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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지역 국가유산 답사
▶ 출발 일시 : 2024년 11월 5일(화)~6일(수), (1박 4식)
▶ 출발 장소 : 압구정역 공동주차장(현대백화점 압구정점)
시간 | 행선지 | 비고 |
11월 5일(화) 1일 차 일정 | ||
07:30 | 인원 점검 및 압구정역 출발 | 압구정역 |
08:00~08:05 | 2차 탑승 | 죽전 간이 버스정류장 |
11:00~12:30 | 영월 장릉 | 이동 및 관람 |
12:30~13:30 | 점심 식사(영월 문화식당) | 이동 및 점심(생선구이) |
13:30~14:30 | 청령포~자규루와 관풍헌~보덕사 | 이동 및 관람 |
14:30~15:30 | 태백시 황지 | 이동 및 관람 |
15:30~17:00 | 삼척 공양왕릉~죽서루 | 이동 및 관람 |
17:00~17:30 | 정동진 | 이동 및 관람 |
19:30~21:00 | 강릉 도착, 저녁 식사(강릉 소반 식당) | 이동 및 저녁(한식) |
21:30 | 강릉 선교장(숙박) | 간단한 뒤풀이 및 취침 |
11월 6일(수) 2일 차 일정 | ||
07:00 | 선교장 관람 | 관람 |
08:00~09:00 | 아침 식사(원조 민속 순두부) | 이동 및 아침(초당두부) |
09:00~10:10 | 경포대 일대 | 이동 및 관람 |
10:10~11:00 |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 이동 및 관람 |
11:00~12:30 | 오죽헌 | 이동 및 관람 |
12:30~14:00 | 점심 식사(주문진 소불고기 또는 생선구이) | 이동 및 점심(한식) |
14:00~14:40 | 양양 하조대 | 이동 및 관람 |
14:40~16:30 | 양양 낙산사~의상대 | 이동 및 관람 |
16:30~ | 양양 낙산사 출발 | 이동 |
20:30 | 서울 도착 |
11월 5일(화) 1일 차 일정 |
◇ 영월 장릉(莊陵) :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90-1 (사적 제196호)
- 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능.
장릉(莊陵)은 조선 제6대 단종(端宗)의 능으로 1698(숙종 13)에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여 종묘에 부묘(附廟)하고, 왕으로 봉(封)함에 따라 장릉이 되었다.
1456년(세조 2)에 성삼문 등 사육신이 도모한 상왕 복위계획이 탄로되고, 이듬해 1457년 9월에 경상도 순흥에서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단종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단종은 영월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이 당시 단종의 시신을 강물에 띄웠으나, 후환이 두려워 이를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관곽을 갖추어 이곳에 장사지낸 뒤에 이를 숨겨 왔다.
단종의 묘소는 오랫동안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중종 이후 조정에서 조심스럽게 단종에 대한 제사와 묘소의 영조(營造)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1541년(중종 36)에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으며, 선조 때에 이르러 김성일(金誠一)ㆍ정철(鄭澈) 등의 장계로 영역(瑩域)을 수축하고,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우게 되었다.
장릉의 상설(象設)은 추봉된 정릉(貞陵 :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 등의 예에 따라 난간과 무인석을 세우지 않고, 양식은 왕명으로 가장 간단하며 작은 후릉(厚陵 : 정종의 능)의 양식을 따랐다.
따라서 장릉의 석물(石物)은 숙종과 정조 연간에 만들어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능 석물의 선구를 이루며, 명릉(明陵 : 숙종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長明燈)은 장릉에서 그 첫선을 보였다.
특히 장릉은 능 제도에 의해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배식단사(配食壇祠)를 설치하였다. 단종을 위하여 순절한 충신 32인의 위패를 모신 충신 위, 사적이 상세하지 않은 12인을 포함하여 단종에게 충성을 다한 198인을 모신 조사위, 환관·군노 28인을 모신 부관위, 궁녀·관비 등 6인의 여인을 모신 여인위 등 260위를 배설하고 있으며, 각 위에는 각각 그 관명과 시호가 기록되어 있다.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이한 단종과 관련된 시설들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경내에는 정자각, 단종비각, 배식단사, 재실, 영천, 홍삼문, 구도 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숲으로 멋진 경관을 이루고 있다. 매년 한식일에 한식 제를 올리고, 1967년부터 단종제(端宗祭)를 거행하고 있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장릉 [莊陵]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영월 청령포(淸泠浦) :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 67-1(국가명승지 제50호)
- * <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
-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유배되었던 곳.
