루어진 이 일을 봅시다"라고 말했다. "주께서" 그렇게 "그것을 그들에게 알리셨거늘," 거기에 또 무슨 의심의 여지가 있겠는가? "천사들에 의해서 되어진 말은 견고하고" 틀림없는 진실이다.
2. 그들은 즉시 방문했다(16절). 지체없이 그 장소로 "빨리 갔다." 아마 천사가 성경에 기록된 것(사관의 구유로 가라는 따위) 이상으로 그들에게 자세히 일러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마리아와 요셉을," 그리고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그리스도 주"의 빈한하고 초라한 모습이 그들의 신앙에 자극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아주 가난하고 빈천한 처지에서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안락한 생활을 직접 체험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목자들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자기들이 보았던 천사들의 환상을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고, 자기들이 들은 천사들의 노래도 말해 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큰 용기를 주었던 것이었다. 그 동네에서 제일가는 귀부인이 찾아오는 것 이상의 격려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이 그 아이에 관해서 보았던 환상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경험을 서로 나눔으로써, 그들은 서로의 신앙을 더욱 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Ⅵ. 목자들은 이 보도를 퍼뜨리려고 애썼다(17절). "그들이 그것을 보고" 즉 "그리스도 주"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을 그 아기에게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지극히 만족했다. 그 아기의 사정이 비록 자기들처럼 초라했지만, 천사들이 자기들에게 일러 준 사실과 일치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마치 문둥이들이 주장했듯이(왕하 7:9 에 보면, "오늘은 좋은 소식의 날이로다. 우리가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되리라").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이야기의 전모를 "널리 알렸다." 즉 "천사"와 요셉과 마리아가 "이 아기에 관하여" 알려 준 것, 곧 그가 구주요, "그리스도 주"라는 사실, 그리고 그에게는 "땅의 평화"가 있고, 그는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되었던" 자요,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 등을 알렸다. 그들은 이 소식을 모든 자들에게 고했고, 그것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세상에 와" 있는 이 때에도, 세상이 비록 그를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충분한 통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는가? 진실로 왜 "사람들 모두가 목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이히 여겼는가?"말이다(18줄어들). 목자들은 솔직담백하고 "정직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감히 남을 속이리라는 의심을 받을 위인들이 못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은 믿을 만하며, 그들의 말이 참이라면, 메시야가 왕궁이 아니라, "말구유에"났다는 사실을 듣는 자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천사들이 그 소식을 그렇게 "초라한 목자들"에게 알려 주면서 대제사장에게는 알리지 않은 사실도 의아하게 여겼을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이상히 여겼다. 그러나 구주와 구주에 대한 자기들의 의무, 또는 그로 인해 얻을 자기들의 유익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않았다. 오히려 그 사건을 "9일간의 기사(奇事)"처럼 방울져 떨어지게 했다. 오. 그 세대들의 경이로운 어리석음이여 ! 그들이 그토록 고의적으로 "자기들의 눈을 담아버렸으니," 그때 그들의 평화에 속하는 일이 그들에 논에 숨겨졌다"는 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Ⅶ. 그들의 말을 믿고, 그것을 이용하고 그들의 인상을 받아들인 자들도 있다.
1. 동정녀 마리아는 그들의 말을 자기의 "개인적인 명상"의 제목으로 삼았다. 그녀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하고 생각했다"(19절). 그녀는 증거를 종합하고 소중히 생가하며, 그녀에게 앞으로 닥쳐올 새로운 사실들과 비교하려 했다. 그녀의 자기의 정절이 의심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의 정절을 밝혀 주기를 바라고 침묵하고 기다렸듯이, 이제는 자기의 영예로 드러났지만, 역시 하나님께서 영예를 공표하기를 맡기고 침묵을 지켰다. 자기가 해산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천사들만 알았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도 충분한 만족이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들은 간직할 값어치가 있고, 그것을 안전히 지키는 길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명상이란 기억을 돕는 최선의 도움이 된다.
2. 목자들은 그 사실들을 자기들의 보다 더 "공개적인 찬양"의 제목으로 삼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일에 감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그들 자신은 달랐다. 그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20절). 그들이 알려 준 보도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무관심했을지 모르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께 돌린 감사를 기쁘게 받으셨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하여,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그들이 본" 사실로 인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막 들었을 때 듣던 바대로 그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 ─ 비록 그는 극단의 겸비의 상태에 있었지만 ─를 본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이 후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그의 "구유"가 어떤 자들에게는 "어리석음"이요 "걸림돌"이나, 또 어떤 자들에게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감탄과 찬송을 보낸다.
성전에 현신(現身)한 그리스도 (누가복음 2:21-24)
우리 주 예수는 "여자에게서 낳으므로"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갈 4:4). 그는 아담의 딸의 아들이므로 "모세"의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 그는 자기의 목에 그 멍에를 메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무거운 멍에였고, "장차 올 선한 것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또한 율법의 제도는 사도 바울의 말대로 "약하고 천한 세상의 초등 학문"(갈 4:9)이지만, 그리스도는 거기에 복종하셨으니, 그것은 그가 더 좋은 은총을 가지고 그것을 취소시켜, 우리에게서 제거하려 함이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그가 저 "율법 아래 있게" 되시고 거기에 순복한 모습을 두 가지 볼 수 있다.
Ⅰ. 그는 율법이 지정한 날에 "할례를 받았다"(21절). 곧 "제 8일이 다 되었을 때", 곧 그가 난 지 7 밤이 지난 그날에 그들은 그에게 "할례를 행했다."
1. 그 의식은 "고통스런" 수술이었다("필경 당신의 피의<잔인한> 남편이니이다." 출 4:25). 그러나 그는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감수하셨을 것이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순복하사, 그의 초기의 복종, 곧 피 흘리기까지 견디는 복종을 보여 주신 것이다. 이 때 그는 방울방울 자기의 피를 흘렸다. 그러나 후에도 그는 그 피를 붉은 시냇물처럼 흘렸다.
2. 그 할례는 본래 "이방인"을 전제로 하고, 그를 하나님과의 계약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의식이었으나, 그는 항상 그의 "사랑 받는 아들"이었다. 아니 그것은 "죄인"을 상대로 하는 의식이지만 ─ 죄인의 그 의식으로 그의 더러움을 제거해야 된다 ─ 그에게는 잘라버려야 할 아무런 불순함이 조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복종했다. 아니 "그러므로" 그는 거기에 복종했다. 즉 "육체"의 모양뿐만 아니라 "죄 있는 육체"의 모양을 가지고자 하셨기 때문이다(롬 8:3).
3. 그렇게 하면 그는 스스로 "율법 전체에 빚진 자"가 되지만(갈 9:3), 그는 복종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복종했다. 그것은 그가 자신은 자유인으로 태어났지만 종의 형체를 지고 싶어서였다.
그리스도가 할례를 받은 이유는 이렇다.
