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계 김학수(牧溪 金學守) 선생님!!
스승님과 제자의 끈 66년'을 이어 오다.
(1)
존경하는 스승님이시자 은사님이신 목계 김학수(牧溪 金學守)
선생님은 제 평생의 정신적인 지주이십니다.
제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49년, 중학교에 갓 입학을 한
바로 그 순간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이셨고 이 후 60년을 훌쩍 넘긴
이 시간까지도 스승님과 제자의 끈끈한 끈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해 선생님은 대학 강단으로 자리를
옮겨셨고 저는 선생님께 대학진학 상담을 드렸습니다.
결과는 선생님이 나오신 대학의 같은 학과로 진학을 하게 되어
선생님의 제자이자 대학의 같은 학과 후배가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선비의 고장’ 경북 안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조부님 슬하에서 성장하는 과정,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친구분들이
자주 하시던 이야기들 중에서 '선비', '처사', '사군자' 등이 소년의
가슴에 새겨졌다고 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소년의 진로는 ‘스승의 길’로 정해 졌고 성인이 되신
이 후, 49년을 교단에서 봉직하셨습니다.
(2)
선생님은 스스로가 맹자(孟子)의 ‘진심편(盡心篇) 군자삼락(君子三樂)’에
나오는 ’천하의 영재들을 모아 교육(得天下英才而敎育)’ 하는
즐거움을 선택하셨고 지금도 그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는 일생입니다.
49년이라는 긴 세월, 그리고 교단을 떠나 계시는 20여 년 지금까지도
참으로 많은 인재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또 받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한국사람의 ‘한국사람다움의 기저(基底)’에는
‘선비정신’ 이 깔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대학 재학 때, “교수님! 그렇다면, 선비는 누구이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그래, 자네는 등산을 즐기고 있잖아. 다음, 금오산에 갈 때는
‘채미정’을 꼭 둘러 보고 오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선비 중 한 분이신
야은 길재 (冶隱 吉再 1353~1419) 어르신네를 채미정(採薇亭)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채미정’은 고려와 조선왕조의 교체기,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자락에서 은거한 고려의 신하였던 야은 어르신네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해 놓은 정자입니다.
새 왕조 조선에서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충절을 지켜 낸
조선조 유학(儒學)의 거성, 야은 길재 어르신네는 조선조 개국 초기,
수 많은 정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습니다.
(3)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는 한 몸,
그 은혜가 같다는 뜻입니다.
지금의 노년 세대가 자라면서 쉽게 접했던 짧지만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글귀입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근거한 가르침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늘을 사는 후진들이라고 무시해도 좋은 사상일 수야 없겠습니다.
우리 역사상 또 한 분의 위대한 유현(儒賢)이자 큰 스승,
큰 선비이신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어르신네도
‘임금과 스승과 부모는 일체’이니 정성껏 받들어야 한다고 갈파하셨습니다.
민주주의국가에서 군(君.임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것이야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천하일등인충효(天下一等人忠孝)입니다.
그리고 스승(師)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따르고 존경해야 할 대상임에는
더 이상 강조의 여지가 없겠습니다.
(4)
목계 선생님은 1989년 교육현장이었던 대학강단에서 퇴임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학술단체인 수인회(樹人會)와 공부방 모임 일송회(一松會)를 결성,
주도하시면서 정례모임을 갖고 회지까지 발간을 하고 있습니다.
한 편, 제자 여러 사람이 연중 매 목요일 마다 ‘목요회’라는 모임으로 선생님을
오찬에 초청하여 선생님의 정신세계를 승계,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연세 아흔이 되던 해인 2009년 가을에는 ‘목계김학수문화논총
선비문화를 찾아서’를 출간, 후손들과 주변 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이 책에서 우리사회가 점차로 물질주의사회로 변천해 가고는 있지만
'한국사람다움의 기저' 만은 잊지 않고 살기를 당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매년 친필의 연하장과 매달 한 차례씩
옳곧은 삶의 지침이 될만한 글귀를 육필로 적어서 우편으로 보내 주십니다.
적어도 일년에 열세 차례 이상, 받게 되는 이 우편물들은
늘 감동스럽기만 한데 선생님께서는 이 작업이 큰 낙이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1년을 생각하는 사람은 마당에다 화초를 심고
10년을 내다보는 사람은 산에다 나무를 심는다고 합니다.
100년을 설계하는 사람은 인재를 양성해서 세상에 내어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을 ‘100년 대계(大計)’라고 하는 것이겠지요.
목계선생님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이 100년 대계의 실천이었습니다.
(5)
선생님의 장년기는 참으로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민족상잔의 한국전쟁 중이었고 전쟁은 휴전상태로
계속 이어지는 폐허속이었습니다.
학교건물은 군부대에 징발당하고 학교수업은 강변노천에서
흑판 하나만 걸어 두고 강행했던 참으로 암울했던 시대였습니다.
이런 가운데서도 100년 대계는 이어졌습니다.
반반한 천연자원 하나 찾기 힘든 삭막한 풍토에서 인재들을 양성했고
그 인재들은 오늘날의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습니다.
목계선생님은 스스로를 닦는 수기(修己)정신과
예의와 염치를 소중히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이념을
늘 강조하셨고 실천하셨습니다.
목계선생님의 집안은 한 가족, 할아버지로부터 손자까지
다섯 사람의 박사를 탄생시켰습니다.
할아버지(철학)를 위시, 정훈(의학) 성훈(공학) 경훈(경영학)
아들 세 사람이 박사가 되어 이미 각 분야에서 크게 공헌하고 있는데,
지금은 장손(종현)까지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 사회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목계선생님은 아흔을 넘기신 연세이지만 매우 건강하십니다.
전문의인 장남이 주치의 역할을 잘 해 준 덕분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 한나절, 장남과 함께 선생님을 모시고 노오란 개나리가
막 피어나기 시작한 대구두류공원을 산책했습니다.
선생님의 건강은 후진 모두에게 크나 큰 희망입니다.
오래, 오래 건강하옵시기를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