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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RPG의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실제 인물이나 사건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려는 의도가 아니며 이를 통해 불쾌감을 느끼게 할 의도가 일절 없다는 것을 알립니다.
이 RPG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국가, 회사 또는 단체, 그 밖에 모든 명칭, 사건과 에피소드 등은 모두 허구적으로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유사한 예가 있더라도 이는 해당 사건이나 인물 등을 비하하거나 정치적으로 가치판단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점을 밝힙니다.
이 RPG는 허구적 창작물로서 특정한 사상, 이념, 정치체제, 인권 탄압과 폭압적 정치질서를 옹호, 미화하거나 찬양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을 밝힙니다.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이상을 배반한 적이 없으며, 단지 체제가 이상을 배반했을 뿐이다. 나는 결코 변절자가 아니다. 헝가리에 ‘반혁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죽는 날까지 투쟁할 것이다!“
- 너지 임레, 1956년
18. 코민포름 지령 제117호
독도 영유권과 해상주권을 둔 일본과의 육박전이 아직도 진행중이던 1950년 2월, 주한소련대사 파뉴쉬킨은 난데없이 ”한국이 1946년 인도차이나 전쟁 참전을 약속했으니 그 약속을 지키라“는 서한을 보내왔습니다. 이상이가 곡물원조를 대가로 맺었던 밀약이 공표되자 여론은 크게 요동쳤고, 주로 옛 임정 계열(한독당계)을 중심으로 공산당에 대한 거센 비판여론이 일었습니다.
그 와중인 1950년 3월 18일, 코민포름은 한국 내 주요 좌익 정당들을 ‘통일노동자당’으로 통합하고 우경 세력을 숙청하며 단일후보 명부제를 도입하라는 제117호 지령을 내려보냈습니다. 월남 파동으로 공산당이 십자포화를 당하던 와중이었기에, 이는 공산당 중앙에 정권 상실의 위기감을 심어주고 곧바로 적화 일당제를 강제하려는 의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연히 지령서의 1순위 타겟인 권가연은 “이것이 파시즘과 뭐가 다르냐”면서 항변했고, 주아문 역시 “절대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격언과 함께 민주적 견제와 균형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애초부터 ”권가연-박현우 집단“을 눈엣가시로 보던 이상이는 둘째치고, 공산당 내에서 민주주의 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주장해오던 허경훈마저도 주아문이나 권가연의 항변에는 선을 그었습니다. 애당초 정당들이 ’경쟁하는‘ 것은 단지 부르주아 계급독재일 뿐이며, 프롤테라리아 계급독재 원칙 하에서만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잇속에 재빠른 신지훈은 이승만의 심복인 자신이 숙청 대상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계산해, 아예 코민포름 지령 이행에 적극 동참해 새 대중독재정당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사실, 지령을 거부하기 어려운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넜습니다. 바로 한국의 초기 산업 기반이 소련이 사실상 장악한 남만주 공업지대와 북한지역 공업지대를 긴밀히 연결하는 구조에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경제·지리적 종속 구조 속에서 조선공산당이 코민포름의 지령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했고, 이는 곧 정치적·외교적 후폭풍을 감수해야 하는 선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모스크바에 직접 가서 담판을 짓자”는 이상이의 발언에 수긍한 일행들은 정말 박헌영으로부터 정부대표 직함을 받고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이는 코민포름 지령에 반대하는 이들에게는 최악의 선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3월 21일, 모스크바의 늦겨울 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 대표단은 업무오찬을 명목으로 비밀 회동에 불려갔습니다. 포스크료비셰프, 포스펠로프, 체슬라프, 수슬로프 등 스탈린의 “그림자(тени)”로 불리던 이들은 마치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처럼 대표단을 대했습니다.
짧은 인사 후 포스펠로프가 아직 대부분에게 미공개된 제117-Б호 문서를 내밀자, ‘권가연–박현우 집단’을 반프롤레타리아적 분파로 규정한 혹독한 내용이 모두에게 공개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둘을 살려보려던 주아문은 특수한 연립 정국의 사정을 들어 제한적 활용을 주장했으나, 수슬로프는 권가연의 존재를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가 포용하기 어렵다고 못박았습니다. 그러나 허경훈은 단일후보 명부제(찬반투표) 등 정치체제 개혁 면에서는 이견이 있으나 권가연-박현우를 숙청하는 데는 이견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고, 권가연은 자신을 당장 끝장낼 수 있는 소련의 고위간부들 앞에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순교자를 자처했습니다.