(1) 자기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고, "육체로는 그리스도가" 그 민족의 "태생임"을 입증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을 친히 붙들어 주려" 함에서였다(히 2:16).
(2) 그가 친히 우리들의 죄의 담보물이 되어 우리의 안전을 지키는 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구드윈(Goodwin) 박사의 말에 의하면, 할례는 우리의 "끈"인데,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이 "율법에 빚진 자"임을 자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자기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말하자면 자기의 손을 할례에 대시고, "우리를 위한 죄(속죄제물)가 되셨다."
의식(儀式)의 율법이 제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이로써 그리스도는 소나 염소의 피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피를 바칠 수 있게 끔 한 것이다. 제물은 미리 할례를 받지 않고는 바쳐질 수 없는 법이다.
(3) 그는 교회의 어린 자손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정당화시킴과 동시에 존귀히 여기기 위해서였다. 이 규례는 계약의 인을 치는 제도요, 할례와 마찬가지요(롬 4:11), 오늘날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의해서 생기는 의에 인을 치는 제도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제 8일에 할례를 받음은 그가 30세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믿음 있는 자들의 자녀들의 세례를 그들이 성장하기까지 미루어 두게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믿음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식들을 유아기에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케 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의식의 변화가 실체를 바꾸지는 않는다.
관례에 따라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명명식이 있었다. 그는 "예수" 혹은 "요수아"로 호칭되었다. "그가 모태에 있기 전에"(1:31) "그 천사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그렇게 이름지어 준"것이다. 그리고 천사는 나중에, 상정된 아버지 요셉에게도 말해 주었었다(마 1:21).
[1] 그것은 요한이란 이름처럼(골 4:11)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흔한 이름"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도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 됨"을 취하시고자 하셨다.
[2] 그것은 구약 성서에서 그를 상징해 주는 위대한 두 인물의 이름이었다. 즉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와 같다. 그는 이스라엘의 사령관이었고, 가나안 정복자였다. 또한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이름이다. 그는 대제사장이므로 관을 쓰기에 적합했고 "자기의 보좌에 앉은 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던 것이다(슥 6:11, 13).
[3] 그 이름은 그의 과업에 대해 중대한 의미를 주었다. 예수는 "구원자"를 의미한다. 그는 그의 신성의 영광으로부터가 아니라 그의 은혜로운 작정으로부터 중보자가 되기로 지명된 자였다. 그는 "구원을 가져온다."
Ⅱ. 그는 정전에 "현신(現身)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결례의 날이 찼을 때"(22절), 율법을 염두에 두고, 또 율법이 지정한 시기에, 그가 난 지 40일이 되는 날에 있었다.
많은 사본들과 신빙성 있는 사본들은 auvth/j를 auvtw/n으로 읽어서, "그들의 결례 날" 곧 어머니와 아기의 결례 날로 읽는다. 왜냐하면 율법의 원리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주 예수는 씻어야 할 불순함이 없었지만, 할례를 받았듯이 결례식도 받았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위한 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의 할례"로 ─ 우리가 그와 연합하여 교제하는 밀을 빌어 또 "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골 2:11) 영적 할례로 ─ 우리가 "할례 받게" 되듯이, 역시 그리스도의 "정결함"을 통해서 우리도 우리가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들어온 더러움과 부패에서 "영적으로 정결함"을 받게 된다.
이제 율법에 따라서,
1. 아기 예수는 장자이므로 "주께 드려졌다"(현신되었다). 즉 성전의 한 뜰에서 바쳐졌다. 그 율법이 여기에 인용되어 있다. "첫 해에 난 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칭하여야 하리라"(23절). 멸망시키는 천사가 애굽의 첫 태생을 죽일 때, 이스라엘의 첫 태생들은 특별히 보호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도 첫 해에 난자이므로, 그는 아론의 집의 후손 이상으로 확실한 권한에 의해서 제사장이었다.
그리스도는 많은 형제들 중의 "장자"요, "주께 거룩한 자라고 칭함"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는 다른 장자들처럼, "주께 드려졌다." 비록 그는 이제 막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 왔지만, 제사장의 손으로 아버지에게 "드려졌다." 제사장이 그 아버지에게 소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제 그가 "주께 바쳐졌다"는 사실은 그가 자신을 중보자로서 주께 "드림"을 상징해 주는 것이다. 그때 그는 "주께로 이끌리고 나아가게" 된다(렘 30:21). 그러나 그는 율법에 따라 "대속을 보았다"(민 18:15). "처음 난 남자는 대속함을 받아야 하리니." 그 값은 "5 세겔"이었다(레 27:6; 민 18:16) 그러나 가난한 자의 경우에는 제사장이 값을 감해 주든가 안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여기에 속전(贖錢)에 대한 말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주께 드려졌다." 그것은 그가 "되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귀"는 평생토록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문설주"에 대고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처럼 거기서 섬기기 위해 성전에 남아 있지는 않았지만, 사무엘처럼 "그가 사는 날 동안" "주께 바쳐졌다". 또 "손으로 만들지 않은" 참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2. 그 어머니는 자기의 예물을 바쳤다(24절). 그녀가 장차 대(大) 제물이 될 자기의 아들을 주께 드렸으니, 다른 예물은 드리지 않아도 변명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지금은 효력이 없지만) "율법에 쓴 바대로", 그녀는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비둘기들"을 바쳐야 했다. 능력이 있었더라면, 그녀는 "번제물로 어린양을 드리고, "속제물로 비둘기"를 바쳐야 한다. 그러나 가난하다면, 그래서 어린양을 살 돈이 없다면, 그녀는 "번제와 속죄제"를 위해 각각 한 마리씩 "두 마리의 비둘기"를 드려야 한다(레 12:6, 8).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특별한 경우에 있어서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그에게 대해 죄를 졌을 경우에는 슬픔과 수치를 감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그 두 경우에 모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 우리에게 언제나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나 죄로 인한 슬픔, 그 두 가지의 근거가 결여되어 있은 적이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같이 죄 속에서 "잉태되고" "출생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의 사정은 우리들의 사정과 같지 않다. 그러나 그는 율법 아래 있게 되었으므로, 율법에 동의한 셈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그에게 모든 의를 이룸이 되었다." 죄의 고백에 연합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일이다. 그러므로 "누가 '내가 나의 마음을 깨끗케 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으리요?"
그리스도를 맞은 시므온과 안나 (누가복음 2:25-40)
그리스도가 자신을 낮춘 때에도, 그 겸비의 수치를 상쇄할 만한 영예를 여전히 받았다. "그의 태생의 비천함" 때문에 우리로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먼저번에는 "천사들"이 그에게 찬양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죄에서 출생한 다른 아기들처럼 성전에 바쳐진 것을 보고 우리로 불쾌히 여기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시므온과 안나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에게 찬양을 돌리고 있다. 성전에 있는 그리스도에게는 어떤 남다른 엄숙한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직 침묵을 지키고 다른 아이들과 숲에 그냥 있었던 것이다.
