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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글과 이야기 스크랩 동곡이 그리워지는 저녁/ 김경호
미사 추천 0 조회 16 12.04.04 02: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곡이 그리워지는 저녁/ 김경호

 

동곡이 어딘지 가 본 적 없지만

비 내리는 오늘도

매운 양파 같던 하루

마음에 들지 않는 문자는 날아들고

밤새 성가신 모기떼가 떠도는

막걸리집 앞마당

늙은 감나무 가지에도 비는 내려

방천시장 텅 빈 골목

주인 떠난 가게들의 추억들만

젖은 깃발 되어 걸리는데

이 집은 동곡면(面)보다 더

사람의 소리가 북적이고

 

파전 향기에 취해가는 사이

설익은 편육만 나오고

소식 없는 양념장 재촉하다가

양은주전자가 한없이 가벼워지는 저녁

언젠가 어린 시절 우리가 기웃거렸던

빈 의자만 놓인 극장의 벽화 앞

낡은 전당포를 낀 골목은

언짢은 표정으로 서 있고

술이 과한 친구는 자꾸

내 말문을 막는데

 

동곡이 어딘지

가 본 적 없는 우리

동곡막걸리에 취해

내리는 빗줄기 바라보며

중년의 여름날은 스러지고

문득 빈 옆자리에

잊었던 이들 불러 앉히고 싶은

아무도 올 리 없는 재래시장 한 모퉁이,

한 때 열광했던

가객(歌客)의 노래도 그치고

늙은 고양이들 어슬렁거리는

스레트 지붕 아래

더운 바람 한 줄기 몰려 와

오선지에 걸린

빛바랜 소망엽서를 읽고

오늘도 별이 뜨기를 기다리며

폐선처럼 녹슬어가는

여기는

어디에도 없을

동곡이 그리워지는 저녁

 

- 시집 『봄날』(도서출판 두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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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걸리 한 사발 걸친 뒤, 이를테면 김광석식 육자배기가 주절이 주절이다. 더구나 비오는 저녁답 방천시장 동곡집이 아닌가. 물맛 좋기로 소문난 청도 동곡면의 한 술도가에서 빚어지는 80여년 전통의 막걸리. 매년 삼짇날이면 운문사 처진 소나무에게 수십 말씩 공양해대는 동곡막걸리. 그리고 다 망해 찌그러져가는 재래시장. 그 바로 옆 자투리 골목길에다 비록 대구에서 태어나 4년밖에 살지 않고 상경했지만 가객 김광석의 혼을 다시 불러일으켜 세운 곳이었으니 '양은주전자가 한없이 가벼워지는'것은 지당하고도 합당한 일.

 

 '낡은 전당포를 낀 골목은 언짢은 표정으로 서 있고' 나는 그대를 생각하는데 하루에도 열댓 번은 생각하는데, 그대는 나를 생각하는지 알 수가 없고. '술이 과한 친구는 자꾸 내 말문을 막는데' 사람이 살면 얼마나 살거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토한다. '동곡막걸리에 취해 내리는 빗줄기 바라보며' '문득 빈 옆자리에 잊었던 이들 불러 앉히고 싶'지만 '아무도 올 리 없는 재래시장 한 모퉁이' 이름만 어울리지 않게 '문전성시(門前盛市)'인 낡은 시장 주막에서 '늙은 고양이들 어슬렁거리며' 스레트 지붕 밟고 지나가는 소리나 간간히 듣는다.

 

 김광석이 죽기 전까지 아무도 그의 고통을 몰랐듯이 우리의 슬픔이나 그리움은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고 그래서 속으로만 삭혀야 했다. 누군가는 이등병이 되었고 누군가는 서른을 맞이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나이 60에 딸을 시집보내며 눈물 흘렸을 것이나, 다만 우리는 매일 이별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뿐이다. 오늘 동곡이 그리워지는 칼칼한 저녁, 어딘가에선 뚝뚝 동백이 모가지를 꺾을 것이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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