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장이식수술을 끝낸 친구는 간호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다
죽으러 가는 잎새들로 바람은 살아 있음을 깨닫는다]
며칠 전에 만난 까치에게 눈인사를 했다
개미처럼 달
려가고 싶다 어머니의 젖을 물러,
수양버들 이파리가 흙먼지처럼
흩날리는 것은 그리움이 미쳤기 때문이다.
나 자신에게 결국 믿음이 없어 떠나왔던 것이다.
수레바퀴국화를 선물했던 누이의 탓이 아니다.
나의 생태계, 손금은 알리라
다시는 나의 손으로 포장할 수 업는 사람 앞에
나타나고 싶지 않았던 날의
나를.
사실은 우리 모두 遺族이고 싶었다.
토익TOIEC 점수로만 나를 계산할 수 있었던,
대학시절, 人間임을 기억하고 싶었으나 말을 할 수 없었고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겨울철이 와도 거리엔 영정을 든
女人들이 秋葉처럼 아스팔트를 떠돌았다.
사진을 보면 千年을 썩지 않을 눈망울들,
누이가 사 준 볼펜을 잃어버려 더더욱 어쩔 줄 모르겠던 한해가
초상집 잉걸불 연기처럼 사라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기에 살고 싶었다
형광등이 떨어질까봐 두려워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취방 벽에
이름 석 자를 적었다.
■ 동아일보
오월
/고창환
바람이 지날 때마다 눈이 부시다 잎이 넓은 나무들 세상의 그늘을 가려주지 못하고 나지막이 엎드린 가난 위에서도 반짝거리는 나뭇잎 착한 이웃들의 웃음처럼 환한 잇몸을 드러내며 햇살이 쏟아진다 사람의 흔적이 자목련 향기처럼 아름답다 숲을 떠난 꽃씨들이 큰 길까지 날리고 나른한 항구에 풀린 마을을 내다본다 골목길을 따라 풍선마냥 가벼운 마음들이 들락거린다 자주 꺾이는 바람도 세상살이가 조금씩 눈에 보일 쯤이면 바로 펼 수 있을까 마주치는 세상의 모퉁이마다 큰 바퀴가 지나고 마른 돌가루가 날릴지라도 손바닥을 펴서 햇살을 받는다 사는 낡가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가 오랜 희망을 다시 짚어보듯 푸른 소리를 실어나르는 송전탑을 향해 귀를 세운다
■ 매일신문
나르시스를 위하여
/류외향
기억하고 싶었어요 하마 삐그덕거리는
시간에 얹혀 제 한 몸 돌보지 못하는
반편이 같았어요 그래서인가요?
하루종일 거울 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더군요.
오늘은 말이죠.
입 속을 보았더니 영영 캄캄해서 도무지
저 깊숙히 썩은 이빨, 아니다 아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닮았더랬죠.
벌린 입 언저리까지 찢어
탐욕에 뒤틀린 눈알 들이밀었더니
글쎄, 얼마나 어두운지 출구를 못 찾는 거 있죠.
뽑아내고 싶었어요.
거추장스런 허섭스레기쯤이야 버린대도
대뇌 신피질엔 손상이야 있겠어요 고르고
골라서 차곡차곡 챙겨넣은
보석 같은 추억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안팎 구별도 없이,
썩어도 안 썩은 체하는
벌거숭이 임금님만 있는 거예요.
난 말이죠, 무서웠어요.
저 깊숙히 깨소금만큼 썩어 있던
이빨 도려내면
한 몸 되어 두리뭉실 엉켜온 다른 이들
죄다 끌려나와 종량제 봉투 속에
사려 깊게 버려질가
내낸 겁이 났어요.
그래서인가봐요.
거울 겉에 달라붙은 치욕을 뚫고
진흙탕에만 피어나는 연꽃처럼
기억하고 싶었어요 가녀란 삶
영영 거울 속에 묻혀버린 애증과
아무래도 내 것이 되어주지 못하는
썩은 이빨 하나
기억하고 싶었어요.
■ 문화일보
獨酌
/최성윤
조용함을 더 조용하게 하는 것이
묵묵히 흐르는 물소리이듯
손금을 열고
들여다보면
외로움의 중심은
고요하여라
터진 솔기 속에
햇살같이 밝은 피톨들
먼 산을 담아
제 안에서 빛나게 하고
고개 끄덕이며 끄덕이며
주먹 쥐어 속살 여미면
따뜻하게 배어나와
뚜렷해지는 그림자
어두움을 더 어둠답게 하는 것이
흔들리는 양초 불빛이듯
빈 방 이 깊은 殘 속에도
흠없이 강림하는 이름
지키고 싶은 어둠 있어서
촛불 켜는 사람
■ 서울신문
운천리 길
/염창권
1
고향이 그리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산다
삶은 늘 깃이 짧아 겹겹으로 껴입은 속옷들
고스란히 드러내보이지만
가슴 속을 흐르는 고향 생각만은
꼭꼭 여미며 산다.