Ⅰ. 시므온은 그에게 아주 영예로운 증언을 보냈다. 그 증언은 그 아기에게는 명예가 되었고, 그 부모에게는 격려가 되었다. 그것은 또한 제사장들이 구주를 알게 되는 행복한 서두가 될 수 있는 말이었다. 만일 "파수꾼"들이 눈이 멀지만 않았더라면,
이제 살펴 볼 것이 있다.
1. 시므온 혹은 시몬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는 기록이 있다. 그는 당시 예루살렘에 거주했고, 그의 경건심과 하나님과의 교제 때문에 이름난 자였다. 유대 학자들과 오랫동안 교제해 오던 어떤 학자들은, 이 때에 예루살렘에는 유명한 시므온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가 헬렐의 아들이요, 유대인들이 "라반" ─ 학자들에게 붙여 주는 최고의 칭호 ─ 이란 호칭을 최초로 받게 된 자라고 한다(그리고 그 칭호는 7명에게만 주어졌다고 한다). 그는 자기 아버지를 계승하여, 아버지가 세운 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대(大) 산헤드린의 한회원이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말하기를, 그는 "예언자의" 영을 받은 자요, 더욱이 메시야의 현세적 왕국에 대해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품고 있던 견해와는 반대되는 증언을 했기 때문에 지위를 빼앗겼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전승을 실은 책 미슈냐에는 시므온에 대한 언급이 없음을 그들은 지적한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어리석은 행위를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거부하는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당시에 그의 아버지 힐렐이 생존해 있었고, 더구나 유대 역사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시므온 자신이 이 사건 훨씬 후대까지 살았다고 하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는, 여기에 나온 시므온이 나이 많았다는 말이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말, "주의 종을 이제 평안히 하소서"는 그가 "지금" 죽어도 좋다는 뜻을 시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빨리 죽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법이다. 사도 바울도 자기의 죽음이 "가까이"왔다고 말해 놓고도 여러 해를 더 살았다(행 20:25).
그 생각에 대한 또 하나의 이의는, 시므온의 아들은 바리새인인 가말리엘이고, 기독교의 적대자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서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앙심 깊은 자가 바리새인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하면,
(1)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자이다. 곧 인간에 대해서는 "의롭고" 하나님께 대해서는 "경건했던" 자이다. 이 둘은 항상 병행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상대방의 좋은 친구가 된다. 그러나 하나가 다른 하나의 결함을 보충해 줄 수는 없다.
(2)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 즉 메시야의 도래를 기다린 것인데, 오직 그분 안에서만 지금 학대받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은 위로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는 위로의 저작자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위로"의 대상이요 근원이다. 그가 오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린다. 그가 오리라는 것을 믿는 자들은 그의 도래를 끊임없이 "기다리고 소망하며," "인내하면서 희망한다." 나는 다소 "성급한" 기다림 때문에 그것이 오기 전에 말을 해버릴 뻔 했도다.
시므온은, 다니엘처럼. "책을 보고 깨달았다." 즉 그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그 어느 때보다 큰 대망 중에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오신 자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불신 유대인들은 "이제껏 나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보기를 희망하노라"라는 말을 맹세나 엄숙한 주장으로 사용한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기다려야 되는 것임을 기억하자, 또 기다릴 값어치가 있다는 것, 그리고 "기다린" 자들에게, 계속 기다리는 그 기다림에 큰 기쁨을 주리라는 것을 명심하자.
(3) "성령께"서 그에게 임했다. 성결의 영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언의 영으로서 임한 것이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그래서 그 자신이 위의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4) 성령은 그에게 은혜로운 약속을 주었다. 즉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를 목격하리라고 했다(26절). 그는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상징했던 "그 시기"를 알아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 가까이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신탁"(원문의 뜻은 그렇다)을 받았다. 즉 메시야, 곧 "주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신탁이다.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는 자들, 그리고 그들만이 "죽음을" 용감하게, 두려움이 없이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리스도가 성전에 바쳐져 있을 그 때에, 때맞추어 시므온이 들어왔다(27절). 바로 그때에, 요셉과 마리아가, 말하자면, 아기를 교회에 있는 장자의 명부에 등록시키려고 데리고 들어왔던 그때에, "성령의" 인도로 시므온이 성전으로 들어간 것이다. 시므온의 희망을 지원해 주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 그의 기쁨을 절정에 달하게 해줄 것이다. 그의 귀에 속삭임이 있었다. "이제 곧 성전으로 가라. 오랫동안 기다리던 자를 보게 되리라."
그리스도를 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의 성전으로 가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거기에 가면 "너희가 찾고 있는 주"께서 홀연히 다가와서 "너희를 만나"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는 거기서 "그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3. 그는 이 사실을 목격함으로써 충만한 기쁨을 가졌다. "시므온이 그 아기를 안았다"(28절). 즉 그는 최대의 애정을 가지고 아기를 "포용했고," 자기의 품에 안았으니, 최대로 자기의 심장 가까이로 끌어안았고, 이것이야말로 기쁨이 충만했던 일이다. 그는 "아기를 안고" 그 아기를 주께 드렸다고 어떤 자는 생각한다. 또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이었든가 부모를 대신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 옛 사본들은 시므온 자신이 한 제사장이었다고 말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준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을 우리가 산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에게 대해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를 사랑과 겸손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안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볼 자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약속" 것보다는 "실현된" 것이 더 위대하다. 그는 자기의 팔로 그리스도를 안았다.
4. 시므온은 이에 엄숙한 선언을 했다. "그는 하나님을 찬송했다." 그래서 "주여, 이제 주의 종을 편안히 놓아주옵소서"라고 했다(29-32절).
(1)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기쁨에 넘치는 전망을 했다. 그리고 생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하게 되었다(이것은 큰 수확이다). 아니, 생을 경건히 경멸할 수 있게 되었고, 죽음을 소망하게까지 되었다. "주여, 당신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나의 눈이 죽기 전에 보리라고 약속된 그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이다."
[1] 여기에 하나님은 "그의 말에 신실한" 분임에 대한 인정이 있다. 솔로몬도 고백했듯이(왕상 8:56), 하나님의 선한 약속은 한 조각도 실패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다 희망을 걸었던 사람치고 그 희망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2] 그 사실에 대한 감사가 있다. 그는 많은 예언자들과 왕들이 보기를 원했으나 보지 못한 그 구원을 자기의 팔에 안아 보게 된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했다."
[3] 신앙의 고백이 있다. 즉 자기의 품에 안긴 이 아기는 "구원자", 곧 "구원" 자체임을 고백했다. 그는 "당신(우리 성경에는 '주')의 구원", 당신이 지시하신 구원, 즉 깊은 계획으로 "당신이 예비하신 그" 구원이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오기"까지에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렸으나, 그것은 아직도 "예비"되는 중임을 고백했다.
