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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31 강 강해 (아산 UBF 메시지)
영생을 얻는 길
말씀 / 누가복음 18:9-30
요절 / 누가복음 18:29,30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며칠 전 다른 센터 섬기는 목자님과 대화하며 우리는 양들이 하나님 나라를 맛보며 살도록 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서로 공감하였습니다. 여기 모인 각 개인이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도록 영적인 풍성함이 있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논리와 연구로 말씀을 쉽게 풀어 드러내는 것이 저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 광고한대로 학생회, 학사회가 서로 깊은 관심과 교제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 역시 하나님 나라 맛보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각 개인이 맛보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각자 개인의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행하여서 주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생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자세를 가르쳐 주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두 사람이 기도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누가 보아도 경건한 사람입니다. 그는 율법을 준수하고 율법대로 살아가는 종교 지도자입니다. 반면 세리는 대단히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세속적이다 못해 죄인이 된 사람입니다.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세리는 가장 큰 죄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각각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이러하였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영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열심과 진심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은 먹고 자고 숨 쉬는 것까지 율법 준수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경건한 바리새인이 그릇된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은 기도를 빙자하여 다른 사람들이 듣도록 기도 소리를 크게 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사람들 듣도록 목소리를 크게 하는 그의 기도에 자신의 죄와 허물은 전혀 담겨 질 수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기가 잘한 것, 자기의 의로운 것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영적으로 볼 때 용납하기 어려운 요소가 많았습니다.
세리의 기도는 어떠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세리는 기도할 때에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기도의 응답 이전에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큰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 볼 때 자신이 너무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지난 행로에 죄악이 가득하여서 눈조차 하늘 향해 들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죄로 인하여 애통했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쳤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주의 긍휼만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 앞에 나가는 인간의 기본자세는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를 가지면 하나님께 은총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기의를 가지면 다른 사람을 얕잡아 봅니다. 자기의를 가지면 자신에 대하여 오만한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우리의 자세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결핍상태, 특히 의로움에 대해서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더 낫다고 여겨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면서 나는 문제가 많으며 오직 예수님의 용서와 성령의 함께 하심을 통해서 변화될 수 있음을 인식하며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 여기는 착각과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막고 실생활에서 사람들에게도 상처와 인격적 피해를 줍니다. 자기의는 실제 삶에서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고 자기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막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실체를 매우 부족하다고 칭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런 표현을 쓰면 대단히 모욕적인 욕설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적으로 자신이 심각한 문제를 가졌는데 가장 심한 결격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가장 많은 헌신과 충성을 하였으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리 많은 업적이 있어도 자기가 뭔가 안다 하거나 자신이 무엇인가 이루었다 여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한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보다 성공적인 기도를 드렸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조금도 자기의를 내세우지 아니하고 긍휼과 은혜를 구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질 것은 죄인으로써의 깊은 자각이며 구할 것은 주의 긍휼과 은총임을 말씀하십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예수님께서 겸손할 것을 말씀하시는 그 순간 제자들이 권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계시는데 어린애들을 데리고 오는가, 이를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세를 보이는 제자들을 말리십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어린 아이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것은 넓은 관용의 내면과 너그러운 인격적 수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유치한 사람이 있습니다. 말과 행동과 생활이 미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어린 아이 같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디에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자 합니다. 멤버십을 만들고 인증절차를 만들어,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 아이나 어린 아이 같은 사람에 대하여 포용하고 영접하는 너그러움 가질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편을 가르고 등급을 매기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없으며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한편, 어린아이의 성품 중에 좋은 점도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어머니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저 여자 분은 어떻게 나의 어머니가 되었을까? 따지지 않습니다. 나는 왜 어머니라 불러야 하는가? 의문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순수하고 겸손하게 어머니의 존재와 어머니의 사랑을 믿고 인정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런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게 영접하고 받드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큰 업적이 있어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받드는 자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어떤 관리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사람은 니고데모와 같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인간적으로 위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학식과 명예와 부를 얻기 위해서 많은 노력과 투쟁을 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예수님을 향해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 질문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 외에는 '선하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습니다. 이 관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나 '다윗의 자손'과 같은 호칭 대신 '선생님'이라 하면서도 '선하다'는 표현을 쓴 것은 모순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 잘 보이려 했거나, 반대급부로 예수님께 자신도 인정을 얻기를 바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장된 호칭을 지적하신 후 질문에 대답해 주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율법은 우리에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은 인간의 힘으로서는 도저히 율법의 요구를 만족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할 수 없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영생의 근원되시고 영생을 주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 나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게 됩니다. 율법을 아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그는 놀라운 대답을 하였습니다.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그의 대답은 놀랍습니다. 사람이 어찌 율법을 다 지켜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의 대답은 전형적인 바리새인의 대답입니다. 