수슬로프는 스탈린이 권가연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 사실을 암시하며 불편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이 틈에 냉소를 던지던 신지훈을 뒤로 하고 수슬로프는 권가연에게 마지막 기회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을 규탄하는 공개 연설을 요구했으나, 권가연은 차라리 정계은퇴를 택하겠다며 거부했습니다. 결국 미리 대기하던 MGB 요원들이 권가연을 ’정중히 모시자‘, 오찬장의 분위기는 바짝 얼어붙었습니다. 오직 이상이만이 대숙청의 공포를 애써 억누르며 기쁘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제117호 지령이 하달된 이유는 머지않아 밝혀졌습니다. 소련은 공산진영의 주요 중공업지대로 거듭나게 될 만주-한반도의 절대적 안정을 원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자들의 일당영도체제를 빨리 수립할 필요가 있던 것이었습니다. 이진하의 아들이자 옛 NKVD 간부로 고려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던 나창만(차만 우페노비치 나가이)이 오찬장에 들어와 마치 “통보”하듯 한국의 차후 정치체제와 정계개편 방향을 읊자, 고려인 출신인 허경훈과 이상이조차 잔뜩 얼어붙어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몇년 전 평양에서 최용건에게 북조선 기독교세력을 가져다바친 전력이 있던 박현우는 즉각 납작 엎드리며 ”반동 권가연이 가지고 있던 영향력을 자신이 잘 흡수해보겠다“는 말까지 자진해서 하고서는 기독교 세력을 공산당의 통제 하에 두는 역할을 수용했고, 여러 상황들을 겪으며 자유민주주의 따위 개인의 영달 앞에서 의미없게 된 신지훈은 아예 이참에 자신이 우익들을 몽땅 쓸어버리고 권력의 중추에 오를 계획을 짰습니다. 그나마 허경훈의 주장으로 의정원 의석 절반을 조국전선과 지방평의회가 공동으로 공천해 민주적으로 선출하게 하자는 타협안이 만들어졌을 뿐이었습니다.
한편, 소련 MGB에 체포된 권가연은 가혹한 심문을 거친 끝에 자신이 CIA 간부이자 전 미군정 행정장관 알렉산더 바민의 사주를 받아 사보타주를 벌일 목적으로 소련에 입국했다는 가짜 간첩 혐의를 자백했고, 공개재판에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뒤늦게 사건을 막아보려던 즈다노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재판은 SI를 비롯한 서구 사회주의 세력의 강력한 반소여론을 촉발했습니다..
19. 청명 작전
공산당, 신민당, 근로인민당은 1950년 6월 3일부로 통일사회당으로의 합당을 선언했고, 이승만과 직속 측근들 또한 대한노농당을 탈당해 통일사회당에 입당했습니다. 이어 총정치국장 이현상은 방첩대를 동원해 구 한독당계 장교들을 ‘외국 간첩’ 혐의로 기습 숙청했고, 한독당이 거세게 반발하자 당중앙은 이현상보다도 더 악명높은 이상이를 후임으로 임명했습니다. 박헌영은 코민포름 지령을 기초로 한 ‘밑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각 인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회의에서 박헌영은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뒤를 돌아보지 말고 혁명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이에 이상이와 방학세는 조선의 10월 혁명을 외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주아문은 숙청이 필요하다 해도 그 최소선을 지켜야 한다며, 동지까지 무참히 제거하는 일은 혁명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경고했고, 허경훈 역시 일부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대는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더 많은 권력만을 노리던 신지훈은 적당히 맞장구치며 기회를 노렸죠.