[4]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작별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옵소서. 이제 나의 눈이 이 광경을 보는 축복을 받았사오니, 눈을 감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의 것을 더 이상이 보지 않게 하옵소서." 눈은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전 1:8). 그런데 지금이 그 만족을 찾은 때이다.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고, 그 눈으로 구원을 보는 자에게야 이 세상이란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 이제 나의 모든 친구, 친척들, 이 세상에서의 나의 모든 즐거움과 직업, 심지어는 성전까지라도 작별을 고하리라는 것이다.
[5] 그것은 죽음에 대한 환영이다. "이제 주의 종을 떠나게 하소서." 죽음이란 작별이란 것, 즉 영혼이 몸을 벗어나고, 이 감각의 세계를 떠나 여의 세례로 가는 작별이란 것을 명심하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해임을 명하기까지는 우리는 떠날 수 없다. 우리는 그의 "종"이므로, 우리가 우리의 시간을 다 채우기 전에는 그의 일을 그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모세에게는 가나안을 보리라는 약속이 있었고, 그것을 보게 되면 "죽으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 말씀을 변경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신 3:24, 25).
시므온에게는, 그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그 말이 겉으로 표현된 것을 넘어서서, 자기가 그리스도를 보게 되면 죽게 되리라고 암시적으로 해석했을 것이다. "주여, 이제 되었습니다. 나를(세상을) 떠나게 하소서"라고 그는 말했다.
여기서 살펴 볼 것이 있다.
첫째, 선한 사람에게 죽음이란 얼마나 "위안을 주는" 것인가.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자격을 그대로 가지고) 수고로운 곳을 떠나 쉬는 곳으로 떠난다. 그는 "평안히" 떠난다. 즉 하나님과의 평화(화목), 자신의 양심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떠난다. 또한 죽음과의 "평화" 속에서, 죽음과 잘 화목하고서, 그것을 잘 알고서 떠난다는 것이다. 그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떠났듯이(신 34:5),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떠난다. 하나님의 계율의 말씀은, "올라가라, 그리고 죽으라"는 것이었다(모세의 경우). 그런데 약속의 말씀은 "내가 다시 와서 너를 내게로 영접하리라"는 것이다.
둘째, 이러한 위안의 근거는 무엇인가? "나의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이니라." 이것은 야곱이 "이제 나를 죽게 하옵소서. 내가 주의 얼굴을 뵈었음이니이다"라고 말했듯이, 그 광경에 대한 큰 만족감, 그 이상의 것을 뜻해 준다.(시므온의) 말은 죽음 저편에 있는 행복상에 대해 믿음에 찬 대망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 구원을 통해서 그 광경을 보았던 것이며, 그것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죽음을 "유익하게" 만들었다(빌 1:21).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은 죽음도 기쁨으로 맞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2) 그는 교회와 세상에 대해 아름다운 전망을 했다. 이 구원은,
[1] 세상에 축복이 될 것이었다. 그 구원은 한 쪽 구석에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민의 얼굴 앞에 예비(준비)되어" 있는 것이요, 알려질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흑암에 앉아 있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될 구원이었다. 그리하여 그들도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그를 통하여 저 세상을 알게 된다. 이 본문은 "내가 너를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주리라"는 이사야 49장 6절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의 촛대의 초가 아니라 세상의 빛으로, "의의 태양"으로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2] 그것은 교회에도 축복이 된다.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라고 했다. 메시야가 자기들의 지파 중에서 연원되었고, 그들 중에서 났고, 살았다는 사실이 유대 민족의 영광이었다. 그는 참으로 영적으로 이스라엘인인 사람들의 "영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토록 그러할 것이다(사 60:19). 그들은 그분 안에서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주안에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이 의롭게 되고 영화롭게 되리라"(사 45:25).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심으로써, 그는 "이방인들을 비추는 빛"이 친히 되셨다. 그리고 그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신 그 때에, 그는 친히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 되셨다.
5. 그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찬양을 보냄으로써, 그 아기에 관한 예언을 했다. 그들은 이 아기에 관해서 그가 아주 자세하고도 명백한 말로 한 "모든 말들을 기이히 여겼다"(53절).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에게 들려진 그 말에 감동을 받았고, 그것으로써 자기들의 신앙을 더욱 돈독히 했으므로, 여기에 그들에 대한 말이 나온다.
(1) 시므온은 그들이 왜 즐거워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 주었다. "그는 그들을 축복했다"(34절)고 했으므로, 그는 이 아기와 관계를 맺는 영광을 누린 자들에게, 그리고 그를 양육할 책임을 받은 자들에게 축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해 줍시사"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들을 축복해 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이 아기가 자기들에게 위로와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 될 자이기 때문에, 기뻐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아기는 "이스라엘 중에서 다시 일어나는 많은 자들을 위해" 세움을 입었다. 즉 죄에서 죽어 매장되었던 많은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박해받고 슬픔과 절망 속에 빠져 있는 많은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왔다. 그는 또한 "다시 흥하는(일어나는)" 자들에게와 똑같이 "패하는" 많은 자들을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그는 eivj ptw/sin kai. avna,stasin ─ "그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그들의 패함이 되고자 하여" 세움을 입었다. 그들을 낮추고 비열하게 하고, 자신(自信)에서 이탈시키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굳게 되게 하고자 함이다. 따라서 그가 상처를 입히시고 다시 고치시며, 바울은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
(2) 시므온은 또한 그들이 왜 "두려워하면서 기뻐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메시야의 나라를 두고 옛부터 전해오던 충고에 따른 것이다(시 2:11). 요셉과 특히 마리아가, 이 풍성한 계시 때문에 "자고(自高)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그들을 위한 "육체의 가시," 그들의 기쁨에 대한 완화제가 있다.
[1]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에게 축복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넘어지는(패하는) 자들을 위해 세우심을 받았으므로," 이스라엘 중에는 넘어질 자들도 있다. 그들의 타락이 그를 자극시키고 괴롭히고 분노하게 되어, 그들의 죄와 패망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더욱 악화될 것이다. 길르앗의 향료로 자기들에게 유해한 독을 제조하고, 구원의 반석에다 자기들의 영혼을 메어치는 많은 자들에게는 이 진귀한 주춧돌이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이것은 저 예언을 가리키는 말이다(사 8:14, 15). 즉 "그는 어떤 사람에게는 피난처가 되나 어떤 자들에게는 덫이 된다"고 했다(벧전 2:7, 8).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자기들에게 생명에서 생명에 이르는 향기가 될 자들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즐겁듯이, 그와 그의 복음이 사망에서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자들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그는 "하나의 표적(a sign)"으로, 즉 어떤 자에게는 경탄의 대상으로, 또 어떤 많은 사람들에게는 비방의 대상으로 세워졌다. 그의 공적 사역 중에는 많은 "눈이 그를"보았고, 그는 표적이었다. 그러나 그를 "거스르는 혀"가 많이 있었다. 즉 죄인들의 박해와 비난이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트집잡히고, 욕을 먹었다. 그리고 이 결과로 많은 사람들의 속생각이 밝혀지고 만다(35절). 즉 이 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밝히 폭로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가까이함으로써 자기들의 은밀하고 착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없으면 전혀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리스도에게 적대심을 가지며, 그에게 분노함으로서 자기들의 은밀한 타락과 악한 마음씨를 드러내게 된다. 사람들은 그들의 속마음, 즉 그리스도에 대한 자기들의 생각에 의해서 판단을 받게 되리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그의 "대적자들"인가? 이것이 판단의 기준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를 분별하는 분별자요, 그것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알게 되고, 후에는 그것에 의해서 심판을 받게 된다.