영월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육륙봉(六六峰)의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어서 마치 한반도처럼 생긴 지형이다. 1457년(세조 3)에 조선 제6대 단종(재위 1452∼1455)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었던 곳이다.
청령포 남쪽은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고, 동ㆍ북ㆍ서쪽은 남한강 상류의 지류인 서강(西江)이 곡류하고 있어 배로 강을 건너지 않으면 밖으로 나갈 수 없는 특수지형으로, 현재도 도선(導船)을 이용해야만 찾을 수 있다.
이곳은 1457년에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단종이 유배되었다가 그해 여름 홍수로 서강이 범람하자 단종의 처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觀風軒)으로 옮길 때까지 머물렀다.
이곳에는 단종이 유배 당시 세운 것으로 알려진 금표비(禁標碑)와 그 뒤 영조 때 세운 단묘유적비(端廟遺蹟碑), 2000년 4월 단종문화제 때 적소(謫所)로 건립한 단종 어가(端宗御家)가 있으며, 단종이 서낭당을 만들 듯이 쌓은 돌탑 등이 있다.
청령포 수림지로 불리는 소나무숲은 울창하고, 관음송(천연기념물 제349호)이 있다. 서강의 물이 맑아 예로부터 ‘영월 8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이다.
< 청령포에 있는 단종 관련 유적지 >
▶ 단종 어가(端宗御家) : 이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를 2000년에 재연했으며, 밀랍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는 유지 비각이 있다.
▶ 단묘 유지비(端廟遺址碑) :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 금표비(禁標碑) : 이 비석은 강봉된 노산군이 이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300척을, 남북으로는 490척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이른바 행동반경을 제한하는 금지령 팻말이다.
▶ 망향탑(望鄕塔) :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이 탑은 단종 대왕이 유배 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 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정순왕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 관음송(觀音松)(천연기념물 제349호) : 청령포 수림지에 있는 유달리 눈에 뜨이게 우뚝 서 있는 소나무이다. 유배 때의 단종 한이 서려 있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단종 유지 비각(遺址碑閣) 서편에 서 있다.
▶ 청령포 수림지 :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청령포에 있는 이 수림지는 수십 년~수백 년생의 거목들이 들어찬 숲으로, 단종의 유배 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 육육봉(六六峰) : 청령포 바로 뒷산으로 일명 도산(刀山)이라고도 한다. 청령포에서 솟아오른 암벽으로 된 이 산은 6개의 작은 봉을 이루고 있어서 ‘육육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청령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대한민국 구석구석, 2013. 6, 한국관광공사)
◇ 자규루(子規樓) 및 관풍헌(觀風軒) :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984-3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26호)
- 조선시대 영월군 관아의 누각과 동헌(東軒) 건물
자규(子規)는 피를 토하면서 구슬피 운다고 하는 소쩍새를 가리키는 말이다. 자규루(子規樓)는 단종(1452∼1455)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유배되어 이곳에 잠시 지낼 때 이 누각에 자주 올라가 자규시(子規詩)를 지었다고 전한다.
자규루는 원래 1428년(세종 10)에 영월군수 신권근(申權近)이 창건하여 매죽루(梅竹樓)라고 부르던 건물이다.
단종이 영월군 남면(南面) 광천리(廣川里) 국지산(菊芝山) 밑에 있는 청령포로 유배된 그해 여름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자 이곳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다. 단종은 이 관풍헌에서 지내면서 동쪽에 있는 매죽루에 자주 올라 자규시(子規詩)를 읊어 본인의 심정을 토로하였으므로 후인들이 자규루(子規樓)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그 뒤 이 누각은 크게 퇴락하였으므로 1791년(정조 15) 관찰사 윤사국(尹師國)에게 명하여 중수하게 한 뒤, 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누기(樓記)를 윤사국이 쓰고, 채제공(蔡濟恭)이 지은 상량문을 이동욱(李東郁)이 썼다.
이곳의 누기와 상량문의 탑본(搨本)을 모아 꾸민 『자규루첩(子規樓帖)』 책자가 전해지고 있다.
여기서 단종의 자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규시(子規詩: 소쩍새 시) - 단종(端宗)
一自寃禽出帝宮 (일자원금출제궁) : 한 마리 원통한 새 궁중을 나와
孤身隻影碧山中 (고신척영벽산중) : 외로운 몸 외짝 그림자 푸른 산중을 헤맨다
假眠夜夜眠無假 (가면야야면무가) : 밤마다 잠을 청하나 잠은 이룰 수 없고
窮恨年年恨不窮 (궁한년년한불궁) : 해마다 한을 다하고자 하나 한은 끝이 없네.