율법의 피상적인 준행을 의롭게 여기는 개념을 근거로 하는 대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중요한 내면중심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물질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돈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따져볼 때, 이 관리는 남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을 율법 지킨 것으로 보았습니다. 간음하지 않았고 살인하지 않았고 도적질하지 않았고 거짓 증거 하지 않았고 부모를 모셨으니 율법을 잘 지켰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해를 끼치지는 않았으나, 이웃을 선제적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율법의 근본정신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았다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는 이웃 사랑에 무관심하였으면서도 자기는 율법 조항을 지키며 살았다고 자부하였습니다. 본래 약간의 선을 가진 사람이 영적으로 무지하고 약간 의에 다가 선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에 다가가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그런 다음 깨끗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가 예수님의 뜻을 알고 예수님을 따랐다면 사도 바울처럼 구약과 신약에 균형이 잡힌 위대한 제자가 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이 큰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이 관리는 학문과 직책이 높았으며 보통 부자가 아니라 큰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영생의 길에 대한 방향까지 받았으나 근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영생의 기쁨과 영생의 확신을 원하면서도 정작 영생의 길을 앞에 두고는 근심의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 안타까운 일이 생긴 것에 대하여 성경은 그 사람이 큰 부자이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를 안타까이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재물은 사람으로 하여금 강한 집착을 갖게 하고 그 집착으로 사람을 사로잡기 때문에 영생에 가장 강력한 장애물로 작용합니다. 재물에 대한 집착은 어떤 사람에게는 양심을 마비하게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의리와 신의와 여러 가치와 의미들을 뒤로 미루어 놓게 만듭니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영생의 길이 놓여있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부자들이 영생의 길에 들어서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인정해마지 않는 훌륭한 인생을 살아온 그 관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구원은 확정적이라 여겼습니다. 그가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라고 모두가 인정하는 바였습니다. 그렇다면 율법도 잘 지키지 못하며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이 많은 보통사람은 아무도 구원 얻을 자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 사람이 안 된다면 누가 되겠는가? 저 사람이 못 들어가면 누가 들어가겠는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절 "가라사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더라도 마음 중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십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말했습니다.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베드로는 비싼 고기를 잡을 수 있는 수익성 높은 배를 버렸고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께서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를 집보다 더 가치 있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가족보다 더 소중하다고 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앞세우느라 집이 없거나 집을 떠나 있으니 얼마나 고생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소중하게 여기고 지키느라 아내를 고생시키고 아내를 서운하게 하고 아내에게 부담을 지우니 얼마나 미안합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느라 부모의 기대를 채워 드리지 못하고 부모님들을 걱정하게 하니 불효가 막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앞세우느라 아들 딸을 충분히 잘해주지 못하니 참 미안합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금세에 여러 배를 주시고 내세에서는 영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집과 가족과 앞으로 우리가 꼭 들어가야 할 영생의 주권이 주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안정된 삶의 터전 집을 원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내를 아끼고 부모와 아이들을 잘 Support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당장의 집과 아내와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집도 없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아내를 더 아끼지 못해 마음 아프고 부모와 아이를 책임지지 못하여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현세와 내세의 영생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세에 많은 것을 얻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고 얻었다고 자부하지만 순식간에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결국 이것도 잃고 저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소중합니다.
학생들이 생각할 때, 그 나라는 내가 뭔가 해야 할 것 같을 것입니다. 그 나라를 얻기 위하여 나는 무엇인가 특별한 노력을 하여야 할 것 같을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여 쟁취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할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대단히 영적이라며 자부심이 너무 컸습니다. 자기의 피나는 노력을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스스로 선하고 스스로 의로운 자라는 생각에 빠지는 바람에 분별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듣지 않으며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이 전부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뿐 자기에게 적용하여야 하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기에 집착하느라 영생을 잃어버리고 무서운 범죄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오늘 말씀에 나온 다른 사람은 고매한 인격과 사람들의 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 역시 각별한 노력과 투쟁으로 그런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하나님 나라의 평화가 없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도 감동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예수님을 생명의 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로 만나지 못하였기에 자기가 가진 것이 더 중요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무엇을 버리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기 위하여 가진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영생을 소망하면서도 갈등 속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얻는 길도 일러주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가 늘 자각하는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겸손과 간절함이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옳다 하는 것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며 집보다, 재산보다, 아내보다, 부모보다, 자식보다 더 하나님의 나라를 가치 있게 여기는 마음 중심과 삶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현세에서 몇 배를 더하여 주시고 내세에 반드시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아산 개척 하며 월세와 아파트 관리비를 10년 넘도록 제때 내 본 적이 없습니다. 세 아이들 스쿨뱅킹도 늘 밀려서 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아이들과 사는 곳(호서대 아산캠퍼스 앞)을 문제 삼았습니다. 빨리 이사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살림집이 없고 학생들 상대 하는 원룸 중에서 학교에서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은 비어 있었는데, 여기에 신용불량자들, 빚쟁이 피하여 들어온 사람들이 살았고 그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은 함께 자랐습니다. 학원 보내지 않는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내가 사는 것과 아이들 키우는 것을 듣고 ‘그렇게 아이들 키워서는 안 된다’고 훈수 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인격이 있어 말 하지 않아도 속으로 걱정하였습니다. 지금 어떠합니까? 정부부처 차관을 기대하는 고위공직자 선배, 강남에서 자식 키운 대기업 임원 친구, 송파 은행지점장 후배가 자식을 돌봐 달라 부탁하고 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대로 이루시는 주 예수님을 감사하며 찬양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영생을 누리기를 원하시는 주 예수님의 뜻을 따라 풍성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늘 우리에게 임하기를 기도 합니다. 가장 귀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고 그의 나라를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Asan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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