[2] 그리스도가 그의 어머니에게 위안이 될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말지니, "그대의 심령을 칼이 찌르리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또한 수난 받는 예수이다. 그리고,
첫째, "너(마리아)는 그의 다른 어떤 친구들보다도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으리다. 그것은 네가 그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 관계가 가깝고, 강한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니라." 그가 학대를 받는 때가 그녀에게는 "골수에 칼"이 다니다. 그녀가 그의 십자가 곁에 서서 그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던 그 때에, 그녀의 내적 비탄은 너무나 커서, "칼이 내 마음을 찔렀도다"라고 진실로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너는 "그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리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을 마리아의 순교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어떤 옛 학자들은 그녀의 순교로써 이 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본다.
인간의 가장 큰 희열과 이 세상에서의 출세, 그 한가운데 인간을 속박하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좋을 것이다.
Ⅱ. "안나" 혹은 "안"이라고 하는 "여(女)예언자"가 그(예수)를 알아보았다. "남자"나 "여자"나 그를 믿기로 초대받은 자들은 그를 증거 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음 사실을 관찰해 보자.
1. 이 안나란 여인에 대해서 나온 본문의 기사를 보자.
(1) 그녀는 "여(女)예언자"였다. 이제 예언의 영이 소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3백년 이상이나 예언의 영이 끊어졌었다. 아마 이 구절은, 그녀가 다른 여인들보다 성경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젊은 여인들"에게 하나님께 속한 일을 가르치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는 것을 의미해 주는 말일 것이다. 교회가 아무리 타락한 시절이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증언이 없이" 세상을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2) 그녀는 "바누엘의 딸"이었다. 그로티우스(Grotius)의 말에 의하면,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은 야곱의 "바누엘" 혹은 "브누엘"(창 32:30)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즉 그 말의 신비가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보게 된 이때에도 우리의 목숨이 보존되었으니, 지금에서야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은혜로운"이란 뜻이다.
(3) 그녀는 "아셀 지파"의 출신이었다. 아셀 지파는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래서 어떤 자는 이 사실을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온 일이 없다"는 말에 대한 논박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갈릴리에서야말로 예언이 다시 소생되자마자 즉시 예언자가 난 셈이다.
(4) 그녀는 "나이가 많았다." 84년을 과부로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84년을 과부로 지낸 것을 보아, 그녀는 젖어도 100세가 넘었으리라고 본다. 그러나 다른 자들은, 여인이 안나 처럼 나이가 많으면 안나와 같은 금식기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의 나이는 실상 84세이고, 긴 기간을 과부로 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결혼한 지 7년만에 젊은 과부가 되었지만, 재혼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그냥 과부로 지냈다. 이 사실은 그녀를 칭찬하기 위해 언급된 것이다.
(5) 그녀는 항상 성전 "안에서", 적어도 "성전"에서 수종을 들며 살았다. "혹자는, 그녀가 기숙을 했다고 한다. 즉 성전 뜰의 구빈원에 살면서 성전의 자선으로 연명했거나, 여(女)예언자로서 거기에 거처를 정하고 살았다는 것이다. 그곳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는 자들과 상의하고 충고를 받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는 말은, 그녀가 예배 시간에만은 항상 성전에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떤 선한 사업을 할 필요가 생기면, 그는 언제나 그 일에 도움을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전의 외곽 건물 중의 어느 하나에 그녀의 방을 마련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그리고 공중 예배에 그녀는 빠짐 없이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경건 생활도 많이 가졌다. 왜냐하면, 그녀가 "주야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해야 할 세속의 일이 없었거나 다 마쳤으므로, 온전히 경건 생활에만 자신을 바쳤다. 그리고 "일 주일에 두 번씩"만이 아니라 항상 고행적인 생활을 살았고, 남들이 먹고 마시고 잠자는 데 보내는 시간을 그녀는 종교적 실행에 다 바쳤다. 또 그녀는 "기도의 시간"을 준수했을 뿐만 아니라, "주야로" 기도했다. 항상 기도하는 정신으로 살았고, 기도의 생활을 했으며, 자신을 기도에 바쳤고, 종종 절규했고, 대부분은 엄숙한 기도를 드렸으며, 중재 기도를 특히 열심히 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서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행동을 값있게 하고 훌륭하게 만드는 점이 바로 이 사실이다.
바리새인들은 "이따금씩 금식한다." 그리고 "긴 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섬기고, 금식과 기도로 자기들의 교만심과 탐욕을 섬긴다. 그러나 이 착은 여인은 착한 일을 했을 뿐만 아니라, 착한 정신에 입각해서 했고, 착한 목적을 두고 했다. 즉 그녀는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금식과 기도" 중에 하나님의 영광을 목표로 삼았다.
명심해 둘 것이 있다.
[1] 경건 생활이란 우리가 항상 해야 할 일이다. 다른 의무는 때를 따라 이따금씩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항상" 해야 한다.
[2] 경건한 행실에 전념하는 연로한 그리스도인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광경이다. 그들은 "선을 행하기에 싫증" 내지 않으며, 자기들이 그러한 행실 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것은 "다 마쳤다"고 생각지 않고, 갈수록 그런 일을 즐거워하며 그 필요성을 느끼고, 마침내 하늘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는 자들과 같다.
[3] 지금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빛과 방편을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이용하는 자들은 그것을 더 많이 받고 또 발견하게 된다. 안나 그녀는 성전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보상을 이제 마침내 풍성히 받은 셈이다.
2. 그녀는 우리 주 예수께 증언을 했다(38절). 아기가 바쳐져 있을 때에, "그녀는 마침 그 때에 나아왔다." 또 그때는 시므온이 아기에 대해 말을 하고 있는 때였다. "항상" 성전에 있던 그녀가 그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1) 그녀는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아마 시므온과 같이 이제 평안히 세상을 떠나기를 소원하면서, "주께 역시 감사를 드렸다." 그리스도가 "알려진 바 된" 자들은 그 큰 은혜로 인하여 "주께 감사를 드려야" 마땅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우리는 남이 찬송과 감사를 드리는 것을 보면 분발하여 우리도 그 의무를 행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이요, 우리도 "역시 감사를 드려야"하지 않겠는가?