“임정을 계승한 대한민국 체제 내에서 도대체 어떻게 한독당을 완전히 굴복시키냐”는 박헌영에 물음에 ”박헌영을 수령으로 하는 ’대한사회주의공화국‘을 세우면 된다“고 답한 이상이-방학세 일파의 의견은 더더욱 강성해졌습니다. 허경훈, 주아문, 심지어 내무부장 현준혁까지 가세해 “나라를 사분오열시킬 수 있다”며 경고했지만, 이상이는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일축했습니다. 그 외에 한독당원들을 전부 소련식 수용소(굴라그)에 보내버리자는둥, 10만명이고 100만명이고 전부 총으로 쏴버리면 그만이라는둥 온갖 어지러운 소리들이 튀어나오자, 박헌영마저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들겨본 신지훈이 이참에 급진론에 편승해 우익들을 전부 쓸어버리자고 결심할 무렵, 박현우는 “지방 평의회(소비에트) 간선제 의회 제도 도입”이라는 상당히 과감한 제안을 꺼냈습니다. 물론 무력혁명 그 자체에 매혹되어 있던 이들은 그저 이상론으로 치부했으나, 통일사회당 정치국원으로서 독자적인 입지를 구축한 허경훈은 박현우를 비로소 ‘동지’라 여기며 그 난장판 속에서 나름의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소련 침공설’을 그럴듯하게 위조해낸 뒤 별실에서 주아문과 함께 박헌영을 따로 대면한 허경훈은 “어차피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전면 폐지하고 언론-교육기관을 전부 장악해버린다면 우익 ’따위‘가 더는 존재할 수도 없게 되는 것 아니냐”면서, 정말로 이상이-방학세-신지훈이 주장하는 무력혁명을 저지른 뒤 그들을 토사구팽해버리자고 주장했습니다.
볼셰비키식 무력혁명 자체에는 관심이 있지만 밑도끝도 없이 과격론만 부르짖는 이상이, 방학세나 기회주의적 정치꾼인 신지훈이 더 큰 권력을 가지는 건 막고 싶었던 박헌영이 승낙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우익을 궤멸시키고 ’민족혁명당‘ 재건을 명목으로 자신이 관제 민족주의 정당의 당수 자리를 해먹고 싶던 신지훈, 그리고 그냥 스탈린식 일당영도체제를 추종하던 이상이가 이런저런 계획을 제안하자, 박헌영-허경훈-주아문의 대화를 엿들은 박현우는 짐짓 무기력한 어용 정치인처럼 굴며 동의했고, 주아문 역시 고개를 주억거렸습니다.
6월 25일, 민족주의 우익 세력의 마지막 권력거점이던 조선일보, 동아일보, 서울신문, 경향신문 등 언론사와 각지 교육기관들이 의문의 병력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소련군 침공 임박”이라는 호외 기사가 거리를 뒤덮으면서 훗날 ‘6.25 사태’라고 불릴 정변이 막을 올렸습니다. 박현우는 어떻게든 중도파-기독교 인사들을 보호하려고 애쓰고, 허경훈과 주아문 역시 “소련의 압박이 너무나도 거세니 잠시만 몸을 낮추고 있으시라”며 족청 등을 위시한 민족주의자들을 지방으로 대피시켰지만, 야심이 온몸을 지배한 신지훈은 방학세와 함께 이들을 모두 폭력적으로 일망타진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총정치국장 이상이는 수도사단장 최남근 소장을 시켜 사회혁명당 아나키스트들이 간부로 포진하던 노농감찰부 건물에 군사작전을 벌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전국 각지의 공장과 발전소, 회사 건물도 군대와 청년단체(홍위병)에 의해 장악되어 수많은 사상자를 발생시켰으며, 그 여파는 박헌영마저 당혹스러워할 정도였습니다. 허경훈이 대피시킨 족청 단장이자 국방위원장 이범석은 신지훈의 수하들에게 체포당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자신의 충복 박철환을 통해 “종쏘주의자들의 만행”을 폭로했고, 이는 예상치 못한 민중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제2의 소군정 절대 거부”, “권가연 즉각 석방” 등의 구호가 거리를 메운 것입니다.
신지훈이 1935년의 그 민족유일당의 재건이랍시고 그럴듯하게 만든 간판인 민족혁명당의 당원들마저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며 학을 떼버리자, 박헌영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거센 여파에 큰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0. 누가 죄인인가?
