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이 좋아도 브엘세바로 올라가야 합니다
(창 26: 12-33)
세상의 사람이 되지 말라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브라함 때도 가나안 땅에 흉년이 들었었는데 또 이삭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삭은 흉년을 피해 블레셋 땅 그랄로 내려갑니다.
이삭이 그랄로 내려 간 것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으로서 애굽으로 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때 당시 애굽은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이었습니다.
학술과 과학은 이미 피라미드를 건축할 정도로 최첨단을 걸었고 문명은 웅장하고 화려하기
그지없을 정도였습니다.
이삭의 아버지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똑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창 12: 10- 11절을 보십시오.
왜 똑같은 상황임에도 아브라함에게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이삭에게는 애
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아브라함의 성품은 창조적 정신, 개척자 정신이 있습니다.
잠시 어려워 약속의 땅을 떠난다할지라도 또 애굽이 아무리 화려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약속의 땅에 돌아올지 알았습니다.
그와 반면에 이삭의 성품은 온화하고 유약합니다.
좋은 환경이 오면 거기에 순응해 버리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을 잘 아셨습니다.
애굽에 내려가면 다시는 올라오지 않을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대로 내려가서는 안 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입니까? 죄악의 세상을 상징합니다.
다시 죄악의 세상에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중간지대
하나님은 이삭에게 이 땅에 머무르라. 그랄에 머무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을 주리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랄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아닐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약속의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땅이기에 이 땅에 머무르라고 합니다.
그랄이라는 땅은 신앙의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과 신앙과 중간지대입니다.
신앙의 중간지대에 머물렀던 이삭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대로 놀라운 축복을 하십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보면 농사를 지었는데 백배나 수확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창대케 하고 왕성케 하여 거부가 됩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룹니다.
수많은 종들을 거느리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할 정도로 축복을 받습니다.
신앙의 중간지대에 있다할지라도 얼마든지 물질의 축복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축복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물질의 축복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세상의 축복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16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랄 골짜기로 들어갑니다.
그랄 골짜기에 들어가서 우물을 파자 물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랄의 목자들이 쫓아와서 자기들의 소유라고 주장을 함으로 이삭의 목자들하고 싸
움이 납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에섹이라고 부릅니다. 다툼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또 그랄의 목자들과 자신의 목자들과 물 때문에 또 싸웁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싯나라고 부릅니다. 적대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과 얼마나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이 또 다른 우물을 팠는데 이상하게도 그랄의 목자들이 싸움을 걸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합니다.
르호봇은 어떤 곳입니까?
르호봇은 넓다는 뜻입니다. 넓은 곳입니다.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넓은 곳인데 우물이 있는 곳이란 금상첨화입니다.
불레셋과 싸움이 끝난 곳입니다.
더 이상이 싸움이 없어졌습니다.
이제는 안정된 곳입니다.
물질적으로 부요한 곳입니다.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라
오늘 본문 23절을 보면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렇게 좋은 르호봇을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기 좋은 곳을 이삭은 떠납니다. “이제는 살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물도 있고, 농사도 잘 되고, 양과 소와 하인들도 매우 많고 더 이상 블레셋 사람들이 괴
롭히지 않고 이제 주어진 축복을 누리고 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삭은 이 모든 행복의 조건들을 다 버리고 왜 르호봇을 떠날까요?
그곳은 그가 있어야 할 땅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편해도, 아무리 좋아도 참 신앙인이 머물러서는 안 되는 장소이기에 약속의 땅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참 신앙을 위해서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껏 예배하며 살기 위해서 떠난 것입니다.
이삭은 엉거주춤한 그랄의 생활을 청산하고 본격적인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브엘세바로 갔
습니다.
브엘세바는 창세기 22장 19절에 나타나는 장소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 자신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 데리고 갔던 장소가 브엘세바입니다.
브엘세바는 이런 깊은 영적인 의미가 새겨져 있는 장소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엉거주춤한 상태로 믿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서 적당히 예수 믿는 것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일주일 내내 성경 한번 들춰보지 않다가 주일이면 그 성경을 꺼내 들고 교회 오는 신앙생
활에 일대 변혁과 혁신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이삭은 기근 때문에 브엘세바를 떠나서 그랄에 기거했다가 이제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다시 간다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삶이 불편해질 수도 있고, 다시 흉년으로 고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편안한 삶보다는 고달프고 힘들다 할지라도 신앙의 삶을 살기로 결단을 내
리고 르호봇을 떠나 브엘세바로 올라갑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원하십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잘 살 수는 있어도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
으며, 인생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참 행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르호봇이 아무리 살기 좋아도 약속의 땅 브엘세바로 가십시오.
살기 좋은 로호봇을 떠나면 망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브엘세바의 삶을 결단할 때 반드시
더 큰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오늘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말합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올라감으로 어떤 은혜들을 받습니까?