안나는 시므온과 조화를 맞추었다. "그녀는 주께 고백했다"(이렇게 읽을 수도 있다). 즉 그녀는 이 아기에 대한 자기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2) 그녀는 여(女)예언자로서 남들에게도 그에 대해서 가르쳤다. 그녀는 메시야가 오리라는 것은 믿었고, 그와 더불어 "예루살렘의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자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했다. 구속(救贖)이란 필요하고, 기다리던 일이요, 바라던 일이다. "주의 말씀이 발해졌던" "예루살렘의" 구원을 기다렸다(사 2:3). 예루살렘에는 "구속을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소수였다. 왜냐하면 안나가 그들을 모두 알고 있었고, 그들은 분명 그녀와 합심하여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나는 그들이 어디에 가면 있는지를 알았고, 그들은 안나의 소재지를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사실, 곧 좋은 소식을 그들 모두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출생에 관한 이 소식과 나중에 있을 그의 부활에 관한 소식은 실로 위대한 새 소식이었다. 그리스도를 잘 알고 있는 자들은 "직접"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잘 알 수 있도록 자가들에게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끝으로, 여기에 우리 주 예수의 유아기와 어린 시절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1. 그는 "어디에서" 그 시절을 보냈는가?(39절) 아기를 바치는 의식과 그 어머니를 정결케 하는 의식이 모두 끝나자, 그들은 "갈릴리로 돌아갔다." 누가는 그들이 갈릴리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태복음에 의하면(2장),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돌아갔고, 거기서 동방의 현인들을 만났으며, 헤롯의 잔인한 영아 학살을 피하여 애굽으로 피신하라는 지시가 있기까지는 베들레헴에 머물었다. 그리고 헤롯이 죽자 애굽에서 돌아와, 나사렛 정든 마을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그들은 오랫동안 나사렛을 떠나 있었던 걸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나사렛을 "그들의 본(本)동네"라고 했다. 그들이 거기서 오래 살았고, 그들의 친척들도 거기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의 나라와 제사장직은 유대교회나 국가의 현 정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모욕을 받던 그런 고장으로 보내졌다. 다른 점에서도 그렇지만 이 점에 있어서, 그는 자신을 낮추셔야 했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명성도 지니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2. "어떻게" 그 시절을 보냈는가?(40절) 모든 면에서 "그는 자기 형제들과 동등함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그도 다른 아기들처럼 유아기와 소년기를 거쳤다. 그러나 죄는 짓지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하나님의 본심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그의 몸은 "자랐다." 그리고 그의 인격적 영혼 속에서는 이해력(총명)이 증가되어 갔다. 그러므로 그의 "자연적" 몸은 그의 "신비한" 몸 ─ 그것 완전한 영에 의해서 원기를 받으나 그 몸은 "완전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성장한다"(엡 4:13, 16) ─ 의 한 표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1) 다른 아이들은 이해력과 결단력이 약함에 반해서, 그는 "영(정신)에 있어서 강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의 인간적 영혼은 비상한 활력을 공급받았고, 그의 모든 신체 기능은 비상하게 그 직능을 다했다. 그는 강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판단은 사물을 투시하는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920 다른 아이들은 "그 마음에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지만 ─ 그것은 그들의 말과 행실에서 나타난다 ─ 그는 "지혜로 충만했다." 교육의 덕분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의 작용하심 덕분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의 언행 모두는 그의 나이 이상으로 슬기로왔다.
(3)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의 부패된 본성을 드러냈고, "죄의 가라지"가 "이성(理性)의 밀"과 더불어 자라났지만, 그는 그런 점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지 "그 위에는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그 밀은 가라지 없이 자라났다). 더구나 다른 아이들은 전래적으로 진노의 아들이지만, 그는 "지극히 사랑 받는" 자요, 하나님의 호의를 극진히 받는 자였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다.
소년 시절의 예수 (누가복음 2:41-52)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유아 시절에서부터 29세가 되어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드러내기까지, 그 어간에 관해 기록된 유일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야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해 봐야 헛일이기 때문이다.
Ⅰ.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41, 42절).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비록 긴 여행이고, 그들은 가난했으므로 크게 절약해 살지 않고는 거기까지 갈비용도 부담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들은 율법에 따라 규칙적으로 예루살렘 유월절에 참여했다. 공중 규례는 종종 있어야 하며, 우리는 "어떤 사람들처럼 모이기를 폐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세상적인 일은 영적 관심사에 양보해야 한다. 요셉과 마리아는 같은 집에서 아들과 같이 지냈다. 그래서 그들은 예루살렘의 모든 랍비들 이상으로 영적인 일을 잘 가르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로, "절기의 전례(前例)를 떠나서 올라갔다." "주는 야곱의 모든 거처들보다도 시온의 문들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그래야 한다.
아마 "오순절"과 "초막절"에도 역시 요셉과 마리아는 올라갔을 것이다. 모든 남자들은 "일년에 3번 성전에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마리아는 "유월절"에만 거기에 나타났는데, 그 절기는 3대 절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절기이며, 복음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절기이다.
2. 어린 예수가 "열 두 살 때"에 그들과 함께 올라갔다. 유대 학자들에 말에 의하면, 열두 살 된 어린이는 때때로 금식하는 것을 시작하여, 속죄일에 금식하는 훈련을 쌓아야 한다. 그리고 13세가 되면 어린이는 "계명의 아들"이 되기 시작한다. 즉 교회 어른들의 의무를 감당하게 된다. 그는 이미 유아기 때부터 할례에 의하여 "계약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예수가 절기 때에 예배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 없다. 아마 여러 해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그의 지혜와 정신이 그 나이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총명으로 들을 수 있는" 모든 자들은 공중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느 8:2). 다른 면에서 남보다 앞선 어린이는 신앙에서도 남보다 앞서야 한다.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이 공중 예배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리스도는 어린이들의 호산나 찬송을 기뻐하신 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영예에 속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린 유아 시절에 하나님께 봉헌된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되었을 때에는, "복음의 유월절'에, 곧 주의 만찬에 초대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자기들의 행동으로 스스로 주님과 연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Ⅱ. 그리스도는 "그의 부모들 뒤에 예루살렘에 머물렀다." 부모들은 그것을 몰랐다. 이것으로써 그리스도는 자기가 무엇을 위해 있는 지 그 초기의 전조를 보이려 하셨던 것이다.
1. 그의 부모들은 "그 날들을 마치기"까지는 돌아가지 않았다. 즉 유월절 기간 중의 첫 이틀이 지나면 ─ 그때 많은 자들이 빚으로 돌아간다 ─ 꼭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의무가 없었지만, 그들은 그 절기가 계속되는 7일 간을 줄곧 거기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한 자들처럼, 규례가 끝날 때까지 머물러 있는 것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도엑처럼 "주님 앞에 억류된" 사람같이 서둘러 가지 않는 것이 좋다(삼상 21:7 참조).