聲斷曉岑殘月白 (성단효잠잔월백) : 자규 소리도 끊긴 새벽 멧부리 달빛만 희고
血流春谷落花紅 (혈류춘곡낙화홍) : 피 뿌린 듯 봄 골짜기 떨어진 꽃이 붉구나.
天聾尙未聞哀訴 (천롱상미문애소) : 하늘은 귀머거리라 슬픈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何乃愁人耳獨聽 (하내수인이독청) : 어찌해서 수심 많은 내 귀만 홀로 듣는가.
자규루에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관풍헌(觀風軒)이 있다.
관풍헌은 태조 1년(1392)에 건립된 조선시대에 영월군수가 업무를 처리하던 관아의 동헌(東軒) 건물이다.
1457년 9월에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노산군의 숙부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세조는 다시 노산군을 서인(庶人)으로 강봉했다가 단종 복위운동을 구실로 금부도사 왕방연(王邦衍)에게 사약을 들고 가게 하였다. 이에 단종은 이 해 10월 24일, 17세의 일기로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관풍헌은 조계종 보덕사에서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은 팔작 맞배붙임집인 정사(正舍)와 정사 좌우의 익사(翼舍) 1동씩으로 모두 3동이 세워져 있다.
관풍헌은 한 단의 장대석으로 된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기둥 위의 공포(栱包)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처리하고, 전면 3칸에는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았다.
관풍헌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과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고, 관풍헌의 정문을 백운루(白雲樓) 또는 관풍루(觀風樓)라고 부른다.
* [자료] : [네이버 지식백과] 자규루 및 관풍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보덕사(報德寺) : 영월군 영월읍 보덕사길 34 (영흥리) (문화재자료 제23호)
통일신라 시대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보덕사(報德寺)는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義湘)이 창건한 사찰로 지덕사(旨德寺), 노릉사(魯陵寺)라고도 불리며,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이 사찰은 668년(문무왕 8)에 의상이 창건하여 지덕사(旨德寺)라 하였다. 고려 1161년(의종 15)에 운허(雲虛)가 중창하였고, 그 뒤 원경국사(元敬國師)가 극락보전(極樂寶殿) · 염불당(念佛堂) · 고법당(古法堂) · 침운루(沈雲樓) 등을 중건하였다.
조선 초 1457년(세조 3)에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 영월로 유배되자 사찰명을 노릉사(魯陵寺)로 개칭하였으며, 1705년(숙종 31)에는 한의(漢誼)와 천밀(天密)이 대금당(大金堂)을 건립하였다.
그 뒤 이 절은 장릉(莊陵)의 원찰(願刹)로 지정되면서 보덕사라고 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퇴락한 대현전(大賢殿) · 목우실(牧牛室) · 산신각 · 심검당(尋劍堂) · 칠성각 · 사성각(四聖閣) · 객방(客房) 등이 있다.
이 중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극락보전은 고려 의종 때 운허와 원경국사가 증축하였다고 전하지만, 현존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양식의 팔작지붕으로 조선 후기 양식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6·25전쟁 이전까지 사전(寺田)이 1,000석에 이르고, 승려가 100명 이상 있었으므로 월정사의 말사 중 가장 큰 사찰이었다.
보덕사는 전일의 영월군수가 업무를 보던 관풍헌 건물을 포교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 태백시 황지(黃池) : 태백시 황지동
- 남한에서 제일 긴 강인 낙동강의 발원지
약 5억 년 전 고생대에 얕은 바다였던 태백은 물의 도시로도 통한다.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와 낙동강의 발원지인 황지(黃池)연못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못은 옛날에는 하늘 못이란 뜻으로 ‘천황(天潢)’이라 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황지(黃池)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한, 황지는 ‘황(黃)’씨 성을 가진 황부자의 옛 집터로 돈에 인색하기 짝이 없던 황부자가 시주해달라는 노승에게 시주 대신 두엄을 퍼 주자, 하늘의 노여움을 받아 뇌성벽력이 일던 날 집터가 꺼지면서 큰 연못이 되었고, 이 연못이 ‘황지(潢池)’로 불리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은 태백시 도심 중심에 자리했다. 예전에 황지는 마을 전체가 큰 연못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황지연못은 어느 집 정원의 작은 연못처럼 둘레가 100m 남짓한 규모다
황지는 황 부자 집터가 변한 상지, 방앗간 터가 변한 중지, 통시터(화장실의 방언)가 변한 하지로 되어 있다. 물의 온도는 13° 내외, 하루 약 5,000t의 물이 나와 태백시의 상수도 취수원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낙동강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태백의 황지연못은 『동국여지승람』이나 『대동지지』 등의 옛 문헌에서도 보듯이, 낙동강의 시작을 알리는 최초의 연못이라 할 수 있다. 이 못에서 솟아나는 물이 드넓은 영남 평야를 유유히 흘러간다.