함석지붕에 나무들이
자꾸 손가락을 다치는 입동 무렵
군장을 꾸린 아침 행렬을 보며 노인들은
담벽에 붙어 모락모락 하얀 안개꽃을
피워 올리거나 떠나온 마을 이야기로
잠시 마음이 산란해지기도 한다
민통선을 건너온 바람의 기별에
길 이쪽과 저쪽에 늘어선 하얀 억새꽃이
무시로 흔들리며 휘어지는데
대체 마음 어느 깊은 곳을 강물이 흐르기에
사람들은 저마다 조그만 안개를
피워올리는 것일까
강물 끝을 따라가 보는 것일까
싸늘한 아침 빛이 나무들의 억개를 돌아
행렬의 입입마다 하얗게 부서질 때
길은 강을 이루며 흘러가고 있으니
운천리를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
문해리 자일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며
길을 트고 있으니
보육원을 빠져나온 아이가 망연히
사병들의 행렬을 바라볼 때 소매깃을
빠져나온 내복이 시린 손등을 덮어줄 때
쇠붙이처럼 희고 단단한 운천의 하늘에
조그만 입김의 안개를 보탠다.
2
삼팔교 난간 밑으로
어둑히 풀리는 한탄강을 건너
여전히 사병 혼자 집총 차렷 자세인
검문소를 지나면
그곳에 운천리로 가는 길이 있다.
한떼의 눈발이 퍼붓다가 문득 고요해지면
그만큼 길은 더 쓸쓸히 깊어가고
들판은 희고 검게 덮인 잔설로 딱딱하게 굳어
오래도록 녹지 않는다
대공포 사격 소리에 놀라 흩뿌리듯 날아가는 텃새들
나무는 자꾸 손을 다치고
캐터필러 발자국이 움켜쥐고 있는 불임의 세월들
나무는 자꾸 발이 아프고
길을 따라 걷는 노인들 걷다가 잠깐 서 있다가
지치면 길 밖으로 나와 그들의 길을 벗어들고
살아온 나날만큼 막막히 나무에 기대어
쓰디쓴 한 모금의 안개를 피워 물 때
누군들 가슴 속 뜨거운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으랴
누군들 가슴 속 뜨거운 강물이 넘쳐 흐르지 않으랴
누군들 함께 섞여 어디론가 가야 할 곳으로
흘러가지 않으랴
노인들 운천리에 모여 살고 운천리 가슴 속에
깊고 그윽한 강물 하나 가꾸며 산다
서로의 뿌리를 잇대고 산다.
■ 세계일보
알고 말고, 네 얼굴
/임찬일
옛 친구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함께 다녔던 국민학교를 들추어내고
그때 가까이서 어울렸던 친구의 이름도 떠올리고
그제서야 자기가 아무개라며 나에게 묻는다
기억이 나느냐고
이것저것 지난 세월에 묻은 흔적을 증거삼아
비로소 서로를 확인하는 이 낯선 절차
그래, 물 같은 세월 흘렀으나 거기에
비추듯 남아 있는 우리들의 코 묻은 얼굴과
남루했던 시절
흑백사진처럼 다소 낡은 모습으로 떠오르는
그 무렵의 일을 이제는 옛날이라고 싸잡아
네 이름처럼 불러야 되는구나
친구야, 오랜만이다 애들이 몇이고?
그래, 나랑 똑같구나 딸 하나 아들 하나라니!
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오기까지
삼십 년이나 걸려야만 했단 말이냐
서고 연락도 하고 언제 한번 만나자며
전화를 끊었지만 우리들의 기약은 다시 아득해지고
무슨 꿈결처럼 잊혀져서 나는 또
가물가물한 너의 얼굴을 영영 놓쳐 버릴지도 모른다
남은 것이라곤 적어 놓은 너의 전화번호
연락처를 알았으니 가끔 전화라도 하마
만나자, 만나자, 하다보면 그 말이 씨가 되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을 차지하고서
끊어진 것들 가슴속 이야기를 이을 날이 있겠지
■ 조선일보
賻儀
/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등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 놓았다.
■ 중앙일보
퓨즈가 나간 숲
/한혜영
퓨즈가 나간 숲은 깜깜하다. 나무 꼭대기 새집조차 어둡다.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온전한 것이 있다면 푸르던 기억에 항거하는 단단한 그리움이다.
한계절 사랑의 불 환하게 밝혔던 나무들, 열매들, 그리고 새들, 그 사랑의 흔적을 罪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물론 그냥 상처다. 이 겨울의 어둠 아니 한줄기 빛을 참고, 그래 빛이야말로 얼마나 많은 것들에게 상처가 되었나. 눈부신, 찬란한,
아름다운 따위의 형용사와 눈이 맞아 저지른 빛의 횡포, 가지마다 넘치는 축복인 양 위선의 잎새 덕지덕지 달아주며 오늘의 상처를 마련했었다. 누구라도 헛발 자주 내딛고 나뒹굴던시절, 쌈짓돈마냥 숨겨둔 사랑의 잎새 하나만 있어도 가슴은 이리 훗훗한 그리움이다.