1950년 7월, 전국적 시위로 불붙은 정국에 절대권력을 쥐기 일보 직전이었던 박헌영은 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노농감찰부가 군대에 의해 ‘폭파’되고 일선 노동자들마저 불안감을 느끼는 상황에서, 학생 중심의 정치시위가 반공 총파업으로 번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기다렸다는듯 삼당 간부회의를 소집한 국무령 여운형은 사태를 수습할 방책을 요구했고, 박헌영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6월 혁명의 제도적 성과는 인정하되, 그 책임자들을 단호히 징벌하고 총선거로 정국을 재정립하자”고 선언했습니다. 이 발언은 사실상 책임자 색출과 숙청을 예고하는 말이었고, 방학세는 진땀을 흘리며 자신은 강권에 휘둘린 희생자일 뿐이라며 이상이와 신지훈, 그리고 최남근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
이미 대숙청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던 이상이는 노농감찰부 점령을 자아비판하는 것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권력자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거나 동지들을 팔아넘겨야 한다는 냉혹한 규칙을 떠올렸습니다. 그는 뒤늦게 납작 엎드리며 박헌영을 ”유일한 수령“으로 모시겠다며 읍소했지만, 오히려 노농감찰부 사태로 만인의 지탄을 받는 이상이와 엮일 것을 염려한 박헌영은 이상이를 ’손절’하기 바빴습니다. 신지훈 역시 본능적으로 자신이 도마 위에 올랐음을 직감했지만, 이미 자신의 편을 들어줄 우익 인사들은 신지훈 자신이 숙청해버린 뒤였습니다.
주아문, 허경훈, 박현우는 6.25 사태 전부터 약속했던 대로, 그리고 박헌영이 바라던 것처럼 “이상이-신지훈-방학세-최남근 4인방의 단죄”를 부르짖었습니다. 이상이는 마지막까지 허경훈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고, 자유주의적 이상론자에서 5년간 권귀 그 자체로 타락한 끝에 정치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 신지훈은 인생무상을 느끼며 담배만 태웠습니다. 박헌영은 소위 “4인방”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정치적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러나, 박헌영의 정치적 목숨줄을 끊을 단두대는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평양에서, 모스크바에서, 서울에서 온갖 굴욕을 감내한 박현우는 조심스럽게 허경훈과 주아문에게 “이참에 박헌영도 날려버리는 것이 어떻냐”며 꼬드겼고, 오래 전부터 박헌영을 못마땅해했지만 사회주의 공화국의 존속을 위해 참고 있던 허경훈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코민포름 지령 사태에서도, 그리고 6.25 사태에서도 침묵을 지키던 국무령 여운형은, 박헌영만 축출된다면 정말로 통일사회당의 유일무이한 ‘주석’이자 조선민족의 ‘수령’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침 박헌영과 그의 정파인 화요파(콤그룹)가 실세로 군림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였던 총정치국이 이상이의 숙청으로 인해 사분오열된 상황이었죠.
세 일행은 곧바로 여운형과 그 측근들을 만나 향후의 진로를 물었습니다. 여운형은 자신이 박현우의 “간선제 소비에트 의회” 방안을 매우 오래 전부터 지지해왔다고 밝히면서, 소련이 코민포름 지령을 어겼다고 침공해온다고 해도 30년 넘게 일제에 맞서 투쟁해온 마당에 한번 더 항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심지어 박헌영에게 극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상이가 자신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던 구 사로당 인사들에게 그가 작금의 사태에 직접적 책임이 있다는 증거자료를 넘긴 상황이었으므로, 박헌영을 축출할 타이밍도 무르익은 상황이었죠.
건맹-건준 시절부터 여운형을 지지하던 이혁기, 박승환, 박정희 등 국군준비대 계열 장교들은 옛 상관이던 주아문과 함께 박헌영이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던 또다른 좌익 군부, 즉 김책, 최현 등으로 대표되는 ”88여단계“를 기습적으로 체포해버렸습니다. 불의의 일격을 맞은 박헌영은 그대로 침몰했죠. 의정원은 여운형의 요구에 따라 국무원을 불신임해버렸고, 공안위원회, 내무부, 국가경제최고평의회를 채우던 박헌영의 심복들도 전부 야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신지훈과 방학세가 전부 형무소에 넣어버렸던 우익 인사들이 석방되어 박헌영의 실각을 확인하자, 족청과 사회혁명당은 ”단재단“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공산정권에 대항해 지하 의열투쟁을 벌이려던 계획을 공개하며 모두의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습니다.