황지연못의 둘레가 100m로 상지와 중지, 하지로 구분되며, 태백시의 중심에 위치해 비교적 접근성은 좋은 편이며, ‘한국 명소 100선’ 중의 한 곳으로 지정된 바 있다.
한때 태백시 지역의 상수원으로 이용되었던 황지연못은 물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 연못의 수온이 연중 섭씨 9~11도를 유지하고, 큰 홍수나 가뭄이 닥쳐도 수량이 넘치거나 줄어드는 예가 없다
연못 한가운데 짙푸른 물빛에 신비로운 정기가 담겨 있는데, 이 물이 태백시의 구문소를 통과하고, 경상도 땅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 굽이굽이 1,300리 길을 쉼 없이 달리는 셈이다.
◇ 삼척 공양왕릉 :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178(강원도기념물 제71호)
- 폐위된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능(두 개의 공양왕릉 중의 하나)
이곳에는 모두 4기의 무덤이 있다. 가장 남쪽에 있는 묘소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릉이고, 2기는 공양왕의 장남 정성군 왕석(定城君 王奭)과 차남인 정양군 왕우(定陽君 王瑀)의 무덤이며, 나머지 1기는 왕의 시녀 또는 왕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 전한다.
공양왕릉의 규모는 지름 13m 정도이며, 능 앞에는 길이 107cm, 너비 63cm의 상석 1개가 있다.
삼척시에 공양왕릉이 있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1392년에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면서 폐위되어 원주로 방치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추방되면서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다. 1394년에 공양왕은 큰아들 정성군 왕석(定城君 王奭)과 동생인 정양군 왕우(定陽君 王瑀)와 함께 삼척부(三陟府)로 간 뒤 4월 17일에 교살되어 이곳에 묻혔다는 것이다.
1662(현종 3)에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와 1855년(철종 6) 김구혁(金九赫)이 쓴 《척주선생안(陟州先生案)》에는 이곳의 무덤을 공양왕릉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삼척시 궁촌(宮村)에서는 3년마다 어룡제(漁龍祭)를 지내는데, 그에 앞서 반드시 공양왕릉 앞에서 먼저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남아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도 공양왕릉(사적 제191호)이 있다. 이처럼 두 곳에 공양왕릉이 있는 이유는 공양왕의 재위 시기(1389∼1392년)가 조선 건국과 맞물려 있어 문헌이 빈약하므로 정확한 고증이 어려운 까닭이다.
삼척시 죽서루
◇ 죽서루(竹西樓) : 삼척시 성내동 9-3 (국보 제213호 / 명승 제28호)
- 관동팔경의 하나로 오십천의 강을 끼고 있는 누각.
죽서루는 삼척시의 서편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이 내려다보이는 절벽에 있으며, 예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다른 관동팔경의 누(樓), 정(亭)이 바다를 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죽서루만 유일하게 강을 끼고 있다.
관동팔경의 하나인 죽서루는 2023년에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되었고, '삼척 죽서루와 오십천'은 명승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누각은 1266년(고려 원종 7)에 이승휴(李承休)가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지은 기록이 있으므로 보아 1266년 이전에 건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 초 1403년(태종 3)에 삼척부사(府使) 김효손(金孝孫)이 옛터에 의거하여 죽서루를 중창(重創)하고, 그 후에도 보수와 증축이 되었다.
삼척시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을 내려다보며 벼랑 위에 서 있는 죽서루는 자연 암반을 초석 삼아 높고 낮게 기둥을 세워서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라 여겨질 만큼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다.
죽서루는 송강 정철(鄭澈), 미수 허목(許穆) 등 고려와 조선 통틀어 이름난 문인이나 정치인들이 여기에 들러 글솜씨를 과시하고 갔다. 미수 허목은 삼척 부사 재임 시절 ‘第一溪亭’(제일계정) 현판과 중수기(重修記)를 남겼다. 그 외에 당성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를 비롯하여, 여러 현판과 일중 김충현이 쓴 율곡 이이(李珥)의 "죽서루 차운"(竹西樓次韻), 조선 정조가 직접 지은 시판 등 26개의 현판이 죽서루에 걸려 있다.
전면에서 보이는 〈죽서루〉와 〈관동제일루〉라는 현판은 1715년(숙종 41)의 삼척 부사 이성조의 글씨이고,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라고 적혀있는 현판은 1837년(헌종 3)의 삼척 부사 이규헌의 글씨이다.
