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8 충북단양-강원원주 답사자료 2019.09.25.
단양-원주 답사
* 일 시 : 2019.09.25.(넷째 수요일) 06:30 ~ 19:30
* 일 정 : (현지 사정에 의하여 일부 변경 될 수 있습니다)
<< 마산박물관 - 충북단양 적성/적성비 – 강원원주 용소막성당 -
- 점심 (장독대 항아리 보쌈 식당) -
– 박경리문학공원 - 강원 감영지 – 치악산 구룡사 - 마산박물관 >>
사적 제439호 강원 감영지
* 해설 : 고 명 천(회장) * 인솔 : 김 인 국(이사)
마산문화유산답사회
2019-8 강원원주 답사 여정
* 마산박물관 000분(06;30) 0.0 km 06;30 ⇒
* 단양휴게소 149분(09;20) 236.5 km
단양신라적성(사적제265호)/적성비(국보제198호) 60분 / 10;20 ⇒
* 원주용소막성당33분(11;00) 46.9 km 30분 / 11;30 ⇒
= 항아리보쌈식당25분(12;00) 18.2 km 40분 / 12;40 ⇒
* 박경리문학공원 5분(12:45) 18.2 km 40분 / 13;25 ⇒
* 강원감영지 11분(13;40) 3.7 km 30분 / 14;10 ⇒
* 구룡사 34분(14;50) 20.7 km 50분 / 15;40 ⇒
* 마산박물관 220분(19;20) 317.4 km <<19;20~19;30귀가>>
2019-8 단양-원주 답사자료 마산문화유산답사회
== 원주/단양 현황 ==
= 원주 ; 원주시는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도의 백두대간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 자리잡아 남한강과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 여주시, 남한강과 운계천을 경계로 충청북도 충주시 등 2개의 다른 도와 접하고 있는 위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행정구역 ; 1읍 8면 16동 * 인구 ; 347,506명(2019.08.31.)
= 단양 ; 단양군은 충청북도의 동북단에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경상북도 영주시, 북쪽으로는 강원도 영월군, 남쪽으로는 경상북도 문경시, 서쪽으로는 제천시와 각각 경계하고 있는 3도 접경의 도 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 행정구역 ; 2읍, 6면, 151리 * 인구 ; 30,003명(2019.07.31.)
*** 단양 적성[丹陽 赤城]
* 사적 제265호(1979.07.26.)
* 단양의 성재산(323.7m) 정상부에 쌓은 삼국시대의 퇴뫼식 석축산성이다.
* 이칭 ; 성산성(城山城), 고성(古城), 민보성(民堡城), 농성(農城)
* 소재지;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리 산 3-1
* 크기 ; 성 주위 923m * 규모 ; 8만 8648㎡
= 신라 진흥왕 때(545∼551) 축성되었다. 할석(割石) 및 자연석으로 축조되었는데, 성의 기반을 토석(土石)으로 다지고 그 위에 외벽은 자연석으로 고루 쌓았다. 남서쪽 끝의 산봉을 기점으로 하여 북동쪽으로 닫는 산등성의 외측(外側)을 돌아 축성되었고, 이 능선의 남쪽 저지(低地)는 밭으로 되어 좋은 곳은 북동쪽 끝으로, 상후(上厚) 0.6m, 내고(內高) 1.8∼3.3m, 외고(外高) 2.0∼4.3m의 성벽이 남아 있다. 성문의 유지(遺址)는 남서쪽 끝과 남쪽에서 당고개로 이어지는 능선쪽, 그리고 남동쪽의 3곳에서 확인되었다. 신라가 한강을 건너기 직전의 전진기지(前進基地)로서 전략적 ·정치적으로 중요한 성이었다. (두산백과)
그러나 1978년에 발견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 국보 제198호)에는 이 산성을 적성(赤城)이라고 하였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여 이 산성이 법흥왕·진흥왕 때 신라가 죽령(竹嶺)을 넘어 한강의 상류 지역으로 진출하고 북쪽으로 세력을 팽창시키는 요충지로 이용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성 안에서는 신라 토기와 기와 조각이 주로 확인되었지만 통일신라시대 토기 조각과 고려시대의 토기·청자 조각도 출토되어 고려시대까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소재지 ; 충청북도 단양군 단양읍 하방3길 100(하방리)
* 건립시기 ; 신라시대 545(진흥왕 6)∼550년(진흥왕 11)
* 높이 ; 93cm, 윗너비 107㎝, 아랫너비 53㎝.