1950년 9월, 박현우의 바람대로 지방 평의회 의원을 선출해 그곳에서 호선하는 방식의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옛 조공 중앙파를 구성하던 화요파와 소련파의 몰락, 여운형의 정파인 통일사회당 건맹계의 정국 장악, 그리고 족청의 가담으로 파이가 커진 ‘진짜 민족주의 좌익’ 민족혁명당의 약진이었습니다. 박현우 역시 88여단 숙청으로 최용건이 함께 날아가자 소련이 정해준 당명인 농민민주당을 기독사민당으로 환원하고 당당히 삼당 연정(통일사회당-민족혁명당-기독사민당)의 파트너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물론, 아직 한국이 모든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민주주의 중국과 세계 좌파공산주의자들이 여운형의 7월 민주혁명을 환영하는 동안, 뜻밖에 자존심을 구기게 된 소련이 이 상황을 사실상 ‘반혁명’으로 규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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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E.샤츠슈나이더 엌ㅋㅋㅋ 이거 완전 소전에서 나온 루크사트주의 읍읍....
+근데 에필로그 기준으로 연립 여당은 민혁당+녹색사민노당인가요? 그리고 대규모 개헌 후 대한민국의 선거 시스템이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었을지도 궁금하네요 가령 평의회 민주주의와 북유럽 민주주의의 중간단계로 바뀌었다는지..... 대략적으로 다음 사진같이 말이죠
@E.E.샤츠슈나이더 아, 보다가 궁금한데 자주를 10으로 유지하는 방법이 있었나요? 중국이 망하면서 중소결렬이 나야 했나요? (...)
@렌지파일 중국을 북벌하면 되는거 아니었을까요(?)
@로콘 아니면 주체적 핵개발을 하는거죠(??)
@로콘 중국의 제 2차 군벌난립이 터지겠군요(??)
@dnjdss 북유럽 체제 자체가 정의상 사회민주주의 코포라티즘(계급협동)이라 파쇼딱지 맞고 침몰하지 않았을까요? 상속세도 없는 곳이니..
@렌지파일 서유럽은 결국 조금 더 빨간 맛의 EU를 거쳐 아예 리스본 조약보다도 더 결속력이 높은 연방체제로 개편되었습니다.
동유럽은 소련같은 기술관료정이 지배적이고..
자주가 10으로 고정되려면 애초부터 미국이랑도 좀 잘 지냈어야 하는데, 그쪽이랑 확 틀어지면서 그만…
@E.E.샤츠슈나이더 그럼 서유럽은 미국이랑 군사동맹 관계가 아닌건가요?
@렌지파일 아.... 하필이면 계급에 대한 노선차이(계급투쟁이냐, 계급협동이냐) 때문에 그럴수도 있겠네요
@E.E.샤츠슈나이더 오... 역시 SI가 원역사보다 떡상한게 컸군요 채찍피티에게 대체EU의 명칭을 물어봤는데 후보군이 크게 5가지네요
1. 유럽 합중국(USE)
2. 유럽 연방(EF)
3. 유럽 공동체(EC)의 유지?
4. 유럽 공화 연합(ER)
5. 유럽 인민(혹은 시민)연합(EUP)
@dnjdss 아예 5번 아닐까요 ㅋㅋ
@E.E.샤츠슈나이더 아 ㅋㅋㅋ 그래서 그 시점에서 "모두가 쏘아올린 공" 이라고 하신거군요 ㅋㅋ
@dear0904 파업도 취소하고 미군정과 잘지내려 했던 허경훈은 웁니다(?
@렌지파일 허경훈 입장에선 5번이 평의회민주주의적인(?) 이름이니까요 ㅋㅋㅋ
+사실 자유민주주주의를 좋아하는 권가연도 같이 우니 걱정마세요(???)
@렌지파일 유일하게 그나마 도왔다는 평가를 받는 주아문도 같이 웁니다(?)
@렌지파일 나는 무죄다! 나는 무죄다!
@dnjdss 그냥 EU입니다. Union이 쏘비에트유니온의 그 유니온(싸유즈)으로 해석될 수도 있으니까(?)
@E.E.샤츠슈나이더 세상에.... 둡체크와 올로프 팔메가 좋아하겠군요(??)
1. 허경훈은 어떤 인물이었나?
허경훈의 뒷배 중에 NKVD 간부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한 3인자쯤 되는 높은 인사들로요. 문제는 이들이 중앙아시아 NKVD 책임자로 대학살 때 고려인들을 박살낸 인사들(코불로프 형제)이었다는 겁니다. 허경훈의 개인 엔딩 때 타슈켄트에서 반 허경훈 시위가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고, 허경훈이 대숙청과 비슷한 게 나오면 질색한 게 그 때문이기도 합니다.