죽서루는 원래 정면이 5칸이었던 것을 후일에 좌우 양단에 1칸씩을 늘려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 되었다. 그래서 늘린 부분만은 공포(拱包)의 형식을 달리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부의 천장을 보면 애초의 건물의 측면 외부에 나와 있던 도리의 뺄 목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 누각이 전에는 맞배지붕 건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죽서루란 이름은 누각의 동쪽에 대나무숲이 있었고, 그 죽림(대나무숲) 안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죽서루로 명명되었다.
관동8경 : ❶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❷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❸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❹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❺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❻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❼울진의 망양정(望洋亭), ❽ 평해의 월송정(越松亭) |
◇ 강릉 선교장(船橋莊) : 강릉시 운정동 431번지(중요민속자료 제5호)
- 조선후기에 지은 사대부가의 상류주택
강릉 선교장은 총 건평 1,051.24m²(318평), 99칸의 사대부가의 상류 주택이다.
1703년(숙종 29) 효령대군의 11대손인 가선대부 이내번(李乃蕃)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10대에 이르도록 증축되었고,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선교장의 안에는 열화당(悅話堂) · 안채 · 동별당(東別堂) · 활래정(活來亭) 등의 건물과 여러 채가 있다. 가장 오래된 안채 주옥(住屋)은 당초에 주거를 정한 때의 건물이라고 전하나 확실하지 않다.
전체적으로 이 집은 낮은 산기슭을 배경으로 독립된 건물들을 적당히 배치하고 각 건물의 구조도 소박하게 처리함으로써, 집 밖의 활래정과 함께 자유스럽고 너그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전날에 박정희 · 김대중 · 노무현 대통령이 선교장을 방문한 적이 있다.
예전엔 경포호수를 가로질러 배로 다리를 만들어 건너다녔다 하여 ‘선교장(船橋莊)이라 불렸다.
선교장의 명당을 발견한 유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효령대군의 11세손인 가선대부 이내번(1692~1781)은 충주에서 살다가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안동 권씨)와 함께 외가 근처인 강릉 경포대 쪽에 옮겨와 살았다.
권씨 부인은 세종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의 10세손으로 충주에 사는 이주화에게 시집을 갔다. 그 후 1718년(숙종 44)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마치고, 이내번과 이태번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오죽헌이 있는 강릉, 경포대 근처 북촌 저동에 자리 잡았다.
권씨 부인은 강릉에 정착하여 아들 이내번과 염전을 경영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댁이 있던 충주는 내륙 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이때 권씨 부인은 소금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이를 기반으로 아들 이내번이 상당한 규모의 전답을 사들였다. 경제적 기반을 쌓은 이내번은 어머니 권씨 부인이 1751년에 별세하자 더 넓은 새로운 집터를 배다리 골에 마련했다.
그러다가 재산이 불어나서 더 넓은 집터를 물색하던 중, 한때의 족제비들이 나타나 일렬로 무리 지어 서북쪽으로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이내번이 그 족제비를 따라가 보니 현재의 선교장 터 부근 숲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를 계기로 이내번은 여기에다 집터를 잡았으므로 선교장 터는 족제비와 인연이 되어서 잡은 터로 알려져 있다.
선교장 내의 주요 건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열화당(悅話堂) : 사랑채로서 열화당은 1815년(순조 15)에 이후(李厚)가 세웠으며, 중국의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의 ’열친위지정화(悅親威之情話)‘에서 첫 글자와 끝 글자를 각각 따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친인척들이 이곳에서 정담을 나누며 기쁘게 살자는 의미의 이름의 열화당은 선교장 주인 남자의 거처로 큰 사랑채가 된다.
조선말에 러시아공사가 열화당에 머문 후에 기념으로 서양식 테라스를 설치해 준 시설이 남아 있다.
현재는 오르간을 설치하여 선교장 문화 예술의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고, 선교장에서는 일찍부터 출판사 ‘열화당’도 운영하고 있다
▶ 활래정(活來亭) : 1816년에 세운 것을 증손인 이근우(李根宇)가 현재의 건물로 중건하였고, 동별당은 약 50년 전에 새로 건립한 건물이다.
활래정은 대문 밖인 선교장 입구의 큰 연못 옆에 세워진 정자로서, 연못 속에 돌기둥을 세워 주위에 난간을 돌렸으며, 팔작지붕에 겹처마의 납도리집이다.
이 정자는 활수래(活水來), 즉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연지와 함께 못 가운데 만든 섬은 신선계(神仙界)를 상징한다. 조선시대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지나는 풍류가와 시인, 묵객들이 머물며 문화와 예술의 향을 피우던 곳이다.