2. 그 어린이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머물렀다." 집에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다. 또 부모와 동행하기가 부끄러워서도 아니다. 거기에 볼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으며, 그는 "그들"에게 보다는 그 아버지의 말씀에 더욱 "복종"해야 된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다. 그러나 한편 "그분"에 대한 그의 관계가 "그분들"에 대한 그의 무관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이들은, 그가 성전에 남은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집으로 가는 날 아침에 먼저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경배하던 습관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뒤에 머물렀고," 그들이 다시 그를 찾기까지 거기서 재미있게 지냈다.
아니면 아마 그는 부모들의 하숙하던 집, 또는 어떤 자는 친구의 집에 머물렀다고 본다(예수와 같은 어린이는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귀염둥이일 수밖에 없고, 모든 사람이 그의 친구가 되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예배 시간이 되자 성전으로 갔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혼자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든 "주의 집에 거하기"를 즐거워하는 젊은이를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들은 이 때의 그리스도와 같은 자들이다.
3. 그의 부모는 어린 예수를 뒤에 두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하룻길의 여행"을 갔다. 그들은 "그가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44절). 이 때에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특히 첫 날의 여행길은 사람들로 붐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 그가 자기들의 이웃 사람들과 섞여서 오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내려가다가 길에서 "친족과 아는 자들 중에서 그를 찾았다." 당신은 혹 우리 아들을 못 보셨습니까? 당신은 그를 보았습니까? 마치 결혼한 자들의 질문같이, "그대는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자를 보았느뇨?"라고 물었다.
이 사람은 찾을 만한 가치가 있는 보석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의 동행이 되려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어린 예수는 "자기 친족과 아는 자들"중에서 자비를 베풀기를 좋아하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는 만나지 못했다"(45절).
우리에게는 우리가 피할 수 없이 교제해야 할 친족과 지인(知人)들이 많이 있고, 너무나도 많이 있지만, 그들 중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곤 거의 아무 것도 찾아 볼 없다.
그들은 시골로 내려가는 그 길에서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예수에 대한 것은 아무 것도 듣지 못하게 되자, 자기들이 지난밤에 유숙하던 그 곳에 가면 필경 그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거기서"도 그들은 그에 관한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 구절과 요한복음 23장 8, 9절을 비교해 보라.
4. 그들은 지난밤의 숙소에서 그를 찾지 못하자, 다음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그를 찾아 되돌아갔다."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자들은 "만날 때까지 찾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찾는 자에게는 그가 만나질 것이요, 풍부한 상급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던 위안을 잃어버린 자들, 그리고 그와의 관계성을 상실한 자들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자기를 되돌아보고, 자기들이 그것을 누렸던 그 마지막 지점까지 "되돌아가야" 한다. 즉 "그들이 언제 넘어졌고, 회개했느냐를 기억하고, 처음 일을 다시 하여",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계 2:4, 5).
그리스도와의 친근성을 잃었다가 다시 회복하고픈 자들은 예루살렘, 곧 "우리의 절기의 성읍," 그가 "자기 이름을 거기 두시기로 택하신" 그 곳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그의 규례, 그의 복음을 통해서 그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그를 만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5. 그들은 "제 3 일"에 "성전에서," 즉 성전에 속한 어떤 부속건물에서 그를 만났다. 그 곳은 율법 학자들이 ─ 법정이 아니라 ─ 회의 장소나 논쟁 교실로 삼던 곳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율법 학자들) 한가운데 앉아 있는" 예수를 보았다. 그 때 예수는 그들의 교훈을 듣고 시험을 받는 "학생"으로서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그에게서 상당한 지식과 지혜를 보았기 때문에, 자기들과 같은 부류로 치고 자기들 중에 앉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지혜로 충만했다"(40절)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그 지혜를 증가시키고 서로 그것을 주고받기를 바라는 자임을 보여 주는 실례이다. 이 점에서 그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의 한 모범이다. 젊은이는 자기들에게 맞는 자들의 동료가 되어 기쁨으로 그리스도를 배워야 하고, 놀고 잇는 자들이 아니라 학자들 "한가운데 앉기"를 선택해야 한다. 그들에게 "12세 때"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라고 지식을 추구하고, 자기들에게 교훈을 줄 만한 사람을 사귀게 하자. 젊은이가 교훈을 바란다면, 그것은 희망적이고 약속 있는 전조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와 같은 나이의 많은 어린이들이 "성전에서 다른 어린이들"과 함께 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의 학자들"고 더불어 앉아 있었다.
(1) 그는 그들의 말을 들었다.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은 "듣기"를 계속해야 한다.
(2) 그는 "그들에게 물었다." 선생으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는 배우는 자로서(그는 그렇게 물을 만큼 겸손했다). 혹은 진리를 추구하는 협동 구도자의 자세로 물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리는 서로 우호적인 질문을 통해서 탐구되어야 한다.
(3) 그는 그들에게 "대답"을 했다. 그의 대담은 매우 놀라웁고 만족한 것이었다(47절). 그리고 그의 질문에서 뿐만 아니라 그의 대답에서도 지혜와 "총명"이 드러났으므로, 그의 말을 듣는 모든 자들이 "기이히 여겼다." 그들은 그렇게 어린 사람, 아니 아무리 위대한 학자들에게서라도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과 같이, 그는 "그의 모든 선생보다 총명이 뛰어났다." 아니 "노인들보다도 승했다"(시 119:99, 100).
이제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의 빛줄기를 다소 보인 셈이다. 그는(칼빈의 말대로) "그들에게 맛을 주었다." 곧 그이 신성한 지혜와 지식을 맛보여 주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공공연히 선생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처음에 시도했던 그 시도와 같다. 스데반은 이 사건을 가리켜 해석하기를, "그는 자기 형제들이 이해하는 줄로 알았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의 손에 의해서 그들을 어떻게 구원할 것"을 아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행 7:24, 25).
그들은 그 당시에 어떤 암시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여기에서(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의 사업을 지금 곧 시작하도록 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그들은 "기이히 여겼을" 뿐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그러므로 모세와 같이 그는 다시금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물러났고, 그들은 여러 해가 지나기까지 그에 대해 더 들을 수 없게 된 것이다.
6. 그의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서 그와 조용히 이야기했다. 일단 그 무리들이 해산하자, 그녀는 그를 따로 불러서, 부드러운 애정을 가지고 그 일에 대해서 그에게 물었다(48절).
