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은 협동의 반대말이 아니다
이덕하
2008-03-06
진화론에 대한 증오.. 1
경쟁의 양상.. 2
자본주의와 경쟁.. 3
경쟁은 악이 아니다.. 4
한편으로는 진화론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가 있다. 기독교인과 이슬람교인은
진화론을 증오한다. 왜냐하면 진화론이 그들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진화론에 대한 은밀한 증오가 있다. 대부분의 진보주의자들이
진화론을 증오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들은 보통 과학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진화론에 대한
증오는 은밀할 수밖에 없다. 진화론은 매우 강력한 과학이기 때문에 진화론을 노골적으로 증오하다가는 과학을
증오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화론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대신 진화 심리학을 증오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에 대한 증오는 사실상 진화론에 대한 증오다.
진화론의 핵심에는 자연 선택이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 선택은 본질적으로 번식 경쟁이다. 즉 진화론의 핵심에는 경쟁이라는 개념이 있다. 여기에 진화론이 미움
받는 이유가 있다. 종교인도 진보주의자도 진화론이 경쟁이 판을 치는 세상을 정당화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경쟁이나 공격성이 아닌 이타성, 협동, 정의가 지배하는 사회가 바람직한데 말이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자들 중 일부는 진화론을 들먹이며 자본주의의 경쟁을
찬양한다. 하지만 이런 경향의 세력을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신자유주의의 진원지인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기도 하다. 미국 지배
계급은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에 시비를 걸 정도로 진화론을 증오한다. 그리고 대다수 미국 국민들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들은 지독히도 종교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화론을 들먹이며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방식이 인기가 있을 리 없다.
따라서 진화론이 자본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진보주의자들의 걱정은 상당 부분 현실성이 없다. 진보주의자들은 풍차라는 괴물과 싸우는 돈키호테처럼 있지도 않은 거대한 적(진화론을
이용한 자본주의 정당화)과 싸우고 있다.
경쟁은 협동의 반대말도 이타성의 반대말도 아니다. 경쟁은 경쟁일 뿐이다. 경쟁의 양상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는 늑대들을 보면 경쟁이 협동이나 이타성의
반대말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에는 이런 양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컷들이 서로 암컷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수컷들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전략을 쓸 수 있다. 몇 가지만 나열해 보자.
첫째, 다른 수컷을 공격하여 제압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수컷을 짝짓기 체제에서 제외시킬 수 있다. 으뜸 수컷(alpha male) 한 마리가 ‘하렘’의 암컷들을 모두 거느리는 바다 코끼리들은 주로 이런 전략을 쓴다.
둘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 많은
종에서 수컷이 암컷에 비해 훨씬 화려하다. 그 이유는 암컷이 화려한 수컷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경쟁의 한 양상이다. 조류의 경우 이런 전략을 많이 쓴다.
셋째, 자신의 이타성을
뽐낼 수 있다. 특히 공동 육아를 하는 종의 경우 얼마나 성실하고 착한지가 매우 중요하다. 이타성을 뽐내기 위해서는 이타성을
가장하는 방법도 있지만 실제로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서로 지능이 비슷한
개체끼리는 상대를 완벽하게 속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수컷은 암컷에게 선택되기 위해 더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이런 전략을 쓴다.
이타성과 반대되는 듯한 공격성 경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타성과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름다움 경쟁도 있다. 게다가 이타성 경쟁도 있다. 배우자나
친구로 선택되기 위해 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타성
경쟁의 존재는 이타성(또는 협동)과 경쟁이 반대말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자연 선택이 본질적으로 경쟁에 의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이타성과
협동이 진화할 수 있는 이유는 이타성 경쟁이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하면 보통 경쟁을 떠올리고, 공산주의 하면 보통 협동을 떠올린다. 공산주의에 비해 자본주의가 경쟁을 더 부추기는 사회라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이윤 경쟁을 부추길 뿐이다. 인간 사회에서 경쟁은 수많은 분야에서 수많은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이윤
경쟁은 그 중 일부일 뿐이다.
부르주아 혁명을 계기로 신분제가 사라졌다. 신분제가 있던 사회에서는
신분이 대대로 세습되었다. 따라서 신분을 둘러싼 경쟁이 제한되었다. 이런
면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경쟁을 부추기는 혁명이었다. 이전에는 단지 누구의 자식이라는 이유 만으로 선망
받는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 지위를 둘러싸고 경쟁이 일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은 어떤 면에서는 경쟁을 부추길 것이다. 왜냐하면 재산의
상속을 폐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단지 부자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자가 될 수
있었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부를 둘러싼 경쟁이 새로운 양상을 띨 것이다. 왜냐하면 누군가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음으로써 출발점에서 저 멀리 앞서갈 수 없기 때문이다.
왕정 시대에는 국가의 수반인 왕이라는 직책이 세습되었다. 부르주아
혁명을 계기로 여기에 경쟁이 도입되었다. 대통령을 투표로 뽑게 되면서 득표 경쟁을 하게 된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은 이런 측면에서 경쟁의 범위를 넓혔다.
자본주의에서는 군부와 기업의 장을 투표로 뽑지 않는다.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인 총과 돈에 대한 통제가 민주적 경쟁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반면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군대의
장성도 기업의 사장도 투표로 뽑을 것이다. 즉 여기에도 득표 경쟁이 도입될 것이다. 이런 면에서도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없는 경쟁이 생기는 것이다.
경쟁은 악이 아니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경쟁과 악을 동일시하는 듯하다. 하지만 경쟁은
한정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서로 애쓰는 것을 뜻하는 용어일 뿐이다.
진화의 메커니즘에는 공격성 경쟁도 있고, 아름다움 경쟁도 있고, 이타성 경쟁도 있다. 사람들은
보통 공격성 경쟁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타성
경쟁을 나쁘다고 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인간 사회에도 좋은 경쟁이 있고 나쁜 경쟁이 있다.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사장이 되기 위해 득표 경쟁을 벌이는 것은 왕권이나 사장 자리의 세습보다는 더 좋다. 이것은 좋은 경쟁이다. 반면 제국주의 국가들끼리 군사 경쟁을 벌이는
것은 나쁜 경쟁이다.
나치가 나쁜 이유는 좋은 경쟁은 없애려 하고, 나쁜 경쟁을 부추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치는 투표권을 없앰으로써 득표 경쟁을 없앤다. 나치는
사상의 자유를 없앰으로써 사상 경쟁을 없앤다. 반면 나치는 민족 간의 군사적 경쟁을 부추긴다.
진보주의자들은 어떻게 경쟁을 없앨 것인가에 골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어떤 경쟁을 없애고 어떤 경쟁을 만들어낼 것인가, 무엇이 공정한 경쟁이고 무엇이 부정한 경쟁인가를 따져야
한다.
첫댓글 좋은 지적이십니다. 이런 생각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