▶ 안채 : 1700년 이전에 건립된 안채는 이내번이 지었으며, 선교장의 건물 중에 가장 서민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선교장 종부(안방마님)의 거처이다. 직계 여인들이 함께 이곳에서 생활했다.
안채는 동편에 있으며, 주옥의 평면구조는 ‘ㄱ자’형으로서, 동쪽 끝이 부엌이고, 건넌방은 서쪽에 있다. 안채와 행랑채 사이에는 담을 쌓아서 막았다.
▶ 동별당(東別堂) : 안채의 오른쪽으로 연결이 되어있는 주인 전용의 별당건물인 동별당은 이근우가 1920년에 지은 'ㄱ'자형 건물이다. 집안의 잔치나 손님맞이에 주로 사용된 곳으로 현재 선교장 장주의 거처로 사용되고 있다.
안채의 동쪽 전면에 있는데 2층으로 된 높은 석축 위에 서 있고, 맞은편에 서별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 행랑채 : 남쪽에 있고 서쪽으로 사랑채에 출입하는 솟을대문이 있다.
11월 6일(수) 2일 차 일정 |
◇ 강릉 경포대(鏡浦臺) : 강릉시 경포동 94 (보물 제2046호) / (명승 제108호)
- 조선시대에 많은 문인이 찾은 관동팔경의 하나.
경포대는 강릉시 저동(苧洞)의 경포호(鏡浦湖) 북쪽 언덕에 있는 누각으로 1326년(고려 충숙왕 13)에 안무사(按撫使) 박숙정(朴淑貞)이 현 방해정(放海亭) 북쪽에 세웠다.
고려 말의 안축은 《경포대 신정기》(鏡浦臺新亭記) 기문(記文)에 "옛날 영랑 선인이 놀던 곳이며, 정자가 없어 비바람이 치는 날 놀러 왔던 사람들이 곤혹스럽게 여겨 작은 정자를 지었다"라고 하여 창건 목적을 밝히고 있어 역사성이 높다.
그 후 1508년(조선 중종 3)에 부사(府使) 한급(韓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경포대는 고려 중기 김극기의 「경포대」라는 시와 「강릉 팔영」, 그리고 고려 말 안축의 「관동팔경」, 그리고 조선시대에 송강 정철(鄭澈, 1536-1593) 등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자연 풍광을 음미하며,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경포대를 관동팔경 중 으뜸이라 했으며, 경포대에 저녁이 되어 달빛이 쏟아지면 하늘, 바다, 호수, 그리고 술잔과 임의 눈동자 등에서 다섯 개의 달을 볼 수 있는 동해안 제일의 ‘달맞이 명소’라고 표현하였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와 조선 초의 세조는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방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 누각은 정면 6칸, 측면 5칸, 기둥 28주의 팔작지붕 겹처마기와 집이다.
이 누각 내부에는 율곡 이이가 10세 때에 지었다고 하는 《경포대부(鏡浦臺賦)》를 판각(板刻)하여 걸어 놓았고, 또한 숙종이 직접 지은 어제시(御製詩)를 비롯하여, 여러 명사의 기문(記文) ·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특히 ‘경포대(鏡浦臺)' 전자(篆字)체 현판은 유한지의 글씨이고, 해서(楷書)체 현판은 이익회의 글씨이다. ‘제일강산(第一江山)’ 글씨는 17세기 당시 조선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서도가 주지번(朱之蕃)의 글씨라고 하는데, ‘강산(江山)’ 두 자를 잃어버려 후세 사람이 써넣었다고 전한다.
◇ 허균(許筠)·허난설헌(許蘭雪軒) 기념관 : 강릉시 난설헌로 193번길 1-29
- 조선후기 최초의 한글 소설을 지은 허균과 최고의 여류 문인 허난설헌 남매를 기념하는 곳
이 공원은 조선시대의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문인 허균(許筠 : 1569~1618년)과 최고의 여류 문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1589) 남매를 기념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 공원은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전통차 체험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허난설헌 생가터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사랑 마당이 있고, 그 안에 네모나게 지어진 본채가 있다.
본채는 두 개의 대문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갈리는데, 그 사이에 곳간이 있어서 내외를 구분하고 있다.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은 목조 한식 기와로 이루어진 단층 건물이다. 내부는 네모나게 난 통로를 따라 들어가면 안내대와 만나고, 이어 주 전시실과 소 전시실로 이어진다.
이 공원에는 허균과 허난설헌을 비롯한 허씨 5문장의 예술혼을 기리는 시비(詩碑) 5기가 허균의 생가터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세워져 있다.