어딘가에 한 뭉치 퓨즈가 분명 있을 것이다. 계절과 계절의 끈을 잇고 명치 끝을 꾸욱 누르면 혼곤한 잠의 머리 절레절레 흔들며 숲은 그날처럼 홀연히 일어날 것이다. 때문에 새들은 이 겨울 떠나지 않고 하늘 받들어 빈 숲을 지키고 있다.
■ 한국일보
안개의 도시
/임동윤
전망 좋은 방이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노랗게 물든 길을 새벽 안개가 지우고 간다
더러는 바람과 어우러져, 빌딩과 숲 사이
좁다란 골목까지 슬그머니 점령한다
가로등 불빛과 눈에 보이는 것들을 지워버린다
밤새 떨어진 나뭇잎들이 바람의 길을 따라
우미진 골목에 아픔으로 쌓이고
몰래 버려진 쓰레기더미와 몸을 섞는다
음식점에서 흘러나온 국물들
외롭게 뛰쳐나와 와와 소리치는 술병들
안개는 그 위에도 군림한다, 이 도시의
가장 추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감싸고 돈다
안개 속에 좀처럼 잠 깨지 못하는 도시
도청지붕에서 아침햇살은
젖은 안개를 하나씩 꺼내 말린다
요선동의 허름한 집에서는 해장국이 펄펄 끓고
벌써 겨울이 시작되고 있다, 간밤의 숙취를 푸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어제보다 한결 든든해져가고
가을의 피가 마르는 것을 나는 느낀다
잎새들이 하루가 다르게 길바닥에 쌓이고
환경미화원들의 새벽이 더욱 바빠진다
청소차에 실려나가는 푸른 꿈의 잔해들
첫눈이 오면서 다시 도시는 얼어붙는 것이다
겨울 안개도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도시, 안개는
이 도시의 전유물이다 한낮이 되도록 가시지 않는다
쿨룩쿨룩 누구나 겨울에 한번쯤 기관지를 앓는다
댐이 생기면서 깊어진 질환이다
나는 곤혹스럽다, 겨울에 더욱 살아서 꿈틀대는 것이
물이 얼면 가장 늦게 풀리는 도시
그래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얼음을 즐긴다
스케이트를 못 타는 사람은 여기 사람이 아니다
오늘도 안개는 자욱하고 한낮이 될 때까지
모든 사물을 몸에 가둔다
그래서 몸에서는 짙은 우유냄새가 난다
겨울 내내 도시는 안개 속에 취해 있고
자동차도 전조등을 켜고 다녀야 한다
더러는 빵빵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야 한다
그러나 한낮이 되고 안개가 걷히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비로소 나도 바빠진다, 햇살이 벽을 타고
방바닥에 깊이 박힌 후에야 거리로 나선다
꽝꽝 얼어붙은 호수에서 사람들은
씽씽 바람을 가르며 얼음을 지치고 있다
민망하다 너무 초라하고 연약하여 나는 부끄럽다
재빨리 빙판을 벗어난다
에메랄드에서 뜨거운 한잔의 커피로 몸을 푼다
땅거미가 깃들면 전망 좋은 방으로 돌아온다
이제 스멀거리며 안개는 기어들 것이다
어둠과 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안개와 속삭이며
잠들 것이다, 잠들기 전 닭갈비와 막국수
몇 잔의 소주와도 친화할 것이다
쿨룩쿨룩 오랜 천식을 앓으며 나는 기다린다
창문도 최대한 크게 열어 놓는다
그러나 아직 안개는 침입하지 않았다
자정이 되면서 자동차의 소음도 낮아지고
도시는 조금씩 기울어지며 호수 속으로 빠져든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나는 마음을 서두른다
오늘은 새벽쯤에야 슬그머니 방문할 모양이다
■ 부산일보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깡통을 위하여
/조영석
찌그러진 모습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 거리를 힘차게 굴러다니며 토해 놓는 만큼의 세상 공기를 마시고 살아간다. 줄어드는 뼛속으로 오염된 언어들이 넘나들지만, 결코 속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들의 불문율. 내 목소리는 나팔소리보다 요란하고 아이의 싱싱한 울음보다 선명하다.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고, 춥고 윙윙거리는 냉장고 속에 잘 진열된다. 만나는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때론 상한 냄새에 진저리치며 심한 두통을 앓기도 한다. 어느 한 순간, 문이 열리고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나를 감싸 쥔다. 나는 선택된 기쁨으로 고통을 기다린다. 그는 내 모자를 딱, 하고 천천히 벗긴 후 내 살을 자기의 살 속으로 들어 붓는다. 눈물 같은 거품을 게워내며 내 살은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어떤 힘에 의하여 신나게 공중을 날아간다. 나는 다시 찌그러지는 연습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