24절을 보면,
이삭이 그랄에서 브엘세바에 올라갔던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렇습니다.
‘적당히 신앙생활 하던 내가 마음을 정리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하나
님만을 섬기겠습니다’라고 결정하는 날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랄에서 야속하셨던 축복을 또 다시 확인해 줍니다.
24절입니다.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첫 일성이 두려워말라고 하십니다.
이삭도 사람인지라 우물도 땅도 다 포기하고 브엘세바로 왔기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 이삭의 마음을 잘 아시고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내가 다시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너와 함께 할 것이고, 복을 줄 것이고, 네 자손을 번성케 할 것이라고 약속을 하십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순간 이삭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두려운 마음들이 다 사라지
고 믿음과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 있는 두려움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 안에 있는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저는 여러분 안에 어떤 형태의 두려움이든 그것이 돈이나 죽음,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이
지든 간에 이 시간에 그 두려움이 떠나가기를 바랍니다.
그랄에서도 하나님이 이삭에게 나타나시어 축복을 약속하셨지만 그러나 그랄에서는 하나님
께 경배했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볼까요? 2절부터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똑같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그런데도 6절에 보면 이삭이 그냥 그랄에 거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브엘세바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께 단을 쌓습니다. 감격의 단을 쌓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
도 우물을 팠더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랄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도 그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브엘세바에서는 그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나를 떠나시지 않는 하나님!
내가 두려울 때 나를 찾아와 주셔서 나와 함께 했던 그 하나님!
그렇기에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가 없고,
그분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단을 쌓았습니다.
이게 바로 그랄에 머물 때와 브엘세바에 머물 때가 다른 것입니다.
이삭이 브엘세바로 돌아오자 또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생기는데, 26, 27절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이삭이 그랄을 포기하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온 그 때, 놀랍게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을 대동하고 그를 방문한 것입니다.
이삭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삭을 쫓아냈던 아비멜렉이 찾아온 것은 놀랄만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방문의 목적을 묻는 이삭에게 아비멜렉은 이런 답변을 합니다.
28, 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
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여러분,
아비멜렉 왕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삭을 잘못 다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공격을 하지 않는 동맹조약을 맺자고 합니다.
정말 뜻 깊은 장면입니다.
그렇게 이삭을 괴롭혔던 자들이 이제 우리를 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삭이 싸워서 얻은 명예가 아니라 져주고, 포기하고, 당했는데 하나님이 이삭의 손을 들
어서 승리를 안겨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누구의 손을 들어주십니까?
힘들고 어렵지만 신앙의 삶을 결단하고 신앙의 길을 선택한 사람의 손을 들어주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교회는 왔는데 마음까지 오지 않았고 몸만
와 있다는 것입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끝나면 어디 갈 것인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서 단지 시간을 때우듯이 예
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지 않으면 곧 교통사고라도 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이 있으니까 마치 예배드
리는 것을 부적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면 환자를 심방하러 가십시오.
아파서 교회 못 오는 사람들과 외롭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예수의 이름으로 찾아가서 격려
해 주는 것은 예배의 연장이며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즐겁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각하
며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삭은 동맹 제의를 받고 그 동안 가졌던 한과 상처와 섭섭함을 털고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잔치를 베풀어주고 다음 날 아침에 그들을 평안히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기뻐하셨겠습니까?
하나님은 원수에 대해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마음의 소원을 속히 이뤄주실 것입니다.
용서가 없으면 소원성취도 없고 용서가 있으면 소원 성취도 있습니다.
더 나아가 철천지원수까지 용서하면 큰 소원도 성취됩니다.
그렇게 아비멜렉 일행을 용서하고 평안히 보낸 그날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갑자기 종이 와서 말합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그들을 용서하고 잔치까지 베풀어 주고 평안히 보낸 그날입니다.
이삭의 종들이 와서 고합니다.
주인님! 드디어 우물이 터졌습니다!
얼마나 생생한 은혜 체험입니까?
그렇게 힘들게 우물을 파면서 물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물이 나오지 않다가 그 날에 물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이런 생생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합니까?
바로 원수 같은 사람일지라도 용서하고 받아들일 때 이런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이삭은 그 체험을 오래 간직하고자 그 우물 이름을 ‘세바’라고 붙입니다.
그 이름이 나중에 브엘세바로 변합니다(33절). 브엘세바란 ‘맹세의 우물’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용서하고, 미운 사람과 화해를 다짐할 때, 반드시 축복의 우물을 터뜨려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어정쩡한 그랄에 머물지 말고 신앙의 땅 브엘세바로 올라가십시오.
거기에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랄 땅이 아무리 편하고 좋아도 거기에서 벗어나 브엘세바로 올라가십시오.
거기에는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한 놀라운 은혜들이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서운 것이 있다면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십시오.
그리하면 삶속에서 생생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할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저와 여러분 삶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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