이 기념 공원에서는 매년 봄가을에 허균의 아호인 교산(蛟山) 문화제와 난설헌 문화제 등의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특히 난설헌 문화제 행사는 강릉시 여성 단체 협의회에서 주관하는 난설헌 다례(茶禮)제 행사가 열려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끈다.
허균은 조선시대 첨지 중추부사, 형조참의, 좌참찬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글재주에 뛰어나 학문은 류성룡에게, 시는 이달에게 배웠다. 명나라 사신 접대에 종사관으로 기용되어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명나라에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
허균은 이 집터 뒤의 산세가 흡사 이무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산 이름을 교산((蛟山)이라고 불렀으며,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스스로 지어 불렀다고 전한다.
허균은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에 가담하여 인목대비 폐모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성리학 외에 불교와 도교 등에도 깊은 관심을 보인 비판적 개혁사상가로서 여러 이론을 개진했고, 사회모순을 비판한 소설 《홍길동전》, 《한정록》 등의 작품을 남겼다.
◇ 강릉 오죽헌(烏竹軒) :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보물 제 165호)
-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집
오죽헌(烏竹軒)은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오죽헌이 유명한 이유는 조선 시대의 가장 큰 학자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이며, 신사임당의 친정집이기 때문이다. 사임당 신씨는 뛰어난 여류 예술가였고, 현모양처의 본보기가 되는 인물이고, 신사임당의 아들 율곡 이이는 조선시대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훌륭한 학자였다.
오죽헌은 뒤뜰에 줄기가 손가락만 하고 색이 검은 대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오죽헌’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이 집은 조선시대 문신이었던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오죽헌의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앞면에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마루로 사용했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만들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拱抱)가 새 날개 모양으로 뻗어 나온 간결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오죽헌에는 율곡의 영정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와 사임당이 율곡을 낳기 전에 용꿈을 꿨다는 데서 이름 지어진 몽룡실(夢龍室) 이외에도 조선 후기의 정조가 율곡의 유품인 『격몽요결(擊蒙要訣)』의 원본과 벼루를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한 ‘어제각(御製閣)’이 있다. 그리고 ‘율곡기념관’과 율곡 일가의 ‘유품전시관’ 등이 있다.
오죽헌에는 샛담 서쪽에 평범한 건물인 안채가 있는데, 안채의 주련(柱聯)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판각해 놓은 것이다.
오죽헌은 우리나라 주택 건축물 중에서 비교적 오래된 건물의 하나로 손꼽히며, 유서 깊은 역사를 가진 문화재이다.
◇ 양양 하조대(河趙臺) : 양양군 현북면 하광정리 산 3번지(명승 제68호)
- ‘양양 8경’ 중의 하나로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
양양 하조대(河趙臺)는 ‘양양 8경’ 중 하나로 바위로 둘러싸인 해안 절벽 위에 세워진 정자로 해안의 기암괴석들과 주변에 있는 소나무 숲과 어우러진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절벽의 윗부분에 '하조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원래 조선초 정종(定宗) 때 건립했으나, 시간이 흘러 퇴락해 철폐되었다가 수차례 중수를 거듭했다. 한국전쟁 때 훼철되었다가 1955년에 재건됐다. 현재의 건물은 초익공 굴도리 양식의 육모정으로 1998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하조대의 명칭은 조선 초기에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곳에서 놀고 즐겼던 까닭에 두 사람의 성(姓)을 따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전한다. 태조 이성계에게 정도전이 있었다면 태종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다. 이곳은 고려 말 조선의 개국공신인 우재 조준과 호정 하륜이 말년을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조대라는 명칭은 3국시대의 이루지 못할 비극적인 사랑을 하였던 하랑 총각과 조당 처녀의 사랑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랑은 신라 장군 이사부의 화랑이었고, 조당은 고구려에 편입된 집안의 낭자였다. 이들 두 집안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치 서양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와 같이 남몰래 사랑했던 그들은 끝내 연을 맺지 못하고, 이곳 해안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외에도 또 다른 비극적인 사랑에 대한 전설은, 옛날 이 근처에 하씨 성의 젊은이가 살고 있었고, 이웃 마을 조씨 집안에는 혼기가 찬 두 자매가 있었는데, 조씨 자매는 동시에 하씨 젊은이에게 애정을 품게 된다.
세 사람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고, 결국 그들의 사랑은 하랑 총각과 조당 처녀의 이야기처럼 비극적인 결말로 끝이 났다.
가슴 아픈 사랑이 깃든 곳, 한이 서린 곳이어서일까? 하조대 부근 절벽에서 피는 해당화는 유난히 붉다고 전한다.