요셉과 마리아는 그를 거기서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크게 존경을 받아 "학자들 중에 끼어 앉을" 수 있는 허락을 받았고, 또 그들의 주목을 끌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가 명목뿐인 아버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러나
(1) 그의 어머니는 자기들이 고생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아들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대하느냐? 왜 네가 우리를 이렇게 놀라게 만드느냐?" 그들은 야곱이 요셉에게 하듯, "사나운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도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어떤 무서운 원수의 손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 무서운 원수가 헤롯이 몇 해 전에 찾던 그 어린 생명을 마침내 찾아낸 모양이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아마 그들은 수천 가지의 상상을 했을 것이고, 갈수록 무서운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얘야, 왜 너는 우리에게 이런 무서운 일을 겪게 하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근심하며 찾았는지 아느냐? 너를 잃어버린 줄 알고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너를 잘 살펴서 데리고 가지 못한 우리 자신들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아느냐?"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들의 손해를 원망할 자격이 있는 자임을 기억하자. 그러나 그들의 눈물은 "씨뿌림"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근심한 나머지 절망에 싸여 앉아 있지 않고, 근신하며 "찾았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우리는 "근심하면서," 즉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사실을 근심하며, 그를 떠나게 해 버린 우리의 죄를 근심하며, 또 더 빨리 찾으러 나서지 않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근심하며 찾아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를 근심하며 찾는 자들은 마침내 그를 만나서 보다 더 큰 즐거움을 맞게 되리라.
(2) 그는 그들이 자기에게 대해서 평상시 이상으로 조급하게 생각한 사실을 얌전하게 비난한다(49절).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여기서 용무를 마치면 당신들을 따라 집으로 갔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어야 하셨을 겁니다. 난 결코 예루살렘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내가 evn toi/j tsu/ patro,j me ─나의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것을 모르셨나이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도 해석한다. "영원토록 집에 머무는 아들, 내가 그밖에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이겠습니까?"
[1] "내 아버지의 염려와 보호 아래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내게 대한 염려는 그분께 맡기시고, 스스로들 괴로워 마옵소서."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화살통에 재빨리 숨었다(사 49:2). 이와 같이 그는 자기의 교회를 보살핀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안전에 대해서 절망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2] "내 아버지의 일에(영어 성경 KJV는 그렇게 읽었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의 일에 관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처럼 속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지 못했습니까? 아직도 내게 대하여 모르셨습니까? 즉 나는 이미 나를 신앙의 사업에 바쳤고, 따라서 신앙의 문제에 관한 일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집에서 그는 우리들에게 한 모범을 보이셨다.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들의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다른 모든 일은 거기에 우선권을 양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우리는 잘 이해하고 있다고 지금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의 언행으로 그것을 해명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이 세상에 온 것,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그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마치기 위함이다. 그러나 이 당시에 그이 부모들은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50절). 그들은 이 당시 그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성전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들은 그가 앞으로 메시야가 될 것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장차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왕궁에서 할 일이지 성전에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예언자적 직능을 "깨닫지 못했다" ─ 그러나 그에게는 예언자적 직능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나사렛으로 돌아갔다. 그의 영광의 이러한 섬광은 순간적이었다. 이제 그 빛은 사라졌다. 그는 부모들에게 예루살렘에 이사와서 살자거나 자기만이라도 거기에 정착하겠다고 간청하지 않았다(그 곳은 교육과 출세의 도성이었고, 자기의 지혜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고장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나사렛으로 잠적하여 빛 없이 살기를 좋아했다. 말하자면 여러 해 동안 그는 거기에서 묻혀 살았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는 1년에 3번씩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 예배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성전에 다시 들어가서 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가 그런 일을 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다.
1. 그는 "부모에게 복종했다." 비록 한 때는 자기가 "단순한 사람 이상"이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부모를 떠나서 하늘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고 있은 적이 있었지만, 아직은 그 일을 자기의 계속적인 업으로 삼지 않았고, 그 몇 해 후에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오직 "그들에게 복종하여," 그들의 명령을 지키고, 그들의 지시대로 오고 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아버지와 더불어 복수의 일에 종사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서 그는 주(主) 안에서 부모에게 의무를 다하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어린이들에게 본으로 보이셨다. 그는 "여자에게서 난 사람"인고로, 제 5 계명 아래서 났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신실한 자들의 "자손"들은 또한 스스로 신실한 자손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그의 아버지는 가난하고 비천했고, 또 그의 아버지는 "명목상"의 아버지(2:23 의 참조)였지만, 그는 "그들에게 복종했다." 그는 "심령이 강하고""지혜로 충만해" 있었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자기(육신)의 부모에게 순복했다. 그렇다면, 우매하며 연약하면서도 부모에게 불복종하는 "그들"은 어떻게 응답될 것인가?
2. 그의 어머니는 그 아들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훗날에는 그 모든 말씀이 그녀에게 이해되리라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때만 그 말씀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고, 그 말씀의 유용성도 알게 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남들의 말이 모호하다 하여서 그 말을 무시하기도 한다(Si non vis intelligi debes negligi─이해될 수 없는 것은 가치가 없다).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애매하여, 그 말씀을 응용할 줄 몰랐던 말이라도 나중에는 아주 명백히 이해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중을 위해서 "그 말씀을 간직해야" 한다(요 2:22 참조). 지금 당장은 우리가 그 쓸모를 모르던 말씀도 언젠가는 그 쓸모를 깨닫게 되리라.
"학생들"은 당장에 쓸모를 모르면서도 문법의 법칙들을 암기해 두는데, 그 이유는 나중에는 쓸모 있게 되리라는 이야기를 듣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그런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
3. 예수는 계속 발전하여 감탄할 만큼 되었다(52절). "그는 지혜와 키가 자라 나갔다"고 했다. 그의 신성(神性)의 완벽성에서 보면 더 이상의 성장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인성(人性), 즉 그의 "키"와 "체구" 등의 몸집이 성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성장하는 연령층을 맞이하여서는 성장했다. 또 한편 그의 영혼이 "지혜에서" 그리고 인간 영혼의 재능이란 면에서 자랐다.
영원한 말씀이 비록 그가 잉태되었을 때부터 그의 영혼에 연합되어 있었지만, 그분 안에 거한 신성은 점차적으로, ad modum recipientis ─ 그의 역량에 비례하여 그의 인성에 발현되었다. 그의 인간적 영혼의 기능은 점차적으로 완전해져 갔듯이, 그의 영혼이 인성으로부터 받은 은사는 점차적으로 잘 소통되어 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점점 더 "사랑스러워 갔다." 즉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도록 해 주는 모든 은총(장점)이 더해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는 자신을 자기의 겸비한 처지에 조화시킨 것이다. 즉 그는 하나의 유아로, 어린이로, 청년으로 되기까지 낮아지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은 그가 "유아"와 "어린 아이"였던 시절에서보다는 청년이 되기까지 자라났을 때에 그(예수) 안에서 더욱 밝게 빛나게 된 것이다.
젊은이는 키가 자람에 따라서 지혜도 자라야 하고, 지혜가 자람에 따라 또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귀여움을 받게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