= 신개척지 유공자의 공훈을 새기고, 충성하는 자에게 포상을 약속한 내용의 비
1978년 1월 단국대학교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다.
= 현재 비의 윗부분이 절단, 파손되었으나 좌·우 양쪽 측면은 거의 완형이고, 특히 비 표면은 양쪽이 완전해 22행의 비문이 분명하다.
각 행의 명문은 20자씩으로 짐작되어 19행까지는 20자씩 모두 380자이고, 20행과 21행은 19자씩으로 38자이며, 끝 행은 12자로 전체 명문은 도합 430자로추산된다.
큼직한 덩어리로 떨어져나간 것 같이 보이는 부분은 돌 색깔이 검게 죽어 있고, 바위이끼의 흔적까지 있어 파손된 시기는 상당히 오래 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06호(1986년 05월 23일)
* 강원도 원주시 신림면 용암리 719-2에 있는 소규모 벽돌구조 성당.
= 천주교원주교구장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풍수원성당(豊水院聖堂)과 원주성당에 이어 세번째로 설립되었다. 1898년(광무 2) 풍수원성당의 전교회장(傳敎會長)으로 있던 최석완(崔碩完)이 원주본당 소속 공소로 모임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인 E.A.J.드브레 신부가 같은 원주교구 소속인 풍수원성당의 정규하(鄭圭夏) 신부와 본당 분할 문제를 협의하였다. 협의한 끝에 1904년 용소막성당을 새로 설립하였다.
= 설립 당시 원주·평창(平昌)·영월(寧越)·제천(堤川)·단양(丹陽) 등 5개 군에 17개의 공소를 관할하고 있었다.
고딕미술의 양식을 변형시킨 소규모 벽돌구조 성당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두산백과)
= 처음에 성당건물은 초가집이었는데 시잘레신부에 의해 벽돌건물로 지어지게 되었다. 한국전쟁 때 일부 파손된 것을 후에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앞면 중앙에 종탑이 튀어나와 있고 건물은 네모난 모양이며, 붉은 벽돌로 쌓았다. 건물을 받쳐주는 버팀벽은 회색벽돌을 사용하였다. 창의 모양은 모두 아치형이며, 테두리를 회색벽돌로 장식하였고, 내부 바닥은 널판지마루이며 벽은 회를 발라 마무리 하였다.
= 원주 용소막성당은 이 시대 성당건축양식의 일반적인 형태와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지붕 꼭대기의 뾰족한 탑이 매우 높은 것이 특징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朴景利 [1926·10.28~2008.5.5.] 소설가 ==
본명 ; 박금이.
1926년 10월 28일 경상남도 충무시(지금의 통영)에서 출생했다.
1945년진주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김행도 씨와 결혼해서 이듬해 딸 김영주를 낳았다. 1950년수도여자사범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후 황해도 연안여자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6.25 전쟁통에 남편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되었다가 죽고, 연이어 세 살 난 아들을 잃게 된다. 이후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한국현대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대하소설 「토지」연재를 시작하여, 1994년 8월 집필 26년 만에 「토지」전체를 탈고하였다.
1980년 지금의 박경리문학공원 자리인 원주시 단구동 742번지에 정착하여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1992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에서 소설창작론을 강의하였고, 1995년 같은 대학교 객원교수로 임용되었다. 1996년토지문화재단을 창립하고, 이어서 1999년토지문화관을 개관하여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토지문화관은 문학인들에게 창작공간을 제공하고, 다양한 학술 문화 행사를 기획, 개최해 왔다.
2008년 5월 5일 폐암으로 타계하여 고향인 통영시에 안장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박경리 문학공원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1620-5
= 원주는 1980년부터 박경리가 정착하여 《토지》 4, 5부를 집필한 박경리의 삶과 문학 혼이 깃든 고향이다.
박경리문학공원은 2008년 8월 15일부터 토지문학공원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토지》 속의 주요 배경을 테마 공원으로 조성해 작가의 문학 세계를 탐방할 수 있도록 꾸며놓았다. 공원 내에는 단구동 옛집과 작가가 직접 가꾸었던 텃밭이 있으며 전시관으로 이용되는 2층 건물의 관리사무소 앞에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 들녘을 연상할 수 있는 평사리 마당을 조성하였고, 옛집 위쪽으로는 홍이동산, 그 아래로 멀리 간도 용정의 벌판을 연상하게 하는 용두레벌을 조성하여 답사객들이 작품과 작가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 토지문화관 ==
1999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에 개관하였다. 삶과 환경의 바탕이 되는 문화와 사상의 새로운 이념정립을 통해 우리 삶의 질을 고양하고 한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설립되었으며 전도유망한 학자, 예술가의 창작과 저술을 위하여 창작실(귀례관)을 마련하여 지속적으로 후원하고 있다. 토지문화관 바로 옆에 있는 사택은 소설가 박경리가 1998년부터 2008년 5월 타계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2층집이 있어 작가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면도 함께 볼 수 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 1. 15.)