◇ 양양 낙산사(洛山寺) :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4-3
- 통일신라 때 의상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는 조계종 3대 관음 기도 도량 중의 하나인 사찰
양양 낙산사(洛山寺)는 서해 보문사 · 남해 보리암과 조계종 3대 관음 기도 도량(觀音祈禱道場) 중의 하나이다. 671년(신라 문무왕 11)에 의상(義湘)대사가 세웠다고 전하며,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의 중건(重建)을 비롯하여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1953년에 다시 창건하였으나 2005년에 일어난 산불로 모든 사찰 건물이 소실되었다. 이에 바로 재건에 착수하여 2009년 10월 12일에 복원 불사하였다.
이 절에는 조선 세조(世祖) 때 다시 세운 7층 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이를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 및 홍예문(虹霓門) 등이 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如意珠)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 자리이다.
의상대사가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고 낙산사라 하였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다. 이 관음상의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 극성기 때의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불상이다.
낙산사 7층 석탑
▶낙산사 7층 석탑(보물 제499호)
이 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던 것을 1467(세조 13)에 이르러 현재의 7층으로 조성한 탑이다. 이 때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와 여의주를 탑 속에 봉안하였다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음으로써 1,000여 년간 국교로 자리 잡고 있었던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와 함께 불교와 관련된 조형 미술의 분야도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나마 조선 전기에는 불교미술 분야에서 조성 양식이나 수법이 고려적인 작품이 다소 조성되었다.
낙산사 7층 석탑도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석탑 중의 하나이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基壇部)는 정사각형의 바닥 돌 위로 밑돌을 놓고, 윗면에 24개 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塔身部)는 지붕돌과 몸돌을 1층으로 하여 7층을 이루고 있다.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몸돌보다 넓고 두꺼운 괴임이 1단씩 있어 특징적이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전체적인 모양이 경쾌하다.
이 석탑의 머리 장식 부에는 가늘고 긴 쇠막대를 중심으로 원나라의 라마탑(喇嘛塔)을 닮은 여러 장식이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어 특이하다. 고려시대의 양식을 이어받고 있으나 전체의 조형이 더욱 간략화되었다.
근처의 명주군에 위치한 정동진리 오층석탑의 연꽃무늬 기단 장식과, 강릉 신복사지 3층석탑 · 월정사 팔각 9층 석탑 등의 탑신부와 비교해 볼 수 있다.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
낙산사 원통보전에 모신 관음보살 좌상은 건칠(乾漆)불상으로, 근처의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 전해진다.
금속으로 만든 8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앉아 있는데, 적당한 크기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만을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머리에는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높은 보관(寶冠)을 썼으며, 네모꼴에 가까우면서도 각지지 않은 둥글고 탄력적인 얼굴에는 귀·눈·입·코 등이 단정하게 묘사되어 있다.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하고, 가슴 부분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었다. 오른손은 가슴에 올리고 왼손은 배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고 있는데, 가냘픈 듯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양어깨를 덮은 옷은 옷 주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는데, 내의 깃이 가슴 밑을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있다. 온몸에는 화려한 구슬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이 관음보살상은 표현수법으로 보아 고려 후반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한 조선 초기의 작품임을 짐작하게 해 준다. 전체적으로 각 부분의 비례가 좋고 특히 표정이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머리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은 고대 이래의 형식에 원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보관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낙산사 홍련암(紅蓮庵) :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36호
낙산사 동쪽 해안 암벽 위에 있는데 관음굴이라고도 한다.
의상대사가 입산 도중에 돌다리 위에 이상한 청조를 만나 쫓아가니 석굴 속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고 보이지 않았다.
의상대사는 더욱 이상하게 여겨 석굴 앞의 바닷속 반석 위에 정좌하여 7일 7야를 지성으로 기도를 드렸더니 깊은 바닷속에서 홍련이 솟아올랐는데 그 속에서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이에 의상대사가 심중 소원을 간절하게 기원하니 만사가 뜻대로 성취하여 무상 대도를 얻었으므로 홍련암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 의상대 (義湘臺) : 양양군 강현면 전진리 54-3(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8호)
- 통일신라 때 의상 대사가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坐禪)하던 곳에 세운 정자
의상대는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이 정자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에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坐禪)하였던 곳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중의 의상대 기문(記文)으로 보아 16세기 이전에도 의상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6년에 폭풍으로 무너져 1937년에 재건하였다. 1975년 7월에도 중건, 1995년 8월에도 복원하였다. 육각정의 의상대는 동해 도립공원의 명승지 가운데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바닷가 암벽 위의 정자에서 맞는 해돋이는 손꼽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