2. 왜 캐릭터 초반 설정과 플레이가 달랐나?
초반 캐릭터 설정에서 허경훈이 전위당을 강하게 긍정하고 우익과 합작하지 않는다고 했었죠. 여기에는 어느 정도 설명할 부분이 있습니다. 일단 전위당을 강하게 긍정하는 보르디가주의의 일부를 가져와서, '공산당이 계급을 완전히 대의하지 못한다'라고 믿는 캐릭터가 되었고(실제로 이 발언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우익과의 합작의 경우, 캐릭터로써는 정치적 입지를 위해 단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허경훈의 정치적 자산으로써 우익의 지지를 일부러 모은 것]이었습니다.
즉 공산당의 중견 인사들 중 우익이 유일하게 밀어줄 수 있는 인물이 됨으로써, 우익에서 싫어도 허경훈을 지지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실제로 그게 먹혔고요.
따라서 박헌영의 축출 이후 우익에게 '통제된 자유'가 주어진 것도 딱 원하는 결말이었습니다. 우익을 물리적으로 제거하지 않을 뿐, 가능한 한 모든 방법(법, 언론, 교육, 경제)을 쓴 것도 그 때문입니다.
3. 이 캐릭터는 어떤 컨셉인가?
일단 평의회 민주주의 엔딩은 아주 초반부터 생각했습니다. 공산당이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에, '한반도에서 민주주의가 유지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의 질문에, 우익을 살려두고 통제하는 인민민주주의or반대 세력을 다 죽여버리고 진행하는 평의회 민주주의, 두 가지 선택지란게 있단걸 들었죠. 정통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 잘 쳐줘도 트로츠키주의자인 허경훈이 후자를 고른것은 당연했습니다.
캐릭터 자체는 이전 민주사회주의 조선공산당을 이끌었던 이소성(본명 이행규)이라는 캐릭터의 안티테제로 만들었습니다. 만약 이념적으로 더욱 급진적이며 따라서 타협하지 않는 버전의 이소성이 있다면 어땠을까? 로 시작한 게 허경훈인 셈이죠.
첨부한 이미지는 허경훈이 구상한 체제입니다. 이미지 자체도 미완성이라 이상한 부분이 좀 있고, 작중 결말에서도 미완성이죠(...)
사실 1번의 뒷배는 단 한 번도 쓰이지 않았고, 오히려 나창만이 나와서 기강잡기(…)에만 쓰였었네요(?)
@E.E.샤츠슈나이더 실제로 안 쓰일 것 같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렌지파일 오.... 그래서 그런 그런 플레이를 하셨군요.... 결국 자신의 반대파들을 없애려다가 자신의 계획을 이루지못하는 엔딩이라니... 정말 감명깊은데요?
@dnjdss 오.. 감사합니다. 왠지 이런 인과응보 결말(?)을 쓰는게 항상 끝맺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렌지파일 뭔가 성공했으니 실패도 해라 느낌이 들어서 승리자의 여유같기도 하네요 ㅋㅋㅋ 프랑스에서도 콜레라로 가시고 여기서도 혈압으로 가시고 ㅋㅋ
@dear0904 성공한 캐릭터가 잘 나가는 결말이면 그것도 좀 그렇죠 (...)
데이비슨처럼 기상천외한 결말이나, 이소성, 나가이처럼 노욕 결말도 있긴 합니다 (?
@렌지파일 그런가요 ㅋㅋㅋ 저는 어쨌든 캐릭터를 굴렸으니 제 손밖에선 잘 쉬었으면 하는 생각이다보니 ㅋㅋ
+ 그래도 엔딩들이 다들 순탄한 느낌은 아닌듯한 공통점이 있죠 ㅋㅋ
@dear0904 그게 맞습니다 사실 권가연도 직계제자들이 신좌파를 그런식으로 제창할줄은 몰랐을겁니다 ㅋㅋㅋㅋ
@dear0904 정확히 말하면 다른 캐릭터를 몰락시킨 캐가 마지막에 잘나가는 결말까지 원하는건 팀플레이에 안 맞는다는 개인적인 생각때문입니다..
흠... 분명 댓글이 하나 달렸었는데 말이야.
ㅋㅋㅋㅋ 사실 삭제한게 있습니다 대충 민주투사로 쓸려다가 말았다는 내용이죠