*** 원주 강원감영지[原州江原監營址]
* 사적 제439호 (2002년 3월 9일)
* 조선시대 강원도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관청이 있던 자리.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일산동 54-1
* 크기 ; 면적 9,608㎡
= 강원감영지(江原監營址)는 전체면적이 9,608.6㎡로, 당시의 건물인 선화당(宣化堂)·포정루(布政樓)·청운당 등이 원래 위치에 남아 있다. 또 중삼문지, 내삼문지, 담장지 등 관련유구가 보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강원감영 이전의 원주목 관아 건물지 등이 하층에 그대로 잘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관아 건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과 측면 4칸의 단층이며, 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李後山, 1597~1675)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 역사 = 강원감영은 강원도 내 26개 부·목·군·현을 관할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다. 1395년(태조 4)에 설치되어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감영이 폐지될 때까지 500년 동안 강원도의 정청(政廳) 업무를 수행한 곳이다. 태조 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영동의 강릉도(江陵道)와 영서의 교주도(交州道)가 강원도로 합쳐지면서 원주에 감영을 설치하게 되었다. 강원감영이 원주에 설치된 이유는 각 도의 감영은 도내(道內)의 계수관(界首官)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하되 한양(漢陽)으로부터 도계(到界) 지점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한다는 지리적 여건에 따라서이다. 그리고 이 지역이 강원도 계수관 가운데 가장 큰 지역이며, 지리적으로 한성부에서 가장 가까운 도계 지점이고, 도내를 순력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김진순(金鎭順), 코리아루트 2009. 11. 12.)
= 강원감영 청사로 사용된 선화당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단층이며 팔작지붕이다. 선화당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원주목사 이후산이 1667년(현종 8)에 완공하였다고 전해진다. 내부는 네 방향에 내진주(內陳柱)를 세워 모두 툇간으로 달았으며,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 선화당의 정문인 포정루는 2층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초익공집으로 팔작지붕에 겹처마이다. 1667년 선화당이 건립될 때 같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6·25전쟁으로 파손되어 다시 보수하였다. 문루(門樓)는 직사각형 초석(礎石) 위에 민흘림기둥이고 2층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돌렸으며 궁창부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 선화당 옆에는 온돌방과 창고가 함께 있는 민도리 계통의 ‘ㄱ’자형 목조 기와집인 청운당이 있는데 후대에 옮겨지어진 건물이다. (두산백과)
*** 치악산 구룡사(龜龍寺)
*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1029
* 건립시기 ; 668년
=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68년(문무왕 8) 의상(義湘)이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들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조선에서는 1706년(숙종 32) 중수되었다. 근래에서는 1966년 종영(宗泳)이 보광루를 해체 복원하였으며, 1968년에는 심검당과 요사를, 1971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보수 단청하였다.
이 절의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보광루(普光樓)·삼성각(三聖閣)·심검당(尋劍堂)·설선당(說禪堂)·적묵당(寂默堂)·천왕문(天王門)·종루(鍾樓)·일주문(一柱門)·국사단(局司壇) 등이 있다.
= 현재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黃膓禁標)가 있는데, 이것은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무단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표지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 구룡사 보광루(龜龍寺 普光樓)
*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45호( )
* 소재지 ;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구룡사로 500(학곡리)
* 면적 ; 약 98.5㎡
= 구룡사의 누문(樓門) 역할을 하는 건물로, 사천왕문 뒤쪽의 높은 축대에 자리하고 있다. 누하(樓下)인 1층의 계단을 오르면,바로 사역(寺域)의 중심인 대웅전 앞마당에 이른다.
= 이 건물에는 중도리 안쪽에만 우물천장이 설치되었는데, 여느 사찰의 누강당(樓講堂)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또한 맞배지붕에서 충량을 사용하는 등 화려하게 장식된 익공은 조선 말기인 19세기 말 사찰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건물.
=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화재로 소실되어 2004년 1월 17일 유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60.5㎝, 가로 221cm.
*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0㎝, 가로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